< 치료사 >
빛이 번쩍였다.
시혁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잘 자고 있는데 누가 불을 켠 걸까. 안 그래도 인턴 업무 인계 받느라 새벽 5시에 겨우 눈을 붙였는데.
눈을 떴다.
한 바탕 쏘아 붙이려는데, 괴상한 것들이 보였다.
“어?”
시혁은 얼떨떨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제 잠들었던 인턴 숙소가 아니라 실외였다.
가장 먼저 어슴푸레한 검은색의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흰 빛이 격자무늬처럼 하늘을 질주하고 있는데, 묘한 형태의 황금색 글자들이 그 안을 떠돌고 있었다.
게다가 하늘이 좀 이상했다. 지구처럼 끝없이 펼쳐진 게 아니라, 거대한 돔 안에 들어온 것처럼 살짝 굽은 상태였다.
이상한 것은 하늘만이 아니다.
주변 상황 모든 것이 시혁의 상식을 벗어났다.
우선 건물들.
참 특이한 형태였다.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돌로 쌓은 뾰족한 탑과 벽이 삐죽삐죽 자리를 잡았다. 나무로 만든 허름한 건물도 군데군데 보였다. 그런가 하면 시혁의 바로 등 뒤에 커다란 거인 석상이 서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보니, 괴물들과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들이 보였다.
철로 만든 갑옷을 입고, 검과 방패로 무장한 자들.
인근의 탑에서 마구 활을 쏘아댔다.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성벽 너머로 날아갔다. 화살이 몸에 꽂힐 때마다 괴물들이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다.
시혁은 못 박힌 듯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무장한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자. 간혹 이능력자 중 저렇게 전근대적인 무장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런데 저 괴물들은 대체 뭐냐?
불에 휩싸인 작은 악마.
키는 기껏해야 1미터도 안 된다. 붉은 피부에 앙상한 몸, 흉악한 송곳니를 가지고 있었다. 얼굴은 못 생겼고, 얇은 팔에 삼지창을 하나 들었다. 역삼각형 모양의 돌기가 달린 꼬리를 가졌는데, 때때로 꼬리 끝에서 불줄기를 뿜곤 했다.
무장한 사람들은 그 악마에게 조금씩 밀렸다. 성벽에 의지해서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혹은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멍하니 서 있자, 누군가 시혁의 등을 후려갈겼다.
“이봐! 소환 됐으면 얼른 참전해야지 뭐하고 있는 거야? 반신이 일일이 명령을 내리실 수는 없다고! 치료사쯤 되면 알아서 해야지!”
“컥!”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다.
시혁은 자신을 때린 자를 돌아보았다. 한 마디 하려고 했는데, 그 자를 본 순간 기가 죽었다.
키가 2미터가 넘고, 전신이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남자였다. 전신을 두터운 갑옷으로 감싼 데다 두 눈이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했다. 키 170의 시혁과는 머리 두 개 차이가 나는지라 뻗대 보기 힘들었다.
더불어 뭔가 기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힘이 시혁의 몸을 자극하자, 신기하게도 마음속에서 근거를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구쳤다.
내심 의아해할 때, 남자가 인상을 팍 긁었다.
“젠장, 설마 했더니 너 신입이냐?”
“그게 무슨……”
“제길! 오늘은 일진이 왜 이 따위야? 따라 와! 할 일을 가르쳐주마!”
남자가 시혁을 덥석 잡고 한쪽을 질질 끌고 갔다.
어찌나 힘이 센지 몰랐다. 어미 고양이에게 뒷목을 물린 새끼 고양이처럼, 시혁은 아무런 반항을 하지 못했다.
남자가 시혁을 데려간 곳은 성벽에서 멀리 떨어진 한 천막.
“으으으……”
“너무 아파!”
“차라리 죽여줘!”
다 쓰러져나가는 천막인데, 그 안에 부상자 몇 명이 누워 신음하고 있었다.
처참했다.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간 것은 차라리 약과였다. 하반신이 통째로 사라진 자도 보였다. 어떤 이는 몸 전체가 불에 타 버려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피부가 완전히 망가진 까닭에 고통을 느끼지 않는지 히죽히죽 웃고 있는데, 그게 오히려 더 기괴한 분위기를 풍겼다.
시혁은 그들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피 비린내가 진동했다. 고기 타는 냄새까지 풍겼다. 저절로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며,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남자가 시혁을 내팽개쳤다. 그러더니 윽박지르듯 소리쳤다.
“치료해라, 어서!”
뭘?
시혁은 의문에 차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시간이 없단 말이다! 너도 치료사라면, 네 세계에서 치료술을 배웠을 테지? 그걸 부상자들에게 펼쳐라! 그럼 어떤 부상이든 회복될 테고, 다시 전장에 투입될 수 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천막 안의 부상자들은 딱 보기에도 목숨이 간당간당했다.
지구 같았으면 당장 응급 수술에 들어가야 할 이들.
그런 그들을 살리라고?
불가능하다.
시혁이 고개를 저으려는 찰나, 남자가 고함을 질렀다.
“네 세계의 상식대로 이 세계를 판단하지 마라! 넌 그냥 네가 배운 치료술을 펼치기만 하면 돼! 그럼 모든 일이 순리대로 돌아간다!”
순리?
시혁은 불신에 찬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순리대로 따지면 저 사람들은 그냥 죽을 것 같은데?
남자가 하도 강하게 주장을 하니 일단 부상자들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후우, 침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데 뭘 어쩌라는 건지…… 응?”
그 순간, 시혁은 왼손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금속성 물체가 몇 개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왼손을 내려다보았는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있었다.
가늘고 긴 금속 물체 몇 개가 왼손에 쥐어져 있었던 것이다.
분명 방금 전만 해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언제 그랬냐 싶게 이 물체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퍼뜨렸다.
시혁에겐 매우 익숙한 형태.
침.
그 중에서도 호침(毫鍼)이었다. 머리카락처럼 가는 침체와 손으로 잡기 좋게 조금 두꺼운 침병이 시혁이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이건 어디서 나타난 걸까.
의문을 풀 겨를이 없었다. 남자가 재촉하는 대로, 가장 가까이 있던 환자에게 자침(刺鍼 : 침을 놓는 행위)를 했다.
한 쪽 팔이 팔꿈치부터 잘려 피를 줄줄 흘리는 사내.
혈자리는 솔직히 말해서 대강 선택했다. 어차피 어느 혈자리를 찌르든 지혈도 되지 않을 테니까. 그게 시혁의 상식이었는데, 그 상식을 뒤집어엎는 일이 벌어졌다.
수양명대장경을 역으로 하여 수오리, 곡지, 수삼리, 편력, 합곡에 침을 찔러 넣었다. 편력과 합곡 쪽은 잘려나간 뒤였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시혁의 손길을 따라 뼈가 생기고 살이 자라났다.
녹색 빛이 반짝이며 탄생한 기적.
결국 5개의 침이 모두 부상자의 팔에 꽂혔다.
“헉?”
시혁은 놀라 입을 떡 벌렸다.
부상자가 벌떡 일어났다.
방금 전만 해도 골골거리던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는 홍조가 돌고, 강건한 육체에는 힘이 넘쳤다.
시혁을 끌고 온 남자가 옆에서 딱딱거렸다.
“이제 뭐가 뭔지 알겠지? 빨리 해! 아무리 신입이라도 이 정도 수는 치료할 수 있어!”
시혁은 다음 부상자에게 다가갔다.
침을 꽂았다. 유급 기간까지 합쳐 도합 7년 간 배운 모든 한의학적 이론을 무시하고 내키는 대로 찔러 넣었다. 그러자 잘린 팔과 다리가 돋아나고, 뭉개진 육신이 회복되고, 까맣게 탄 피부가 재생되었다.
그때마다 시혁의 몸에서 어떤 힘 같은 게 환자에게 흘러들었다. 따스하면서도 맑은 힘이었는데, 큰 부상을 치료하면 많이 소모되고 작은 부상을 치료하면 적게 소모되었다.
이 믿어지지 않는 광경을 보며, 시혁은 아예 마음을 비웠다.
‘이거 꿈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침을 몇 대 꽂았다고 이렇게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성벽에서 싸우고 있는 두 무리도 그랬다.
검과 방패로 무장한 사람들과 불꽃에 휩싸인 악마라니!
꿈, 그것도 지독한 개꿈이었다.
개꿈 치고는 꽤나 현실적이긴 했지만 그야 아무려면 어떠나 싶었다.
현실에서도 기괴한 괴수들이 나타나 인류를 공격하고, 이능력자와 발현자가 출현하여 대응한지 벌써 5년이 지났다. 그것에 비교하면 이 정도 실감나는 꿈쯤이야 별 것 아니지 않겠나.
시혁은 마음 가볍게 부상자들을 회복시켰다.
무한히 회복시킬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한 명 한 명을 회복시킬 때마다 시혁의 몸에 내재된 힘이 소모되었다. 그리하여 10명 정도를 회복시켰을 때는 모든 힘이 떨어져 헉헉대는 신세가 되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신입이라 이 정도로군. 좋아, 모두 나를 따라라! 부대 집결!”
남자가 거대한 망치를 들어올렸다.
흰 빛이 뿜어지더니 회복된 이들을 한꺼번에 감쌌다. 사람들의 갑옷 위로 흰 빛이 내려앉더니, 기묘한 글자가 새겨지며 강렬한 힘을 뿜어냈다.
남자가 망치를 든 채 포효했다.
“가자!”
기세 좋게 성벽 위로 달려가더니, 공격해 오는 악마들을 호호탕탕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저러려고 시혁을 그렇게 닦달했나 보다.
시혁은 잠시 쉰 후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적을 연거푸 발휘하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이거 재미있네.’
꼭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컴퓨터 게임에 등장하는 힐러 유닛이 됐다고 할까.
침도 무한으로 공급되었다. 그것이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욱 강하게 인식시켰다.
시혁은 즐겁게 침을 놓고, 놓고, 또 놓았다.
이것은 꿈.
한 번 깨어나면 언제 또다시 찾아온다고 장담할 수가 없는 기적의 꿈.
새벽이 되어 깨어나기 전에, 최대한 즐길 심산이었다.
다만 모든 환자를 다 치료할 수는 없었다.
“으아아! 으악!”
몸에 불이 붙은 환자가 왔다. 왼쪽 팔을 기점으로 팔과 몸통, 얼굴이 타오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바로 침을 놨다.
하지만 치료가 되지 않았다. 되레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불길이 더 심하게 번졌다. 순식간에 몸 전체를 집어 삼켰다.
환자가 꺽꺽대며 고통스러워했다. 목을 움켜쥐고 땅을 구르더니, 어느 순간 숨통이 끊어졌다.
분주하던 시혁의 손이 뚝 멈췄다.
“이런……”
뭐든지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나?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부상자들이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천막이 금방 부상자들로 가득 찼다.
설상가상으로 시혁의 몸에 내재된 힘, 마나도 모두 떨어졌다.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자침을 했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부상자만 빨리 치료 해달라며 끙끙 앓고 있었다.
결국 방어선이 조금씩 밀렸다.
병력을 보충하는 것보다, 악마들에 의해 죽는 병력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쐐기를 꽂은 것은 상대 진영의 반신이 발현한 이적.
불의 비가 내렸다.
검은 하늘에서 불타는 구가 무수히 떨어졌다. 방어막 따위 가볍게 박살내고 성 전체를 불살랐다.
성벽이 무너지고, 탑이 불에 타 그 기능을 상실했다.
“으아아!”
“살려줘!”
여기까지 왔으면 끝난 거나 다름이 없다.
악마들이 성벽을 돌파했다. 보병들을 깡그리 죽여 버리고, 성 안으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성 안의 모든 이들이 학살당했다.
시혁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대한 핏빛 개에게 목을 물렸다.
핏빛 개가 머리를 흔들었다. 시혁의 연약한 목이 단박에 뜯겨 나갔다.
강렬한 통증이, 전신이 으깨지는 듯한 막대한 고통이 시혁의 영혼을 꿰뚫었다.
동시에 깨달았다.
이 고통……
이토록이나 강한 통증은, 단순한 꿈에서는 결코 겪을 수 없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일개 꿈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진실은 명확했다.
이게 현실이었다.
< 치료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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