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에필로그
2019년 6월 7일, 중국의 한 호텔 앞에 건장한 체격의 남자 하나가 짙은 선글라스로 눈을 가린 채 서 있었다.
그는 무언가 약속이라도 있는 듯 가만히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짐작하겠지만 남자는 어느새 서른둘이 되어버린 오솔이었다.
“저녁 5시 10분.”
이제 곧 그가 회귀했던 시간이 된다. 역시나 몇 분 뒤, 축구공 하나가 차도로 굴러 들어갔고, 그 뒤로 다섯 살 남짓한 꼬마 아이가 공을 쫓아 뛰어가려 했다.
오솔은 잽싸게 손을 뻗어 아이를 잡아챘다.
“요 녀석! 차도로 그렇게 뛰어들면 위험하잖아?”
공은 트럭 바퀴에 깔려 펑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아이가 저 자리에 있었으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오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아이는 오로지 공만 보고 있었다.
“내 공!”
한국말이었다. 오솔은 아이를 새삼스럽게 바라봤다.
“한국인이니?”
“네…….”
아이는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시선이 낡은 축구공에 박혀 있는 것이 무척이나 소중한 물건 같았다. 하긴 그러니 이 먼 타국에서까지 갖고 있었을 것이다.
“축구공이 터져서 그러냐? 너무 아쉬워하지 마라. 이 아저씨가 새 걸로 하나 사줄 테니까.”
“정말요?”
“그래. 대신 다음부터는 안전한 곳에서 축구 한다고 약속해야 한다.”
“알았어요. 약속할게요!”
오솔은 아이를 데리고 근처 축구 용품점으로 향했다. 그는 축구공 하나 골라서 아이에게 건네주고 직원에게 카드를 하나 내밀었다.
직원은 오솔의 카드를 찍어 보더니 깜짝 놀라 점장을 불렀고, 점장은 오솔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제발 허리 좀 펴세요. 괜히 어디 가서 갑질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아요.”
“네, 회장님.”
“아직은 선수라는 명칭을 더 좋아하는데…….”
“죄, 죄송합니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이런……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혹시 여기에 종이 있나요?”
“네! 여기.”
“팬서비스 좀 해도 되죠? 제 팬이 아니라면 별수 없지만…….”
“무슨 말씀을…… 오솔 선수는 아시아의 자랑입니다.”
오솔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다년간의 팬서비스 덕분에 손놀림이 그야말로 일필휘지였다.
‘내 인생을 바꿔준 축구공. 우리 아이들의 인생도 바꿔주기를…….’ -오솔.
오솔은 추가로 점장과 사진까지 찍어주고 아이와 같이 가게를 나왔다. 아이는 축구공을 안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짜식! 그렇게 좋으냐?”
“네! 반딱반딱한 게 촉감이 좋아요.”
오솔은 귀엽다는 듯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찌 보면 이 아이 덕분에 두 번째 기회를 잡은 것이니 고맙기도 했다.
‘서로가 한 번씩 목숨을 구한 것이니까 이걸로 샘샘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이에게서 밝은 빛이 솟아나는 느낌과 함께 별안간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후계자를 찾으셨습니다. 시스템을 양도하시겠습니까?
‘야, 양도?’
-양도를 선택하시게 되면 '레전드 플레이어(Legend Player)'로 더 이상 추가 포인트 사용이나 상점 이용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럼 지금까지 이뤄놓은 능력치나 노화 방지 아이템 같은 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미 사놓은 것은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더 이상 경기나 대회로 경험치를 얻지도 레벨 업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건 벌써 5년 전부터 그랬어. 어떻게 된 게 5년이 지나도록 레벨 업 한 번을 못하냐? 그사이에 월드컵까지 두 번 치렀는데.’
오솔은 2009 챔피언스 리그 우승 이후 5년간 출전하는 거의 모든 대회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인테르, 바이에른 뮌헨, 도르트문트, AT 마드리드와, 유벤투스까지 모두가 힘겨운 상대였지만 결국에 승리하는 것은 오솔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계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별로 아쉬울 건 없지만 왜 이 녀석이야? 대한이나 주희한테는 이런 적 없잖아.’
대한이는 맨시티 유스에 입단해서 축구를 즐기고 있었고, 주희 역시 같은 클래스에서 뛰고 있었다. 대한이는 또래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라면 주희는 그중 가장 실력이 좋았다.
‘딱히 세습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좀 이해가 안 가서 말이야.’
-시스템은 자동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아갑니다. 당신에게 시스템이 찾아왔던 것처럼 이 아이에게도 시스템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 것이죠.
‘그런가……?’
오솔은 아이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봤다. 체형보다 조금 작은 옷, 물이 군데군데 빠지고 구멍도 송송 뚫려있는 모습이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낡아빠진 축구공을 애지중지하던 모습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설마 얘도 집에서 맞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아이의 부모는 좋은 사람이었다. 다만 사기를 크게 당해서 도저히 아이를 돌볼 처지가 안 될 뿐이었다. 오솔은 부모님 앞에서 아이에게 물었다.
“꼬마야…… 아니지, 이름이 뭐랬지?”
“아저씨 머리 나쁘시네요. 아까 한시원이라고 했잖아요.”
오솔은 당황하는 시원의 부모님에게 웃어 보이고 다시 물었다.
“그래. 이름을 잊어서 미안하다. 그런데 너 아까도 그렇고 축구공을 소중히 안고 있던데, 혹시 축구 선수가 되고 싶은 거니?”
“아니요.”
“아니야……?”
오솔이 적잖이 실망하려 할 때였다. 시원의 볼이 발그레해지더니 공에 시선을 떨구고 수줍게 입을 열었다.
“그냥 축구가 좋아요. 한 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만큼, 많이요.”
“흐흐흐. 그러냐? 그럼 됐다. 아저씨가 그 좋은 축구 원 없이 하게 해 주마.”
오솔의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시스템을 양도하셨습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다시 들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은 씁쓸해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의 인생을 바꿔준 친구 아닌가.
‘이제 시스템과도 안녕인가……?’
그러나 아쉬움은 길게 가지 않았다.
-‘레전더리매니저(Legendary Manager)’를 시작합니다. 보좌관 모드 적용 중입니다. ……. 반갑습니다. 오늘부터 선수의 육성, 관리, 감독, 전술의 입안과 훈련 등을 도와드리게 된 ‘보좌군’입니다. 소유 중인 팀을 확인 중입니다. 유소년 클럽 5개와 프로 구단 3개가 확인되었습니다. 구단주 파트가 활성화됩니다. 감독 파트는 아직 잠금 상태입니다. 감독 파트는 감독직을 맡게 되면 활성화됩니다.
‘얌마, 너…….’
-왜 그러시죠?
‘흐흐흐! 아니다. 그나저나 나 아직 현역이야 인마.’
-그럼 취소할까요?
‘됐어. 누가 취소한대?’
-근처에서 유망주를 발견했습니다. ‘한시원’을 플레이어 슬롯에 등록하시겠습니까?
‘그래.’
오솔은 7~8년 뒤, 마흔 살이 될 때쯤 은퇴할 예정이었다. 그때쯤이면 한시원도 13살 정도 될 테니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니었다.
‘참, 그 슬롯이라는 거 몇 개나 있냐?’
-5개 있습니다.
‘잘됐다. 집에 가서 대한이랑 주희부터 등록해야겠다.’
-세습…… 적폐…….
‘뭐 인마?’
항상 딱딱하게 정보만 읊던 시스템이 조금은 변한 듯했다.
-……‘레전더리매니저(Legendary Manager)’는 지옥 난이도부터 시작입니다.
‘뭐?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지옥 난이도야?’
-감독은 원래 지옥 난이도부터 시작입니다. 싫으시면 취소하시던가요.
‘이 X발놈이?’
-‘보좌군’입니다.
‘이게 한마디도 안 지네……. 이건 이것대로 빡치는데?’
오솔의 인생 2막은……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인생 3막이 될 감독 일은 건방진 친구와 함께 일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