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201화
47장 프랑스 보석과 공간 연주자
“내가 알기로 오솔이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한 지 이제 2년 차던데, 맞나?”
“후후후. 다 알면서 묻는군요. 이미 제가 오기 전에 다 찾아보셨을 것 아닙니까?”
“자네는 대화 예절을 좀 배울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 때로는 알면서도 주고받아야 할 말들이 있다는 걸 모르겠나?”
“글쎄요. 회장님도 저도 바쁜 사람들인데 자질구레한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습니까?”
“음…….”
라이올라의 반문에 플로렌티노 페레스의 타박이 멈췄다.
노회한 장사꾼인 페레스는 테이블에서 펼쳐지는 심리전을 누구보다 즐겼지만, 라이올라와 같은 타입에게는 그런 싸움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진흙탕 싸움을 즐기는 타입이군.’
라이올라와 같은 왈패와 어울리는 것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가 데리고 있는 선수가 탐이 나는 이상, 자리를 마련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흠흠! 좋네. 그럼 솔직하게 마음을 터고 이야기해 보지.”
“경청하죠.”
라이올라는 말과는 달리 소파에 몸을 반쯤 파묻고 담배를 꺼내 들었다. 전혀 경청하는 자세가 아니었지만 페레즈의 눈살이 살짝 찌푸리는 것으로 불만 표시를 대신했다.
“……내년 여름,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나 기획하고 있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새로운 프로젝트는 아니지. 일전에 펼쳤던 갈락티코 프로젝트를 다시 부활시키고자 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갈락티코 2기로군요.”
“맞아. 목표로 하고 있는 선수로는 일단 공격수에 오솔.”
페레즈는 오솔을 강조하고는 라이올라마냥 담뱃불을 찾았다. 그는 비서가 불을 붙일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대상에 오른 선수들을 나열했다.
“왼쪽은 호날두, 미드필더로 카카와 사비 알론소, 그 외 수비수도 몇몇 영입할 생각이네.”
라이올라는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부르고 말았다. 나열된 이름들이 주는 임팩트가 그만큼 굉장했던 탓이다. 그들의 실력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엄밀히 말해 그가 놀란 이유는 그들의 몸값에 있었다.
‘각 팀의 에이스들을 한 팀에 모으겠다는 소리를 하는 건가? 과연 갈락티코 프로젝트를 입안했던 사람답게 스케일이 크구나.’
당장 오솔이 맨시티에 입성할 때의 이적료가 3천만 파운드(약 440억 원)였다. 아직 어리고 실력도 출중한 오솔을 맨시티에서 팔 이유도 없지만, 혹시나 팔아야 한다면 최소 2배에서 3배는 받아야 넘길 게 분명했다.
상황은 호날두나 카카도 마찬가지여서 이들을 모두 영입하려면 말 그대로 천문학적인 금액이 필요했다. 과연 갈락티코(은하수) 정책다웠다.
‘굉장하군. 이미 네덜란드 컬렉션을 구성하면서 엄청난 돈을 뿌렸으면서 또다시 돈지랄을 벌이겠다는 소린가?’
그러나 농담으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실제 페레스 체제에서 실시된 갈락티코 프로젝트 1기는 호나우두, 지네딘 지단, 루이스 피구, 데이비드 베컴 등 쟁쟁한 선수들을 한 팀으로 묶은 바 있었기 때문이다.
‘오솔과 호날두, 카카, 로번의 조합이라…… 상상만 해도 즐거워지는 조합이네.’
레알 마드리드라는 구단은 이런 식으로 돈을 뿌리고도 남았다. 당장 페레스가 준비한 자금만 들어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미 3억 유로의 총알을 장전해놨네.”
3억 유로면 한화로 3천 800억 원에 해당했다. 만수르 구단주가 맨시티를 인수할 때 지불한 금액이 2억 유로를 살짝 넘어간다는 걸 생각하면, 이게 얼마나 큰 금액인지 대충 감이 잡힐 것이다.
“이적료가 얼마가 되었든 구단에서 팔겠다는 대답만 나온다면 이적료고 주급이고 다 맞춰줄 수 있네.”
생각보다 영입 의지가 컸다. 자연스럽게 라이올라도 자세를 고칠 수밖에 없었다.
“음…… 주급이나 보너스는 어디까지 보장해 줄 수 있죠?”
“세후 18만 파운드까지 보장해 줄 수 있네. 듣기로는 맨시티 쪽에서 한국에서의 초상권은 온전히 넘겨줬다지? 우리도 거기까지는 양보할 수 있네.”
18만 파운드면 2억 6천만 원 정도였다. 지금 받는 돈보다 20% 정도 인상된다고 할 수 있었다. 2010년대 중반이었다면 별로 놀라운 금액도 아니었겠지만 2000년대에는 아직까지 누구도 받지 못한 금액이었다.
“당연히 에이전트 수수료도 두둑이 챙겨주겠네.”
평소의 라이올라였다면 쉽사리 손이 나갔을 제안이었다. 설령 내년에 맨시티에서 주급을 올려준다고 해도 이적 과정에서 받게 될 계약금과 레알 마드리드라는 이름값과 그로 인한 부대 수입을 생각하면 이적하는 쪽이 무조건 이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이올라의 선택은 그저 귀를 열어놓는 것, 그것뿐이었다.
“글쎄요. 생각을 좀 해보죠.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까요.”
“……빨리 대답하는 편이 좋을 걸? 3억 유로가 많아 보여도 호날두나 카카 같은 선수들을 사다 보면 금방 동이 날 테니까.”
“후후. 돈이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무슨 뜻인가?”
“오솔의 가치를 너무 과소평가하시는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3억 유로라…… 후후. 제 생각이지만 이번 시즌 결과에 따라 오솔의 가치는 1억 유로 그 이상으로 뛸 수도 있습니다. 주급은 당연히 20만 파운드, 그 이상을 받아야 하죠.”
“이, 이십만? 미쳤군. 메시도 아직 18만 유로밖에 못 받는다는 걸 모르나? 물론 16강에서 보여준 모습은 분명 대단했다는 걸 인정하지만, 이렇게 시장 질서에 벗어나는 제안은 납득할 수 없네.”
“재밌네요. 회장님의 영입 정책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는 시장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돈이 아까워서 하는 말이라면 모를까 시장 질서를 운운하는 건 너무 구차하지 않습니까?”
“뭐라고? 이…… 건방진 것도 정도껏 해야지!”
“글쎄요. 과연 이게 건방을 떠는 걸까요? 오솔의 가치는 누구보다 제가 가장 잘 압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보석이고, 이제 그 가치를 모두가 확인하는 날이 올 겁니다. 그날은 아마…… 5월 27일이겠죠.”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라이올라는 오솔이 그 무대에 서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중간에 이런저런 이야기로 내 선수를 흔들고 싶지 않습니다. 모든 논의는 시즌이 완전히 끝난 다음에 하도록 하고, 당연히 언론에도 흘리면 안 됩니다. 만약 이걸 어긴다면…… 그 즉시 협상은 끝입니다.”
라이올라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협상은 마라톤이었다. 오솔이 대회 중간에 떨어진다면 협상을 질질 끄는 게 손해일 수도 있겠지만, 만일 라이올라의 생각처럼 최종전까지 올라간다면…….
‘또 한 번 잭팟이 터지는 거지.’
* * *
오솔은 월드컵 예선전을 위해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이제는 완연한 봄이라 가족들이 다 같이 들어왔는데,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박해진은 그 모습을 유독 부러워했다.
“나도 결혼을 일찍 할 걸 그랬나?”
“결혼할 상대는 있으시고요?”
“너 자꾸 뼈 때릴래? 이게 소개도 안 시켜주면서 약 올리기만 하네.”
“제가 아는 여자가 있어야 소개를 시켜드리죠.”
오솔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슬쩍 힌트를 흘렸다.
“뭐, 친한 사람들한테 한번 물어봐요. 주변에 괜찮은 여자는 없는지. 예를 들면 아나운서들이나 해설자들에게……. 그쪽에는 아는 사람 좀 있을 거 아니에요.”
“그, 그래 볼까?”
오솔은 어쩌면 박해진의 연애 시기를 앞당길 수도 있는 얘기를 건넨 뒤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박해진은 그 모습을 부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쩝…… 성진이 형한테 한번 부탁해 볼까?”
며칠 후, 박해진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북한전에서 전에 없이 활발한 움직임으로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반면 오솔은 이번 경기에서 생각보다 부진했는데, 평소라면 세 골을 넣었을 상황에서 고작 한 골만 넣는 데 그치고 말았다. 게다가 표정 역시 좋지 않았다.
박해진은 경기가 끝나고 나서야 오솔의 표정을 발견하고 물었다.
“야. 오늘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냥 조금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요.”
“조금이 아닌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오솔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전날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며칠 전에 아빠가 쓰러지셨어, 오빠. 엄마가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도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거의 잊고 살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의식에서 멀어졌던 아버지라는 존재가 다시금 튀어나온 것이다.
오솔로서는 1분 1초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존재, 아버지.
그러나 막상 아프다는 소리를 들으니 신경이 안 쓰일 수는 없었다.
‘잊자, 잊어. 지금은 한국에 있어서 그래. 영국으로 돌아가면 잊을 수 있을 거야.’
오솔은 병원에 찾아가지 않았다. 아니, 아예 주소도 묻지 않았다. 동생은 아빠가 조금은 변했다고 말하지만 오솔은 속지 않았다.
‘결국은 또 돈을 노리고 변한 척하는 걸 거야.’
한번 싹을 틔운 불신의 씨앗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 * *
한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 지은 뒤, 오솔은 곧바로 영국으로 돌아왔다. 완전히 다른 장소, 다른 환경에 놓이자 이전까지 그를 괴롭혔던 우울한 기분이 가시는 듯했다.
‘후우.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여유를 되찾은 오솔은 상태창을 열었다. 북한전을 마치고 얻은 포인트를 투자하기 위함이었다. 다른 곳을 둘러볼 필요는 없었다. 이제 투자할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
-왼발 숙련도 84 …… 87%!
‘이제 한 번만 더 투자하면 진짜 끝이네.’
그다음부터는 포인트를 계속 모아서 상점을 이용하는 일만 남았다. 컨디션 물약 같은 건 살 필요가 없었지만, 부상 회복 물약은 아무리 비싸도 한두 개 정도 구비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부상 회복 물약은 포인트가 30개나 필요하구나.’
3~4년 정도 꾸준히 출전해야 겨우 하나를 살 수 있는 수준이었다.
챔피언스 리그나 월드컵 등 주요 대회에서 우승하면 그만큼 빨리 얻을 수 있겠지만 경험치 필요량이 증가하는 추세를 생각하면 은퇴하기 직전까지 많아야 3개 정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큰 부상을 세 번이나 극복할 수 있는 건데 아쉬울 건 없지.’
부상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그게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된다? 이는 운동선수에게 신의 축복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솔! 금방 왔네?”
돌아보니 만주키치의 모습이 보였다. 맨시티에서 오솔 못지않게 부지런하기로 유명한 선수였다. 이윽고 모드리치와 베일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A매치는 잘 치르고 왔어? 베일은 윙으로 뛰는 건 처음이었지, 어땠어?”
“원 없이 뛰긴 했어요. 비록 이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제2의 긱스라는 찬사를 받았죠. 웨일스의 자랑이라는 말도 들었고요. 헤헷!”
‘그래. 아직 스캔들 터지기 전이니까 계속 좋아라 해라.’
오솔은 괜한 말로 소년의 순정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우상에 다가섰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의욕을 불태울 필요가 있었다.
“만주키치랑 모드리치는 어땠어?”
“문제없어. 바로 옆이라 이동 시간도 얼마 안 걸렸고, 덕분에 컨디션도 멀쩡해. 그보다 나는 네가 더 걱정이다. 괜찮은 거야? 듣기로는 경기력이 별로 안 좋았다고 하던데…….”
“아아. 그냥 비행시간이 길어서 컨디션 난조를 겪은 것뿐이야. 이제는 멀쩡해.”
“너야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조심해. 지금부터는 중요한 경기들만 남았잖아.”
“걱정 마. 이제 올 시즌 A매치는 다 끝났으니까.”
만주키치가 언급한 중요한 경기들에는 한 경기 한 경기 치를 때마다 순위가 달라지는 프리미어리그 경기도 있었고, FA컵 준결승전도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을 따지자면 당장 다음 주로 다가온 챔피언스 리그 8강 1차전을 들 수 있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베일이 흥분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레알 마드리드도 이겼으니까 바이에른 뮌헨도 이길 수 있겠죠?”
“글쎄…… 붙어봐야지. 뮌헨이 최근에 삐끗하고 있긴 하지만, 챔피언스 리그 같은 토너먼트에서는 여전히 알아주는 강자니까.”
“그래도 대충은 감이 오시지 않아요? 오솔 형님이랑 마리오 형님은 분데스리가에서 뛰셨으니까 그만큼 많이 붙어보셨을 거 아니에요?”
오솔은 가만히 서서 뮌헨의 베스트 11을 떠올렸다. 확실히 몇몇 선수들의 이름과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조심해야 하는 건 역시 프랑크 리베리지. 이 녀석은 확실히 월드 클래스야.”
이야기를 듣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프랑스의 보석 리베리를 두고 뮌헨을 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오솔은 두 번째로 주의할 선수로 조금은 생뚱맞은 이름을 꺼냈다.
“하지만 의외로 한 방이 있는 선수는 이 녀석, 토마스 뮐러다.”
오솔은 가레스 베일과 같은 89년생, 스무 살의 젊은 선수 토마스 뮐러를 주목했다.
“토마스 뮐러? 그게 누군데?”
“그 녀석은 그냥 후보 아니었어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만주키치와 눈썹을 꿈틀거리는 베일과 달리 모드리치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평가에 동의했다.
“맞아. 조금…… 특이한 선수더라. 막기 쉽지 않아 보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