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182화
파올로 로시는 한마디로 이탈리아산 득점 기계라고 할 수 있다. 그는 7·80년대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로 국가대표로 48경기에 출전해서 20골을 기록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이른바 카테나치오(빗장수비)라는 수비 전술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득점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 와중에 경기당 0.4골을 넘어서는 득점을 기록했다는 건 로시의 득점 본능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증명하는 자료였다.
특히 그는 중요한 경기에서 많은 골을 넣었는데, 그중 임팩트가 가장 큰 것은 1982년 스페인 월드컵 브라질전에서 터뜨린 해트트릭이었다.
“망할. 그때의 기억이 또 떠오르네.”
나이 든 브라질 축구팬은 목에 가시가 걸린 듯 껄끄러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오솔에게서 자꾸만 파올로 로시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남자의 안색이 계속 좋지 않자 일행이 위로를 건넸다.
“괜찮을 거예요. 우리에겐 작은 펠레가 있잖아요.”
‘작은 펠레’는 호비뉴의 별명이었다. 이 시기 호비뉴는 무려 ‘펠레’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호비뉴를 믿어보자!”
브라질은 팬들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보다 공격적으로 나왔다.
[호나우지뉴가 공을 잡습니다. 그 앞을 막아서는 여민국! 오늘 여민국 선수의 움직임이 좋은데요? 저 호나우지뉴를 어렵지 않게 막아내고 있습니다.]
[네. 지금 모습대로라면 분데스리가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줄 수 있겠네요.]
그러나 호나우지뉴는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뿐이지 번뜩이는 센스는 여전했다. 폭발적인 돌파는 불가능하지만 창의적인 패스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그런 호나우지뉴가 패스를 시도했다. 여민국 앞에서 대놓고 하는 패스였다.
‘끊어내면 바로 역습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여민국은 패스를 끊어내는 것은 물론, 이대로 역습까지 가져갈 생각이었다. 선취점을 얻었던 과정을 고스란히 반복할 생각인 것이다.
팡-!
‘뭐, 뭐야? 언제 패스한 거지?’
그러나 여민국은 상대의 패스 타이밍을 읽어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호나우지뉴는 언제 찼는지 모르게 벌써 패스를 성공시킨 것이다.
‘설마…… 페이크 샷?’
페이크 샷은 한쪽 발로 패스할 것처럼 속임수를 넣고 실제로는 디딤발로 패스를 하는 기술이었다. 호나우지뉴는 이 기술에 노룩 패스까지 결합해서 여민국을 완전히 바보로 만들어버렸다.
[호나우지뉴의 감각적인 패스!]
공을 잡은 것은 좌중간에 있었던 호비뉴였다. 그러나 패스가 연결되었다고 해서 기회가 찾아왔다고 볼 수는 없었다. 한국은 극단적인 수비 전술을 펼치고 있었고 골대 앞은 항상 수비수들로 가득했다. 호비뉴는 바로 수비벽과 마주치게 되었다.
[권형수 선수가 앞을 가로막습니다!]
호비뉴 앞에는 권형수를 비롯해 총 세 명의 수비수가 버티고 있었다. 라인을 내린 데다가 중앙 지역은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어서 공간을 찾을 수 없었다. 웬만큼 드리블에 자신이 있지 않고서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호비뉴는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으으! 호비뉴다. 내가 막을 수 있을까?’
권형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눈앞에 선 호비뉴는 작은 몸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간을 보고 있었다.
‘읏! 엄청 날래잖아?’
호비뉴의 두 다리가 좌우로 빠르게 오갔다. 공 위로 다리를 휘젓지만 않았을 뿐이지 동작 자체는 스텝오버와 흡사했다.
눈으로 좇기도 힘든 속도였다. 뺏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제발 누가 도와줘!’
권형수는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도와달라는 생각만 반복했다. 덩치는 그가 훨씬 컸지만 민첩성만 놓고 봤을 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실제로 호비뉴의 동작은 버프를 잔뜩 받은 오솔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를 수도 있었다. 권형수로서는 반응하기조차 힘든 속도인 것이다.
파앗!
호비뉴가 돌파를 시도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타닷!
왼쪽으로 치우쳐졌던 몸이 순식간에 반대로 튀어나갔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도 공은 그의 발에 딱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권형수는 반사적으로 그를 따라갔는데, 역시나 한참은 늦은 반응이었다.
‘으윽! 너무 빠르다!’
다행히 중앙을 지키고 있던 선수가 빠르게 커버를 왔다. 순식간에 두 명의 선수를 만나게 된 호비뉴. 더 이상 정면에는 공간이 없었다.
‘좋아, 이건 호비뉴가 아니라 호비뉴 할아버지가 와도 못 뚫는다.’
그러나 안심하기에는 일러도 한참은 일렀다. 애초부터 호비뉴는 상황이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후후. 바보들.’
호비뉴는 몸을 왼쪽으로 굽히며 순식간에 무게 중심을 우에서 좌로 옮겼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운 덕분에 급격한 방향 전환에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았다.
‘뭐, 뭐야?’
수비수들 입장에서는 호비뉴가 스르륵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권형수는 급히 달려오느라 시야가 왼쪽으로 쏠려 있었고, 다른 수비수는 오른쪽 시야가 권형수의 몸에 가려져 호비뉴의 모습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다시 호비뉴를 발견했을 때는 벌써 슈팅이 이루어진 후였다.
파앙-! 출렁~
가볍게 찬 슛이 골로 연결되었다. 그 전의 돌파도 그렇고 슛도 그렇고, 호비뉴의 골은 오솔의 그것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개인플레이가 지나친 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꽤나 괜찮은 크랙이지.’
오솔은 호비뉴의 플레이를 냉정하게 관찰했다. 비록 지금은 적이었지만 잘하면 올 시즌 동료가 될 수도 있는 선수였다. 프리시즌을 거치지 못하는 만큼 기회가 될 때마다 플레이 스타일을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내 플레이 스타일도 알려줘야겠지.’
* * *
이후 경기는 어떻게든 뚫으려는 브라질과 어떻게든 막아내려는 한국의 싸움이 되었다.
공격 일변도의 브라질이었으나 오솔을 제외한 전원이 웅크리고 있는 한국을 뚫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오솔의 역습에도 대비해야 해서 공격에만 신경 쓰기도 힘들었다.
답답한 상황. 그러나 실제적으로 더 답답한 쪽은 한국, 그리고 오솔이었다.
점유율은 거의 30 대 70까지 벌어졌고, 슈팅은 한국이 1회, 브라질은 전반전만 12회에 달했다. 수비수들의 육탄 방어와 골키퍼의 기적 같은 선방이 아니었다면 아마 슈팅 기록이 아닌, 스코어가 벌어졌을 것이다.
‘이대로 수비만 계속하면 결국 지치고 만다. 되도록 빨리 추가골을 넣어야 해.’
지금 선수들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오솔의 존재였다. 날카로운 비수 한 자루를 쥐고 있기에 절망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갈 수는 없었다. 이기고 있을 때라면 모를까 동점 상황에서 수비만 하는 건, 결국 지는 흐름이었다.
‘나도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수밖에 없나?’
오솔은 지난 시즌 막판에 만났던 토레스를 떠올렸다. 평범한 패스조차 기어기 득점 찬스로 만들어냈던 돌격대장 토레스. 바보 같지만 지금은 그처럼 뛸 필요가 있었다.
“솔아!”
마침 그에게 패스가 도달했다. 그러나 주위에는 온통 브라질 선수들뿐이었다. 포스트 플레이를 할 수도 없고, 패스를 돌리며 연계를 꾀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그렇기에 오솔은 공을 잡고 그대로 상대 진영으로 달렸다.
“윽! 설마, 또?”
오솔이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브라질 관중석 곳곳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아직 그들에게는 선취점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마침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수비수 치아구 시우바가 나타났다.
“이젠 안 당한다!”
치아구는 이를 악물었다. 오솔의 몸싸움에 정면으로 부딪칠 생각인 것이다.
‘길목만 잘 막으면 돼. 녀석이 아무리 강해도 소용없다. 먼저 공간을 선점하면 뚫리더라도 놈의 반칙이 된다.’
이는 파올로 말디니가 오솔을 막았던 방식이었다. 치아구는 해당 경기를 떠올렸고, 자신 있게 오솔의 앞을 막아섰다. 위치 선정은 말디니가 더 뛰어나겠지만 치아구는 그에게는 없는 젊음이 있었다. 부족한 경험은 뛰어난 반응속도로 채울 수 있었다.
‘어쭈, 제법 머리를 썼는데?’
오솔은 상대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자리를 먼저 선점하는 말디니의 수비 방식. 이는 오솔이 처음으로 힘을 쓰지 못했던 수비 방법이었다.
‘그런데 어쩌나…… 그때는 아직 드리블이랑 개인기가 없을 때였는데?’
AC밀란과의 경기는 벌써 1년도 더 전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만 해도 오솔은 제공권과 수비 뒷공간 침투 외에 다른 기술이 없던 선수였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그사이 오솔이 이룩한 것들은 결코 작지 않았다.
‘아마 속도만 믿고 돌파하기는 힘들 거야.’
오솔은 치아구의 앞에서 공을 멈춰 세웠다. 축구공을 발바닥으로 잡고 살짝 멈칫한 것이다. 1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치아구는 ‘오솔이 멈춰 섰다’는 걸 확실히 인식했다.
‘네 반응속도가 뛰어나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다.’
오솔은 천재들을 상대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반응할 수 없는 아주 세밀한 속임수에도 그들은 예민하게 반응하곤 했다.
‘뛰어난 반응속도를 탓하라고!’
오솔은 오른발을 발바닥을 굴려서 공을 끌어들였다. 그리곤 디딤발이었던 왼발로 툭 하고 밀었다. 공은 치아구 앞으로 또르르 굴러갔다.
‘어?’
치아구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몸을 기울였을 때, 오솔은 드리블 방향을 한 번 더 바꿨다. 공중에 떠 있던 오른발을 뻗어 공을 왼쪽으로 몰아간 것이다.
급정지에서 급가속, 그리고 순간적인 방향 전환까지…… 이중삼중의 속임수가 섞인 개인기에 치아구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치아구는 자신을 지나치는 오솔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건…… 삼바 엘라스티코!?’
삼바 엘라스티코. 브라질의 전설적인 공격수 호나우두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기술. 앞선 동작에서 봤듯이 이 기술은 무릎과 발목 양쪽에 무리가 가는 터라 관절이 웬만큼 유연하지 않고서는 시도조차 힘든 개인기였다.
오솔은 그런 개인기를 호나우두의 모국, 브라질을 상대로 펼쳐 보인 것이다.
‘날 호나우두라고 생각하고 막았어야지!’
오솔은 옆에서 달라붙는 마르셀루 또한 밀쳐내고 계속 달렸다.
‘약해.’
정면으로 골키퍼가 나올 듯 말 듯 고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솔에게는 강슛 외에 감각적인 칩샷 역시 있었고, 덕분에 골키퍼는 선택 장애에 걸린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빨리 결정해, 인마!’
골키퍼는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앞으로 튀어나왔다. 나름대로 슈팅 타이밍을 뺏으려는 몸짓이었다. 그러나 오솔에게는 빈틈이 훤히 보였다.
착-!
발등을 타고 솟아오르는 축구공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골키퍼가 힘껏 손을 뻗어봤으나 공은 아슬아슬하게 걸리지 않았고, 마르셀루가 골대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 봤으나 그 역시 골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는 물론이고 골키퍼와 수비수의 속도까지 모두 계산한 슛이었다.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와아아아-!
‘이것으로 다시 앞서 나간다.’
오솔은 주먹을 불끈 들어 보였다. 이탈리아전에서는 시간이 없어서 세리머니를 생략했었지만, 지금처럼 경기력에서 밀릴 때는 이렇게라도 기세를 끌어올려야 했다.
“너…… 진짜로 대단한데?”
말을 건 이는 호비뉴였다. 그는 평소의 장난스러운 모습을 버리고 승부욕에 불타는 한 명의 승부사로 변해 있었다.
“이거 흥이 오르는데? 좋아. 어디 누가 더 대단한지 한번 겨뤄보자고!”
오솔이 해줄 말은 하나뿐이었다.
“그러니까 영어로 말하라고…….”
“앗! 설마 하나도 못 알아들은 거냐?”
“……너 바보냐?”
“으으. 어쨌든 두고 봐, 내가 곧바로 뒤집어줄 테니까.”
호비뉴는 자신의 말을 곧바로 증명해 보였다. 단단히 버티고 선 한국의 수비진을 순전히 개인기만으로 돌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면을 막아내는 수비수를 라 크로케타(팬텀 드리블)로 돌파하고, 중앙을 막아서는 수비수를 힐 스냅으로 속여 넘겼다. 그렇게 단숨에 측면 깊숙한 곳까지 도달한 호비뉴는 라보나 킥으로 크로스를 올렸다.
‘왜 라보나로 차지? 그리고 저놈…… 왼발도 잘 쓰잖아?’
단순한 ‘겉멋’이었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겉멋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크로스가 얼마나 날카롭게 날아갔느냐였다.
‘제발 막아라!’
오솔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호비뉴의 크로스는 파투의 머리를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
파투는 180cm의 결코 크지 않은 키였으나 그를 마크하는 선수가 단 한 명도 없는 게 문제였다. 결국 계속되는 공격에 수비진의 집중력이 흩어진 것이다.
‘망할…….’
이 득점 이후 브라질은 선수를 대거 교체했다. 체력이 떨어진 호나우지뉴 대신 베르더 브레멘의 지에구를 넣었고, 아직 열아홉 살에 불과한 파투를 쉬게 하고 191cm의 큰 키를 가진 조를 투입했다.
좁은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선수와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는 선수들 동시에 기용함으로써 변수를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 같았다.
‘후우. 갈수록 난이도가 올라가는데?’
오솔도 그렇고 한국의 다른 선수들 역시 한숨만 늘어갔다. 베스트 11이 아니어도 브라질은 여전히 강력했다. 이에 맞서 박성배 감독도 교체를 지시했으나, 많이 뛰느라 지친 수비수와 수비형 미드필더를 교체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공격은 순전히 오솔에게만 맡기겠다는 생각이었다.
‘지친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순간…… 일이 벌어졌다. 권형수가 뒤에 호비뉴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골키퍼를 향해 안이한 백패스를 보낸 것이다.
“뒤에 조심해!”
여민국이 고함을 쳐봤으나 소용없었다. 공을 먼저 잡은 것은 권형수가 아니라 호비뉴였다.
호비뉴는 번개처럼 달려가 공을 잡더니 앞을 가로막는 골키퍼를 가볍게 제치고 빈 골대를 향해 공을 차 넣었다.
와아아아-!!!
오솔과 호비뉴가 펼친 치열한 대결. 그 끝을 장식한 것은 권형수의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