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181화
40장 펠레와 파올로 로시
여민국의 엄포는 제법 효과가 좋았다. 내내 거슬렸던 ‘이 정도면 잘한 거야.’가 쏙 들어갔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오솔의 조언 역시 한몫했다.
‘똑바로 뛰어라. 뒤지기 싫으면.’
여민국을 상대로는 목소리를 높였던 권형수였으나 오솔 앞에서는 찍소리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오솔이 마테라치의 코를 어떻게 뭉개 버렸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결과 후반전 초반에는 제법 수비가 견고해졌다. 오솔은 수비가 안정된 것을 확인하고 전방으로 올라갔다.
‘그럼 슬슬 반격에 나서볼까?’
오솔은 슬쩍 상태창을 확인했다. 유독 눈에 띄는 항목이 있었다. 시즌이 끝나고 얻은 6개의 포인트를 모두 투자한 덕분에 한순간에 확 뛰어오른 능력치, 개인기였다.
-개인기 85(+1)
개인기는 변칙적인 플레이의 성공률을 높여주는 항목이었다. 이 능력치가 높아지면 라 크로케타 같은 기술이나 시저스 킥, 혹은 노룩 패스 같은 것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지금처럼…….
[오솔 선수가 내려와서 패스를 받네요. 아! 힐 패스입니다!]
오솔의 감각적인 힐 패스가 고영주에게 닿았다.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한 패스 연결이었다.
와아아-!
관중석에서 함성이 쏟아졌다. 오솔의 센스 있는 플레이에 눈이 즐거워진 것이다.
[고영주, 달립니다!]
고영주는 미리 연습한 대로 중앙으로 치고 들어갔다. 우주원은 우측 라인을 따라 계속 달렸다. 중앙에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동선을 따로 가져갈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윙어일 때처럼 완전히 측면으로 치우친 건 아니었다.
‘나도 이젠 공격수야. 언제라도 골을 넣을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해.’
우주원은 금방이라도 오프사이드 라인 안쪽으로 침투할 것처럼 행동했다. 다른 건 몰라도 주력만큼은 남부럽지 않은 게 우주원이다. 수비수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연시켜!”
“상대를 놓치지 마!”
이탈리아 수비수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오솔의 패스 탓에 미드필더들의 1차 방어가 무너진 탓이다.
고영주는 공을 몰고 가며 그들을 비웃었다.
‘아직 진짜는 나오지도 않았어. 바보들아.’
그 순간, 고영주의 등 뒤로 오솔이 등장했다.
오솔은 혼자만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순식간에 고영주와 이탈리아 선수들을 지나쳤다.
고영주가 패스한 것은 바로 그 타이밍이었다.
파앙-!
근거리에 있는 선수에게 하는 패스치곤 빠르고 강했다. 덕분에 이탈리아 선수들은 패스를 막을 수 없었고, 오프사이드 트랩은 형편없이 무너졌다. 반면 오솔은 그 공을 어렵지 않게 따라잡았다. 그는 침착하게 공을 잡고, 골키퍼의 위치와 무게중심 등을 확인했다.
‘오른쪽!’
판단을 내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오솔은 반대쪽 골대를 향해 가볍게 찼다. 평소처럼 쉬운 슛, 쉬운 골이었다.
‘쉽네, 쉬워.’
오솔은 골대까지 계속 달려 공을 집어 들었다. 이제 한 골이었다. 비기려면 앞으로도 최소한 한 골은 더 넣어야 했다.
‘분위기를 탔을 때 몰아쳐야 해.’
그렇게 세리머니를 생략하고 달리는데, 알림음과 함께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막을 수 없는.(Lv 1)’이 발동됩니다.
-5분 동안 모든 능력치가 1씩 상승합니다.
-효과가 유지되는 동안 골을 넣으면 승급 조건을 충족하게 됩니다. 다음 레벨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골은 두 골입니다.
상대편 선수 중 과반이 경외감을 느껴야 얻을 수 있는 버프가 발동했다. 오솔의 콧대가 슬쩍 올라갔다.
‘후훗. 힘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앞서 말한 것처럼 한국 선수들과 이탈리아 선수들 사이에는 엄연히 실력과 경험의 차이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큰 차이가 하나 더 존재했다. 바로 이탈리아 수비수들과 오솔의 차이였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이탈리아 수비진은 세리에A 주전급이 아니었다. 대부분이 소속팀에서 후보 선수로 뛰고 있었고, 수준 높은 리그를 경험하기는 했지만 경험이 풍부하다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특히나 비교 대상이 오솔 정도 되면 풋내기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전반전 내내 재미 많이 봤지? 후반전에는 조금 다를 거다.’
이후 오솔은 측면과 중앙을 오가며 무수히 많은 찬스를 만들어냈다. 그가 찔러주는 패스는 예상을 뛰어넘었고, 개인기는 시종일관 위협적이었다.
[꼬오오올! 동점골입니다!]
결국 버프가 유지되는 사이에 추가골이 터졌다. 이번에도 골을 넣은 것은 오솔이었다.
오솔은 또다시 세리머니를 생략했다. 역전골을 넣을 때까지는 긴장을 늦추지도 만족하지도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 모습에 이탈리아 선수들은 물론이고 같은 편인 한국 선수들까지도 전율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설마 이기나? 이탈리아를?”
“벌써 동점이잖아. 이탈리아 놈들이 꼼짝도 못 하고 있어. 우리가 놈들을 너무 과대평가했던 것일까?”
“아니…… 이건 그냥 저놈이 말도 안 되게 잘하는 것뿐이야.”
“……그런 놈이 우리 편이라 이거지?”
잘하면 이길지도 모른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러자 권형수를 비롯한 몇몇 수비수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승산이 전혀 없을 때와 희미하게라도 보일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톰마소 로키의 슛! 아! 우리 선수들, 몸을 날려 막아냅니다!]
선수들이 필사적으로 뛰기 시작하자 수비가 더 견고해졌다. 비록 완벽하고 세련된 수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투혼이 느껴지는 수비였다.
삑, 삑, 삐이익-!
아쉽게도 경기는 2 대 2,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다. 오솔이 찔러준 네 번의 찬스를 고영주와 우주원이 사이좋게 두 개씩 말아먹은 덕분이었다.
‘후우. 조금 아쉽네. 잘하면 이길 수도 있었는데…….’
오솔은 아쉬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고영주와 우주원은 힘든 상황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고작 셋이서 공격한 것 치고 두 골이면 괜찮은 성과였다. 게다가 오솔의 득점을 도운 것도 결국 그들이었다. 지금은 칭찬이 필요했다.
‘이젠 더 이상 얼빠진 실수도 나오지 않을 테니까 공격만 더 가다듬으면 되겠어.’
오솔의 예상대로 이어지는 온두라스전에서 한국은 한층 강해진 전력으로 상대를 제압했다. 조별 리그에서 2승 1무. 한국은 무난하게 8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들이 8강에서 만난 상대가…….
[브라질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습니다.]
그렇다. 브라질이었다.
[언제나처럼 활짝 웃고 있는 호나우지뉴 선수도 보이네요. 인상은 참 좋은데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무서운 선숩니다. 오늘 경계 대상 1순위죠.]
[브라질은 와일드카드 세 장을 호나우지뉴와 호비뉴, 치아구 시우바에게 쓰면서 공격과 수비를 한층 강화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강한 전력이 더욱 강해졌죠.]
[선수들 면면이 굉장히 화려하네요. 우리 선수들이 혹여나 기가 죽지는 않을까 걱정되는데요?]
[우리 선수들. 그렇게 나약하지 않습니다. 국민 여러분도 한마음 한뜻으로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계진이 국민들의 응원을 촉구하고 있을 때.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권형수는 호비뉴와 알레샨드리 파투의 투톱을 보며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각각 레알 마드리드와 AC 밀란에서 활약하고 있는 톱클래스 공격수들이었다. 쥐세페 로시에게도 밀렸던 권형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상대였다.
“다들 겁먹지 마! 감독님 말씀 기억하지? 우리는 수비만 하면 되는 거야!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 바로 옆에 동료가 있어!”
여민국이 나서서 분위기를 수습했다. 덕분에 선수들은 박성배 감독의 지시사항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전반전은 무조건 사린다. 웅크리고 막는 것만 생각해라.’
지금까지는 오솔과 고영주, 우주원 이 세 사람만 공격했었다면 이번에는 그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상대는 브라질이다. 이번 경기에서는 양 날개도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해야 해. 특히 오른쪽 라인을 조심해라!’
결국 오솔 혼자 공격하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오솔은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박 감독의 작전에 동의하고 있었다.
‘주원이가 막아야 할 상대는 보통 놈이 아니거든.’
오늘 브라질의 왼쪽 풀백으로 나온 것은 레알 마드리드 소속의 마르셀루였다. 88년생의 이 어린 선수는 미래의 슈퍼스타이자 장래에 세계 최고의 왼쪽 윙백이 되는 선수였다. 우주원이 작정하고 수비만 한다고 해도 막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대인 것이다.
그렇게 오솔이 작전을 다시 되새기고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장난기가 잔뜩 섞인 목소리의 포르투갈어가 들려왔다.
“네가 오솔이구나? 이야, 듣던 대로 덩치가 장난 아닌데?”
오솔은 눈앞의 ‘초딩’을 향해 영어로 말했다.
“난 포르투갈어 몰라. 그리고 스페인어도 모르니까 대화를 하고 싶으면 영어로 해라.”
자신만만하게 다가왔던 ‘초딩요’ 호비뉴는 갑작스러운 영어 공격에 말을 버벅거렸다. 꼴을 보아하니 영어를 모르는 게 분명했다.
오솔은 볼을 긁적였다.
‘큰일이네. 원래 역사대로 흐른다면 이적 시장이 끝나기 직전에 맨시티로 올 텐데. 영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모른단 말이야?’
물론 정해진 역사대로 흐른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실제로 올 시즌에 첼시로 갔었어야 할 보싱와는 1년도 전에 맨시티로 이적해 왔고, 만주키치나 모드리치 등도 원래대로라면 다른 팀에서 뛰었어야 할 선수들이었다.
그러나 호비뉴가 이적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호날두에게 영입 제의를 하면서 맨유 측에 호비뉴에 현금을 더한 트레이드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자존심이 상한 호비뉴는 새로운 팀을 알아보고 있었다.
‘EPL에서 호비뉴의 주급을 감당할 수 있는 건 맨유와 첼시, 그리고 맨시티뿐이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맨시티로 올 것만 같았다. 본래 챔스 티켓이 없을 때도 맨시티로 이적해 왔던 호비뉴였다. 고액의 연봉은 물론이고 챔스 진출까지 가능해진 맨시티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에이, 알 게 뭐냐. 브라질 선수들도 많이 있고, 보싱와도 말이 통하니까 괜찮겠지.’
오솔은 호비뉴를 머릿속에서 치워 버리고 그 자리에 치아구 시우바를 대신 넣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를 포함한 포백 전부를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하하. 이놈들을 나 혼자 상대해야 한다 이거지? 23세 이하라고 해도 상대는 브라질 대표인데, 과연 혼자서 골을 넣을 수 있을까?’
기회라도 많이 주어진다면 부담이 좀 덜할 텐데…… 전원 수비로 돌아선 한국으로서는 공격권을 되찾기가 너무 힘들었다. 이는 곧 단 한 번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소리였고, 아무리 오솔이라고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탈리아전에서 쉽다고 했더니 바로 난이도 조절을 해주는 건가? 후후, 재밌네.’
힘든 상황이었지만 오솔은 웃음이 나왔다. 오늘처럼 책임이 막중한 경기는 그를 부담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겼을 때 말 못 할 성취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 * *
브라질의 중원은 마치 바르셀로나처럼 패스를 주고받으며 수비의 빈틈을 찾았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나온 호나우지뉴와 미드필더에 위치한 안데르송, 에르나니스, 루카스 등 선수들 면면이 보여주는 패스 실력이 뛰어나기에 가능한 플레이였다.
덕분에 한국의 미드필더들은 정말 쉼 없이 뛰어야 했다. 그중에서 여민국의 움직임이 가장 부지런했다. 오늘 그의 역할이 ‘외계인’ 호나우지뉴를 밀착 마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의 에이스를 막아야 하는 부담스러운 역할. 그러나 여민국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
‘호나우지뉴…… 컨디션이 엉망이라더니 역시나 제대로 못 뛰는구나.’
호나우지뉴의 최근 컨디션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작년부터 자기 관리 실패로 체중이 급격히 불어났기 때문이다. 당연히 몸이 무거워진 만큼 속도도 떨어졌고, 소속팀에서 경기를 치르지 못해서 경기 감각도 낮은 편이었다.
‘올림픽을 컨디션 조절하는 무대로 삼을 생각인가 본데…… 우리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냐?’
여민국은 호나우지뉴 앞을 호기롭게 막아섰다. 컨디션이 엉망인 호나우지뉴와 달리 그는 분데스리가 데뷔를 위해 휴식기 내내 개인 트레이너를 달고 몸을 만들어왔었다. 그렇게 완성된 몸은 곧 자신감으로 나타났다.
[여민국의 태클! 아! 그러나 호나우지뉴가 플립 플랫으로 제쳐냅니다!]
플립 플랫. 발목 하나로 공을 좌우로 꺾는 호나우지뉴의 상징과도 같은 기술이다. 몸은 둔해져도 발재간은 살아 있었는지 호나우지뉴는 이 한 동작으로 여민국을 속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타다다닷!
호나우지뉴는 여민국을 속일 수는 있어도 떨쳐낼 수는 없었다. 호나우지뉴는 축구를 시작한 이후 가장 느려진 상태였고, 반면 여민국은 지금까지 중 몸 상태가 가장 좋았다.
촤르르륵!
여민국은 빠르게 따라붙어 공을 따내자, 관중석 곳곳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경기력이 떨어졌다고는 하나 상대는 무려 호나우지뉴였다. 이름 없는 아시아인이 막아낼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참나, 정말 대단한 양반이야.’
감탄한 것은 오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감탄도 잠시, 오솔은 여민국이 공을 잡고 돌아서는 걸 확인하는 즉시 전방으로 뛰었다. 곧이어 뻥! 하는 소리와 함께 공이 하프라인을 넘어왔고, 치아구 시우바가 빠르게 따라붙었다.
‘5년은 더 공부하고 와라. 치아구 유정!’
오솔은 그를 파리 쫓듯이 가볍게 날려 버렸다. 치아구는 잠재력이 대단한 선수였지만 아직까지는 경험이 많지 않았다. 하물며 존 테리 정도 되는 선수조차 오솔과 대등한 상황에서 붙으면 지는데 치아구는 어떻겠는가.
이후 오솔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공간을 가로질렀다.
한국이 전원 수비로 나온 덕분에 브라질은 전원 공격에 가깝게 뛰고 있었고, 치아구까지 날려 버린 이상, 오솔의 앞을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파바바박!
오솔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잔디가 잘려 나가고, 공기가 비단옷처럼 북북 찢어졌다.
골키퍼가 급히 튀어나와 보지만 오솔의 상체 페인팅의 희생자가 될 뿐이었다. 완전체에 가까워진 오솔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오솔은 경기 시작 5분 만에 골을 기록했다.
“아아…….”
경기장을 찾은 브라질 팬들은 절망에 빠졌다. 그중 한 나이 든 브라질 팬은 오솔을 보며 비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파올로 로시 같은 놈이 또 나타났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