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168화
36장 어서 와. EPL은 처음이지
“인대가 좀 파열되었네요. 충격이 제법 컸을 텐데, 괜찮습니까?”
인대 파열이라는 말에 오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속으로 조금 더 조심할 걸 그랬다고 자책했다. 불륜 문제는 존 테리의 치부와도 같은 것이라 평소보다 더 거칠고 격하게 반응할 걸 미리 예상했어야 했다.
“회복하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적어도 2주, 아니, 넉넉히 3주는 쉬어야 합니다.”
“2월 초까지는 필드에 나가지 못한다는 얘기로군요.”
“맞습니다.”
“젠장맞을…….”
의사가 물러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놀란 얼굴을 한 민주가 병원에 찾아왔다. 집에서 TV를 보다가 바로 나온 듯 제대로 꾸미지도 못한 모습이었다.
“솔아, 괜찮아? 의사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어?”
“자기는 딱히 찍어 바른 것도 없는데 어쩜 이렇게 예뻐? 어째 오늘따라 더 예쁜 것 같은데?”
“딴소리하지 말고…… 헉! 설마 심각하대? 그래서 말 돌리는 거야?”
“아니야, 그런 거. 그냥 3주 정도 푹 쉬면 된데.”
“진짜야?”
“응, 진짜로.”
“휴, 다행이다.”
민주가 허물어지듯 자리에 앉았다. 오솔은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
“그보다 아까 물어본 거 대답은 언제 해줄 거야?”
“응, 뭘?”
“왜 이렇게 예쁘냐고 물었잖아. 이야, 자기는 쌩얼이 제일 예쁜 것 같아.”
“알았어. 다음엔 뭐라도 바르고 나올 게. 그만해.”
“아니, 진짜로…….”
“씁! 당신이 말 안 해도 나 지금 꼴이 엉망인 거 아니까, 조용히 해.”
“……네.”
자신을 위해 급히 뛰어온 아내가 고맙고 예뻐서 한 말이었는데, 살짝 오해를 불러온 듯하다.
‘휴, 칭찬 한 번 하기 힘드네.’
민주는 한참 동안 거울을 보더니 과일을 좀 사 오겠다면서 나갔다. 보나 마나 다음에 나타났을 땐 화장까지 완벽하게 한 모습일 것이다.
결혼한 지 2년, 이제는 서로의 민낯에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민주는 아직도 화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이와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맨 얼굴이었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최대한 예뻐 보이고 싶다는 게 그녀의 마음이었다.
‘맨 얼굴이 더 예쁘다고 해도 안 믿네.’
오솔은 혼자 남은 김에 상태창을 확인했다.
-컨디션 84.9%
체력이 모두 돌아왔는데도 컨디션이 85% 수준에 불과했다. 확실히 발목에 손상이 있었다.
오솔은 이어서 새로운 알림창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부상을 신경 쓰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뛰어난 반사 신경과 위기 감지 능력으로 부상을 경감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반응속도가 1 상승하고 추가로 (+1)의 보너스가 붙습니다.
-반응속도 81(+1)
“보너스를 주는 건 고마운데 겨우 하나만 올려주는 거야? 이건 좀 너무하지 않냐? 거의 스파이더맨급 반응속도였는데…….”
그러나 한참을 불평해도 시스템에게서는 응답이 없었다.
* * *
[쾌조의 맨시티! 첼시를 꺾으며 4위까지 바짝 따라가다!]
맨체스터 시티와 첼시전 직후, 리버풀이 3위로 올라가고 첼시는 4위로 추락했다. 이로써 맨시티는 4위와 승점을 2점까지 좁히게 되었다. 그리고 사흘 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1월 마지막 날이 되었다.
삑!
[24:00] … [23:59] …… [23:53]
30일 자정에 맞춰 24시간짜리 타이머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23:50]
이제 겨울 이적 시장 마감까지 23시간하고 50분 남았다.
데샹 감독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들고 줄어드는 타이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불쑥 물었다.
“모드리치의 에이전트한테서 연락은 없었습니까?”
“1시까지는 답하겠답니다.”
“스르나는요?”
“……거절의 의사를 전해왔습니다. 당분간은 팀을 옮길 생각이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습니다.”
“후우, 아쉽군요. 그만 한 선수는 찾기 힘든데.”
데샹은 결국 급한 대로 눈길을 프리미어리그로 돌렸다.
“현재 리그에서 그나마 성적이 나오는 선수는 누가 있죠?”
“영입 가능성이 있는 건 레딩의 니키 쇼레이뿐입니다. 현재 1골 6어시를 기록 중이죠. 킥이 정확하고 수비력도 준수한 편입니다.”
데샹은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니키 쇼레이가 일시적으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의 활약이 꾸준히 이어질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면 뤼도빅 마냉에게 다시 오퍼를 넣어볼까요?”
뤼도빅 마냉은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뛰고 있는 선수로 스위스 국가대표였다. 79년생이라 나이가 좀 많은 걸 제외하면 실력은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돈을 요구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니, 나이를 생각하면 필요 이상의 과한 금액을 요구하고 있었다. 맨시티가 돈을 뿌린다는 사실을 알고 몸값을 한껏 높여보겠다는 속셈 같았다.
“호구 잡히는 건 별론데…… 어쩔 수 없죠. 일단은 최대한 협상해서 계약 조건을 완화해 봐요.”
사실 데샹은 이름값이 높은 선수보다는 실속 있는 선수를 영입하고 싶었다. 어차피 진짜 월드 클래스는 영입하지 못하는 상황이니 고만고만한 선수를 영입하느니 차라리 실리를 추구하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구단주나 이사진의 생각은 달랐다. 지원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팀의 명성이 크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 그들 입장에서는 제법 알려진 선수를 영입하길 원했다.
물론 이적에 관한 모든 권한은 전적으로 데샹에게 있었다. 그가 감독을 맡을 때 내건 조건이 선수 영입의 전권이지 않은가.
마음먹고 밀어붙이자면 못할 것도 없었다. 다만 그렇게 해서 영입한 선수가 자칫 실패한 영입이 되면 감독으로서의 입지도 그만큼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게 걸릴 뿐이다.
고민이 지속되는 사이 1시가 가까워졌다.
1시를 1분 남겨두고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담당관은 상대를 확인하더니 데샹에게 전화를 넘겼다. 모드리치의 에이전트가 분명했다.
“어떻습니까, 결론이 났습니까?”
“네. 저희는 리그에서 최소 20경기 출전과 팀이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하지 못했을 때 추가적인 주급 상승을 요구합니다.”
“이번 시즌 4위에 들지 못했을 때 곧바로 다음 시즌에 주급을 인상해달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인상 폭은 보내주신 금액의 25%가 좋겠군요.”
“25%요? 으음.”
데샹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들이 모드리치에게 제시한 조건은 지금도 EPL 최고의 대우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솔직히 지금 모드리치에게 이만한 대우를 해줄 수 있는 구단은 맨시티 말고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추가로 인상을 한다? 비록 챔스 진출에 실패할 경우라는 단서가 달리긴 했지만 주급을 25%나 인상하는 조건을 추가하는 건 과한 요구였다.
혹시나 이번에 챔스 진출에 실패하면 모드리치는 고작 6개월 만에 주급이 25%나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자칫 팀 내에 불화를 일으킬 수도 있는 계약 조건이었다.
데샹이 말을 끌자 모드리치의 에이전트가 결정을 재촉했다.
“챔피언스 리그에 대한 확신이 있다고 하셨으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죠? 아니면 설마, 불확실한 약속으로 저희를 꾀어낸 겁니까”
“아니요…… 전혀 아닙니다. 조건은 그거면 됩니까?”
“네. 이 두 가지 조건만 만족한다면 세부적인 협의는 금방 끝날 겁니다.”
“좋습니다. 그럼 세부적인 건 담당자와 이야기하시죠. 논의가 끝나는 대로 팩스를 보내겠습니다.”
데샹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조건이 생각보다 셌지만 그래도 리그 4위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과감하게 받았다.
‘후우. 그래도 비교적 빨리 확답을 받았구나. 물론 하루 종일 팩스를 주고받다 보면 이적이 성사되는 건 밤 늦게겠지만 말이야.’
이적은 마지막 날, 마지막 1분을 남겨두고도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재수 없으면 데 헤야의 팩스 소동처럼 2분 차이로 팩스가 늦어져서 합의가 다 끝난 이적이 한순간에 어그러질 수도 있었다.
“모드리치 건은 최대한 빨리 해결해줘요. 늦어도 밤 10시 이전에는 끝냈으면 좋겠네요.”
“네. 알겠습니다.”
모드리치 영입이 대충 마무리되자 데샹은 머리가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덕분에 내내 골치가 아팠던 왼쪽 풀백 자리도 조금 더 편하게 고민할 수 있었다.
“공격과 수비를 다 갖춘 선수를 구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구나.”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한쪽 능력만 갖춘 선수를 데려와서 다른 쪽 능력을 훈련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후반기에는 우리를 상대로 수비적으로 나오는 팀들이 많을 테니, 공격적인 선수를 영입하는 게 더 좋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데샹의 머리에 몇몇 선수가 스쳐 지나갔다. 평소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던 선수들이었다. 데샹은 곧장 사무실을 찾았다.
“말콤!”
사무실 한쪽에 있던 직원이 의자를 뒤로 빼면서 고개를 들었다. 말콤은 아직 얼굴에 주근깨가 남아 있는 통통한 인상의 남자 직원이었다.
“당장 릴에 연락해요.”
“릴이요? 뭐라고 할까요?”
“미셸 바스토스를 사고 싶다고 말해요.”
미셸 바스토스는 브라질 출신으로 현재 리그앙에서 주목받고 있는 젊은 풀백 중 하나였다. 최근 들어 왼쪽 윙으로 출전하고 있었지만, 본래 포지션은 왼쪽 윙백이었다.
말콤이 지시사항을 받아 적고 있을 때, 데샹이 바짝 다가가 말을 덧붙였다.
“딱 1시간만 기다린다고 전해요. 대답할 때 원하는 액수도 말해주면 더 좋고.”
“네, 네!”
데샹은 이어서 다른 직원도 찾았다.
이번에 찾은 선수는 FC 코펜하겐의 오스카 벤트로 이 선수는 작년에 처음 스웨덴 국가대표로 뽑히며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린 선수였다.
이로서 맨시티는 이야기를 진행 중인 뤼도빅 마냉까지 포함해서 한 포지션에 세 명의 선수를 놓고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이적 시장 막판에 여기저기 찔러보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사들이는 건 아니었다. 스카우트들이 미리 검토하고 데샹도 한차례 확인한 선수 중에 고른 것이었다.
‘바스토스나 벤트는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지만 잠재력은 충분한 선수들이야. 혹여 둘 다 놓치더라도 마냉이 보험이 될 테니 걱정할 필요 없지.’
데샹은 자신의 안목을 믿었다.
“감독님 릴 수뇌부에게서 응답이 왔습니다!”
“코펜하겐 쪽도 방금 막 의견을 보냈습니다!”
다행히 답은 둘 다 OK, 승낙이었다. 이젠 둘 중 누구를 선택하느냐만 남았다.
* * *
한편 첼시는 맨시티전 이후 크나큰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존 테리의 2경기 결장이 그것이었는데, 덕분에 그들은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이 마무리되는 1월 10일까지 무려 다섯 명의 주축 선수들이 리그 경기에서 빠지게 되었다.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의 여파! 첼시, 결국 5위까지 떨어지다!]
[모두의 우려를 깨고 후반기에 드디어 4위에 올라선 맨시티! 그 성공에는 오솔이 있었다.]
그 결과, 고작 두 경기 만에 첼시와 맨시티의 위치가 뒤바뀌고 말았다. 존 테리의 퇴장이 아프리카 네이션스컵과 기묘하게 맞물려 첼시의 몰락을 야기한 것이다.
물론 따지고 보면 몰락이라고 표현해야 할 만큼 순위가 크게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4위인 맨시티와도 승점 차이가 고작 3점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본래 첼시가 맨시티보다 5점이나 더 앞서가던 팀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몰락이라는 표현도 크게 틀린 건 아니었다. 짧은 시간에 승점을 8점이나 잃었다는 건 첼시처럼 리그 우승을 노리는 팀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결과였다.
‘이대로 고꾸라져주면 좋겠는데. 뭐, 쉽지는 않겠지. 곧 아프리카 선수들도 다시 돌아올 테니까.’
한편 부상으로 휴식을 취하는 사이 오솔은 국가대표 선배인 박해진을 만나 같이 저녁을 먹거나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둘 다 맨체스터를 연고로 하는 팀에 소속되어 있다 보니 만나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볼 수 있었고, 최근에는 박해진도 부상 때문에 시간적인 여유가 많았다.
오솔은 게임기 패드를 잡은 채 박해진의 다리를 향해 턱짓했다.
“참, 선배님은 무릎 괜찮으세요?”
“응. 수술은 잘 됐었는데, 재활하면서 염증이 생겨서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박해진은 작년 5월에 무릎 연골 재생 수술을 받고 반년 만에 그라운드로 돌아왔다가 해당 부위에 염증이 생기면서 다시 치료와 재활에 들어갔다.
“경기 감각은요?”
“그게 걱정이야. 필드에 선 지 너무 오래돼서…….”
중간에 잠깐 뛰었다고는 하지만 겨우 한두 경기에 불과해서 따지고 보면 벌써 9달 가까이 실전을 치르지 못한 셈이었다. 게다가 걱정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몸이 좀처럼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으니 답답하네. 당장에라도 필드로 돌아가고 싶은데. 후우. 너도 몸 관리 잘해. 작은 부상이라고 우습게 보지 말고 확실하게 잡고 가.”
“네, 그럴게요. 흐흐. 그런데 저한테 이런 조언 해주는 걸 맨유 팬들이 알면 싫어하지 않을까요? 라이벌 팀 선수잖아요.”
“그전에 넌 국가대표의 에이스잖아. 이 정도는 팬들도 이해할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하죠. 영국에는 생각보다 미친놈들이 많잖아요.”
“하긴 과격한 팬들이 많긴 하지.”
두 사람은 가볍게 웃고는 게임을 다시 시작했다. 박해진은 맨유를 골랐고, 오솔은 맨시티를 골랐다. 모든 스탯이 고루 뛰어난 맨유와 달리 맨시티는 공격 부분만 높았다.
“맨시티로 싸움이 되겠어?”
“그럼요. 공격수가 SSS급이잖아요. 원래 이런 게임은 공격수만 믿고 가는 겁니다.”
“그럼 좀 답답할 텐데.”
“어라? 그런데 선배님은 후보네요? 설마 긱스한테 밀리시는 겁니까? 내일모레 마흔인 사람한테 지는 거예요?”
“알았어, 인마. 교체하면 되잖아.”
“흐흐흐. 핸디캡 감사합니다.”
“뭐, 핸디캡? 넌 죽었다.”
박해진은 부상으로 쉬는 동안 게임만 했는지 단 한 번의 슈팅도 허용하지 않는 극강의 컨트롤을 선보이며 오솔을 안드로메다로 보내 버렸다.
“후우. 세상에…… 밥 먹고 게임만 하셨어요? 누가 보면 프로게이머인 줄 알겠네. 무슨 게임을 이렇게 살벌하게 해요?”
“후후후. 박해진이 골을 넣을 때까지 공격은 계속된다.”
“……오래 쉬시더니 독해지셨네요. 지금 모습대로만 하시면 금방 적응하시겠어요.”
“참, 너는 언제 복귀야? 발목은 거의 다 나았다며?”
오솔은 오른쪽 발목을 들어 올리더니 장난스럽게 까닥거렸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고, 불편한 느낌도 전혀 없었다. 충분히 쉬어준 덕분에 인대가 완전히 회복된 것이다.
“이번 주에 바로 출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