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164화
“진짜 아니라니까요!”
파티장은 어느새 취조실로 변해 있었다. 힘없이 앉아 있는 리차즈와 그 근처에서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오솔, 바튼의 모습이 그런 분위기를 풍겼다.
유일하게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려는 이는 데샹 감독이었다. 그는 리차즈 앞에 쭈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추더니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솔직하게 말해줘. 그래야 도와줄 수 있으니까.”
“아까부터 그렇다고 말했잖아요. 그런 아저씨는 모른다고요.”
“누가 그 아저씨를 물어봤어? 그 사람 딸이랑 얽힌 일이잖아!”
바튼의 고함에 리차즈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바튼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오솔은 흥분한 바튼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진정 좀 해요, 이 양반아. 지금도 충분히 머리가 아픈데 여기서 폭행 사건까지 더하면 정말 큰일이라고!’
바튼의 발이 허공을 휘저었다. 과격한 행동이었지만, 덕분에 리차즈의 입에서 진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냥…… 클럽에서 알게 돼서 몇 번 어울린 게 다예요. 딱히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고, 그렇게 많이 만난 것도 아니라고요. 분명히 제가 잘나가니까 돈이나 한번 뜯어보자는 속셈일 거예요.”
“……알았다. 일단 네 입장은 있는 그대로 구단에 전달하마.”
리차즈는 계속 숨어 있다가 변호사가 도착하고 나서나 집으로 돌아갔다. 데샹은 리차즈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말로 크리스마스의 악몽이네.”
오솔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았다.
“네, 끔찍하네요. 크리스마스에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우리 말고 또 있을까요?”
놀랍게도 더 있었다. 그것도 같은 맨체스터 지역에서.
다음날 올라온 기사는 이것이었다.
[뒤숭숭한 분위기의 맨체스터.]
[지난밤 맨체스터의 두 장소에 맨유와 시티의 선수들이 모였다. 두 팀 모두 이른 연말을 보내고 이어질 박싱데이에 온 힘을 쏟을 생각이었을 것이다.
파티는 즐거웠다. 경찰차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신고가 처음 접수된 시간은……. 결국 맨유의 조니 에반스는 성폭행 혐의를 받고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었고, 시티의 마이카 리차즈는 갑자기 난입한 중년 남성에게 폭행을 당했다.
이 중년 남성은 리차즈가 그의 딸을 성폭행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남자는 경찰 조사에서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말하며 큰 파문을 예고했다.
아직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맨유와 시티의 두 유망주의 앞날에 먹구름이 꼈다는 사실만은 명확했다. - 더 문.]
하필이면 같은 날, 같은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더 크게 보도됐다.
조니 에반스의 사건도 컸지만, 언론들은 주로 리차즈를 타깃으로 삼았다. 유로 2008 진출을 망친 주범이자 부족한 프로의식을 보여준 선수, 거기에 성추문까지 더해지자 리차즈라는 이름만 걸려도 조회 수가 활활 불타올랐던 것이다.
“망할 기자들이 몰려서 훈련장 분위기도 개판이네요.”
오솔은 기자들이 몰려있는 지역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훈련장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스태프들에게 쫓겨나고 있었다. 지울리는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남자는 여자를 조심해야 해. 나 봐라. 연락처 한 번 잘못 물었다가 국가대표에서 완전히 나가리 됐잖아.”
지울리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2004년 봄에 있었던 일이었다. 당시 지울리는 프랑스 방송에 나갔다가 한 여성에게 반했다. 상대는 해당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고 있던 여성이었다. 지울리는 그녀의 연락처를 받아서 같이 저녁을 먹고 싶다고 문자를 보냈고, 그게 끝이었다.
“그 여자가 도메네크 감독의 애인인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재수 없게도 지울리가 작업을 걸었던 상대는 당시 프랑스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레몽 도메네크의 애인이었다.
이후 어떻게 됐을까?
‘어떻게 되긴,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아웃이지.’
지울리는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했던 3년간 단 한 번도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고, 그사이 그의 나이는 서른을 넘겨 버렸다.
더 암울한 사실은 도메네크가 물러나려면 아직도 2년이나 더 남았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강제로 은퇴를 당했다고 봐도 좋았다.
“그건 도메네크가 또라이라서 그런 거잖아요. 딱히 여자 탓은 아닌데요?”
“내 말은 여자한테 말 거는 것부터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지. 그 사람이 누구 애인일지 어떻게 알아? 막말로 마피아 보스의 애인이면 어쩔 거야?”
“점성술사한테 크게 데시더니 너무 조심스러워지셨네요.”
점성술사는 도메네크의 별명이다. 국가대표를 선발할 때 선수들의 별자리를 선발 기준에 포함하면서 얻은 별명이었다. 확실히 그는 별종이자 기인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찍혔으니 국가대표는 완전히 물 건너간 거지.’
어쨌든 클럽 입장에서는 좋았다. 덕분에 A매치가 진행되는 동안 지울리가 충분히 쉴 수 있었으니 말이다.
“참, 이번 일은 어떻게 될까요?”
“글쎄 결국 재판까지 가봐야 알겠지만 여자 쪽에서 진단서와 증거까지 다 있다고 하니까. 아마…….”
지울리는 손가락으로 목을 쓱 그었다.
“끽! 아닐까?”
지울리의 말대로 여자 쪽에선 당시 상해를 입은 진단서와 서로 주고받은 문자를 바탕으로 경찰에 신고했다. 리차즈는 바보처럼 그녀와 주고받은 문자를 모두 지워버린 탓에 무죄를 증명할 가장 쉬운 방법을 잃은 상태였다.
데샹은 일단 리차즈를 믿는다는 입장이었으나, 증거가 하나씩 나오면서 그를 지지하기 조심스러워졌다. 만에 하나 진짜 리차즈가 잘못한 것이라면 그를 지지했던 구단까지 이미지에 큰 타격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리차즈를 다시 감독실로 불러 2차 상담을 진행했다.
“어떻게 된 거야. 리차즈, 진단서는 뭐고, 대화 내용은 또 뭐지?”
“그것이…….”
데샹의 물음에 리차즈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옆에 대동하고 있던 변호사가 발언을 막았던 것이다.
“제가 대신 말씀드리죠. 이 사건의 대리인이니까요.”
“예, 말해보세요.”
“일단 문자는 조작된 겁니다. 필요한 내용만 남기고 일부를 누락시키면서 맥락을 뒤튼 것이죠. 결과적으로 지금 제출된 내용만으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실하게 규정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진단서는요?”
“그건…… 리차즈 씨 때문에 생긴 상처는 맞습니다. 다만 서로 합의된 상황에서 발생한 일이라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합의? 아니, 무슨 합의하에 상해를 입힌단 말입…….”
데샹은 묻다 말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데샹의 눈동자가 리차즈에게 향하자 그의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변호사는 헛기침과 함께 마무리에 들어갔다.
“아무튼 저희는 이미 반박할 준비가 완벽하게 끝난 상황입니다. 그러니 구단 측에서는 계약을 준수해 주시지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걸 증명할 방법은 있소?”
“다행히 리차즈 씨께서 증거를 남겨놨더군요.”
“그러니까 그게…….”
“크흠! 동영상입니다. 일단은 여기까지만 말씀드리죠.”
동영상이라는 말에 리차즈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범죄자가 되느니 변태임을 밝히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그 와중에 부끄럽기는 했는지 고개를 못 들고 있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데샹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이제 그의 눈에는 조금의 동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리차즈는 유무죄 여부와 상관없이 데샹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 * *
결국 리차즈는 2군으로 내려갔다. 개인적으로 훈련을 지속할 수 있는 정신 상태도 아니었고, 몰려드는 기자들 때문에 계속 1군에 머물렀다간 다른 선수들에게도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월까지만 버티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수비에 공백인 생긴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1월까지만 버틴다면 수가 있었다. 박싱데이를 앞두고 만주키치와 콤파니의 영입이 확정된 것이다. 여기에는 오솔의 활약이 컸다. 만약 그의 설득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 다 놓쳤을 것이다.
‘에휴. 내가 무슨 영업사원 제라드도 아니고…….’
리버풀의 캡틴, 제라드도 A급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직접 선수들을 설득한 적이 있다. 이건 리버풀이 한창 유로파리그에서 놀던 2009년 이후의 이야기였다.
어쨌든 콤파니가 합류하기로 한 이상 1월부터는 수비가 보강될 것이다. 시즌 중에 팀을 옮기는 것이라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했으나, 다행히 두 사람은 벌써부터 맨시티에 와 있었다. 분데스리가가 겨울 휴식기에 접어든 틈에 미리 움직인 것이다.
‘사실은 불법이지만 그래도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 편법을 좀 써야지.’
당연히 함부르크에서는 계약 불이행이라고 꼬집었고, 맨시티가 이를 종용했다며 비난했다. 이에 만수르 구단주는 그 기간만큼의 벌금을 두 배로 내주는,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부자들만의 문제 해결법이었다.
어쨌든 이로써 두 사람은 팀에서 호흡을 맞춰볼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경기를 어떻게 치르느냐가 중요하다. 이 경기들에서 모두 이기면 단번에 6위까지 뛰어오를 수 있어.’
마침 박싱데이에 만나는 상대들은 더비 카운티나 버밍엄 시티 같은 약팀들이었다. 빅 4와의 경기를 미리 치른 것이 지금에 와서 긍정적인 요인이 된 것이다.
물론 방심은 허용되지 않았다. 수비진의 구성도 바뀌었고, 팀의 분위기도 엉망이었다. 상대가 비록 강등권 팀이라고 해도 현재의 분위기만 놓고 본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데샹은 선수들을 모았다. 그는 평상시에는 보기 힘든 권위적인 자세를 잡았다.
“모두들 최근 팀의 분위기가 뒤숭숭하다는 걸 알고 있겠지?”
“네!”
“나는 기본적으로 여러분의 사생활에 간섭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모두 성인이고, 또 프로니까요. 프로라면 스스로를 관리하는 게 당연하죠.”
“…….”
“하지만 이런 일까지 벌어진 이상 더는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데샹의 눈길이 존슨과 촐루카 등 평소에 리차즈와 자주 어울렸던 이들에게 향했다. 어린 선수들이 찔끔하는 게 보였다.
그들 외에 다른 선수들도 긴장하고 있었다. 자유롭게 풀어주기만 하던 사람이 제대로 각을 잡고 말하자 더 심각하게 들린 것이다.
‘좋은데?’
오솔은 이 같은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시티도 좋았지만 때로는 함부르크 시절처럼 엄격한 느낌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너무 자유롭게 풀어놓는 것도, 그렇다고 너무 조이는 것도 좋지 않다고. 중도를 지켜야지.’
데샹은 마지막 순간, 리차즈의 처우에 대해 언급했다.
“참, 리차즈는 임대 명단에 올랐다. 이제 우리는 그를 빼고 수비진을 구성한다. 남은 세 경기에서는…… 하만!”
“네!”
독일인인 하만이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답했다.
“당분간 리차즈의 자리를 대신해 주게.”
“알겠습니다!”
리차즈가 임대를 간다는 소리는 데샹의 계획에서 그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뜻했다. 몇몇 선수들, 특히 어린 선수들은 설마 하니 이렇게 단번에 잘라낼 줄은 몰랐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감독이 완전히 물러가자 바튼이 특유의 거친 음성으로 으르렁거렸다.
“뭘 그렇게 똥 씹은 얼굴들을 하고 있어? 설마 이렇게 될 줄 몰랐어?”
“하지만 리차즈는 확고부동한 주전이었잖아요. 고작 실수 한 번 때문에 이렇게 되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아요?”
“……시티는 달라지고 있어. 아니, 이미 달라졌지. 확실한 주전은 없어. 당장 이번 영입만 봐도 답이 나오잖아. 이제는 언제든지 원하는 선수를 데려올 수 있는 팀이라고, 시티는.”
“…….”
무한 경쟁이 펼쳐진다는 사실을 반기는 이는 많지 않았다. 재능이 있고, 꾸준히 실력을 갈고닦던 아일랜드 같은 선수만이 이를 기회로 여기고 있었다.
‘바튼이 조금 변했는데?’
오솔은 바튼이 선수들을 훈계하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외로운 들개처럼 남들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선배 노릇을 하니 이상했던 것이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물론 바튼은 갑자기 죽기에는 너무 건강했다. 기본적인 성격도 여전했고.
“뭘 그렇게 봐? 뭐, 불만 있어?”
“아니, 신기해서요. 제법 인생의 선배답던 걸요?”
“그렇게 볼 것 없어. 나중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짜증 날 것 같아서 미리 경고하는 것뿐이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은 이유였지만 그게 끝일 리 없었다. 슬쩍 데샹 감독을 바라보니 바튼의 모습을 확인하며 흐뭇하게 웃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착한 경찰, 나쁜 경찰 놀이인가?’
바튼이라면 나쁜 경찰 역에 딱이었다. 물론 지금까지는 나쁜 놈이나 나쁜 새끼에 더 가까웠지만, 아까처럼 적절한 수준에서 설교할 수만 있다면 군기 반장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나쁘지 않네.’
오솔은 이러한 변화에 찬성하는 쪽이었다. 물론 군기를 잡는 게 심해져서 이른바 똥군기를 잡는 상황까지 간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단체 경기인 이상 어느 정도는 기강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는 실력이 되는 선수들 위주로 영입될 거야. 신인이 살아남으려면 지금보다 몇 배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시티는 막 과도기에 접어든 팀이었다.
당장 겨울에도 이적생들이 들어오고, 내년에도 새롭게 선수들이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그 수만큼 팀을 떠나야 한다.
상위권으로 도약하느냐 아니면 헛된 발악이 되느냐를 판가름하는 시기였으니 구단 입장에서도 비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구단주가 돈이 많으니까 실패해도 계속 도전할 수 있겠지만.’
팀은 언젠가 정상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문제는 ‘누가 남고 누가 사라지느냐’였다. 적어도 2년, 사람을 한계까지 몰고 가는 극한의 경쟁 체제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축구에 목숨을 거는 0.1%만 살아남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