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149화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곳에서 뛰는 거야?”
“응, 지금까지는 수비수를 끌고 다녔다면 이제는 수비수를 피해 다니는 역할인 거지.”
오솔은 빨래를 개다 말고 다가올 리그 컵 경기를 설명했다. 새롭게 맡게 된 역할, 팀원과의 호흡 그리고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까지. 이야기를 다 들은 여민주는 짧게 감상을 읊조렸다.
“꼭 애들 싸움 같네.”
“틀린 말은 아니지. 아직 혈기왕성한 이십 대들이니까.”
조이 바튼은 스물다섯, 일라누는 스물여섯으로 인간적으로 성숙하기에는 조금 이른 나이였다.
“흐음. 내가 봤을 때, 답은 하나야.”
“뭔데?”
“나 같은 여잘 만나서 결혼하는 거지. 그럼 철이 좀 들걸?”
“……아무튼 그래서 이번에는 그 두 사람 대신 나와 디트마어 하만이 합을 맞추게 될 거야.”
“어라, 대답 안 하네? 동의하지 않는다는 거야?”
여민주는 아이를 안다 말고 찌릿 째려봤다. 그러자 대한이도 엄마를 따라 오솔을 본다.
하필 이 두 사람이 바라보다니, 오솔은 괜히 가슴이 찔려왔다.
“하, 하겠습니다.”
“잘해. 언제나 믿고 있으니까.”
마무리는 언제나 그렇듯 응원 그리고 쓰레기봉투로 끝이 났다.
오솔은 말없이 봉투를 받아 들었다. 지은 죄가 많이 있어 결혼하고 나서도 꽉 잡혀 사는 오솔이었다.
* * *
리그컵 1라운드 경기. 브리스틀 로버스전.
맨체스터에서 남쪽으로 한참을 날아간 끝에 도달한 브리스틀의 작은 경기장에는 프리미어 리그 팀과의 경기를 보러 몰려든 브리스틀 팬들로 가득했다.
간신히 만 명이나 들어올까 싶은 작은 경기장을 가득 매운 팬들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상대팀 출전 명단 봤어?”
“당연하지 오솔이 있던데?”
“크! 나는 설마 오솔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어. 후보 선수들만 보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물론 그 후보 선수들도 전 시즌까지 맨체스터 시티의 주축이었던 선수들이었다. 그러나 3천만 파운드의 명성을 갖고 있는 오솔에 비하면 아무래도 무게감이 떨어졌다.
“사인을 받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너무 몰릴 것 같은데.”
“한번 기다려 봐야지. 그래도 이기고 돌아가는 건데 사인은 해주지 않을까?”
브리스틀의 나이 든 팬들은 오솔을 만날 생각에 벌써부터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러나 여기, 브리스틀 유니폼을 갖춰 입은 꼬마는 그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벌써 질 생각을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그래 가지고 선수들을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겠어요?”
브리스틀 로버스의 광팬이자 유소년 축구팀 소속인 카일 베넷이 목소리를 높이자, 경기를 반쯤 포기하고 있던 어른들이 찔끔한 표정으로 변명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상대는 몸값부터 우리의 몇 배나 된다고.”
“특히 오솔이 나온 게 컸어. 덕분에 몸값 차이가 거의 열 배까지 벌어졌지.”
“그래서 포기하자고요? 저도 오솔이 출전한다는 건 알아요. 어떤 포지션으로 출전하는지도 알고 있죠.”
카일 베넷의 조그마한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그가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는 단순히 어른들이 경기를 포기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솔의 포지션이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이 그를 더 화나게 했다.
‘처진 공격수라니…… 우리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이게 무슨 친선 경기라도 되는 줄 알아?’
베넷이 알기로 오솔이 이 포지션에서 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그는 경기 중에 큰 폭으로 움직이며 연계에 집중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9번 자리에서 뛰다가 내려오는 것과 10번 자리에서 계속 뛰는 건 그야말로 천지차이였다.
‘이건 우리를 상대로 연습한다고 밖에 볼 수 없어. 나쁜 놈들!’
베넷은 그들의 팀이 연습 상대가 되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비록 그들이 4부 리그 팀이고 경기장이나 선수단 규모도 그렇게 크지 않았으나, 그래도 이곳은 자신들이 꿈을 키워나가는 팀이었다. 우습게 보이고도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이겨, 로버스! 오솔을 철저히 막는 거야 헌트!”
베넷의 음성을 들었는지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한 제임스 헌트가 손을 들어 보였다.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고 해도, 등 뒤에 어린 팬이 있으니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삐이익!
그렇게 경기가 시작됐다. 공격권은 맨시티에게 있었다. 플라실이 후방으로 돌면서 빌드업에 들어가고, 보싱와를 대신해서 들어온 촐루카가 위로 거침없이 전진한다.
플라실의 패스는 곧장 오솔에게 닿았다. 아무리 익숙지 않은 자리라고 해도 오솔에게 빈 공간을 찾는 건 숨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좋아. 한번 붙어보자!’
헌트는 경고를 받을 것까지 각오하고 거칠게 달려들었다. 무의미한 저항이 될지도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대등한 경기를 이어가려면 초장부터 기세를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상대팀의 에이스는 오솔이야. 내가 저 녀석만 묶는다면 충분히 붙어 볼만해.’
쿠웅!
작정하고 부딪힌 헌트.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말았다.
오솔은 멀쩡하고 오히려 헌트가 바닥을 뒹군 것이다.
“윽!”
사실 오솔은 헌트가 다가오는 것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타이밍에 맞춰 상대의 차징을 가볍게 받았다. 아니, 단순히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대로 180도 회전하면서 오히려 헌트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앗!”
열심히 응원하던 베넷은 뜻밖의 상황에 비명을 질렀다.
“막아요!”
어린 소년의 응원은 오솔에게도 들렸으나 그가 상대팀 서포터까지 배려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에게 돈을 주는 건 맨시티였지, 상대팀이 아니었다.
‘대신 최선을 다해 상대해 줄게.’
오솔은 집중력을 더 끌어올렸다. 프로가 되고 나서 새로운 포지션에서 뛰는 첫 경기였다. 전력을 다해도 부족했다.
‘자, 누구에게 줄까?’
왼쪽은 다리우스 바셀이, 중앙에는 에밀 음펜자가 그리고 오른쪽에는 다니엘 스터리지가 있었다. 셋 모두 드리블 욕심과 골 욕심으로 가득한 골잡이들이었다.
지금처럼 전방에 이기적인 공격수들만 셋이 있을 땐, 오솔이 결정적인 패스를 뿌리는 위치까지 공을 몰고 갈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오솔은 공을 잡고 돌아선 즉시 패스를 시도했다.
‘목적을 달성하려면 상대의 역습을 유도할 필요가 있단 말이지.’
오솔의 패스를 받은 건 다니엘 스터리지였다. 이때의 스터리지는 만 열여덟 살의 어린 선수로, 자신의 장기인 드리블과 속도를 살리는 플레이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는 선수였다.
타다닷!
역시나 스터리지는 이번에도 공을 잡자마자 상대팀을 향해 무작정 돌진해 나갔다. 상대를 앞에 두고 플립플랩으로 순식간에 안으로 접어 들어가는 동작은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그야말로 흑표범이 생각나는 날카로운 돌파였다.
그러나 경이로운 몸놀림과 달리 그 선택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상대는 수비적으로 중앙을 두텁게 가져간 진형이었고, 중앙 공격수로 출전한 음펜자도 중앙에서 골을 노리고 있어서 수비진이 잔뜩 몰려있었다.
정말 멋진 돌파였으나 결과적으로 상대의 아가리를 향해 빠르게 달려드는 꼴이 된 것이다.
‘역시 생각이란 게 없구나.’
자신의 장기를 살리는 플레이를 하는 건 좋은 선택이다. 오솔도 스터리지가 드리블 돌파를 시도하는 것에 불만은 없었다. 그러나 저렇게 멍청하게 움직이는 건 가만히 두고 보기 괴로웠다.
‘혹시나 팀에 남게 되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려줘야겠군.’
오솔이 그렇게 다짐하는 사이, 스터리지는 어느새 공을 뺏겨서 필드에 누워 반칙이라고 어필하고 있었고, 브리스틀 선수들은 역습에 나서고 있었다.
‘좋아. 여기까지는 역습 패턴과 비슷하다.’
오솔은 전방으로 움직이다 말고 빠르게 후위로 돌아섰다. 중원에 남은 선수는 디트마어 하만 혼자였다. 커버가 늦으면 수비진까지 그대로 노출되고 만다. 지난 볼튼전이 그러했다.
일라누는 커버가 늦었고, 바튼은 시간조차 제대로 끌지 못했었다.
‘역시 베테랑이구나.’
오솔은 하만의 수비를 보며 속으로 탄성을 내었다. 중앙 지역으로의 돌파를 막으면서 또 다른 패스 코스까지 확실하게 막아서는 수비 방법은 바튼의 그것과는 확실한 차이를 보였다.
‘바튼이 상대를 완전히 막으려고 하는 것과 달리, 하만은 내줄 건 내주고 중요한 것만 우선적으로 막아서고 있어.’
물론 실력만 된다면 상대를 완벽히 막아서는 게 제일 좋았다. 그러나 그게 안 될 때는 하만처럼 중앙을 우선적으로 막아서는 선택을 내려야 했다.
그렇게 상대가 하만에게 시간을 끌리는 사이 어느새 오솔이 돌아와 협력수비를 펼쳤다.
공은 금방 터치라인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브리스틀로서는 아쉬운 찬스가 날아간 것이다.
“진짜 빠른데? 협력 수비 좋았어.”
“하만이야말로 잘 버텼어요.”
두 사람이 가볍게 손을 맞댔다. 일라누와 바튼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장면이다.
‘역시 하만과 짝을 맞추길 잘했어.’
오솔은 오늘 경기에 앞서 두 명의 선수와 합을 맞춰봤다.
첫 번째로 같이 한 선수는 젤송 페르난데스로, 그는 스물한 살의 젊은 선수라 체력이나 스피드가 하만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다. 그러나 경험이 적어서 그런지 그는 광활한 중원을 혼자 감당하는데 어려움을 호소했다.
두 번째 선수는 바이에른 뮌헨과 리버풀에서 전성기를 보낸 독일의 국가대표 출신 수비형 미드필더 디트마어 하만으로, 그는 만 서른넷이라는 나이 때문에 발은 느렸으나, 오랜 경험으로 상대의 길목을 차단하는 일에는 도가 텄다.
결과적으로 역습을 대비하는 역할 자체는 하만이 더 잘 소화해냈고, 최종적으로 오솔의 파트너가 되었다. 그가 상대를 막아서는 사이, 체력과 속도가 뛰어난 오솔이 재빨리 중원으로 돌아오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니들도 이렇게 해주면 좀 좋냐?’
오솔은 벤치 쪽을 힐끗 흘겨보고 다시 전방으로 올라갔다. 오늘 공격수들의 조합을 보니 이런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될 것 같다. 이렇게 두세 번만 더 보여주면 바보라도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래도 변하지 못하면 둘 다 나가야지.’
오솔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최선을 다해도 고쳐지지 않으면 그건 그냥 안 맞는 것이고, 각자의 길이 다른 것이다. 괜히 맞지도 않는 사람까지 억지로 끌고 갈 필요는 없었다.
* * *
그렇게 오솔의 플레이 메이킹과 수비만이 오롯이 빛나는 가운데, 경기는 별다른 득점 없이 후반전으로 흘러갔다. 이쯤 되자 오솔의 포지션을 두고 불만을 품었던 브리스틀 팬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연습 삼아 나왔다고 보기에는 꽤나 체계적이잖아?”
“그러게 호흡도 잘 맞고, 수비 가담도 생각보다 뛰어나.”
“흥! 그래도 우리를 우습게 봤다는 건 변하지 않아요.”
베넷은 브리스틀 팬들의 대화를 들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어른들은 현실을 받아들인 반면, 아직 혈기가 가득한 베넷은 쉽사리 화를 풀지 않았다.
“베넷.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상대도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
“최선이요? 오솔이 전방에 있었으면 벌써 세 골은 들어갔을 거예요. 이건 우리를 농락하는 거라고요. 그럼에도 우리가 계속 당하기만 한다는 게 견디기 힘들어요.”
“세 골이나 먹히는 건 그것대로 괴로울 것 같은데…….”
“제 말은 질 땐 지더라도 방심한 상대에게 한 방 정도는 먹여줬으면 한다는 거예요!”
그때였다. 베넷의 기도를 들었는지 다니엘 스터리지가 또 돌파를 시도하다 공을 뺏기고 말았다. 다시금 브리스톨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좋아! 한 골 넣어버려!”
‘후우. 이제는 슬슬 학습할 때도 되지 않았나?’
오솔은 한숨을 뱉을 새도 없이 수비진으로 돌아갔다. 반복되는 상황에 이골이 박혔는지 이제는 복귀 속도도 제법 빨랐다.
‘하만이 1, 2초만 막아주면 충분히 합류할 수 있겠어.’
타다닷!
그런데 이번에는 상대의 움직임이 이전과는 달랐다.
스터리지와 달리 상대는 학습능력이란 게 있는지 오솔이 합류하기 전에 빠른 돌파를 시도했다. 특히 하만의 약점인 스피드를 공략했다. 덕분에 하만은 상대가 옆을 지나치고 나서야 간신히 따라붙을 수 있었다.
‘확실히 나도 늙었구나.’
하만은 느려 터진 다리를 탓하며 계속 달렸다.
뒤에 수비수들이 있는 상황이라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으나,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손을 들어 상대의 유니폼을 잡아챘다.
9번과 리키 램버트라는 이름이 길게 늘어졌다.
쿠당탕!
리키 램버트는 손을 요란하게 흔들며 뒤로 넘어졌다.
‘이런…… 살짝만 늦추려고 했는데.’
공격수의 동작에 시뮬레이션이 약간 섞여있었으나 반칙은 반칙이었다. 호각 소리와 함께 심판이 다가와 옐로카드를 내보였다.
우우!
옐로카드가 나왔음에도 브리스틀 팬들의 얼굴은 전혀 펴지지 않았다. 퇴장도 아니고 고작 경고 한 장과 거의 처음으로 나온 공격 찬스를 맞바꿨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어쨌든 막았다.’
하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나는 풀타임 출장이 힘들어.’
단순히 90분을 뛰는 건 문제가 없으나, 열 살이나 더 어린 녀석들과 붙기에는 90분이란 시간이 너무도 길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완투할 수 없다고 해서 쓸모없는 투수인 건 아니잖아. 할 수 있는 데까지 완벽하게 막을 수 있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겠지.’
어차피 후반전에는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4부 리그 선수에게 돌파를 허용할 정도로 말이다. 카드 한 장으로 위기를 막았으면 그걸로 됐다.
‘바튼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도 알려줬으니, 이것으로 내 일은 다했다.’
곧장 선수 교체 사인이 나왔다. 70분간 상대를 꽁꽁 틀어막은 하만이 나가고 문제아, 조이 바튼이 들어왔다. 이제 남은 시간은 오솔과 바튼이 합을 맞추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