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133화
26장 일단 이겨라
“이봐, 라이올라. 결정은 선택지가 있을 때 하는 거야. 지금 말뿐인 조건으로 날 맨시티에 넘기려는 건 아니겠지?”
오솔은 따끔한 말로 라이올라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상대는 아랍 왕자라고! 위장 취재원 따위가 아니라!”
“알아, 믿어. 당신이 에릭손도 아니고 그런 속임수에 당할 리 없지.”
최근에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직에서 사임한 스벤 에릭손의 이야기다.
작년, 그러니까 2006년 1월, 에릭손 감독은 영국의 한 잡지사에서 판 함정에 빠져서 곤욕을 치렀는데, 이때 잡지사에서 위장한 캐릭터가 바로 아랍계 거부였다.
물론 만수르라는 유명인으로 위장할 바보는 없으니 아마 라이올라가 만난 인물은 본인이 맞을 것이다. 게다가 맨시티를 인수할 생각이라는 정황까지 확인했으니 이견의 여지가 없다.
‘만수르의 재력을 생각한다면 주급에 관한 약속은 믿을만하지.’
오솔은 만수르가 얼마나 부자인지, 그가 팀을 인수하고 맨시티가 얼마나 발전하는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다른 팀의 제안도 확인하지 않았는데 덜컥 결정할 수는 없었다.
“챔스에 나갈 수 있는 빅 4의 제안도 같이 보여줘. 그럼 선택하지.”
“어, 언제까지?”
“당연히 만수르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기 전까지겠지.”
“그게 언젠데?”
라이올라는 그 답지 않게 멍청한 목소리로 되묻고 있었다. 방금까지 돈방석에 앉는 상상을 하다가 현실로 돌아온 게 분명했다.
“그거야 직접 만나본 사람이 가장 잘 알겠지? 자, 돈 벌고 싶으면 빨리 뛰어! 그래야 두둑한 수수료를 챙길 것 아니야?”
“이런 영악한 놈, 다 알고 있었구나?”
“제대로 해. 알고 있지? 경쟁이 붙으면 조건은 더 나아진다는 것을. 기왕 욕심부리는 거 조금 더 부리라고!”
“허 참! 나보다 더한 놈은 처음 본다.”
“후후. 나는 벌써 애가 둘이거든. 억울하면 당신도 하나 더 낳아.”
“됐어. 하나 있는 것도 아주 골칫거리야. 후우. 젠장. 오랜만에 좀 쉬나 했는데, 다시 런던으로 날아가야 되겠군.”
라이올라는 투덜거리면서도 바로 짐을 쌌다. 이런 추진력이야말로 그의 성공 비결이었다.
‘돈이냐, 챔피언스 리그냐 그것이 문제로군.’
오솔은 과연 어떤 제안들이 오갈지 궁금해하며 몸을 풀었다. 이제 3주 뒷면 AC 밀란과의 2차전이 있었다.
* * *
그사이 함부르크는 독일컵 16강에서 레버쿠젠을 만나 패배하고 말았다.
오솔과 반 더 바르트가 빠진 결과였다. 하필이면 챔스 16강 1차전과 일정이 겹친 탓에 어쩔 수 없었다.
이날 경기에서 골을 넣은 것은 공교롭게도 지난 시즌 함부르크를 떠난 세르게이 바바레즈였다.
그는 플레이메이커를 잃고 무기력해진 함부르크를 여유롭게 무찌르며 그들의 선택이 실수였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확실히 바바레즈를 놓친 것은 실수였다. 만일 그가 있었다면 오늘처럼 반 더 바르트가 빠져야 하는 순간에 큰 도움이 됐을 것이고, AC 밀란을 상대할 때도 공격 옵션을 하나 더 가져갈 수 있었다.
[또다시 무승부! 함부르크에는 오솔과 반 더 바르트 외에는 선수가 없는 것인가?]
흔들기 좋아하는 언론에서는 연일 이 같은 상황을 떠들어댔다.
토마스 돌 감독은 최대한 중요도가 적은 경기와 약팀을 상대로 후보 선수들을 내보냈으나 결과는 영 좋지 않았다.
약팀들은 후보로만 구성된 함부르크를 상대로 대등한 경기를 선보였고, 혹여 그것조차 안 되는 팀들은 단단히 수비를 굳히며 어떻게든 승점 1점이라도 확보하려 했다.
함부르크는 이제 리그에서 가장 강한 팀이기 되었으니 이런 저항에 부딪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챔스 기간에는 유독 무승부가 많아. 컨디션 난조로 패배하는 경기도 있었고…….’
오솔은 3위권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순위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반 더 바르트가 없을 때는 오솔이 유일한 에이스로 뛰어야 했는데, 최전방 공격수라 할 수 있는 역할이 한정적이었다.
‘어쩌면 이게 해답이 될지도 모르지.’
오솔은 가만히 놓여있는 축구공을 보다가 시선을 올려 수비벽 더미를 확인했다. 그가 발을 움직인 것은 수비벽 너머의 골대를 확인한 다음이었다.
타다닷,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대포알처럼 날아간 공은 더미의 머리에 맞고 밖으로 튕겨나갔다.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더미의 목이 부러졌다.
“엄청난데? 새로운 살인 기술을 연마하고 있는 거야?”
반 더 바르트가 덜렁거리는 더미의 목을 만지며 물었다. 비록 말투는 놀리는 것이었으나, 그는 속으로는 매우 놀라고 있었다. 오솔의 어마어마한 킥력과 그 힘을 견디는 발목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젠장! 또 이러네.”
“그거 맞지? 지난번에 피를로가 찼던 프리킥.”
“맞아요. 무회전 프리킥을 연습 중이었죠.”
“무회전 프리킥이라…… 그런데 피를로의 것이랑은 좀 다른데?”
“혹시 EPL도 봐요? 최근에 호날두가 이 프리킥으로 몇 골 넣었는데.”
“호날두? 아, 본 것 같다. 피를로와는 달리 상당히 강슛이었지.”
“피를로는 정확한 슛을 목표로 찼지만 무회전 프리킥의 장점은 역시 힘이죠.”
호날두의 프리킥은 피를로와 달리 속도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도움닫기도 상당히 먼 거리에서 시작한다.
킥력이 좋기로 유명한 브라질의 호베르투 카를로스와 유사한 준비 동작이었다.
‘카를로스도 무회전으로 차면 시속 135㎞는 나온다고 했었지.’
카를로스는 시속 135㎞짜리 슛이 가능한 선수였으나 그의 걸작, UFO슛의 시속은 108㎞에 불과했다. 전력으로 찼음에도 회전을 주느라 속도가 줄어든 것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각도로 휘어진 탓에 골키퍼가 막을 생각도 못했지만, 이는 곧 속도만 놓고 보면 무회전으로 때리는 편이 더 빠르다는 얘기가 된다.
게다가 속도 외에도 골대까지의 경로도 직선이 아닌, 곡선을 그리기 때문에 도달 시간은 직선 슈팅보다 훨씬 더 느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공기 저항에 의해서 움직임을 예측하기도 힘드니, 제대로만 찬다면 골키퍼 입장에서는 꽤나 막기 힘들겠어.”
반 더 바르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수비벽 더미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오솔의 옆에 서자 비로소 무언가 이상한 점이 느껴진 것이다.
“가만 수비벽이 왜 이렇게 가까워?”
반 더 바르트는 수비벽까지 걸음을 옮겨보더니 오솔을 돌아보며 한숨을 쉬었다.
“야! 프리킥 벽은 최소한 9.15미터는 떨어져 있어야 돼. 이건 너무 가깝잖아. 어쩐지 아까부터 얼굴만 죽어라 맞춘다 싶더라니.”
“아, 그건 일부러 가까이 놓은 거예요.”
“뭐, 일부러?”
“실제 경기에서는 그 규칙, 잘 안 지키잖아요. 어떻게든 앞으로 나오려고 슬금슬금 움직이니까 그걸 감안해서 거리를 좁혀 놨죠.”
이것은 실제로 호날두가 사용했던 방법으로 그는 수비벽을 2미터나 더 가까이에 놓고 연습했다. 당연히 오솔도 질 수 없다는 생각에 7.15미터 거리에 수비벽을 세웠다.
“허…….”
반 더 바르트는 오솔의 연습 방법에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실전처럼 연습한다고 해도 이런 부분까지 신경 쓴다는 건 쉽지 않았다. 만약 그였다면 이렇게 연습하는 대신, 실전에서 심판에게 항의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하는구나. 이러니 그렇게 빠르게 성장하지…….’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오솔의 훈련은 그가 함부르크에 와서 해왔던 훈련에 비할 수 없이 엄격하고, 또한 지독했다. 타깃형 스트라이커의 완성형에 접근한 선수가 하는 훈련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반면 그는 어느 순간부터 현 상태를 유지하는 쪽으로만 움직이고 있었다. 끔찍했던 부상 이후에 생긴 습관이었다. 무리한 훈련으로 몸이 피로해지면 그만큼 부상 위험이 올라가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그런 상황 자체를 회피해왔던 것이다.
‘덕분에 컨디션 조절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함부르크에 오고 나서 딱히 기량이 상승했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지.’
물론 작년에 비해 개인 성적이나 경기력은 더 좋았다. 그러나 이것은 부상 이전의 실력을 되찾은 것이지 그전보다 실력이 오른 것은 전혀 아니었다. 즉, 사실상 그는 3년 전과 비교해서 나아진 점이 없었다.
‘내 몸은 저렇게 고된 훈련은 버틸 수 없어. 아마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탈이 나겠지. 하지만 이런 디테일을 잡는 건 또 다른 문제야.’
이날의 사건은 얼핏 별것 아닌 일었으나, 카카와의 일전을 통해 부족함을 느끼고 있던 반 더 바르트에게는 큰 깨달음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 * *
그로부터 열흘이 지나고, 리그 26라운드 경기 중에 기회가 찾아왔다.
삐이익!
휘슬이 길게 울리고 심판이 골대에서 약 30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손가락을 찍었다. 함부르크의 프리킥 찬스였다.
배니싱 스프레이가 있었다면 수비벽의 위치를 정확하게 잡을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스프레이가 프로리그에 활용된 시기는 2008년부터였다.
그래서일까 수비벽은 심판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든 거리를 좁혀서 크로스를 방해할 목적이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공격수의 머리를 노리고 차겠지. 각도도 왼발로 슈팅을 노리기엔 어정쩡하니까.’
그러나 수비수들은 전방에 선 프리키커들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반 더 바르트는 물론이고 헤딩에 참여해야 할 오솔의 모습도 보인 것이다.
‘설마 차려는 생각인가? 하지만 정보에 의하면 프리킥은 거의 반 더 바르트가 전담한다고 들었는데?’
프리키커가 누군지 숨기려는 속셈일 수도 있으나 함부르크 감독에게 생각이라는 게 있다면 저 자리에 오솔 대신 다른 선수를 세웠을 것이다.
‘게다가 뭐 저렇게 멀리 섰어?’
수비벽을 이룬 선수들은 심사가 복잡해졌다. 오솔의 선 위치나 골대를 노려보는 눈빛 그리고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는 행동에서 무언가 불길함이 느껴졌다.
‘저번에 저 녀석 공에 맞고 한 명 쓰러지지 않았나?’
‘재수 없게 맞고 기절하는 거 아니야?’
그들이 상대가 합법적인 방법으로 부상자를 만들려는 속셈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을 때였다.
휘슬이 울리자 오솔은 천천히 그러나 점차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탓, 타다닷, 콰앙!
‘으헉! 진짜 찼다!’
수비벽은 습관처럼 몸을 띄웠으나 곧 공이 빠르게 날아오는 것을 보고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날아오는 방향도 하필이면 머리 쪽이었다.
‘마, 맞으면 죽는 거 아니야?’
그들이 공포에 질려 있을 때, 다행히도 공은 수비벽 머리 사이의 공간으로 스쳐 지나갔다. 만약 공이 조금만 더 옆으로 갔다면 얼굴에 정통으로 맞았을 것이다.
‘정면이다!’
골키퍼는 몸을 잔뜩 긴장시킨 채 자리를 지켰다. 공이 골키퍼 정면으로 날아왔기 때문에 그는 위로 쳐낼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공이 오른쪽으로 급격하게 꺾이며 수직낙하를 했다. 공에 실린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낙하하는 폭이 굉장히 컸다.
골키퍼는 예상과는 다른 경로에 놀라, 급히 손을 뻗었으나 끝내 쳐내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출렁!
[꼬오오올! 골입니다! 오솔의 첫 번째 프리킥 득점입니다!]
[설마 차겠어? 했는데, 진짜로 찼습니다! 심지어 골까지 넣었어요! 벌써 리그 23 득점입니다.]
[이걸로 분데스리가 통상 마흔아홉 골을 기록하는군요. 이제 한 골만 더 넣으면 두 시즌만에 50골 달성입니다.]
[정말 대단한 활약입니다, 오솔 선수. 아직 3월인데 벌써부터 득점왕이 확정된 느낌이에요.]
[네, 이미 압도적인 1등입니다.]
재밌게도 중계진이나 시청자 관중은 모두 신났는데, 정작 골을 넣는 당사자만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쳇! 아직 어설프네.’
오솔은 머리를 긁적이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챔스 16강을 마치고 얻은 포인트 6개로 패스를 90(+1)까지 끌어올렸고, 지난 2주 동안 무회전 프리킥 연습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러면 뭐하냐. 아직도 이렇게 제멋대로 날아가는데.’
이번 프리킥도 원래의 목표는 상대 머리를 넘겨서 골키퍼가 없는 쪽에 차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보다시피 골키퍼 정면이었다.
물론 골은 들어갔다. 그러나 이번이 처음으로 선보이는 프리킥이라 들어간 것일 뿐, 객관적으로 봤을 때 결코 좋은 프리킥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힘 조절을 좀 해야 하나?’
가장 큰 문제는 90(+5)에 이르는 힘을 온전히 쏟았을 때 프리킥 정확도를 보장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지금처럼 원치 않는 곳으로 날아가는 건 기본이고, 심할 경우에는 흔히들 독수리 슛이라고 부르는 높이 뜨는 슈팅을 차기도 했다.
‘으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는 힘과 기술의 불균형이야. 별수 없이 당분간은 힘을 조금 빼고 차야겠어.’
오솔은 당장 사흘 앞으로 다가온 챔스 16강 2차전을 생각하며 무회전 프리킥을 다듬어갔다.
* * *
그렇게 오솔이 또 하나의 무기를 완성시키고 있을 때였다.
“안으로 좀 들어가지. 빌어먹을 비행기를 너무 탔더니 좀 쉬고 싶어.”
정확히 보름 만에 라이올라가 결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소파에 앉자마자 가방을 내던지듯 탁자에 올렸는데, 그곳에는 이른바 ‘빅 4’로 불리는 팀들의 제안서로 가득했다.
“이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꺼고, 이건 리버풀 그리고 이건 맨체스터 시티의 제안서야.”
“첼시랑 아스날은?”
“안타깝게도 그 두 곳은 네 영입을 포기했어.”
오솔이 미간을 찌푸리자 라이올라는 이어서 두 번째 뭉치를 꺼냈다.
“이건 그냥저냥 찔러보기 식으로 제안한 곳들인데, 조건들이 형편없었어. 뭐, 어차피 우리가 살펴볼 제안은 이 세 개니까 이딴 건 무시하자고.”
라이올라는 보란 듯이 종이를 찢었다. 공교롭게도 제일 윗면에 있는 게 함부르크 SV의 재계약 제안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