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130화
반 더 바르트는 바닥에 붙어 있으려는 공을 잡고 한걸음 더 내디뎠다. 급하게 방향을 튼다고 자세가 엉망이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오솔과 만주키치가 부지런히 뛰어서 만들어준 찬스였다. 그들의 노고를 생각한다면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파바박!
그러나 각오를 다질 틈도 없었다. 어느새 옆에서는 파올로 말디니가 푸른 눈을 빛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반응한다고?’
경악하는 반 더 바르트와 달리 말디니는 자신의 수비가 너무 늦은 건 아닌지 자책하고 있었다. 확실히 패스 코스와 공격수의 돌파를 인지한 것에 비해 커버가 늦긴 했다.
‘젠장. 3년 전만 하더라도 금방 따라잡았을 텐데…….’
파올로 말디니는 68년 6월생이다. 올해로 서른여덟 하고도 8개월의 나이인 것이다.
반응속도가 늦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오히려 아직까지도 풀타임 출전이 가능하다는 점을 칭찬해야 했다.
‘최대한 슈팅을 방해한다.’
푸른 안광과 흩날리는 머리칼, 마흔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탄탄한 몸이 반 더 바르트를 덮쳐왔다. AC 밀란의 심장과도 같은 사나이가 뿜어내는 기백은 보통이 아니었다.
‘이익!’
반 더 바르트는 그 기세에 눌리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면 아직 말디니는 멀었다. 적어도 1초의 여유는 있었다.
비틀!
그러나 마음의 여유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단단히 내디딘 발이 진창에 빠지며 반 더 바르트의 균형을 한차례 흔든 것이다.
‘젠장!’
이제 여유는 없었다. 여기서 몸을 가다듬었다간 슛이 말디니 발에 막히고 만다.
반 더 바르트는 몸이 흔들리는 와중에 발을 뻗어 슈팅을 시도했다.
파핫!
임팩트가 정확하지 않았다. 다행히 말디니가 오기 전에 슛을 하는 데 성공했으나, 발은 공의 겉면만 치고 지나갔고, 공은 힘을 온전히 싣지 못한 채 골문으로 날아갔다.
‘제발!’
어설픈 슛이었으나 반 더 바르트는 비라는 변수에 기대를 걸었다. 이런 날씨에는 골키퍼도 공을 잡기 힘들었다.
타앗!
그러나 그런 사실은 지다 골키퍼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브라질의 수문장이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자만하지 않았다. 억지로 공을 잡기보다는 그대로 손을 뻗어 공을 쳐내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아! 너무나 아쉬운 기회였습니다!]
[오솔 선수의 기가 막힌 패스였는데요. 이걸 반 더 바르트가 놓치네요.]
“이런 빌어먹을!”
반 더 바르트는 잔디를 쥐어뜯으며 인상을 썼다. 방금 찬스는 두 번 다시 만들기 힘든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아쉬웠다.
“일어나요. 코너킥 차러 가야죠.”
“후우. 미안하다.”
“겨우 한번 놓친 걸 가지고 그렇게 미안해하면, 저는 부담스러워서 앞으로 슛도 제대로 못한다고요.”
오솔은 반 더 바르트의 손을 잡고 벌떡 일으켜 세웠다. 맞잡은 손을 통해 기운이 좀 전달되기를 바랐다. 물론 그로서도 아쉬운 기회였으나 최대한 빨리 잊고 다음을 노려야 했다.
‘골이 들어갔다면 경기가 백만 배쯤 쉬워졌겠지만…… 지금도 0 대 0이니까 나쁘지 않아.’
언제나 말하는 거지만 선취점이라는 건 단순한 한 골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게다가 이번 경기는 산 시로 원정이었다. 원정 다득점 규칙을 생각한다면 한 골이라고 해도 꽤 컸다.
‘뭐 아직 찬스는 끝난 게 아니니까.’
오솔은 박스에 가득 찬 선수들을 보며 머리칼을 한 차례 쓸어 올렸다.
후두둑.
물기가 빠져나가며 비에 젖은 머리칼이 이마에 바짝 붙었다.
‘이번에 넣으면 돼.’
오솔이 그렇게 자리를 잡을 때였다. 중앙에 있어야 정상인 말디니가 오솔을 따라 박스 바깥으로 나왔다.
“이 아저씨는 왜 따라 나오는 거야?”
오솔은 저도 모르게 볼멘소리를 뱉었다. 말디니 같은 베테랑이 자신을 마크한다는 사실이 영 껄끄러웠다.
“패스 실력이 좋던걸?”
말디니는 칭찬을 입에 담았으나 정작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두 눈에 경계심을 가득 담고 오솔을 바라봤다.
오솔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운이 좋았죠.”
“글쎄, 내가 봤을 땐 제대로 노리고 찬 것 같았는데?”
“글쎄요. 제 패스를 높게 쳐줘서 고맙긴 하지만 방금은 진짜 운이었는데요?”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오솔은 떫은 감이라도 씹은 사람처럼 인상을 썼다. 겨우 패스 한 번 했을 뿐인데, 상대는 벌써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이건 좋지 않은데…….’
나름 비장의 무기였는데 너무도 쉽게, 또 빠른 시간에 간파당하고 말았다. 과연 말디니라는 말이 나오는 모습이었다.
파아앙!
공이 날아왔다.
오솔은 잡담을 멈추고 박스로 쇄도했다. 말디니도 오솔을 따라 달리며 공의 경로를 확인했다.
‘여기다!’
말디니는 노련했다. 손으로는 오솔을 늦춘 사이에 공의 낙하지점을 파악하고 그 길목을 틀어막은 것이다.
그는 오솔과 정상적인 헤딩 경합을 해서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아예 상대의 접근 자체를 막는 선택을 했다.
이는 예측력과 위치 선정, 판단력까지 두루 뛰어나야 사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말디니 같은 베테랑이 아니면 사용하기 힘들었다.
[아! 그대로 라인 밖으로 나갑니다. 아쉬운 기회를 연달아 놓치는 함부르크입니다.]
‘어이가 없네. 이 인간은 무슨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오솔은 허탈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 피지컬이 좋은 마테라치도 상대가 안 됐는데, 마흔에 가까운 노장이 그를 이렇게 쉽게 막아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경험의 차이라는 것인가?’
마테라치는 사실상 20대 후반까지 1부 리그 경험이 거의 없었다.
반면 말디니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축구를 배웠고, 이후에는 AC 밀란에 입단해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그의 1군 데뷔 나이는 고작 16살이다.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자리한 것은 17살이며, 국가대표가 된 것은 그가 19살이 되던 해였다.
말디니는 데뷔 이후 무려 스물두 해를 정상의 자리에서 수비수로 뛰어왔다. 이때까지 그가 상대한 공격수들만 해도 마라도나, 호나우두 등 전설적인 선수들이며, 그때 같이 연습했던 공격수도 반 바스텐이나 루드 굴리트 같은 괴물들이었다.
‘오솔…… 제법 다재다능하지만 못 막을 정도는 아니지.’
말디니는 오솔을 돌아보며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그의 전성기에 만난 선수들에 비하면 오솔처럼 단순한 타입은 오히려 막기 쉬웠다.
비에리, 바티스투타, 크레스포 등 전통적인 9번은 이미 세리에A 칠공주 시절부터 질리도록 상대해봤기 때문이다.
‘패스도 제법 잘 하지만 지단이나 토티에 비하면 투박한 편이지. 그래도 조심은 해야겠지. 이제는 저 속도를 따라갈 수 없으니까 말이야.’
이후 말디니는 오프사이드 트랩 타이밍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만으로도 오솔에게서 시작되는 역습의 대부분을 막아낼 수 있었다.
파앙! 삑!
다시 깃발이 올라갔다. 반 더 바르트가 두 팔을 높이 들어 올려 보지만 심판의 판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번에도 오프사이드였다.
오솔은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보며 더운 숨을 내쉬었다. 이제 막 킬러 패스를 시도하는 입장이라 그런지 패스 타이밍 잡기가 까다로웠다.
게다가 이탈리아 팀들은 기본적으로 수비를 단단히 한 상태로 경기를 진행하길 원했고, 그건 AC 밀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껏 피를로의 공을 강탈해봐야 이미 상대 진영에는 적어도 네 명의 선수가 수비 라인을 짜고 있었다.
“내가 이래서 이탈리아 팀이랑은 경기하기 싫다니까.”
개인 돌파라도 가능했다면 모르겠으나, 아쉽게도 오솔의 발기술로는 이런 빗속에서 수비수를 벗겨내는 게 불가능했다.
삑, 삐익!
결국 그렇게 공격다운 공격도 없이 전반전이 지나갔다.
선수들은 등 뒤로 하얀 연기를 뿜으며 하나둘씩 라커룸으로 향했다. 비 때문에 체력 소모가 심했던 탓일까. 선수들의 어깨가 하나같이 축 처져 있었다.
“조급해하지 마! 어차피 이번 경기는 원정이다. 무승부로 끝나더라도 나쁠 것 하나 없어!’
토마스 돌 감독은 선수들을 독려했다. 산 시로 원정에서 무승부를 거둔다는 건 사실 굉장히 성공적인 결과였다. 그러니 상대도 언젠가는 공격적으로 나올 것이고, 그때가 곧 역습의 기회였다.
“마음이 급한 건 결국 상대편이야. 기다리다 보면 반드시 기회는 온다!”
작전은 변함없었다.
오솔과 만주키치는 공격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피를로를 막아야 했다.
* * *
“꺄아!”
함부르크 북서부에 위치한 한적한 동네. 네 가족이 넉넉히 살법한 큰 집에서 아이의 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 봐. 대한아, 주희야. 아빠 나왔다, 아빠!”
“아브!”
“어머, 아빠를 알아보겠어? 아유 기특해. 또 해봐. 아빠! 아빠!”
“아브브!”
“옳지! 우리 같이 응원하자. 아빠, 꼭 이기세요~ 해봐. 이겨서 돈 많이 벌어오세요!”
민주는 아이들과 같이 경기를 시청했다.
아이들은 아빠의 얼굴이 제법 눈에 익었는지 화면에 오솔의 얼굴이 나올 때마다 격한 반응을 보였다.
민주는 나중에 오솔에게 그 모습을 보여줄 심산으로 카메라를 켰다. 때마침 오솔의 모습이 화면에 크게 클로즈업 되었다.
“아쁘!”
“어머, 진짜 아빠라고 하잖아? 대한이랑 주희, 진짜 천잰가 봐.”
민주는 말을 빨리 배우는 똘똘한 모습도 귀여웠으나 그것 못지않게 아빠를 좋아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괜히 가슴 한편이 흐뭇해졌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를 정도였다.
‘내가 왜 이러지? 아빠니까 좋아하는 게 당연한 건데…….’
민주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계속 촬영을 진행했다.
찬스를 놓치고 아쉬워하는 오솔의 모습에 아이들도 덩달아 소리를 높였다. 그 모습이 진짜 응원하는 듯해서 귀여웠다.
다음 순간, 화면은 오솔에게서 카카로 넘어갔다.
“꺄하하!”
아이들의 반응이 한층 열광적으로 변했다. 오솔이 등장했을 때보다 훨씬 더 과격한 반응이었다.
민주는 동영상을 지워야할지, 아니면 오솔에게 보여줘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 * *
삐이익!
휘슬 소리와 함께 후반전이 시작됐다.
[다행히 이제는 빗줄기가 제법 가늘어진 것 같죠?]
[네, 전반전에 비하면 확실히 줄었네요. 선수들도 이제는 조금 더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AC 밀란은 후반전에 들어서 기존과는 다른 경기 운영을 선보였다.
피를로가 공을 잡고 천천히 점유율을 높이는 방식에서 피를로 대신 전방에 있는 세도로프나 카카가 적극적으로 볼을 운반하고 단번에 슈팅까지 가져가는 형식으로 바뀐 것이다.
점유율은 다소 포기하더라도 보다 많은 슈팅 기회를 가져가겠다는 생각 같았다. 덕분에 토마스 돌 감독의 얼굴이 환해졌다. 마침내 피를로의 후방 빌드업을 막는 데 성공한 것이다.
‘좋아, 작전이 먹혀들었어. 이제는 수비를 굳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작전이 먹혀들었다고 좋아하기는 너무 일렀다. 피를로만큼은 아니었으나 세도르프 역시 공격을 전개하는 대 있어선 달인에 가까운 선수였다.
[세도르프 선수, 공을 잡고 가볍게 돌아섭니다. 아! 돌파했습니다!]
세도르프는 그라운드 상태를 보고 과감하게 돌파를 시도했다. 덕분에 패스를 돌릴 거라고 방심하고 있던 마크맨은 세도르프의 뒷모습만 확인해야 했다.
좌중간을 따라가 직선으로 돌진하는 세도르프의 모습에 사방에서 환호성이 쏟아졌다. 모처럼 나온 역동적인 장면이었다.
인자기와 질라르디노가 좌우로 크게 벌어지며 중간에 공간을 만들었다. 아주 작고 비좁은 공간이어서 빈 공간이라고 말하기도 힘들었다.
파앙!
그러나 놀랍게도 세도르프의 패스가 향한 곳은 바로 그 얼마 안 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준족의 카카가 달려들고 있었다.
“마크해!”
카카에게 가까운 선수는 콤파니가 아니라 마티센이었다.
콤파니는 카카에게 시선을 집중하며 중앙으로 뛰어 들어갔다. 혹여나 마티센이 돌파당했을 때를 대비한 움직임이었다.
‘뭐야, 저거?’
덕분에 콤파니는 카카가 어떻게 마티센을 요리하는지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카카는 오른쪽으로 돌파할 것처럼 순식간에 상체 페인트를 넣었다. 그리고 마티센의 시선이 분산된 사이에 그의 다리 사이로 공을 넣고 좌중간으로 달려들었다.
마티센은 자신이 어떻게 농락당했는지도 모르고, 공과 카카를 모두 놓치고 말았다.
놀라운 점은 최고 속도를 유지하면서 보여준 개인기라는 것이다.
카카는 신체능력과 기술적인 완성도 그리고 축구 센스가 모두 정상급인 선수였다.
‘너무 빠르다. 공이 없을 때의 오솔만큼 빨라!’
콤파니는 비에 젖은 잔디를 밟으며 자신의 몸이 평소보다 훨씬 느려졌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카카의 속도는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뻥! 철썩!
카카의 슈팅은 정석대로 반대편 골대를 노리고 들어갔다. 반 박자 빠른 슈팅에 골키퍼는 제대로 몸을 눕히지도 못했다.
퍼스트 터치에서 마지막 터치(슈팅)까지 이르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3초…… 비에 젖은 그라운드도 카카의 스피드를 막지는 못했다.
카카는 그렇게 단 세 번의 터치로 골을 만들어내며 팽팽하게 이어지던 경기의 추를 기울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