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129화
25장 사냥꾼이 되거나, 사냥감이 되거나.
2월 25일, AC 밀란과의 챔피언스 리그 16강 1차전이 있는 날은 아침부터 우중충했다.
오솔은 짙게 물든 구름이 더욱더 불길하게 느껴지는 것이 지금 자신이 있는 장소가 밀라노에 위치한 주세페 메아차 경기장이기 때문이었다.
“산 시로는 올 때마다 기분이 별로란 말이야.”
만주키치가 투덜댔다. 오솔을 비롯한 선수 일동은 그 의견에 동의했다.
주세페 메아차(별칭 ‘산 시로’)는 수용인원 8만 3천 명 가량의 초거대 경기장이었다. 8만 관중이 뿜어내는 열기는 이미 지난 인테르 밀란전에서 질리도록 느꼈었다.
그래서일까 선수들은 경기장 지붕에 흉물스럽게 튀어나온 거대한 철제 대들보가 꼭 악마의 뿔처럼 불길하게만 느껴졌다.
툭. 투둑.
버스 차창으로 비가 떨어졌다. 물기는 표면을 따라 서서히 번지며 괜히 사람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자, 자! 다들 기운 내! 지난 두 달 동안 우리가 준비한 걸 보여주는 날이잖아. AC 밀란 녀석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자고!”
반 더 바르트가 모처럼 주장 노릇을 했다. 덕분에 선수들은 그간 해왔던 훈련을 떠올리며 다시금 자신감을 되새길 수 있었다.
자화자찬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AC 밀란에 대한 대비는 완벽했다.
‘변수는 날씨다.’
오솔은 조금씩 늘어나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표정을 굳혔다. 영하의 날씨는 아니었으나 아직 기온은 봄보단 초겨울에 더 가까웠다. 당연히 장시간 비를 맞으며 뛰기에는 영 좋지 않았다.
‘패스를 올린 게 득이 될까, 아니면 실이 될까?’
비가 많이 오면 드리블하기가 어려웠다. 물을 잔뜩 머금은 공과 잔디가 떨어지기 싫다는 듯 서로 엉키는데다가 공도 축구화도 미끄러워서 터치가 마음처럼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번에 패스를 올린 것은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산 시로 정도라면 아무리 비가 많이 오더라도 그라운드 상태가 나빠지지 않을 거야. 하지만 아무래도 드리블러들이 활약하기는 힘들겠지.’
그렇게 되면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카카의 공격력이 줄어들게 된다.
물론 똑같이 반 더 바르트도 활약하기 어렵겠으나, 다행히 이번에는 원정 걍기였다.
무승부만 이끌어도 승리나 다름없는 상황인 것이다.
게다가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시야도 좁아지며 중장거리 패스도 부정확해질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카카는 물론이고 자연스럽게 피를로의 플레이 메이킹도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미세하게 우리가 득을 본 셈인가?’
고맙게도 날씨가 그들을 도왔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빗속에서 경기한다는 것은 그만큼 실수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뜻했고, 실수는 곧 실점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실수는 줄이고, 상대의 실수는 이용한다. 축구는 언제나 그런 게임이었지.’
오솔은 점차 강해지는 빗줄기를 살펴보다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 * *
쏴아아!
비 오는 소리가 TV 화면 너머까지 전달됐다.
[비가 많이 오는군요.]
[네, 경기 한두 시간 전부터 비가 한두 방울씩 내리더니 기어이 경기 시작을 앞두고 쏟아지기 시작하네요.]
[아직은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요. 혹시나 선수들의 컨디션에 악영향을 주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특히 몸살감기 같은 걸 조심해야겠죠. 몸이 아무리 튼튼해도 병에는 장사 없거든요.]
중계진은 오솔의 컨디션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오솔의 최근 득점 감각과 경기력, 유의미한 기록 등을 쭉 읊고 나서야 양 팀의 전력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함부르크는 평소처럼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베스트 일레븐이 총동원되었죠. 반면 AC 밀란은 수비진 구성이 조금 아쉽게 되었습니다. 네스타 선수가 아직까지 복귀를 하지 못했거든요. 최근에 다시 훈련장에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아직은 경기력이 돌아오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도 2차전에는 나올 수 있다면서요?]
[네, 오늘 AC밀란의 중앙은 파올로 말디니와 카하 칼라제 선수가 지키고 있는데, 두 선수가 비록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커리어 대부분을 측면 수비수로 뛰었기 때문인지 가끔씩 실수하는 모습이 나오곤 합니다.]
[오솔 선수가 노려야 하는 건 그런 실수들이겠네요.]
[맞습니다. 문제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한 날씨입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오솔 선수의 장기인 스피드를 살리기도 힘들거든요.]
이런 날씨에서는 아무래도 공격이 무뎌질 수밖에 없다. 볼 컨트롤이 힘드니 공격 속도도 그만큼 떨어진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속공을 펼치기가 어려웠다.
[이어서 오른쪽은 마시모 오도 선수가 서고, 왼쪽에는 얀쿨로프스키 선수가 나왔습니다. 골키퍼는 브라질의 넘버 원 골리, 지다입니다.]
[계속해서 미드필더진을 소개해야 하는데요. 아마도 시청자분들도 익숙한 이름들이 많이 보이실 겁니다. AC 밀란의 두 번째 황금세대 멤버가 그대로 남아 있거든요.]
[그렇습니다. 안드레아 피를로, 젠나로 가투소, 클라렌스 세도르프가 중앙을 책임지고 있죠. 벌써 5년 넘게 호흡을 맞춰오는, 말 그대로 황금 라인입니다.]
[세도로프 선수가 30대에 접어들며 활동량이 조금 줄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딱히 약점이랄 게 없습니다.]
중원에서의 이름값은 AC 밀란이 함부르크를 압도했다. 게다가 이 선수들은 장시간 호흡을 맞춰온 만큼 조직력이 함부르크보다 더 끈끈할 확률이 높았다.
[공격진은 인자기와 질라르디노, 그리고 카카입니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셰브첸코 선수가 팀을 떠났지만, 그 공백을 카카 선수가 잘 메워주고 있습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세 골을 넣으며 팀의 승리를 견인하고 있고, 리그에서도 다섯 골을 기록하고 있죠.]
[오솔 선수에 비하면 조금 부족한 수치네요.]
[네, 그러나 AC 밀란은 시즌 초에 칼치오폴리 스캔들 때문에 부침이 있었다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팀이 안팎으로 시끄럽고, 리그에서는 승점 삭감까지 있었죠. 자연스럽게 초반 경기력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 기록들은 그 와중에 보여준 모습이라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그렇군요. 아, 선수들이 입장합니다.]
화면 위로 빗물로 흠뻑 젖은 선수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모습은 정상적인 경기가 가능한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러나 선수, 심판 그리고 우비를 뒤집어쓴 관중 그 누구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 이 정도 비로는 승부를 멈출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4-3-1-2, 양 팀의 포메이션이 똑같네요.]
[안첼로티 감독은 AC 밀란을 맡은 이후로 벌써 5년 넘게 4-3-1-2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공격형 미드필더를 두 명 세우는 4-3-2-1로 변형하기도 하지만 기본 틀은 변하지 않았죠.]
[토마스 돌 감독이 그 영향을 받았을까요?]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을 겁니다. 안첼로티의 AC 말란은 근 10년 동안 이 포메이션으로 가장 성공한 팀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선수 구성이 받쳐주지 않으면 AC 밀란과 같은 전술을 구사할 수는 없을 겁니다.]
실제로 AC 밀란과 함부르크의 전술에는 많은 차이점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바로 사람. 즉, 선수들이었다.
전방에서 찬스 메이킹을 해야 할 공격형 미드필더와 후방에서 빌드업과 플레이 메이킹을 해야 하는 수비형 미드필더.
안첼로티 감독은 4-3-1-2에서 가장 핵심적이어야 할 두 포지션에 월드클래스 선수인 카카와 피를로를 두고 있었다.
반면 토마스 돌 감독은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 월드클래스를 넘보는 선수인 반 더 바르트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으나, 아쉽게도 수비형 미드필더에는 그만한 선수가 없었다.
두 축 중 하나가 부실한 탓에 시스템이 제 위력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피를로만큼 전술 이해도와 시야가 뛰어난 선수는 흔치 않아.’
토마스 돌 감독은 배가 아픈 표정으로 안첼로티 감독을 바라봤다.
안첼로티 감독이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유럽 최강을 노리고 있을 때, 자신은 부족한 선수들로 그럴듯한 전술을 구현하기 위해 머리가 빠져라 고민해야 했다.
‘내게도 피를로 같은 선수가 있었다면 경기 준비가 지금보다 배는 더 수월했을 텐데…….’
토마스 돌 감독은 안첼로티 감독의 인복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그는 안첼로티가 피를로와 다른 선수들의 공존을 위해 어떤 결정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공격형 미드필더인 피를로의 수비형 미드필더 기용.
실제로 2001년에 안첼로티가 했던 짓이었다. 공격에 재능이 있고 수비력이 약한 선수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한다는 발상은 어느 누구도 쉽게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아니, 설령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걸 실제로 실행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심지어 당시 안첼로티는 유벤투스에서 경질되어 밀란으로 온 상황이었다. 그런 지도력을 의심받는 상황에서 당장 결과를 보여줘야 하는 입장인데 오히려 돌발적인 선수기용을 시도한다? 이는 마르코 폴로도 주저할 만큼 커다란 모험이었다.
그러나 이 고집 센 이탈리아 남자는 자신의 결정을 밀고 나갔고, 결과적으로 그 결정은 피를로와 안첼로티, 그리고 AC 밀란 모두에게 윈-윈이 되었다.
‘음…… 좋은 선수들이 많구나.’
토마스 돌 감독의 질투를 흠뻑 받고 있는 안첼로티였으나, 정작 그는 함부르크의 주축 선수들을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스카우트의 보고서나 TV 중계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현장에서는 너무도 잘 보였다. 실전이야 말로 상대의 정보를 얻고 전술을 분석하기 최적의 장소였다.
‘오솔. 몸싸움과 헤딩 등 전통적인 9번을 완벽하게 수행한다. 게다가 연계도 좋고, 무엇보다 라인 브레이킹이 뛰어나지…… 언뜻 인자기나 트레제게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보다 더 다재다능해.’
그의 시선은 차례대로 반 더 바르트와 콤파니도 훑었다. 보고서를 통해 확인했으나 직접 만나본 결과도 이 세 선수가 함부르크의 핵심이자 가장 수준 높은 축구를 구사하는 선수들이었다.
‘수비형 미드필더와 골키퍼만 보강하면 훨씬 좋은 팀이 되겠어.’
안첼로티는 중앙을 단단하게 가져가는 전술을 좋아했다. 그는 감독 초기에 그의 스승인 아리고 사키의 전술인 4-4-2 기본형을 주로 사용했으나, 유벤투스에서 지단을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지금과 같은 형태로 진화하게 되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 함부르크 SV는 성장 잠재력이 뛰어난 팀이었다.
‘물론 그것도 이 세 선수를 지켜낸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는 것이겠지만 말이야.’
안첼로티는 오솔이 뛰는 모습을 보면서 눈을 빛냈다. 비인지 땀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흠뻑 젖어도 부지런히 뛰는 모습이 난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탐이 났다.
아마 장판 전투에서 조자룡을 바라보는 조조의 심정이 이러했을 것이다. 적이지만 어떻게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인물. 지금 안첼로티에게는 오솔이 그러했다.
‘인자기도 슬슬 은퇴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으니까…….’
삐익!
벌써 카드가 나왔다.
피를로를 지키려고 가투소가 조금 무리하게 달려든 탓이었다.
가투소는 콧김을 뿜어대며 심판에게 항의했다. 말디니가 재빨리 다가와 그를 진정시켰다.
평소에는 저런 투쟁심이 상당히 도움이 되지만, 가끔은 너무 지나쳐서 독이 되기도 했다.
“젠장. 달려드는 모습이 딱 미친 소네.”
오솔은 빗물 때문에 눈을 찡그리기 바빴다. 눈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조금만 늦었다간 피를로를 놓치고 가투소랑 사이좋게 필드를 뒹굴게 된다.
가투소는 비록 체구는 작지만 그 속은 단단한 근육과 뼈로 꽉 차이었었다. 무게 중심이 낮아서 거칠게 들어올 때면 오솔의 무게 중심이 형편없이 헝클어지곤 했다.
“차라리 균형감각을 올릴걸 그랬나?”
오솔도 설마하니 키가 10㎝나 작은 선수에게 이렇게 밀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만큼 가투소는 몸싸움에 일가견이 있었다.
“용용이! 가투소를 놓치지 마!”
“미안! 눈 깜짝할 사이에 멀어지는 바람에…….”
“이제부터는 밀착 마크해줘.”
“알았어.”
가투소를 하루 종일 쫓아다닌다는 건 상상만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지는 일이었으나, 누군가는 그 일을 해줘야만 했다. 터프하고 활동량이 좋은 나이절 더 용이라면 그럭저럭 상대가 될 것이다.
‘좋아. 다음번에 기회가 오면 바로 뺏는다.’
오솔은 만주키치와 눈을 마주치고는 피를로에게 공이 돌아가기만을 기다렸다. 두 사람이 타이밍을 맞춰 압박하는 일은 지난 두 달간 그들이 가장 공을 들인 플레이였다.
파앙!
생각보다 빨리 피를로에게 공이 돌아갔다. 하긴, 그는 후방 빌드업의 중심이었으니 공이 가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지금!’
‘알았어!’
오솔은 만주키치와 발을 맞춰 피를로에게 접근했다. 다행히 저 멀리서 달려오는 가투소는 나이절 더 용이 온몸으로 방해하고 있었다.
‘좋아! 피를로를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악!”
뒤에서 나이절 더 용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대충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오솔은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피를로에게 달려들었다.
‘피를로는 발재간이 그리 좋지 못하지.’
게다가 이렇게 비까지 쏟아지는 날에는 공을 지키기가 더 힘들었다.
“큭!”
오솔이 공을 뺏자 피를로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만주키치는 오솔이 방해 없이 공을 찰 수 있게 피를로를 막았다.
‘라파엘은?’
오솔은 좌중간으로 달려 들어가는 반 더 바르트를 보며 발을 크게 접었다.
‘평소보다 더 세게…….’
뻐엉!
공은 중앙 수비수 사이를 뚫고 날아갔다.
반 더 바르트의 진행 경로를 생각한다면 좌중간 깊은 곳을 노리고 들어간 패스였다.
툭!
그러나 공은 수비수를 지나치자마자 땅에 처박혔고, 이내 추진력을 잃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모두가 패스 실수라고 생각하는 순간, 칼라제의 뒤로 돌아 뛰던 반 더 바르트가 어느새 중앙으로 들어와서 그 공을 잡아챘다.
엄청난 반응 속도였다.
‘아니, 이건 약속된 플레이다.’
파올로 말디니는 이를 악물었다.
반 더 바르트는 이미 패스가 날아올 때부터 중앙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약속된 플레이야!’
이게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바로 오솔의 패스 실력이 그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