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124화
오솔은 반 더 바르트의 뒷모습을 돌아봤다.
‘고맙다는 말의 의미가 이것이었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이리도 쉬운 걸 뭘 한다고 그렇게 오래 헤맸단 말인가.
‘대충 어떤 심정인지 알 것 같네.’
오솔도 패스를 주고받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색함도 사라지고, 심리적 거리감 역시 많이 줄어들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풀어야 할 문제가 남아있었으나,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왠지 이야기가 잘 통할 것 같았다.
‘그래, 지금은 이 분위기를 그대로 역전까지 가는 거야.’
상대는 비에라가 빠지면서 중원에 힘이 다소 빠진 상황이었다. 이 기회를 잘 살려야 했다.
[멀리 걷어내는 월터 사무엘입니다. 기세가 완전히 넘어왔네요. 인테르 선수들은 막아내기 급급한 모습이죠?]
[만치니 감독이 교체에 들어갑니다. 사네티 선수를 빼고, 루이스 피구 선수를 넣는군요.]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피구 선수하면 역시 현란한 드리블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다만 지금은 측면을 공략하려는 의미보다는 최대한 공을 소유하면서 시간을 보내려는 의도 같습니다.]
과연 인테르는 좌우를 오가며 적당히 시간을 끌다가 기회가 났다 싶을 때만 공격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함부르크는 중앙에 잔뜩 웅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피구처럼 개인기가 좋은 선수는 어설프게 압박했다가 오히려 공간을 내주기 십상이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잡으면 돼. 한 번만!’
함부르크 선수들은 끈질기게 인내했다. 그들은 오솔과 반 더 바르트의 콤비라면 단 한 번의 역습으로 경기를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집중하자! 힘들어도 한 발 더 뛰고!”
“모두 힘내자!”
선수들의 기운이 빠졌다 싶을 때, 반 더 바르트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오솔이 그 뒤를 받쳤다.
내내 대립했던 두 사람이 의견이 맞아 들어가자 동료들의 얼굴도 한결 편안해졌다. 각자가 친한 선수를 위해 편을 갈랐으나, 그들도 내심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가 종반에 들어설수록 두 팀의 수비가 단단해져 갔다. 공격 패턴이 단조롭다 보니 그만큼 막기 쉬웠던 것이다.
오솔은 그 같은 기류를 읽고 만주키치를 불렀다.
“체력은 좀 어때?”
“문제없어.”
“그래? 이제 슬슬 마이콘이랑 붙어볼 때가 된 것 같지 않아?”
“그 얘기만 나오기를 기다렸지.”
“이길 수 있겠어?”
“녀석도 제법 크지만 그래 봐야 내 밑이야.”
마이콘은 다니 아우베스와 달리 184㎝라는 준수한 키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만주키치는 터프한 수비수인 월터 사무엘까지 동시에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와이드 타깃맨 전술이 성공하리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 이번 경기에서는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으니까 통할 확률이 높아.”
“나만 믿어. 녀석들은 알아도 못 막을 걸?”
“좋아.”
오솔은 공이 잠깐 나간 사이에 작전을 전달했다. 다음 역습에서는 오솔이 아니라 만주키치 쪽을 노리고 차라는 뜻이었다. 반 더 바르트는 여기에 한마디를 보탰다.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10분밖에 안 돼. 이제는 체력도 슬슬 한계에 다다랐지. 어쩌면 이번 역습이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
“그 말은…….”
“그래, 총공격에 나서자는 거야.”
지금까지는 사실상 반 더 바르트까지 세 사람만 공격에 투입되었다. 역습을 빠르게 가져가다 보니 2선, 3선의 선수들이 합류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전방에서 소유권을 가져왔는지 확인하고 뛰면 늦어. 만주키치가 공을 따낼 거라고 믿고 동시에 올라가는 거야.”
물론 최소한 세 명의 수비수는 남아야 한다. 그러나 그 외에는 모두가 올라가서 박스 안을 가득 채우기로 했다. 박스 안에 얼마나 많은 선수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득점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래, 이판사판이야. 어차피 한 골 차이로 지나 두 골 차이로 지나 차이 없잖아?”
“맞아. 저 이탈리아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자고!”
미드필더들이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했을 때 좋은 점이라면 역시 반 더 바르트가 그만큼 더 자유로워진다는 것이었다.
굳이 중앙의 자리를 지킬 필요 없이 공간을 찾아 마음대로 이동해도 된다는 것. 이는 이탈리아에서 흔히 말하는 트레콰르티스타의 움직임이었다.
‘내 역할은 어디까지나 빈 공간을 찾고 게임을 풀어나가는 거야. 최후의 일격은 네게 맡기겠다, 오솔.’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에이스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순간, 반 더 바르트는 오히려 전술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었다. 바로 골이라는 가장 무거운 짐을 오솔이 맡아준 덕분이었다.
[피구의 크로스! 라인하르트 선수가 잘 클리어합니다.]
공은 라인하르트의 머리에서 전방의 반 더 바르트에게 향했다. 캄비아소가 바짝 달라붙었다. 돌아서는 순간 바로 달려들 기세였다.
파앙!
그러나 반 더 바르트의 선택은 측면의 아투바에게 공을 돌리는 것이었다. 상대도 중앙에 잔뜩 몰려 있었기 때문에 아투바를 마크하는 선수가 없었다.
[아투바! 한번 접고, 뒤로 살짝 내줍니다.]
누군가는 아투바가 공을 뒤로 돌리는 모습을 보고 역습을 포기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함부르크 선수들이 노리는 바였다.
공은 패스 실력이 뛰어난 콤파니에게 흘러갔고, 상대는 수비로 전환하느라 뒤로 물러난 상황이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자유롭게 패스할 수 있었고, 그사이에 만주키치는 상대편 진영 깊숙이 도달해 있었다.
‘잘 받으라고!’
콤파니의 발을 떠난 공은 빠르게 전방으로 흘러갔다. 목표는 만주키치의 머리였다. 그에 맞춰 함부르크의 미드필더들이 일사불란하게 달려들었다.
[역습! 역습입니다!]
마치 베르더 브레멘의 산탄총이 연상되는 역습 장면이었다. 인테르 선수들은 깜짝 놀라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따라 뛰었다. 그러나 마구 교차하며 전진하는 선수들을 막느라 수비 진영이 한 순간에 어그러졌다.
[만주키치의 헤더!]
만주키치는 모두의 기대대로 높이 뛰어올라 공을 떨어뜨렸다. 공을 받은 이는 공간을 선점하고 있던 반 더 바르트였다.
‘때릴까?’
이전 같으면 이렇게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알고 있다. 그가 직접 처리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반 더 바르트는 공을 받기 전, 자신의 위치를 재확인했다. 정면으로는 골대 왼쪽 기둥이 보였고, 페널티 에어리어를 규정하는 흰색 선은 다섯 걸음 앞에 떨어져 있었다.
‘골키퍼의 위치는…….’
골키퍼는 왼쪽으로 살짝 치우쳐서 서 있었다. 아마 그의 직접 슈팅을 염두에 둔 위치 선정 같았다.
‘오솔이라면 수비수 뒤로 돌아들어가려 하겠지. 그렇다면…….’
판단이 끝난 순간 그의 발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반원을 그렸다. 원터치 패스였고, 동시에 그의 전매특허인 왼발 감아 차기였다.
공은 수비수의 발과 골키퍼의 손이 닿지 않을 위치를 찾아 절묘하게 날아갔다. 그 끝은 반대편 골대 부근이었다.
타다닷!
오솔은 공에 이끌리듯 달려가 몸을 붕 띄웠다. 달리던 속도에 몸을 날리는 속도까지 더해지자 순간적으로 거리가 좁혀졌다.
투웅! 철썩!
공은 오솔의 이마에 제대로 맞았다.
골망은 물론이고 관중석까지 마구 흔들렸다.
오솔은 벌떡 일어나 잔뜩 쓸려 빨갛게 변한 목을 보여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으아아아!”
포효를 지르는 것 외에 다른 건 생각나지 않았다.
이윽고 늑대 무리가 모여들 듯 함부르크 선수들이 달려와 오솔처럼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그중에는 잔뜩 상기된 표정의 반 더 바르트도 있었다.
“죽여주는 패스였다!”
“잘했어! 이 미친놈아!”
두 사람은 격해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욕설을 뱉어내는 동시에 서로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어깨동무와 높이 들어 올린 두 개의 주먹.
두 사람의 날갯짓에 함부르크가 어디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지 기대하게 하는 멋진 세리머니였다.
이 장면이 다음날 신문 기사 1면을 장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서운 뒷심을 보여준 함부르크 SV,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리다.]
[만치니 감독 ‘오늘 함부르크는 대단했다. 그러나 주세페 메아차에선 다를 것이다.’]
[함부르크, 챔피언스 리그 16강에 청신호가 들어오다.]
“반응이 좋네.”
오솔은 신문을 접고 상태창을 확인했다.
“흐흐흐. 이쪽은 더 좋은데?”
-순간속도 88…… 90(+5)!
-반응속도 73…… 74!
오솔은 인테르전에서의 만점짜리 활약으로 레벨을 하나 올릴 수 있었고, 그렇게 얻은 포인트 3개는 순간속도와 균형감각에 투자했다.
드리블 쪽에 먼저 투자할까도 생각했으나 당장은 반 더 바르트라는 A급 플레이 메이커가 있으니 필요 없었다.
“신체 능력이 오를수록 득점 확률은 더 올라가지.”
오솔은 능력치 확인을 끝내고 나서도 상태창을 닫지 않았다. 인테르전으로 얻은 것은 포인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극장골의 주인공’이 5 레벨이 되었습니다.
-이제 경기 시간이 85분을 넘는 순간부터 모든 능력치가 5씩 상승합니다. 단, 한 골 차이로 지고 있거나 양 팀 스코어가 동점일 때만 발동합니다.
-스킬이 최종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남들이 힘들어할 때 혼자 기운이 펄펄 넘치는 것만큼 신나는 상황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인테르전 동점골도 발이 느려진 코르도바와 달리 오솔은 여전히 빠른 속도를 유지했기에 넣을 수 있었다.
“으으. 피곤하다.”
지난밤, 오솔은 오래간만에 술을 입에 댔다. 회귀한 이후로 한 번도 마신 적이 없었으나,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선 맥주 한 잔 정도는 필수였다.
‘스무 살 기념으로 마신 셈 쳐야지.’
같이 마신 상대는 당연히 반 더 바르트였다. 끝나고 대화를 하자던 그는 술기운이 살짝 돌 때쯤 조심스럽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미안하다. 진작 이렇게 사과했어야 했는데…… 아저씨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네가 미워졌어.”
반 더 바르트는 관계를 상당히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레르비를 단순한 에이전트가 아니라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긴 아내의 친정이 독일이라서 함부르크로 온 사람이었으니…….’
미래에 레알 마드리드에 갔다가 주전 경쟁에서 밀렸을 때도 암 치료를 받는 아내를 위해 이적을 포기했던 그였다.
쇠렌 레르비와는 어렸을 때부터 무려 10년을 이어져온 인연이었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네가 얼마나 화났을지 이해해. 나라도 가고 싶은 팀으로의 이적이 무산되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거야.”
“이건 단순한 화풀이가 아니에요. 물론 처음에는 감정적인 이유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제 정당한 권리를 되찾으려는 목적이 더 크죠.”
아무리 분위기가 좋더라도 이런 일에서는 사실 관계를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정당한 권리?”
“돈이죠. 제가 이번 여름에 이적했다면 적어도 6개월에서 1년은 더 많은 주급을 받으며 뛰었을 테니까요.”
“그렇군…….”
반 더 바르트는 그쪽으로는 생각해보지 않았는지 살짝 고민하는 표정이 되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그 돈을 대신 갚아주면 아저씨에게 건 소송을 취하해 줄 수 있겠어?”
“그 말…… 진심이에요?”
“당연하지.”
오솔은 뜻밖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아무리 사이가 좋다고 해도 손해배상액이 얼마나 나올 줄 알고 대신 내준다는 것인가.
오솔이 리버풀로 갔다면 받았을 주급은 최소 10만 파운드(약 1억 4천만 원)로 연봉으로 계산하면 무려 520만 파운드(약 74억 5천만 원)였다.
50%에 달하는 세금을 제외해도 거의 37억 원에 가까운 돈인데, 여기에 계약금까지 계산하면 금액은 더 커진다.
이적 무산에 레르비의 잘못이 10%밖에 없다고 쳐도 근 4억 원이 넘는 돈을 갚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반 더 바르트 연봉의 약 1/3 수준으로, 아무리 그가 고액 연봉자라고 해도 선뜻 내겠다고 말하기 힘든 액수였다.
“그렇다면 저야 좋죠. 돈도 안 되는 소송을 지루하게 이어가 봐야 남는 것도 없으니…….”
아무리 법률 대리인이 대신한다고 해도 소송은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피해액만큼만 받아낼 수 있다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 문제는 변호사에게 넘기죠. 우리가 떠든다고 해도 뭐가 맞는지 감도 안 잡힐 것 같으니까요. 대신 저도 최대한 양보하라고 전할게요.”
“고맙다.”
두 사람의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졸지에 반 더 바르트만 생돈이 나가게 되었으나, 그는 외려 레르비가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오해를 풀 수 있었다. 덕분에 팀은 점차 하나가 되어갔고, 이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완전히 하나 된 함부르크의 첫 번째 상대는 스포르팅 CP의 감독, 파울루 벤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