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120화
사실 달라진 경기력은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이 누구보다도 크게 체감하고 있었다.
‘젠장. 잘 좀 패스해 봐.’
오솔은 반 더 바르트의 뒤통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의 패스에 불만을 느끼면서도 정작 요구사항을 적극적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그의 성격 같아선 벌써 몇 번이고 타박했어야 정상이었으나, 이미 반 더 바르트가 비슷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기 때문에 참은 것이다.
‘하아. 답답하네. 괜히 뭐라고 했다가 즐라탄처럼 되면 큰일이잖아…….’
즐라탄의 자서전에 따르면 반 더 바르트가 갈등에 대처하는 방법은 철저한 ‘회피’였다.
즐라탄이 매번 대화를 시도하려 할 때마다 반 더 바르트가 자리를 피하거나 일부러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래놓고 반 더 바르트는 동료들과 뒤에서 험담를 하곤 했다.
즐라탄은 이를 ‘계집애 같은 대처법’이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고, 곧 이들은 둘 중 하나가 클럽을 떠나야만 할 정도로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물론 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파탄에 몰렸을 때 보여준 모습이었다. 그러나 반 더 바르트의 기본적인 성향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기도 했다.
‘게다가 딱히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
오솔이 최근에 두 아이의 아빠가 되면서 자제력이 좀 늘어나긴 했으나, 이번 사건처럼 잘못한 일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먼저 자존심을 굽힐 만큼 물렁한 인간은 아니었다.
[만주키치 선수가 나가고 파올로 게레로 선수가 들어옵니다.]
경기는 후반으로 넘어갔고, 토마스 돌 감독은 루시우-반 바이텐 조합을 꺾기 위해 발이 빠른 공격수, 파올로 게레로를 투입했다.
‘일단은 이 친구를 믿어보는 수밖에 없겠군.’
게레로는 반 바이텐을 뮌헨에 내주면서 넘어온 선수로서, 남미 출신답게 빠르고 기술이 좋았다. 그라면 반 바이텐의 약점인 속도를 충분히 공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부터 오솔은 수비수들을 끌어내기 위한 움직임에 중점을 두고 움직였다. 어차피 반 더 바르트와는 팀워크가 맞지 않는 상황이니 전방에 남아있어 봐야 아무 소용없었다.
오솔의 이 같은 선택은 제법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뮌헨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던 이 페루산 스트라이커는 오솔이 만들어낸 공간으로 쉴 새 없이 침투해 들어갔다.
파앙!
[반 더 바르트의 패스! 좋습니다. 수비진 사이를 제대로 뚫고 들어갔어요!]
[공간을 정말 잘 봤네요!]
[게레로가 달려갑니다! 빨라요! 반 바이텐이 전혀 따라가지 못합니다! 슈우우웃!]
[꼬오오올!]
[스루 패스가 절묘하게 들어갔네요. 시즌 2도움 째를 기록하는 반 더 바르트 선수입니다.]
함부르크는 겨우 만회골을 넣는 데 성공했지만, 아쉽게도 파올로 게레로의 골 결정력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잇달아 찾아온 좋은 찬스들을 모두 놓치면서 주인공이 되는데 실패했고, 팬들은 ‘오솔이 저런 찬스를 맞았더라면 좋았을 걸.’하며 아쉬워했다.
삑, 삑, 삐이이익!
그렇게 경기는 1대1, 무승부로 끝이 났다. 승점은 동일하게 1점씩 나눴으나 경기력만 놓고 본다면 함부르크의 패배에 가까웠다.
실제로 토마스 돌 감독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오늘 경기로 공수 양면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콤파니는 적응 기간이 지나면 좋아지겠지만, 오솔과 라파엘의 문제는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군.’
이제는 누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팀에서 비중이 커진 두 사람이었다. 감독으로서도 섣불리 한쪽 편을 들 수 없었다.
‘둘 중 하나라도 양보를 해야 할 텐데…….’
마음 같아선 나이가 어린 오솔에게 한 발 물러서라고 하고 싶었으나, 지난 1년간 같이 지내면서 파악한 그의 성격으로 봐선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게 뻔했다. 어쩌면 괜히 둘을 중재한답시고 불렀다가 오히려 상황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었다.
‘말해봐야 소용없어.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더.’
결국 토마스 돌 감독은 두 사람의 분쟁이 더 커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계속 훈련을 진행했다. 어떠한 대책도 없었다. 그저 둘의 프로 의식을 믿을 뿐이었다.
‘두 선수 다 향상심이 대단하니, 별 문제없겠지. 또 따지고 보면 그 둘이 직접적으로 얽힌 일도 아니잖아.’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감독은 두 사람의 아주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서곤 했는데, 최근 들어 제법 우려스러운 모습들이 포착되었다.
바로 오솔과 반 더 바르트가 각자 어울리는 집단이 다르고 각자의 패거리가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오솔 같은 경우는 만주키치나 타카하라, 아투바와 마다비키아 같은 용병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같은 처지다 보니 서로 잘 통했다.
반면 반 더 바르트는 같은 네덜란드 출신인 나이절 더 용과 요리스 마티센, 스위스 출신인 라파엘 비키 등 주로 유럽 선수들과 뭉쳐 다녔다.
‘이건 좋지 않은데…….’
토마스 돌 감독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단순히 경기력에 문제가 생기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팀이 용병과 유럽 출신으로 나눠질 기미가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그렇게까지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또 친한 동료들끼리 어울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선수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팀워크와 결속력을 위해서 권장할만한 일이었다.
단,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말이다.
‘젠장. 바바레즈를 잡았어야 했나?’
돌 감독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처럼 바바레즈가 빠지면서 생긴 여파가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사실 이번 일도 반 바이텐이나 바바레즈처럼 선수단의 기강을 사로잡을 수 있는 선수가 중간에서 적절히 중재만 해줬다면 별문제 없이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두 사람은 함부르크를 떠났고, 이제 함부르크의 새로운 주장은 문제의 중심에 선 반 더 바르트였다.
그래, 이게 진짜 문제였다. 새롭게 팀의 중심이 되어야 할 선수가 분쟁거리가 되어 팀을 분열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으으. 미치겠군. 주장직을 주면 철 좀 들겠다 싶었는데, 아무 소용없잖아?’
안타깝지만 주장직 하나 줬다고 사람이 바로 바뀌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반 더 바르트가 함부르크에서 생활한 건 이제 겨우 2년 째였다.
물론 나중에야 함부르크의 레전드로 인정받을 정도로 헌신하지만, 솔직히 그는 지금 당장은 구단에 이렇다 할 애정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반 더 바르트는 기량이 회복해 감에 따라 올 시즌을 끝으로 스페인 리그로 떠날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알고 보면 그도 레알 마드리드나 발렌시아 같은 팀에 가려고 오솔과의 관계를 유야무야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상황이 나아질 리 없었다.
* * *
[유로 2008 예선을 위해 다시 모인 대표팀 선수들!]
그렇게 아슬아슬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지 한 달째, 어느덧 9월 A매치 기간이 다가왔다.
대부분의 주전 선수들이 대표팀으로 떠나고, 구단에는 국제대회 출전이 금지된 오솔과 아직은 국가대표에 소집될만한 실력이 없는 이들만 남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외적으로 벨기에의 신성이자 포스트 반 바이텐으로 불리는 뱅상 콤파니 역시 소집에서 제외되었다.
이유야 다양했다. 최근에 잇달아 범했던 실책 때문일 수도 있었고, 단순히 또 다른 유망주인 토마스 베르마엘렌의 실력을 보려는 의도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감독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콤파니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연령별 대표팀을 매번 월반해왔던 이가 갑자기 국가대표에서 제외되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덕분에 오솔은 콤파니와 같이 훈련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래도 공수 밸런스가 맞으니까 좀 낫다. 그렇지?”
만주키치의 말이었다. 그도 이쯤 되면 국가대표에 뽑힐만하지 않나 싶었으나, 아쉽게도 이반 클라스니치와 보스코 발라반 등에게 밀려서 이번에도 국가대표 데뷔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게 3 대 3은 충분히 되겠는데?”
만주키치와 오솔 투톱에 반 더 바르트의 백업 멤버인 트로쵸프스키까지 셋이 공격을 맡고, 반대편에는 기 드멜과 라인하르트 그리고 콤파니가 섰다. 자연스럽게 힘과 스피드가 두루 뛰어난 콤파니가 오솔을 담당했다.
“네 별명이 벨기에의 철벽이라면서? 한번 제대로 붙어보자고.”
“잘됐네. 나도 작년 분데스리가 득점왕의 실력을 한번 보고 싶었는데.”
“혹시 모를까 싶어서 알려주는 건데, 월드컵 실버 부츠가 제일 최근에 받은 상이야.”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방심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국가대표 소집에 제외되었음에도 콤파니는 여전히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오솔은 그의 미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모습이 결코 자만심이나 오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첼시에 입단했을 때니까 2008년이 맞겠지?’
전생에 오솔이 막 EPL에 발을 내디뎠을 때, 콤파니도 갓 맨체스터 시티에 이적을 한 신입생이었다. 그 당시 콤파니는 탁월한 몸싸움 능력과 태클 그리고 멋진 패스를 바탕으로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선수였다.
‘물론 그때는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로 나오긴 했었지. 최후방을 맡기기엔 아직 불안해서 그랬던 것일까?’
오솔은 콤파니의 뛰어난 빌드업 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헤매는 모습이 아쉽기만 했다.
‘콤파니의 능력이라면 반 더 바르트가 전방에 고립되었을 때 후방 플레이 메이커로서 활약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되면 후방에서 단번에 찔러주는 패스를 골로 연결하는 장면이 더 자주 나올 수 있었다.
지금처럼 단순히 선수의 머리만 보고 올리는 게 아니라 중원을 단번에 가로지르는 스루패스나 수비수 뒷공간을 노리는 패스를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일단은 수비 불안부터 해결해야 해.’
파앙!
경쾌한 소리와 함께 트로쵸프스키의 패스가 정직하게 날아왔다. 그러나 너무 경로가 정직했는지 콤파니가 어렵지 않게 걷어내는 데 성공했다.
‘기본은 확실한데 말이지.’
콤파니는 이 한 달간 오솔의 장단점을 다 파악했는지 생각보다 잘 막아냈다.
기본적으로 피지컬이 되는 선수라 몸싸움이나 제공권에서 크게 밀리지 않았고, 거기에 수비 타이밍을 읽는 능력도 뛰어나서 적절히 태클을 걸었다.
트로쵸프스키의 어설픈 패스로는 기회를 만들기 쉽지 않아 보였다. 오솔은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조심해. 조금 거칠게 나갈 생각이니까.”
“얼마든지!”
오솔은 훈련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 시작했다. 실전이 아니기 때문에 체력 안배를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쿠웅!
“큭!”
콤파니의 동글동글한 눈이 충격으로 반쯤 감겼다.
‘표정이 꼭 화성 침공 외계인이 죽기 전 모습 같네.’
오솔은 한가한 생각과는 달리 온몸에 힘을 더했다.
“으윽!”
콤파니도 만만치 않은 거구였으나 작정하고 밀어붙이자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오솔은 그 틈에 놀라운 점프력을 선보이며 헤딩을 따냈다.
콤파니는 눈앞에 벽처럼 선 오솔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점프력이 얼마나 높았는지 고개를 한참을 꺾어도 그의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이게 분데스리가 득점왕의 실력인가?’
영상을 보며 분석했던 내용과 실제 피부로 접하는 실력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존재했다. 그가 상상했던 가상의 오솔은 이렇게까지 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가 뭐지? 너도 내 예상을 뛰어넘는 선수라는 거냐?’
콤파니는 문득 바이에른 뮌헨전에서 저질렀던 실수가 떠올랐다. 패스를 끊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발을 뻗었다가 실점의 빌미만 제공했던 그 일 말이다.
‘이게 리그의 수준 차이라는 것인가?’
콤파니의 실수는 모의전과 실전의 차이가 빚어낸 결과였다. 그는 그동안 벨기에 리그에서 만났던 선수들을 바탕으로 예상하고 대응했고, 얼핏 잘 막아내는 듯했다.
그러나 지난 경기의 슈바인스타이거나 눈앞의 오솔처럼 분데스리가의 몇몇 선수들은 벨기에 평균을 훨씬 웃도는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몇 번이고 그러한 차이를 염두에 두고 더 강한 상대를 상상했으나, 실전에서 만난 상대들은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는 괴물들이었다.
‘큭! 볼터치가 엄청나잖아? 거기서 이런 순간속도까지 보유하고 있다고?’
콤파니는 오솔의 헤딩에 이어 볼터치에까지 당하자 멘탈이 바사삭 부서질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는 승부를 뒤로 미루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의 패배가 자신을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 번 더 붙자!”
콤파니의 눈에 불이 들어왔다. 질 때는 지더라도 적어도 한 번은 막겠다는 생각 같았다.
‘그나마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드리블 실력과 순간속도야. 볼터치 후 파고드는 순간을 노리면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콤파니의 예상을 형편없이 빗나갔다. 오솔의 속도가 미묘하지만 더 빨라지면서 그를 스쳐 지나간 것이다.
‘어째서?’
혼란스러워하는 콤파니를 보며 오솔은 볼을 긁적였다.
‘조금 미안하네.’
-Level Up!
-순간속도 80…… 83!
콤파니는 방금 훈련을 하면서 실시간으로 강해지는 인간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는 그저 자신의 예상이 아직도 정확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뭐, 당하는 김에 완전히 깨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오솔은 이참에 콤파니를 개안(開眼)시키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