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115화
중계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꼬오오호올!]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격정적인 샤우팅이었다. 카메라는 코너로 질주하는 오솔을 빠르게 따라붙었다.
오솔은 달라붙는 동료들을 가차 없이 날려버리고, 94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베베토가 보여준 요람 세리머니를 재현했다.
[그러고 보니 오솔 선수는 곧 아빠가 되는군요.]
[네, 고등학교 때 첫사랑과 이른 나이에 식을 올렸다고 하는데요. 비록 나이는 팀에서 막내지만 이미 한 집안의 가장입니다.]
[대표팀에서도 공격을 이끄는 가장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벌써 4골을 집어넣으면서 클로제와 같이 득점 선두에 섭니다!]
[리그에 이어서 월드컵까지 이쯤 되면 두 선수를 라이벌이라고 해도 되겠는데요?]
한편 오솔은 세리머니를 마치고 상태창을 확인하고 있었다. 득점과 동시에 레벨이 올랐다는 알림을 들었기 때문이다.
‘포인트가 3개 더 생겼다.’
오솔은 남은 포인트를 모두 볼터치에 투자했다.
-볼터치 83(+5)
볼터치가 90까지 이른다면 제아무리 처리하기 어려운 패스가 오더라도 여유롭게 받아낼 수 있었다.
“좋아! 이길 수 있어! 조금씩만 더 집중하자!”
“네!”
“파이팅!”
군기반장 김남준이 선수들을 일깨웠다. 공격진에서는 안태환이, 수비진에선 이영신이 그의 말을 받았다. 곧이어 모든 선수들이 전의를 끌어올렸다.
[우리 선수들의 기세가 매섭습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이게 지금 피파랭킹 29위와 13위의 경기 맞습니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느 쪽이 한국이고 어느 쪽이 이탈리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만큼 기세에서 붉은 악마들이 아주리 군단을 압도하고 있었다.
“젠장맞을 놈들 같으니…….”
마테라치의 입에서 한층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오솔은 그를 자극하고자 들릴 듯 말 듯 말을 흘렸다.
“2002년에는 16강이었는데, 이번에는 8강인가? 풉! 그 정도면 많이 발전한 거지.”
“이 원숭이 같은 새끼가…….”
오솔은 순간적으로 멈칫했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겼다.
2006년 월드컵부터 인종차별적인 언행이 걸리면 즉시 퇴장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심판에게 결려야 가능한 일이었다. 저렇게 작게 투덜거리는 건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날 자극하려는 속셈인가? 지단처럼 박치기라도 하게 만들려고?’
오솔은 마테라치의 수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흥분하지 않았다.
필드에서는 조롱과 모욕도 유용한 수단 중 하나였다. 상대방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합리적인 생각을 막으면 그만큼 플레이에서 이득을 보기 쉽기 때문이다.
‘나도 그래서 놀리는 거니까.’
인종차별을 겪는 건 짜증나는 일이었으나, 10년간 질리도록 당해왔던 일이라 참을만했다. 게다가 지금은 명백히 한국이 이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는 괜히 심판에게 항의하다가 흐름이 끊기는 것보다, 아무렇지 않은 척 경기를 이어가는 편이 더 상대를 화나게 하는 방법이었다.
“에휴. 이해한다. 너라고 뭐, 인종차별주의자겠냐? 팀도 지고 있고, 실력에서도 상대가 안 되니까 홧김에 한 말이겠지…… 그렇게라도 해서 화가 풀리면 계속 해. 심판한테 이르진 않을 테니까.”
“이 자식!”
뒤에서 마테라치가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렸으나 오솔은 가볍게 무시하며 문전으로 달려갔다.
[다시 한번 대각선 크로스!]
마테라치는 화를 내느라 한 박자 늦게 따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영신의 크로스는 느릿느릿 날아왔다. 정확도를 높인다고 속도를 상당 부분 포기한 탓이다.
‘쳇! 중간이 없군!’
한국 선수들에게 아쉬운 점은 이런 것들이었다. 지나치게 정확하게 올려줘야 한다는 생각에 공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러면 아무리 오솔이어도 골로 연결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지금은 공격수들이 많으니까.’
오솔은 몸을 띄우며 측면으로 파고드는 박해진과 공을 받으려고 오는 안태환, 측면에서 대기하고 있는 이청운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제대로 받으라고!’
투웅!
[오솔이 공을 따냅니다! 공은 중앙의 안태환에게!]
안태환은 공이 자신이 원하는 위치로 떨어지는 것을 보며 속으로 감탄사를 뱉어냈다.
‘등을 진 상태에서도 수비진의 위치가 보인다는 거냐? 아니면 내 움직임만 보고 그걸 예상했다는 거야?’
모두 맞았다. 오솔은 등 뒤에서 전해지는 마테라치의 몸을 통해서 칸나바로가 어디에 서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고, 안태환의 움직임은 그 짐작에 확신을 심어줬다.
‘이러면 구태여 접을 필요도 없겠어.’
안태환은 발 앞에서 멈추는 공을 보며 슛 동작을 취했다.
[안태환의 슈우우웃!]
공이 발등에 제대로 얹어졌다. 그의 슛은 수비수 틈을 파고들어 반대편 골대를 노리고 날아갔다.
‘빠르다!’
부폰은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도 없이 몸을 띄웠다. 긴 팔다리가 쭉 펴지면서 192㎝의 거구가 껑충 뛰어올랐다.
파아앗!
공이 조금 더 빠르다고 느껴지는 순간, 부폰의 오른팔이 한 뼘 더 길어지며 공의 진로를 방해했다.
파앙-!
공이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굴러갔다.
‘읏! 큰일이다!’
부폰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보나 마나 오솔이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만회골도 그렇게 허용하지 않았나.
‘어? 없어?’
삐이익!
쇄도하는 오솔 대신 찾아온 것은 심판의 휘슬 소리였다.
‘뭐야?’
그가 돌아본 곳에는 쓰러져있는 오솔과 그에게 귓속말을 하는 마테라치가 있었다.
* * *
‘이런 망할 자식!’
오솔은 등판 전체에 퍼지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그때 귓가로 마테라치의 목소리가 들렸다.
“건방진 새끼! 어디 또 까불어 보시지?”
마테라치는 처음부터 헤딩에 관심이 없었다. 그의 목표는 공이 아닌, 오솔이었던 것이다. 헤딩 경합을 하는 대신 오솔을 밀어서 균형을 잃게 만든 행동이 그것을 증명했다.
“이 자식이…….”
오솔은 이를 악물며 일어났다. 심판에게 항의하는 동료들과 어떻게든 카드를 막으려는 이탈리아 선수들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마테라치도 눈에 들어왔다.
잠시 심판이 양 팀 선수들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을 때였다. 마테라치가 손가락을 슬그머니 올리더니 양쪽 눈 끝을 잡고 길게 찢었다. 일명 ‘눈 찢기’라고 불리는 동양인을 비하하는 행동이었다.
‘이 새끼가?’
오솔은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하지만 곧 손에 힘을 풀었다.
이걸 심판에게 알리면 바로 퇴장이었다. 그럼 11대 10으로 싸울 수 있다. 4강도 가능한 것이다. 반면 여기서 폭발했다간 오히려 자신이 퇴장당하고 만다. 그러니 지금은 참아야 했다.
‘그래. 실컷 놀려라. 과연 너 때문에 월드컵에서 떨어지고 나서도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두고 보자.’
이탈리아 축구팬들은 과격하기로는 유럽 어딜 가도 뒤지지 않았다. 마테라치가 개인적인 복수를 하다가 팀이 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심판에게 말을 꺼내려고 할 때였다. 마테라치의 조롱이 이어졌다.
“덤벼들 배짱도 없냐? 이 팔푼이 같은 놈아! 아빠한테 사내답게 덤비는 법도 못 배웠나보지?”
오솔의 몸이 우뚝 멈춰 섰다.
“아니면 배울 아빠가 없었나? 하하! 설마 아빠가 너무 많아서 누구에게 배워야 할지 몰랐던 건 아니지? 만약 그렇다면…….”
마테라치는 뒷말을 잊지 못했다. 오솔이 득달같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몸을 피하는 대신 오히려 맞기 좋게 자세를 잡았다.
‘그래. 쳐라 쳐! 어차피 난 퇴장이야.’
마테라치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주심을 보며 퇴장을 직감했다. ‘눈 찢기’가 들킨 것이다. 심판의 눈을 피해서 한다고 했으나 오늘은 그 답지 않게 너무 허술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대 맞고 같이 나가는 거다!’
그래서 일부러 패드립을 쳐서 상대를 자극하고, 오솔의 손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으스스한 목소리와 살기 어린 눈빛을 보는 순간, 그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흐흐. 길쭉한 눈이 갖고 싶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내가 손수 찢어줄 수 있는데 말이야.”
“헉!”
마테라치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아니,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머리를 오솔에게 잡힌 후였다.
“건방도 작작 떨었어야지. 세상에 미친놈이 너 하나뿐인 줄 알았어?”
퍼어억!
오솔은 깔끔하게 박치기 한 방으로 마테라치의 코를 뭉개버렸다.
“아아악!”
“은령타의 뒤는 내가 잇는다. 이 씨벌탱아.”
오솔은 몰려드는 이탈리아 선수들에게 밀려, 마테라치에게서 멀어졌다.
물론 오솔이 당하게 내버려둘 한국 선수들이 아니었다. 불같이 달려드는 가투소는 김남준이 마크했고, 이청운은 칸나바로에게 ‘네 대가리도 까줄까?’라고 소리쳤다.
우우우!
금방이라도 난투극이 날 것 같은 분위기에 관중석이 웅성거렸다. 이탈리아의 열혈 팬 몇몇이 분을 못 참고 경기장에 난입을 시도했고, 한국 팬들은 혼란스러운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긴 끝난 거지! 퇴장이야.”
상대에게 상해(傷害)를… 그것도 피가 철철 날 정도로 강하게 입혔으니 퇴장당하는 게 당연했다.
[아! 레드 카드입니다!]
심판은 오솔에게 퇴장을 명령했고, 오솔은 피로 물든 이마를 닦으며 경기장을 벗어나야 했다.
-Level Up!
귓가로 ‘레벨 업’이라는 알림음이 들려왔으나,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사람’ 때문에 이성을 잃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한없이 더러웠다.
“젠장!”
이어서 심판은 응급조치를 받고 있던 마테라치에게 레드카드를 들어 올렸다. 오솔은 폭행으로 마테라치는 인종차별적인 행동으로 인한 퇴장이었다.
삐이익!
두 사람의 퇴장 이후 경기는 곧 재개되었다. 두 팀의 공방은 여전히 치열했으나 미묘하게 한국의 플레이에서 힘이 떨어졌다.
이탈리아는 마테라치 대신 바르찰리를 투입하며 수비의 구멍을 메우는 데 성공했지만, 한국은 교체로 들어온 조형진이 오솔만큼 뛰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반 86분, 한국은 결국 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탈리아의 역전골입니다…….]
경기는 그렇게 2 대 1로 끝이 났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마테라치의 행동이 결국 이탈리아를 살린 것이다.
오솔은 멍하니 서서 그의 첫 번째 월드컵이 끝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가힌샤 클럽의 여섯 번째 멤버가 되었습니다. 축하의 의미로 포인트 3개를 지급합니다.
‘지금 누굴 놀리냐?’
오솔은 그러면서도 포인트 3개가 잘 들어왔는지 확인했다.
‘후…… 그래도 조금은 위로가 되네.’
* * *
찰칵! 찰칵, 찰칵!
경기 후 각종 매체에서 오솔을 인터뷰하기 위해 접근했다. 축구 신동의 화려한 등장과 파격적인 퇴장은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불미스러운 행동으로 퇴장을 당했고, 결국 팀은 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우선 경기를 보고 충격을 받았을 관중, 그리고 시청자 여러분께 사과의 뜻을 전합니다. 죄송합니다.”
“마테라치에게 달려든 이유가 무엇인가요?”
“뒷트임을 하고 싶은 것 같아서 좀 도와주려고 했습니다.”
“인종차별적인 행동 때문이라는 겁니까?”
“그럼 뭣 때문이겠어요?”
“일각에서는 마테라치의 발언을 문제 삼기도 했습니다. 그가 오솔 선수의 가족을 모욕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아니라고 하긴 힘들겠네요. 네, 오늘 그는 좀 심했습니다.”
기자들의 손이 빨라졌다.
“마테라치의 행동은 주심도 봤습니다. 조금 더 침착했으면 한 명이 빠진 이탈리아를 상대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지 않습니까?”
“그랬나요? 그렇다면 어째서 바로 카드를 안 꺼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군요. 마테라치는 일부러 절 밀쳐서 다치게 했고, 인종차별도 했으며, 마지막에는 모욕적인 말까지 꺼냈습니다. 그 사이에 카드가 나와도 두 번은 나왔어야 하지 않나요?”
“심판 판정이 늦어서 이 모든 결과가 나왔다는 건가요?”
“승부를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나, 벨기에 같은 몇몇 국가들에서는 너무도 쉽게 인종차별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강한 처벌과 의지가 없다면 극복할 수 없을 겁니다.”
기자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공교롭게도 오늘 주심은 인종차별이 심하기로 유명할 벨기에 출신 심판이었다.
“지금 심판의 공정성을 의심하는 겁니까? 그러니까 본인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이야기인 건가요?”
“아니요. 퇴장은 명백히 제 잘못입니다.”
자리에 참석한 한국 기자들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오솔의 말에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나가는 것 아닌가 걱정도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했다.
“저는 백인을 차별하는 표현을 알지 못하거든요. 이렇게 인종차별이 만연한 대회인 줄 알았다면 하나 배워올 걸 그랬습니다. 그랬다면 그라운드에서 피를 볼 일도 없었을 거고, 서로 사이좋게 인간 취급 안 할 수 있어서 참 좋았겠죠.”
“…….”
오솔은 식은땀을 흘리는 기자들을 돌아보며 뒷말을 이었다.
“물론 비유하는 말이었습니다. 인종차별은 다시는 반복되어선 안 될 일이죠.”
“네, 그렇습니다.”
“다음번에 또 같은 짓을 한다면 그땐 진짜 얌전히 걸어 나가게 두지 않을 거니까요.”
“!?”
“개념이 없으면 맞아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