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114화
22장 개념이 없으면 맞아야지
“와아아!”
“그렇지!”
모두가 잠들었을 새벽 5시 45분. 갑자기 아파트 단지 곳곳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한국 대 우크라이나의 16강전을 지켜보는 이들이 내지는 소리였다.
“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던 이들은 메아리처럼 이어지는 박수소리에 안도했다. 다행히 이른 새벽임에도 많은 이들이 16강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새벽 4시라는 극악의 경기 스케줄에도 밤잠을 줄여가며 응원을 한 것이다.
게다가 이들의 소란에 중간에 깬 사람들도 화를 내기보다는 TV를 켜서 경기 결과를 확인하기 바빴다. 그리곤 이유 있는 층간소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떻게 된 거야? 벌써 경기 끝났네. 기다린다는 게 깜빡 잠들었어요. ㅜㅜ]
[헐~ 이 경기를 놓치다니…… 님, 제대로 손해 보셨네요.]
[ㅇㅇ 리얼. 오늘 경기는 생방으로 본 사람 모두가 승자임.]
[바로 재방해주니까 보세요. 다 놓쳐도 좋으니 마지막 골은 꼭 보셔야 합니다. 분데스리가 득점왕의 클라스를 알 수 있는 골이거든요.]
채팅창에는 한동안 오솔의 결승골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그만큼 오솔은 어린 선수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침착하고 여유롭게, 소위 클래스가 느껴지는 골을 넣었다.
[아, 결과를 알고 보면 또 그 맛이 안 나는데…… 으으. 이런 바보. 치맥도 준비했는데 자버리다니.]
[나는 밤새 술 마시고 경기까지 봤더니 졸려 죽겠음.]
[나도 ㅜㅜ. 설마 8강도 이 시간에 하는 건 아니겠지? 제발 새벽 2시에 했으면 좋겠다.]
[응, 아니야. 그때도 새벽 4시야.]
[맞네. 독일이랑 아르헨티나가 새벽 2시네. 하아. 우리는 왜 매번 새벽 4시냐. 토고전 이후로 제정신으로 챙겨본 경기가 없네.]
[그러게, 아쉽다. 시간대가 이래서 광장에 나가지도 못하잖아. 이번에는 또 어떤 시청녀가 나오나 기대했는데.]
[그거 다 연애 기획사 연습생들임.]
[아니면 관종이거나.]
[그러니까 흰소리 집어치우고 오솔이나 찬양하셈. 우크라이나전 득점으로 벌써 세 골 째임.]
[록타르~]
[테사다르!]
[그건 무슨 혼종이냐?]
이야기는 금방 딴 곳으로 튀었으나, 사람들은 그 와중에도 오솔이 3골을 넣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현재까지 3골을 기록 중인 선수들은 포돌스키와 크레스포, 로드리게스 그리고 토레스로 그 면면이 화려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득점 선두를 달리는 건 4골을 집어넣은 클로제였다. 오솔은 이미 그와 리그 공동 득점왕을 받은 적이 있었다. 기록만 놓고 봐도 오솔은 이미 세계 정상급 스트라이커인 것이다.
[19살에 이 정도 활약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않아?]
[응, 메시도 있어.]
[포돌스키나 호날두, 루니도 있음.]
[내 말이 그 말이야. 지금 언급한 선수 중에 빅클럽 아닌 곳에서 뛰는 선수가 어디 있냐고. 오솔도 나중에 레알이나 바르샤 가는 거 아니야?]
[루카스 포돌스키 = 강등팀 FC 쾰른 소속]
[이젠 바이에른 뮌헨이거든!]
[그나저나 득점왕은 조금 힘들겠다. 경쟁자들이 다 강팀 선수들이네. 분데스리가랑 UEFA컵 득점왕 먹었다고 해서 기대 좀 했는데…….]
[득점왕? 그것도 팀이 받쳐줘야 가능한 일이지. 남들보다 더 적게 뛰고 득점왕이 되는 게 가당키나 함? 게다가 하필이면 8강 상대가 빗장수비로 유명한 이탈리아임. 당장 승리도 장담할 수 없는데 득점왕이 말이 됨? ㅋㅋㅋ]
득점왕이 되려면 적어도 팀이 결승전에는 올라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운 좋게 올라온 약팀을 만나 골을 쓸어 담거나.
[이탈리아면 4년 전에 16강에서 만났던 놈들이잖아? 이번에는 8강에서 만났네.]
[녀석들…… 제법 강해져서 돌아왔군.]
[이 자식들, 2002년 때 젖병 물고있던 티를 팍팍 내네. 하이라이트만 보니까 이탈리아가 우습냐? 그때 경기를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절망적이었는데. 개놈들 툭하면 팔꿈치로 찍어대고, 토티랑 비에리는 수시로 돌파해서 계속 1대1 찬스 허용하고…….]
[하긴, 우리가 이긴 건 진짜 기적이었어. 그때 비에리가 놓친 기회가 엄청 많았잖아.]
[큰일이네. 이탈리아 놈들, 이번에 제대로 복수하겠다고 이를 갈고 있던데…….]
* * *
“큰일이네요. 중원이 완전히 무너졌어요.”
우크라이나전 다음날 아침. 핌 베어벡 코치와 아드보카트 감독은 쉬지도 못하고 골을 싸매고 있었다.
“왼쪽은 페로타가, 오른쪽은 가투소가 완벽하게 틀어막고 있습니다. 피를로와 토티는 앞뒤에서 게임을 풀어나가고, 카모라네시의 돌파에 이은 루카 토니의 헤딩은 단순히 위협적이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선수들의 체력 상태는 어떠한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좋지 않습니다. 특히나 이은령과 김남준의 회복이 더딥니다. 가투소나 페로타를 상대로 적절히 대응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음…….”
아드보카트 감독은 한참 동안 전술판을 바라보더니 박해진의 이름을 피를로 옆에 붙였다.
“박해진은 이미 에이트호번에서 뛸 때 피를로를 마크한 적이 있지.”
박해진이 피를로의 경기 운영을 방해할 수만 있다면 조금 더 수월한 경기가 가능할 것이다.
“토티는 여민국에게 맡긴다.”
실력과 체력, 모든 면에서 여민국 외의 대안이 없었다. 그들의 시선은 이제 왼쪽으로 향했다.
“카모라네시는 이영신이라면 막을 수 있을 거야. 문제는 참브로타로군 그를 막으려면 왼쪽 날개의 활동량이 중요하겠는데?”
“그렇다면 고영주를 기용하기보다는 설현민을 왼쪽으로 돌리는 편이 더 낫습니다.”
안타깝게도 고영주는 박해진이 없는 왼쪽을 사수하지 못했다. 활동량과 몸싸움에서 부족함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중앙에 남은 한자리는 김삼식을 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으음. 아니야. 조금 힘들어도 김남준이 뛰는 편이 나아.”
아드보카트 감독은 김삼식에게 완전히 신뢰를 잃은 듯했다. 그만큼 16강전에서 그가 저지른 실수가 어처구니없었다.
“원톱은 오솔로 하고.”
오솔의 이름은 아까부터…… 아니, 시작부터 전방에 놓여 있었다. 실력도 뛰어나고 체력적인 문제점도 보이지 않았으니 그를 뺄 이유가 없었다.
“괜찮을까요? 상대는 칸나바로와 마테라치인데요.”
“괜찮아. 충분히 버틸 수 있어.”
아드보카트 감독은 오솔의 이름표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주어진 역할 이상을 해주는 선수, 그런 선수를 좋아하지 않을 감독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참브로타와 카모라네시의 측면 공격에 집중하느라 반대편에 있는 파비오 그로소를 간과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파앙!
철썩!
[아…… 전반전 20분 만에 실점하고 마는 대한민국 대표팀입니다.]
[너무 안타깝네요. 이번 실점은 골을 넣은 선수만 바뀌었다 뿐이지, 2002년에 비에리 선수에게 실점했던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파비오 그로소 선수, 기뻐하고 있습니다. 측면 수비수임에도 190㎝의 장신이라 막기가 까다롭겠다 싶긴 했는데, 이 선수가 기어이 일을 저지릅니다.]
[보시면 우리 선수들은 루카 토니와 마테라치를 막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제기랄! 또냐?’
2002년 멤버 전원의 머릿속에 울린 외침이었다. 그들은 모두 이른 시간에 선취골을 내주고 남은 시간 내내 고생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이 자식들, 또 잠그고 역습 위주로 나올 텐데…….’
이탈리아와 같은 강팀이 선 수비 후 역습으로 나오면 한국처럼 공격력과 수비 조직력이 약한 팀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를 극복할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공격 기회를 살려서 득점까지 연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비가 너무 탄탄하다.’
라인은 잔뜩 내려가 있고, 오솔은 마테라치가 밀착 마크하고 있다. 혹 그를 뚫는다고 해도 칸나바로가 바로 커버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 빈틈이 없었다.
중거리 슛도 각도가 안 나오고, 측면을 파고들 공간도 없었다. 결국 한국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측면 윙백들의 대각선 크로스가 전부였다.
[오솔 선수의 헤딩! 아! 머리를 가져가는 데는 성공했습니다만, 부폰 골키퍼가 침착하게 잡아냅니다.]
[그렇지만 대단하네요, 오솔 선수. 저렇게 상대편이 빽빽이 들어찬 곳에서 헤딩슛까지 성공하다니요.]
방금 오솔이 선보인 것은 밖으로 빠져나오면서 골대 쪽으로 하는 헤딩이었다. 당연히 위력도 떨어지고 부정확한 헤딩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오솔은 그중 몇 개는 부폰이 깜짝 놀랄 만큼 위협적인 슈팅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만큼 95에 이르는 헤딩은 위력적이었다.
“푸헤!”
오솔은 득점에 실패했음에도 웃음을 흘렸다. 그것도 주변에서 들릴 만큼 충분히 큰 소리로 말이다. 하긴, 애초에 들으라고 낸 소리였으니 큰 것이 당연하다.
“전혀 못 막죠? 아무것도 못하죠?”
“이, 이 새끼가…….”
오솔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마테라치가 있었다. 신기하게도 시합에서 이기고 있는 것은 이탈리아였으나 마테라치는 오히려 지고 있는 사람처럼 분을 참지 못했다.
“미안해서 어쩌나, 헤딩 경합에서 한 번도 못 이겼네?”
“겨우 한두 번 이겨놓고 기고만장하기는!”
“아~ 네스타가 부상만 아니었어도 재밌었을 텐데, 넘나 시시한 것!”
“착각하고 있나 본데? 지금 지고 있는 건 너희들이야. 이 개고기나 먹는 야만인들아.”
“응~ 원한다면 개를 발라줄게. 아, 이미 체험 중이었나?”
“이…… 미개한 동양인 주제에 말만 번지르르하긴! 너희 같은 놈들은 월드컵에 참여할 자격도 없어. 더러운 돈으로 심판을 매수하는 새끼들이 어딜 기어들어와?”
“키야! 내로남불 오졌다리~ 칼치오폴리 스캔들은 어디서 일어났더라? 게다가 미개한 동양인한테 아까부터 계속 지고 있네? 어떻게 팀원들한테 얹혀서 8강까지 왔지만 실력이 다 들통나 버렸쥬? 인정? 어, 인정~”
“이, 이 개…….”
“개 좋다면서 욕은 꼭 개를 들먹이면서 하네? 진정한 애견인이야.”
오솔은 얄밉게 놀린 후 슬쩍 밑으로 내려갔다. 상대를 놀리는 것 못지않게, 분노할 시간을 주는 것도 중요했다.
‘칸나바로는 흔들기 쉽지 않아. 반면에 마테라치는 다혈질이라 흥분하면 과한 수비가 나올 확률이 높지.’
그리고 위험지역에서의 반칙은 상대방의 카드를 유도하는 동시에 프리킥이나 잘하면 페널티킥까지 얻어낼 수 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골을 만들어갈 수 없어. 결국 세트피스를 얻어내는데 집중해야 해.’
지금처럼 플레이 메이커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이게 정답이었다.
‘물론 살인태클은 좀 조심해야겠지만 말이야.’
마테라치는 하비 나바로 못지않은 더티 플레이의 장인이었다. 태클 높이도 발목뿐만 아니라 무릎까지 올라가는 미친놈 중에 상(常)미친놈이었다.
하비 나바로의 경우처럼 위기 상황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긴장을 최대로 유지해야 했다. 물론 그 와중에 도발도 계속 넣어야하고 말이다.
“풉!”
“푸헤!”
“푸헤헤!”
오솔은 이후에도 경합에서 이길 때마다 경박하게 웃으며 마테라치의 신경을 긁어댔다.
칸나바로는 혹시나 마테라치가 폭발할까 싶어서 계속 그를 진정시켰으나, 그것도 후반전에 이르자 슬슬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자칫 퇴장이라도 당하면 큰일인데…… 당장 4강 상대가 독일이란 말이야.’
그러나 마테라치쯤 되니까 오솔을 막고 있는 것이지 칸나바로도 오솔을 막으라고 하면 자신이 없었다. 두 사람은 그만큼 피지컬에서 큰 차이가 났다.
그렇게 오솔이 마테라치를 충분히 흔들었다 싶었을 때, 마침내 아드보카트 감독도 공격적인 카드를 꺼내 들었다. 2002년 이탈리아전에서 골든골의 주인공, 안태환을 투입한 것이다.
“이제 반격이다. 오솔!”
“조심해요. 뒤에 미친개가 거품을 많이 물었어요.”
“마테라치의 성격이라면 나도 잘 알고 있어.”
안태환은 설현민을 대신해서 좌측 날개로 뛰었다. 그는 전문적인 측면 자원은 아니었으나 반대발 윙 포워드처럼 안쪽으로 접으면서 슈팅 각도를 만드는 것에 능했다.
[박해진이 안태환에게! 안태환! 접었어요!]
[슈우우웃!]
안태환은 그러한 기대대로 참브로타를 가볍게 따돌리며 기습적인 슈팅을 시도했다.
오솔은 혹시나 튕겨져 나올 공을 기대하며 문전으로 쇄도했고, 그런 그를 막기 위해 마테라치가 따라붙었다.
터억!
부폰은 공은 품에 안으려 했으나 너무 강한 속도 때문에 제때 잡지 못했다.
공은 페널티 마크 쪽으로 굴러갔고, 그곳에는 서로에게 팔꿈치를 휘둘러가며 돌진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타다닷!
마테라치의 발이 더 길었다. 그러나 달리기 속도는 오솔이 더 빨랐다.
“하앗!”
두 사람의 몸이 슬라이딩 태클을 연상케 할 정도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이윽고 누구의 발에 닿았는지 분간하기 힘들만큼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공을 찼다.
톡!
공은 데굴데굴 굴러 골대 쪽으로 향했다.
부폰이 엎드린 상태에서 억지로 몸을 날렸으나, 골키퍼 장갑은 공이 지나간 공간만 휘젓고 말았다.
와아아아!
오솔은 터지는 함성을 배경으로 골망에 들어가 있는 공을 확인하고, 이어서 부심을 바라봤다.
깃발은 올라가지 않았다.
그는 이어서 주심을 돌아봤다.
‘센터마크!’
주심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센터마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