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105화
“자신감 하나는 보기 좋다.”
안태환은 픽하고 웃었다. 자신만만한 오솔의 모습을 보자 문득 처음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었을 때가 떠오른 것이다.
때는 1997년 4월 23일, 상대는 중국이었다. 그는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날씨와 잔디의 상태, 같이 뛰었던 동료들의 얼굴까지 생생했다.
어디 그뿐인가. 그때 느꼈던 감정, 품었던 생각도 잊지 않았다.
당시 그는 국제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알려서 유럽에 진출하고 말겠다는 포부가 가슴에 가득 들어찬 젊은 야심가였다.
‘그래, 나도 이럴 때가 있었지. 하하. 그게 벌써 9년 전이구나.’
넘치는 자신감으로 이탈리아 무대를 누비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그도 30줄에 들어서서 모든 일에 걱정이 앞서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이나 남미 선수들이라면 경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기가 죽었는데…….’
당시 한국은 프랑스 월드컵까지 4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해내며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월드컵 조별리그에 들어가면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1998년에는 멕시코에게 3 대 1로 무너졌고, 네덜란드에게는 치욕스러운 5 대 0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감독이 도중하차라는 초유의 사태까지 일어났다. 그리고 만난 벨기에전에서는 살이 터지고 피가 흐르는 분투를 보였음에도 결국 무승부에 그치고 말았다.
아무리 사력을 다해도 1승을 기록하지 못한 것이 그들의 현실이었다.
‘시대가 바뀌긴 했나 보네. 나 때에는 월드컵 1승이 목표였는데, 어느덧 16강을 목표라고 말할 정도라니…….’
냉정하게 말하면 한국은 아직도 약팀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야 ‘지난번에 4강을 갔으니 이번에는 적어도 16강은 가야지.’라고 말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한국의 4강은 2004년 유로에서 그리스가 우승한 것처럼 역대급 이변이자 깜짝 성적일 뿐이었다.
“자신감은 좋은데 그렇다고 너무 자만하지는 마. 지난번의 성적은 솔직히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어. 모든 경기가 우리 안마당에서 펼쳐진 경기들이었고, 장시간 훈련으로 체력과 조직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린 상태였지.”
“…….”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도 다른 국가와 똑같은 조건이야. 아니, 오히려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니 더 힘들다고 할 수 있지. 게다가 국민들의 기대가 이만큼이나 상승해서 오히려 부담감은 더 심해졌어. 절대 쉽지 않을 거야.”
“자만하는 일은 없으니 그건 걱정 마세요. 지금 굉장히 냉정하게 전력을 분석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나온 결론이 16강이야?”
“할 수 있다면 4강을 재현하고 싶은데, 일단은 16강을 목표로 달려봐야죠. 요즘 월드컵 대체복무를 두고 말이 많다면서요. 그런 말이 안 나오게 하려면 그만큼 보여줘야죠.”
안태환이 봤을 땐 자만심에 가까운 과도한 자신감이었으나, 더는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도 오늘 경기를 치르면서 느꼈던 것이다. 오솔이 이전 세대와는 차원이 다른 선수라는 사실을.
“어쩌면…… 그래, 아무튼 가장 중요한 건 다치지 않는 거야. 지난달에 국동이가 다쳤다는 소식은 들었지? 이런 상황에서 너까지 빠지면 큰일이니까 조심해. 이제는 한 달밖에 안 남았어.”
“그것도 걱정 마세요. 제 사전에 부상이란 단어는 없으니까요.”
오솔이 너무 자신만만한 모습만 보여서일까 안태환의 얼굴에는 오히려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 * *
다음날 오전, 함부르크의 선수단 전체가 회의실에 모였다.
원래라면 경기 다음날은 푹 쉬게 해주지만 오늘은 전날 경기를 뛰었던 선수들까지 모두 있었다.
토마스 돌 감독은 작은 헛기침과 함께 말을 시작했다.
“원래 오후쯤 모일까 했지만 시간이 부족하다는 판단에 일찍 소집했다. 이유는 다들 알고 있겠지?”
“UEFA컵 결승전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죠.”
반 바이텐이 특유의 굵은 목소리로 답했다. 결승전이라는 말에 지쳐있던 선수들의 자세가 바로 섰다.
“그래. 정확히는 우승 트로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서다.”
몇몇 선수들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앞만 보며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덧 여기까지 왔다. 이제 딱 두 발자국만 더 옮기면 ‘UEFA컵 우승과 리그 우승, 동시 달성’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하지만 결승전 상대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건 다들 알고 있겠지?”
감독의 신호에 스크린에 화면이 떴다.
흰색과 붉은색이 섞여있는 삼각 방패 모양의 엠블럼과 Sevilla FC라는 명칭.
프리메라리가의 강팀, 세비야 FC가 그들의 결승전 상대였다.
“다행히 결승전 장소는 그렇게 멀지 않다. 네덜란드의 에인트호번이지.”
제3의 장소에서 치러지는 결승전이었지만 스페인에서 와야 하는 세비야에 비하면 그들이 훨씬 가까웠다.
돌 감독은 가볍게 웃었다. 사소하지만 조금이라도 이득을 보고 시작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상대의 진형이다. 4-4-2 기본형이지.”
4-4-2 기본형은 4-3-1-2에 비해 측면에서 수적 우위를 얻기 쉬웠다. 물론 4-3-1-2는 반대로 중원에서 이득을 보기 쉽다.
“상대는 측면을 주로 활용해서 공격을 전개할 거야. 특히나 이곳, 오른쪽 라인의 돌파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
화면에 두 선수의 전신사진이 떠올랐다. 푸른 눈의 백인 미청년 헤수스 나바스와 잔 수염이 얼굴을 가득 덮고 있는 까무잡잡한 사내, 다니 아우베스였다.
“역습 상황에서 헤수스 나바스의 돌파도 무섭지만 진짜는 이쪽이다.”
토마스 돌 감독은 다니 아우베스의 사진을 톡톡 쳤다. 스크린이 흔들린 탓에 다니 아우베스가 달려드는 모습이 한층 실감이 났다.
“브라질리언답게 드리블 실력도 좋고, 스피드도 수준급이라 상당히 위협적인 돌파를 보여주는 선수다. 크로스의 정확성도 대단히 높아서 단순히 돌파만 신경 쓸 수도 없는 노릇이지.”
오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 아우베스면 향후 10년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오른쪽 윙백이라는 평가와 함께 ‘카푸의 후계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선수였다. 2006년에도 이미 비슷한 평가를 받고 있어서 빅클럽들의 영입 제안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 녀석을 막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
화면이 바뀌고, 다니 아우베스의 분석 영상이 펼쳐졌다. 아니, 스페셜 영상이라고 말을 붙여도 좋을 법한 영상이었다.
다니 아우베스는 호나우지뉴의 돌파를 저지하고, 델 오르노를 가볍게 제친다.
크로스는 빠르고 정확해서 공격수들이 머리만 갖다 대면 골이 되었고, 패스는 정확·정교했으며, 어쩌다가 시도하는 중거리 슛도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자세히 보면 측면 돌파와 크로스가 주 득점 루트인 걸 알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상대 투톱의 키가 크기 때문에 더 위력적이지. 프레데리크 카누테는 193㎝의 장신이고, 루이스 파비아누도 185㎝로 만만치 않게 크다.”
다행히 카누테 같은 경우는 이번 시즌 들어서 부진을 거듭하고 있었으나, 파비아누는 2경기 당 1골 수준으로 골을 넣으면서 좋은 경기력을 보이고 있었다.
“상대의 공격수나 중앙 미드필더, 왼쪽 라인도 만만치 않은 상대들이지만, 그동안의 경기를 보면 오른쪽에서 크게 흔들리면서 다른 곳까지 연쇄적으로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설명을 듣는 티모테 아투바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저들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다행히 스태프들이 놀고 있지만은 않았는지 바로 대처법이 나왔다.
“만주키치.”
“예.”
“다니 아우베스는 네가 맡는다. 중앙으로 들어오는 것보다는 왼쪽 측면에서 계속 상대의 공격을 막고, 공격 시에도 그 자리에서 타깃맨 역할에 집중하는 것이 네 역할이다. 아니, 일단은 공격은 잊고 상대를 막는 것에 집중해라.”
“네…….”
대답을 하는 만주키치의 얼굴이 영 좋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수비력이 좋은 선수라고 해도 엄연히 공격수인데, 웬만한 수비수들은 가볍게 털어버리는 다니 아우베스를 막으라니 너무 힘든 역할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다행히 그러한 생각은 감독 또한 하고 있었다.
“물론 만주키치 혼자서는 막기 힘들다. 그러니 만약 상대가 전진한다 싶으면 나이절 더 용이 바로 협력 수비를 가준다.”
선수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윙백 하나를 막기 위해 두 사람이나 동원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쨌든 특단의 조치 덕분에 만주키치는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에도 공격은 오솔과 반 더 바르트가 도맡아서 하는 건가? 후…… 조금 부럽네.’
그렇게 만주키치가 아쉬워하고 있을 때 돌 감독이 말을 이었다.
“아마 만주키치는 경기 내내 왼쪽을 벗어나지 못할 거다. 자연히 최전방에는 오솔 혼자 남게 되겠지. 오솔, 네가 해줘야 할 일들은 평상시와 크게 다를 게 없다. 다만…….”
돌 감독은 설명을 하다 말고 화면을 전환했다. 다니 아우베스의 스페셜 영상이 지나간 자리에는 이제 긴 머리를 치렁거리는 남자의 얼굴이 덜렁 남았다.
“이놈은 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름은 하비 나바로. 별명은 미스터 까브론(Mr. Cabrón)이다. 우리말로 개자식이란 뜻이지.”
그런 별명이 붙은 이유는 이어진 동영상으로 단번에 설명할 수 있었다.
“작년 3월 20일에 있었던 경기다.”
화면은 공을 향해 달려드는 두 선수를 담고 있었다. 마요르카의 후안 아랑고와 하비 나바로였다.
만주키치는 화면을 자세히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쌍욕을 별명으로 달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다닷!
전력으로 달려드는 두 사람. 공은 후안 아랑고의 발에 먼저 닿았다. 그러나 하비 나바로는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았다. 그는 길게 뻗은 발을 끝까지 휘둘러서 아랑고의 허벅지를 그대로 걷어찼다.
‘오우. 살벌하네…… 일부러 찬 건가?’
만주키치가 측면으로 빠진 게 다행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쯤 돌 감독이 화면을 다시 감았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재생했다.
“후안 아랑고의 얼굴 쪽을 집중해서 봐라.”
‘얼굴? 다리가 아니고?’
만주키치를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하비 나바로는 팔꿈치를 높이 들어서 아랑고의 턱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장면을.
“미친, 저거 뭐야?”
“이런 씨…… 완전히 작정하고 휘둘렀잖아?”
웅성임 사이로 영상이 계속 진행됐다. 불쌍한 아랑고는 경기장에 쓰러져서 의식을 잃었다.
하비 나바로는 팔꿈치를 휘두를 때는 언제고 뒤늦게 아랑고의 혀가 말려들어가지 않게 응급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다니 아우베스를 잘 막아야겠다.’
만주키치는 측면의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동시에 저런 양아치를 상대해야 하는 오솔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화면은 계속 이어졌다. 계속되는 장면들은 다니 아우베스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스페셜 했다. 그곳에는 욕과 침은 물론이고 방금 봤던 팔꿈치 사용, 쓰러진 상대의 발목을 밟는 장면 등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더티 플레이가 모여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안태환에게 부상은 걱정 말라고 큰소리쳤던 오솔도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미친개에게 걸렸구나.’
축구판에는 별별 거친 놈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상식이 있고, 적당히 라는 것을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저렇게까지 미친놈에게는 답이 없었다.
‘미친개를 이기는 방법이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솔이 주로 썼던 방법은 상대가 이빨을 들이밀 때 빼지 않고 마주 물어뜯는 것이었다.
‘이제 곧 아빠가 되니까 최대한 자재하려고 했는데…… 상대가 저런 놈이라면 어쩔 수 없지.’
오솔은 이번 경기에서만은 옛사람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주님, 이번만은 정의로운 뚝배기 브레이커가 되는 걸 허락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