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94화 (94/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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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과천선 스트라이커 94화

18장 함부르크에 남고 말겠어

2005-06 분데스리가 전반기 신인상과 베스트 11 선정.

이 소식은 오솔보다 먼저 한국에 도착했다. 덕분에 그에 대한 평가는 ‘막 국가대표에 승선한 무서운 10대’에서 한순간에 ‘역대급 재능의 스트라이커’로 바뀌었다. 금의환향이란 표현이 딱 어울리는 귀환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공항이 휑하지만…….’

대표팀 소집처럼 정해진 일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 공항에 찾아온 기자들은 없었다. 뭐, 덕분에 여민주를 비롯한 청송고 친구들과 편히 만날 수 있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솔아, 여기야!”

오솔은 두 팔을 벌리며 그대로 여민주를 품에 안았다. 옆에서 같이 환영하던 이승훈, 황태곤의 입이 댓 발 나왔다.

“너무하네. 기껏 훈련까지 빠지고 나왔더니, 여친 있다고 찬밥 취급하기냐?”

“어? 뭐야, 너희 왔었냐?”

“야. 이래서 내가 오지 말자고 했잖아.”

“농담이야. 짜식들아. 나와줘서 고맙다.”

이제 오솔은 고맙다는 말도 곧잘 했다. 황태곤이 괜히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됐고, 밥이나 사.”

“밥 안 먹었어? 그럼 날도 쌀쌀한데 국수나 먹으러 갈까?”

“국수? 갑자기 웬 국수야?”

“그런 게 있어.”

오솔은 어리둥절해하는 친구들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자세한 이유는 청첩장이 나오면 알려줄 것이다.

그날 저녁, 그는 친구들과 같이 학교 근처의 고깃집을 찾았다. 고교 시절 전국대회에서 활약한 다음 날이면 버릇처럼 찾았던 그 집이었다.

‘아니지. 아직은 졸업하기 전이구나?’

오솔은 부득이하게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지만 친구들은 아직 학교에 속해 있었다. 물론 이미 K리그 구단과 계약한 녀석도 있었고, 안타깝게도 2부, 혹은 3부 리그를 알아보는 녀석도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모두 고등학생 신분이었다.

‘어쩌면 오늘 이후로 이렇게 다 같이 모이는 건 힘들지도 모르겠네.’

오솔은 왠지 모를 기분에 휩싸였다. 전생과는 달리 이번에는 동창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괜히 소주가 그리워지는 기분이었다.

“참, 분데스리가는 어때? 엊그제는 클로제랑 붙었다면서?”

축구를 업으로 삼는 녀석들이라 다들 유럽 축구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오솔은 그냥 느낀 그대로 말했다.

“기술이 좋은 프랑스인과 네덜란드인, 그리고 힘이 좋은 독일인이 적절히 섞인 곳이야. 가끔 남미 쪽이나 아시아 선수도 있고. 뭐, K리그랑 크게 다를 건 없어.”

담담한 말투에도 질투심이 강한 몇몇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오솔이 K리그를 겪어보지도 않고 단정하듯 말한 것에 빈정이 상한 것이다. 그러나 오솔은 아는지 모르는지 할 말만 쭉 이었다.

“다만 동업자 의식은 좀 덜한 것 같더라. 내가 용병이라 그런지 아니면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힘으로 찍어 누르려는 시도를 많이 하고 태클도 상당히 거칠게 들어와. 알아서 피하든지 아니면 집에 돌아가라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하는지 뒤에 붙어서 욕설과 무시, 때로는 인종차별적인 말을 걸기도 하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던 놈들의 얼굴이 싸늘히 식어버렸다.

오솔은 학창 시절 월등한 실력을 바탕으로 팀의 승리를 이끌었던 녀석이었다. 질투심은 났지만 그럼에도 그의 실력은 인정하고 있었다. 심지어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역대급 재능이라고까지 불리지 않는가.

그러나 그런 오솔도 유럽에서는 그저 용병, 그리고 이방인이었다. 불편하고 때로는 적대적이기까지 한 환경에 적응하려고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는 중이었다. 오솔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하긴 유럽 애들은 골격부터가 장난 아니던데. 완전히 통뼈잖아, 그 자식들.’

‘특히나 독일이면 체격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니.’

‘경기하는 거 보니까 태클이 살벌하기 하더라.’

‘제길. 나는 전국대회에서도 다칠까 봐 전전긍긍했는데…….’

오솔의 말들이 단순한 자기 자랑으로 들리지 않는 건, 이 모든 것이 그저 허세가 아니라 이미 행동으로 증명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자신들과 같은 19살임에도 그는 몇 살 위의 선수들과 대등한…… 아니, 그들보다 더 뛰어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한편 오솔도 대화를 하면서 새삼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비록 함부르크에서는 팀의 새로운 스타로 인정받고 있었으나, 다른 지역으로 원정을 갈 때면 공을 잡을 때마다 폭언과 야유가 쏟아지곤 했다.

물론 그가 주축 공격수이니만큼 경계한다는 의미였겠으나, 그 이면에는 아시아에서 온 축구 선수를 깔보는 마음도 숨겨 있었다.

‘용병이라…… 클로제가 나한테 말을 건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일지도 모르겠네.’

클로제는 원래 폴란드 태생이었다. 그러다가 9살 무렵에 아버지를 따라 독일로 이민을 왔고, 언어조차 익숙지 않아서 어린 시절에 따돌림 비슷한 것을 당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이 사람 좋은 남자는 그래서 오솔에게 말을 걸고 친근하게 대했을지 모른다.

“뭐, 나도 똑같이 해주니까 상관없어. 팔꿈치를 쓰면 나도 옆구리에 하나씩 박아주고, 욕을 하면 나도 한국어로 갚아주면 돼. 그러니까 이만 표정들 풀어. 걱정할 필요 하나도 없어. 솔직히 내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스타일은 아니잖아.”

“흐흐. 하긴, 때리면 때렸지 맞진 않을 거야.”

“자, 내 얘긴 이쯤 하고 이제 너희들 얘기 좀 해봐. 나 없는 동안 무슨 재밌는 일 없었어?”

“재밌는 일? 참, 네 플래카드가 학교 정문에 걸렸다. 그것도 엄청 크게!”

“아, 그런 거 쪽팔린데…….”

오솔이 눈살을 찌푸리자 이승훈이 실실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야. 분데스리가 진출로 한 번, 그리고 국가대표 발탁으로 또 한 번. 이제 분데스리가 신인상을 탔으니 세 번째 플래카드가 걸리지 않을까 싶은데?”

“난 네가 어디 출마하는 줄 알았어.”

하하하! 오솔은 인상을 쓰다 말고 피식 웃어버렸다.

“어쩔 수 없지. 그렇게라도 해서 내년에 신입 부원이 많이 들어오면 그만큼 좋은 거니까.”

오솔의 이름이 알려진 다는 것은 곧 그를 키워낸 이탁수 감독의 지도력 역시 인정을 받는다는 걸 뜻했다.

모임이 끝나고 오솔은 여민주의 집 앞에 도착해서 품을 뒤적거렸다. 한국에 오기 전, 급하게 준비한 반지를 꺼내기 위함이었다.

곧이어 작지만 반짝이는 반지가 모습을 드러내고, 정교하게 세공된 보석이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영롱하게 빛났다.

여민주는 우아하게 손을 내밀어야 할 타이밍에 양손을 모아 접시를 만들었다. 반지가 너무 고급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손이 공손해진 것이다.

“푸흡! 그러지 말고 손을 대. 내가 끼워줄게.”

“아, 뭐야. 나 방금 너무 이상했지? 무슨 사탕 주세요도 아니고. 내가 왜 그랬지?”

“흐흐. 나는 한 푼만 주세요라고 하는 줄 알았어.”

“죽을래?”

“빠, 빨리 손 내밀어봐. 끼워보자.”

오솔은 급히 관심을 돌렸고, 다행히 여민주의 시선은 금방 반짝이는 것으로 향했다.

‘예쁘다…….’

반지는 예뻤다. 그러나 엄청나게 비싸 보였다.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사람이 끼기에는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물건이었다.

“저번에 준 반지도 아직 잘 있는데 왜 또 샀어?”

“그건 학생 때 한 거잖아. 이건…….”

“난 그것도 예쁘고 좋은데.”

“혹시 부담이 돼서 그래?”

“아니, 너무 작아서…….”

“엥? 작아?”

오솔의 눈동자가 땡그랗게 변했다. 꺄르륵! 여민주는 산새처럼 맑게 웃었다. 남자 친구를 놀리는 것은 그녀의 소소한 기쁨 중 하나였다.

“난 이런 반지 말고 더 큰 게 갖고 싶어.”

“어떤…….”

“예를 들면 유러피언 골든슈 같은 거!”

여민주의 눈동자가 보석 못지않게 반짝였다.

“분데스리가는 다른 곳보다 경기 수가 적어서 유러피언 골든슈는 받기 좀 힘들걸?”

“그래? 그럼 분데스리가 골든슈로 하자.”

“분데스리가 득점왕도 쉽지는 않아. 그리고 내가 알기로 분데스리가는 신발이 아니라 대포 모양의 트로피로 주는데?”

“그것도 싫으면 월드컵 골든슈로 할래?”

“……분데스리가 득점왕으로 합시다.”

“좋아, 약속한 거다! 득점왕 꼭 해줘야 돼!”

“후후. 좋아. 대신에 이 반지는 받아. 딱히 무리한 것도 아니니까 괜히 부담 갖지 말고.”

“……알았어. 그 대신 이게 끝이야! 또 사 오면 진짜 안 받을 거야.”

“네, 네.”

오솔이 건성으로 대답하며 문을 열었다. 여민주가 두 눈을 깜빡이자, 그가 어울리지 않게 윙크를 보냈다.

“가자. 아버님이랑 어머님을 설득해야지.”

“아…… 응!”

두 사람은 나란히 집에 들어섰다.

* * *

1월 15일. 오솔은 생전 처음으로 결혼식장에 발을 딛게 되었다.

여민주의 부모님…… 아니, 이제는 장인어른과 장모님으로 불러야 맞을 것이다. 어쨌든 오솔의 장인, 장모는 두 사람의 결혼을 큰 반대 없이 승낙했다. 이른 나이에 딸이 집을 떠난다는 것만 제외하면 오솔과의 혼인은 매우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일단 둘이 서로 죽고 못 사는데다가 오솔은 요즘 한창 뜨는 축구 선수로 장래가 유망했다. 그리고 이전에 같이 며칠을 지내면서 그의 사람의 됨됨이도 겪어봤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론은 ‘반대할 이유가 없다’였다.

덕분에 두 사람의 혼인은 착착 진행됐다. 복잡한 절차는 빠르게 생략했고, 비수기라 늦지 않게 예식장을 잡는 데에도 성공했다.

조금은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느낌이었으나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근 15년 만에 꿈이 이루어졌다는 생각에 오솔은 기쁘기 그지없었다.

‘아쉽게도 신혼여행은 못 가게 됐지만…….’

어느덧 후반기 시작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여행은 불가능했다. 여민주는 아쉬울 법도 하건만 ‘독일에서 신혼 생활하는 건데 유럽 여행이나 다름없지!’라며 해맑게 웃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덕분에 신이 난 것은 여민주의 부모님이었다.

“하하하! 아니, 글쎄. 우리 사위가 괌에 갔다 오라며 비행기 티켓을 쓱 내미는데, 아유~ 난 별로 가고 싶지는 않은데, 또 취소하면 손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기로 했지 뭐야.”

장인어른의 입이 시종일관 귀에 걸려 있었다.

“원래는 지중해 쪽도 생각을 했다는데, 거기는 너무 멀잖아. 괌 정도가 딱 괜찮지! 아, 이 사람아 그럼 비행기 표만 줬겠는가? 당연히 용돈도 다 챙겨줬지. 하하하!”

물론 두 분만 모시는 건 아니었다. 이번 여행은 오솔의 어머니와 동생도 같이하게 되었다. 가족들이 다 같이 가는 여행인 셈이다.

‘…….’

오솔이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다. 고영주였다.

“결혼 축하해. 축의금은 두둑이 넣었다.”

“진짜요? 나중에 다 확인할 겁니다.”

“사람을 좀 믿어라. 아무튼 적지 않게 챙겼으니까 이번에 잘 좀 부탁한다.”

“알았어요. 최대한 도와드릴게요. 대신 기회를 살리는 건 알아서 해야 하는 거 알죠?”

“당연하지.”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사흘 뒤에 있을 A매치에 관련된 것이었다.

1월 18일에 잡혀 있는 아랍에미리트 연합국(이하 UAE)에 해외파로서는 유일하게 오솔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자 선발이 유력해진 고영주가 골 기회 좀 만들어달라며 로비 아닌 로비를 한 것이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 후반기 시작까지 얼마 안 남았잖아. 23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어차피 돌아가 봐야 친선경기나 치르고 있을 텐데, 그 시간에 국가대표 경기를 치르는 편이 더 나아요.”

“힘들지 않겠어?”

“괜찮습니다. 어차피 두바이에서 치러지는 거니까 거리상으로 가깝기도 하고, 나흘이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으니까요.”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워낙에 체력 하나만큼은 타고났으니까.”

원래대로라면 오솔은 지금쯤 독일에 돌아가서 새로운 팀원들과 합을 맞추며 친선경기를 치러야 했다. 한 달이나 쉬었기 때문에 조직력을 다시 끌어올리려면 그만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솔로서는 이번 A매치로 얻을 수 있는 경험치가 너무 아까웠다. 마침 한국에 들어와 있었고, 결혼식 때문에 오늘까지는 머물러야 하는 상황. 어차피 합류가 늦은 거 중간에 UAE에 들러서 A매치까지 치르고 싶었다.

오솔은 그 길로 에이전트인 쇠렌 레르비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고, 다행히 구단의 양해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

‘이번에는 레르비 씨가 일을 깔끔하게 잘 처리했어.’

아마 그의 위상이 팀의 핵심 선수로 올랐다는 점이 협상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조금은 무리한 부탁이었음에도 구단이 90분 출전을 허락했으니 말이다.

‘내 회복력을 믿고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

함부르크에서 오솔을 어린 선수로 보는 이는 없었다. 그는 이미 신체적으로는 웬만한 성인들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고, 적어도 한 시즌에 50경기까지 소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마저 나오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벌써부터 몸값 올리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용을 조금 부풀렸을지언정 그러한 평가가 완전한 허구는 아니었다. 아니, 실상을 알고 보면 오히려 과소평가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강인함 수치가 96이다, 이놈들아. 박싱데이도 웃으면서 소화하는데, 겨우 일주일에 두 경기, 그리고 비행기 한 번 탔다고 힘들겠냐?’

그리고 그날 밤.

오솔은 자신의 회복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제대로 증명해 보였고, 시스템 역시 그 사실을 인정했다.

-강인함이 1 상승합니다.

-강인함 수치가 92(+5)에 도달합니다.

침대 위로 한정하면 오솔은 네드베드이자 지단이었으며, 동시에 게르트 뮐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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