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90화
이어지는 16라운드 뒤스부르크전. 함부르크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상대는 리그 최하위로 처져 있는 팀. 아무리 그들이 발톱을 세운다고 해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상대가 공격적으로 나오길 바랐다.
그러나 뒤스부르크는 추운 겨울날 두꺼운 옷을 껴입은 사람처럼 두 겹의 단단한 수비 라인을 구성하고 나왔다. 하노버처럼 텐 백을 구사한 것이다.
5명씩 두 줄로 선 모습은 흡사 두 대의 버스로 길을 완전히 틀어막은 듯했다.
‘중거리 슛에 대한 대비도 철저히 하고 있구나.’
이처럼 뒤스부르크는 아예 비기기 작전으로 나왔고, 덕분에 반 더 바르트조차 그의 전매특허인 돌파나 슛을 시도할 수 없었다. 도저히 공간이라 부를 만한 게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뒤스부르크가 보여주는 것은 가드를 바짝 올리고 상대가 지쳐서 나가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안티 풋볼(Anti-football) 그 자체였다.
사실 이렇게 완전히 내려앉은 상대를 공략하는 것은 웬만한 강팀들도 힘들어했다. 이를 무너뜨리려면 티키타카처럼 공을 소유한 상태로 어떻게든 상대의 빈틈을 파고들거나 중거리 슛으로 상대의 수비 진영을 흐트러뜨려야 했다.
만약 둘 다 불가능하다면 여기, 함부르크처럼 키 큰 공격수를 믿고 들입다 크로스를 올리는 것도 방법이었다.
파앙!
크로스가 오솔에게 향했다. 함부르크 선수들의 시선이 그의 걸음을 따라갔다. 기대감 어린 눈빛들. 모두 오솔이 무언가 보여주길 바라고 있었다.
사실 이런 모습은 경기 중반부터 보였다. 이전 같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반 더 바르트에게 모든 것을 기댔을 선수들이 이제는 오솔의 머리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마다비키아의 크로스! 어쩌면 이게 마지막 찬스일지도 모릅니다!]
경기 막판. 0 대 0 스코어로 90분이 흘렀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아마도 오늘 집에 순순히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선수들은 오솔을 보며 골이 터지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이 순간 오솔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 당연했다. ‘에이스님이 다 해주실 거야’ 스킬과 ‘극장 골의 주인공’ 스킬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와중에 찾아온 찬스였다. 이걸 놓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에이스님이 다 해주실 거야 : 모든 능력 +1
-극장 골의 주인공 : 모든 능력 +3
모든 능력치가 4씩 오른 오솔은 5명의 수비수 사이에서 훌쩍 뛰어올라 공의 방향만 절묘하게 바꾸는 헤딩을 시도했다. 골키퍼의 위치를 정확히 확인하고 도저히 막지 못할 곳으로 공을 인도한 것이다.
출렁~
골이 들어간 것은 당연지사였다.
와아아!
90분간 죽어라 골망을 지켰던 뒤스부르크의 선수들은 허탈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존심까지 모두 버리고 승점 1점을 위해 온갖 야유를 견뎠건만, 결국 돌아온 것은 안티풋볼이라는 오명과 날아가 버린 승점, 그리고 19번과 Oh Sol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는 커다란 등판이었다.
1 대 0. 오솔이 승부를 결정지은 또 하나의 경기이자, 반 더 바르트가 있었음에도 에이스로 인정받은 최초의 경기이기도 했다.
-조건부 스킬, ‘에이스님이 다 해주실 거야’가 2단계로 승급합니다.
-이제 경기에 참가한 팀원 중 과반 수-6명-이상이 에이스로 인정하는 경우, 플레이어의 모든 능력치가 2씩 상승합니다.
-50분 이상 에이스로 뛴 경기에서 승리할 경우, 다음 단계 승급 조건을 충족하게 됩니다. Lv 3이 되기 위해 필요한 승리 수는 10경기입니다.
반 더 바르트가 부진하자 바로 그에게 기회가 왔다.
‘그렇다고 계속 부진하길 바랄 수도 없고…….’
오늘은 운이 좋아서 이길 수 있었지만, 다음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때 만약 오솔이 활약하지 못하고 경기에서 진다면 스킬 레벨 업은커녕 기존에 선수들에게 받았던 신뢰에도 금이 갈 것이다.
‘도르트문트전도 그렇고 이번 경기도 그렇고…… 최근 들어 헤딩만으로는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쩐다?’
지금 그에게 남아 있는 포인트는 총 7개. 70 이상인 능력치는 신체 쪽에 세 개, 기술 쪽은 헤딩 하나뿐이었다. 최근에는 신체 능력을 앞세워서 막무가내로 돌파한 적도 있었지만, 사실상 현재 그가 쓸 수 있는 기술은 헤딩 하나라고 봐도 무방했다.
‘슬슬 기술에도 투자를 해야겠어.’
아직 60대에 불과했지만 지금 투자를 더 늦췄다간 헤딩 외에는 별것 없는 선수로 인식될 가능성이 높았다.
‘흐음. 어떻게 할까?’
관건은 포인트를 어디에 투자하느냐였다.
* * *
전반기 마지막 경기를 앞둔 어느 날, 오솔은 가벼운 걸음으로 알토나93의 훈련장을 찾았다. 결전을 앞두고 무슨 쓸데없는 짓이냐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때로는 복잡한 문제를 마주한 상황에서 가만히 앉아서 고민하기보다 지금처럼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환기를 하는 게 더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네.’
알토나93은 생각보다 견실한 클럽이었다. 비록 그들은 하부 리그 팀이었으나 전문적인 80여 명의 코치진이 있었고, 나이대별로 팀을 나눠서 운영할 정도로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니 독일이 축구 강국이라고 불리는 거겠지.’
축구의 저변(底邊) 자체가 달랐다. 이들에게 축구는 즐거운 스포츠이자 문화였고, 동시에 취미이자 꿈이었다.
“와아- 오거다!”
“오거다!”
오솔을 발견한 꼬마들이 잔뜩 몰려왔다. 개중에는 팬이라면서 맹랑한 말을 해댔던 요나단 타도 있었다.
“진짜 오셨네요?”
“난 일단 약속한 건 어떻게든 지키는 편이야.”
“생각보다 착실하시네요. 그렇게 안 봤는데, 조금 실망…….”
“어쩌라는 거냐!”
오솔은 생각보다 어린이들과 잘 어울렸다. 물론 때때로 애들 장난에 더 심한 장난으로 보복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아이들은 오히려 자지러지듯이 웃어댔다.
“나…… 인기 짱이잖아?”
그렇게 오솔이 의외의 열성팬들을 만나고 있을 때, 알토나93의 11세 이하 코치가 다가왔다.
“오솔 선수 팬입니다! 괜찮으시면 같이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
코치라고는 하지만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겼을 것 같은 젊은 청년이었다. 오솔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발자취를 남겼다.
“클럽하우스에 걸어놓으면 나중에 자랑하기 좋을 겁니다.”
오솔은 부탁한 사람이 오히려 민망해질 법한 자화자찬을 늘어놓더니 가방에서 슬쩍 축구화를 꺼내 들었다.
“애들이랑 좀 놀아도 될까요?”
“그럼요! 그 어떤 훈련보다 더 도움이 될 겁니다.”
1부 리그 선수, 그것도 지역 프로팀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는 선수가 같이 뛴다?
이 나이 때의 애들에게는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라 실질적으로 배우는 게 없다손 치더라도 이날의 추억이 그들의 열정에 끼칠 영향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오솔은 그 길로 아이들과 축구 시합에 들어갔다. 포지션은 수비수였다. 애들을 상대로 공격수로 뛰는 건 말도 안 되는 데다가 요나단 타의 포지션이 수비수라는 것도 한몫했다.
‘오늘은 얘랑 놀아주러 나왔으니까 같이 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흐음. 그나저나 이 녀석 꽤 하는데?’
요나단 타는 재능이 있었다. 두 살 위의 형들과 뛰면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듬직했다.
“헤딩은 공이 떨어질 자리를 미리 선점하고 버티는 게 중요해. 빠르고 정확한 판단력과 강인한 신체가 동반되어야 좋은 헤딩을 선보일 수 있는 거지.”
오솔은 특별할 것 없는, 아주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줬다. 아니, 특별하긴 했다. 이 모든 건 그가 이탁수 감독에게 배운 것들이었고, 개과천선한 이후 단 한시도 잊지 않았던 점들이었다.
‘축구는 원론대로 하는 게 가장 중요해.’
교과서가 달리 교과서겠는가. 효율과 안전성을 두루 갖췄기 때문에 교과서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만약 이 꼬마에게 오늘의 경험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다면 나중에 두고두고 도움이 될 것이다.
오솔은 그렇게 한참을 헤딩과 몸싸움에 대해 알려준 후, 슬슬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역시 수비만 하는 건 나에게 안 어울려.’
오솔이 미드필드 지역까지 올라와 공을 받자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와 공을 뺏으려 했다. 프로 선수와 붙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은 녀석은 한 놈도 없었다.
‘귀여운 녀석들.’
오솔은 지금쯤 한참 세포분열 중일 아들을 떠올리며 드리블을 시작했다.
‘비록 내가 드리블이 56에 불과하지만 이런 꼬마들을 상대로는 충분히…….’
“와아! 뺏었다!”
“프로 선수를 상대로 수비해냈어!”
“오거! 물리쳤다!”
‘빼, 뺏겼네?’
오솔은 휑해진 발밑을 보며 민망해했다. 아무리 서너 명이 동시에 달려들었다고 해도 프로 선수가 열 살 남짓한 애들에게 공을 뺏기다니, 부끄러운 일이었다.
‘쳇, 그렇다고 힘으로 막을 수도 없고…….’
그랬다. 오솔은 자신의 가장 큰 장기라고 할 수 있는 힘을 숨긴 채 뛰고 있었다. 아이들을 상대로 조금이라도 힘을 썼다간 바로 쇠고랑 신세를 질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돌파하려면 그들과 조금의 접촉조차 없어야 하는데, 현재의 오솔의 능력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빠르고 날렵하면서도 유연한 돌파가 필요해. 영주 형이나 안태환 선배처럼.’
그러나 그동안 힘을 기반으로 하는 플레이에 익숙해져서 쉽지 않았다.
현재 오솔은 포스트플레이나 헤딩 경합처럼 다소 정적인 상황에서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었으나, 공을 몰고 속도를 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지금처럼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곤 했다.
‘문제는 드리블 수치가 너무 낮다는 거지.’
오솔은 상태창을 확인했다.
-오솔(Lv 34. 오른발잡이, 왼발 숙련도 38%)
-신체 : 균형 감각 70/ 힘 90(+5)/ 반응 속도 68/ 순간 속도 71/ 주력 90(6%↓)/ 점프력 72(+5)/ 지구력 90(8%↓)/ 강인함 91(+5)
-기술 : 개인기 53/ 드리블 56/ 볼터치 63/ 슈팅 61/ 패스 62/ 헤딩 76(+5)/ 스로인 13/ 태클 38/ 일대일 마크 39
-잔여 포인트 : 7
드리블 수치는 겨우 56. 이대로 투자하기엔 너무도 속이 쓰린 능력치였다. 7개를 다 투자해도 겨우 63인데 지금 드리블에 투자한다? 이는 너무도 불~ 편한 판단이었다.
‘일단은 훈련으로 60까지는 만들고 생각하자. 좋아, 내일부터 드리블 훈련 비중을 좀 더 올리기로 하고…….’
결국 더 위협적인 공격수가 되려면 적어도 수비수 하나 정도는 벗겨낼 줄 알아야 했다. 많이도 필요 없었다. 최종 수비수 하나만 제치면 됐다.
‘가만…… 완전히 제치는 건 불가능하더라도 1초만 시간을 벌 수 있다면…….’
오솔의 뇌리에 지난 A매치에서 안태환이 보여줬던 접기가 떠올랐다. 아주 잠깐이지만 슈팅 각도와 타이밍이 생기는 기술…… 접기.
그러나 접기로 수비수를 속이려면 균형 감각과 순간 속도, 그리고 개인기와 드리블, 볼터치까지 두루 높아야 했다. 고로 당장 안태환의 기술을 그대로 카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 높아져도 비슷한 상황을 연출할 수 있지.’
세상에는 참 많은 개인기가 존재했다. 크루이프 턴이나 마르세유 턴, 맥기디 스핀 같은 턴 동작부터 라 크로케타나 스쿱 턴, 스텝 오버처럼 상체 페인팅과 빠른 방향 전환으로 상대를 속이는 개인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요(要)는 상대의 수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데 있었다.
위협적인 공간에서 단 1초라도 자유로워지는 것. 그것이 바로 특급 공격수와 그저 그런 공격수를 가르는 기준이었다.
‘1초. 그래, 단 1초면 된다.’
오솔은 결심과 함께 남은 포인트를 모조리 한곳에 투자했다.
‘후후. 꼬맹이들 덕분에 문제가 해결됐네. 이거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씩 사줘야 하나?’
마침 상대 팀에서 골을 넣었다.
“와아아! 골이다!”
“오거 팀을 이겼어!”
“아저씨. 저희가 이겼으니까 아이스크림 사주세요!”
“싫어!”
막상 사달라고 하니 또 사주기가 싫었다.
***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나고, 이제는 추위가 본격적으로 찾아올 때쯤 17라운드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장소는 함부르크 SV의 홈구장. 홈 팬들의 열렬한 응원 속에서 치르는 경기인 만큼 승리의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진다면 홈경기인 게 엄청나게 후회되겠지.’
두 팀의 더비 매치에서는 생각보다 빈번하게 난투극이 일어나곤 했는데,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했는가 하면 1982년에는 만 16세의 어린 소년이 함부르크의 극단적인 팬들에게 맞아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날 이후 두 팀의 감정싸움이 더 격렬해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팬들에게 맞아 죽기 싫으면 오늘은 무조건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