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89화
17장 에이스가 느끼는 중압감
레버쿠젠전의 활약은 비단 현지에서만 유명세를 탄 게 아니었다. 국내에서도 몇몇 축구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그의 활약상이 알려지고 있었다.
늦은 밤까지 유럽 축구를, 그것도 정식으로 중계조차 하지 않는 경기까지 다 챙겨 보는 축구 팬들은 마치 문익점처럼 조심스럽게 오솔의 골 영상을 퍼 나르고 있었다.
해당 동영상에는 어지러운 독일어의 나열과 이제는 제법 반가운 ‘Oh Sol’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독일 현지에서 오솔의 위상. 국뽕 주의.]
동영상을 재생하자 지난 레버쿠젠전의 동점 골 상황이 나왔다.
상대 수비수를 튕겨내는 오솔의 모습과 가죽 북이 터지는 소리를 내는 강력한 슈팅, 그리고 천지가 요동치는 듯한 관중석의 반응과 흥분한 캐스터의 목소리…….
안방에서 맞이한 분데스리가의 열기와 오솔에게 쏟아지는 환호성이 지켜보는 사람의 심장을 뜨겁게 달궜다.
[이게 오솔이라고? 지난번에 A매치에 나왔던 애?]
[누가 경기장에 짐승 새끼 하나 풀어놓은 것 같네.]
[진심. ㅋㅋㅋ 얘는 축구를 몸으로 하네. 이거 파이트 볼인가 뭔가 하는 거 아니냐?]
그중 예리한 눈을 가진 이가 물었다.
[이상하다. 저번에 친선경기 직관했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네가 뭘 안다고 씨부렁거리냐? 경기 본다고 선수들 능력치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겨우 열흘 지났는데 달라지긴 뭐가 달라져?]
[그런가? 아니, 그래도 그 전이랑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잘하는데?]
[장시간 비행하다 보면 원래 제 실력이 안 나오는 법이야.]
실력에 대한 의심은 금방 가라앉았다. 실력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더 잘한다는데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어쨌든 이건 확실하네. 이번 월드컵에서 이 녀석이 원톱이 된다는 거.]
[아직은 지켜봐야지. 조형진이야 저번에 워낙에 큰 실수를 해서 나가리 됐다고 해도, 아직 이국동이 남아 있잖아.]
[응. 국내용이야.]
[국내용은 너무 심했고, 아시아용으로 합시다!]
[오케이, 사딸라!]
아무래도 K리그에서 뛰는 선수는 해외파 선수들에 비해 평가절하 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대단하다. 저게 아시아인에게 나올 수 있는 피지컬이냐? 몸싸움이면 몸싸움, 점프면 점프, 거기에 스피드와 슈팅력까지. 말 그대로 깔 곳이 없다.]
[깔 곳이 왜 없어, 테크닉이 형편없는데. 안태환에 비하면 투박 그 자체다. 1분 4초, 여기서도 모서리를 노리고 찼으면 들어갔을 텐데 그걸 못 감아서 놓친 거잖아.]
[하긴, 드리블이나 볼터치가 좀 엉망이긴 하네. 슈팅도 힘만 셌지, 정확도는 낮은 편이고.]
[인간적으로 그런 것까지 바라는 건 너무 노양심 아니냐? 선수마다 각기 특성이 다르고 저마다 장점이 있는 건데 굳이 단점만 콕 찍어서 비난하고 있네……. 니들이 잘 모르나 본데, 해외에서는 분데스리가에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다며 난리가 났다. 아직 전반기도 안 지났는데 분데스리가 두 자릿수 득점이 어디 쉬운 줄 아냐?]
[모를 수도 있지. 넌 왜 이렇게 열폭하냐? 솔직히 분데스리가 따위 누가 보는데?]
[ㅇㅇ. EPL 미만잡은 안 본다.]
“이런 축알못들 같으니!”
정재형은 답답하다는 듯 구시렁대며 커뮤니티를 빠져나왔다.
“분데스리가의 인기가 이렇게까지 떨어졌다니…….”
최근 박해진이 진출하면서 한국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리그는 EPL이 되었다. 그리고 인지도만큼 인기도 많았다.
‘솔직히 EPL 경기들이 재밌긴 하지.’
EPL의 거칠고 속도감 있는 경기들은 전 세계 팬들을 열광케 했다. 그건 그도 인정했다.
문제는 EPL의 중계권을 SBC가 독점 계약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박해진의 맨유는 물론이고 첼시, 아스날, 리버풀, 그리고 이영신의 토트넘의 경기까지 중계하며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물론 해외 축구 중계를 모두 뺏길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다른 방송사들도 다른 리그의 중계권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KBC는 리그앙을 선택했다. 안태환이 FC메츠에서 뛰고 있으니 반지의 제왕이란 별명처럼 실력과 외모를 겸비한 그를 통해 시청자를 끌어모으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메츠의 경기력은 K리그 하위권 팀과 차이점이 없었고, 안태환 역시 그곳에서 힘든 시간을 마주하고 있었다.
상황은 정재형이 있는 MBS도 만만치 않았다. 차태민 하나만 바라보고 산 분데스리가 중계권은 그의 부진과 동시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휴지 조각이 되었고, 최근에는 차태민이 아예 윙백으로 출전하면서 중계권 협상을 주장했던 이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이 난관을 극복하려면 오솔 선수의 경기를 중계하는 방법밖에 없어.’
다행히 MBS는 이미 차태민의 경기를 수입하고 있으니 여기에 함부르크-정확히는 오솔의-경기를 몇 경기 추가하는 것은 절차상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비용…… 아니, 의지였다.
‘해외 중계를 살리겠다는 의지가 있으면 중계를 하는 거고, 아니라면 지금처럼 하는 둥 마는 둥 진행하겠지.’
그는 개인적으로 말도 안 되는 금액이 아닌 이상에야 오솔의 경기를 중계했으면 했다.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면서 나이답지 않은 성숙한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데다가, 어제 경기에서는 축구 팬이라면 누구라도 흥분할 수밖에 없는 멋진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다.
‘무조건 국내에서 중계해야 해. 그리고 되도록이면 우리 팀에서 맡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협상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평소처럼 뚱한 표정의 김 피디가 회의실로 돌아왔다. 그가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밤샐 준비들 해! 이번 건 우리가 맡는다!”
“와!”
정재형이 두 손 모아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좀비처럼 늘어져 있던 연출진과 작가들의 차가운 눈초리였다. 김 피디가 혀를 찼다.
“밤새는 게 그렇게 좋냐? 야근이 아주 해피해피해?”
“……죄송합니다.”
“쯧! 그래도 일단 하기로 한 거 제대로 해야지. 재형이 넌 당장 중계 가능한 아나운서랑 해설 조합 꾸려봐. 오솔의 경기는 위에서도 기대를 많이 하고 있으니까 어설프게 했다간 바로 깨진다. 바짝 긴장해!”
“네!”
중계는 후반기부터였다. 그들에게 준비 시간은 고작 두 달 정도. 서둘러야 했다.
* * *
그렇게 한국에서 오솔의 인지도가 늘고 있는 중에도 리그 경기는 계속 이어졌다.
12월 11일. 어느덧 2005년도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시점에 함부르크는 또 다른 강팀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14라운드 상대, 꿀벌 군단 도르트문트였다.
도르트문트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으나 다행히 최근 기세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뛰어난 감독과 선수단에도 불구하고 구단이 부도를 맞이한 여파로 분위기가 뒤숭숭했고, 그러한 분위기는 자연히 순위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경기는 함부르크의 열세로 진행됐다. 전력 자체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으나 양 팀 플레이메이커의 실력 차이가 너무 컸다. 함부르크는 대타로 나온 바바레즈가 있는 반면, 도르트문트에는 ‘그라운드 위의 모차르트’ 토마시 로시츠키가 있었다.
[제바스티안 켈이 공을 탈취합니다. 공은 로시츠키에게로 향합니다.]
반 더 바르트가 오기 전까지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공을 아름답게 차는 플레이메이커였던 로시츠키는 성사되지 못한 맞대결에 아쉬워하듯 자신의 기량을 유감없이 뽐냈다.
[라르스 리켄에게로 로빙 스루가 들어갑니다! 로시츠키의 창의적인 패스! 아투바가 완전히 상대를 놓쳤어요!]
[방금은 지켜보는 저희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패스였습니다.]
[리켄의 크로스! 얀 콜러의 머리로 갑니다!]
오늘 도르트문트는 얀 콜러와 스몰라레크의 빅&스몰 투톱에 4명의 미드필더가 1자로 선 4-4-2 플랫이었다. 그래선지 이들은 좌우에서 흔들다가 크로스를 올리는 패턴에 강했고, 동시에 상대 수비 뒤 공간을 찌르는 플레이에도 능했다.
물론 모든 패스의 시작은 로시츠키였고, 마무리에 가담하는 것도 그인 경우가 많았다.
[얀 콜러, 공을 뒤로 떨궈줍니다! 로시츠키, 슈웃! 꼬오오올!]
로시츠키의 선제골이었다. 남다른 시야와 창의적인 패스, 왕성한 활동량까지 두루 갖춘 그에게 함부르크는 그저 먹기 좋은 고깃덩이에 불과했다.
[공 줄 곳을 찾지 못하고 전방으로 길게 보내는 볼라루즈! 도르트문트의 압박이 거셉니다!]
도르트문트 선수들은 그들의 별명대로 바쁜 벌꿀…… 아니, 바쁜 꿀벌처럼 뛰어다녔고, 함부르크는 강한 압박에 빌드업을 포기하고 오솔에게 공을 올리기 일쑤였다.
‘제기랄. 이거 쉽지가 않은 걸…….’
그러나 오늘은 오솔도 활약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에는 단순히 컨디션이 떨어졌다는 것 외에도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전담 마크맨의 존재와 협력 수비였다.
오솔의 마크맨은 크리스토프 메첼더라는 독일의 국가대표 수비수였는데, 그는 194㎝의 상당한 거구로 대충 반 바이텐과 비슷한 유형의 선수였다.
물론 메첼더 한 사람뿐이었다면 그가 이렇게까지 고전하진 않았을 것이다.
촤아악!
[멋진 슬라이딩 태클이었습니다. 공격권을 도로 가져오는 크리스티안 뵈언스.]
“두 경기 동안 MOM을 땄으면 한 경기는 쉬어 가기도 해야지.”
“아오, 빡쳐!”
얄미운 소리를 너무도 여유롭게 내뱉는 남자, 크리스티안 뵈언스.
올해 서른셋인 이 남자는 프로 경력 16년 차의 베테랑이었다. 게다가 단순히 경험만 많은 게 아니라 9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약 15년을 독일 국가대표로 활약할 만큼 실력도 뛰어난 선수였다.
말하자면 오늘 상대 수비진은 독일의 전·현직 국가대표들인 것이다. 덕분에 오솔은 리그 경기라기보다는 A매치를 소화하는 기분으로 뛰고 있었다.
‘젠장. 타이밍을 계속 읽히고 있어.’
무엇보다 껄끄러운 것은 백전노장 뵈언스의 예측력이었다. 그는 오솔이 몸을 돌렸다 하면 번번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공격의 맥을 끊어댔다.
“또 한번 돌파해 보시지 그래?”
그는 간단한 말 한마디로 오솔의 속을 뒤집어놨다.
‘이런 젠장. 이런 날에는 진짜 미친 듯이 드리블을 올리고 싶어진다니까!’
달리기는 빨라졌지만 그에 걸맞은 드리블 실력은 없는 상황. 그가 할 수 있는 돌파라고는 차태민식 치고 달리기밖에 없었는데, 그건 벌써 경기 초반에 시도했다가 형편없이 막히고 난 후였다.
오솔은 공을 뒤로 돌렸다. 지금은 이 두 사람을 연달아 돌파하는 게 불가능했다.
[다시 후방으로 흐르는 공. 오솔 선수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네요.]
[그에게 쏟아지는 압박이 너무 심합니다. 라우트 선수나 바바레즈 선수가 더 많이, 그리고 위협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어요.]
[그러나 바바레즈 역시 제바스티안 켈에게 철저하게 마크당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솔과 바바레즈가 철저하게 막혀 버리자 함부르크의 엔진 역시 꺼지고 말았다.
결국 남은 것이라곤 꿀벌들의 독침에 온몸을 쏘이는 것뿐이었다.
삑, 삑, 삐이익!
[2 대 0. 일방적이었던 90분이 끝이 납니다.]
[처참하네요. 함부르크 입장에서는 단 2실점으로 경기를 마쳤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경기였습니다.]
[오늘은 오솔 선수도 지난 두 경기 동안 보여줬던 센세이셔널한 활약을 이어가지 못했네요.]
[하지만 평가절하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기량을 증명했으니까요. 다만 이번에는 상대가 좋지 않았습니다.]
후반전에는 오솔과 신인왕 경쟁을 하고 있는 누리 사힌도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그라운드가 좁다 하고 경기장 곳곳을 누볐다. 그리고 카메라가 두 사람은 한 프레임 안에 담았다. 환하게 웃는 누리 사힌과 답답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는 오솔.
[전반기 신인왕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두 선수죠? 오솔 선수에게는 안타깝게도 오늘은 누리 사힌 선수가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15라운드부터는 반 더 바르트 선수가 돌아온다는 겁니다. 물론 이제는 겨울 휴식기까지 고작 세 경기만 남은 상황이지만, 어쨌든 팀의 에이스가 돌아온다는 건 좋은 일이죠.]
[15라운드는 쾰른전이죠? 독일의 신성 루카스 포돌스키 선수와 오솔 선수의 격돌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겠네요.]
[그것도 좋지만 진짜 격전은 전반기 마지막 라운드인 17라운드입니다. 이날은 북부 독일 최대의 매치로 평가되는 ‘노르트 더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함부르크 대 베르더 브레멘의 경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하죠! 과연 이번 시즌에는 어느 팀이 더 행복한 겨울 휴가를 보내게 될지 궁금해지는군요.]
반 더 바르트가 빠졌던 세 경기는 오솔의 활약 끝에 2승 1패로 끝이 났다. 이제 관건은 남은 세 경기-특히나 베르더 브레멘전-에서 반 더 바르트가 어떤 활약을 보여주느냐였다.
12월 10일.
15라운드 쾰른전은 함부르크가 무난한 승리를 거뒀다.
상대는 루카스 포돌스키의 역습에 모든 것을 걸었으나, 반 더 바르트의 활약에 수비가 처참히 무너지면서 패배하고 말았다.
함부르크의 에이스는 절묘한 중거리 슛으로 골을 기록하며 자신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을 알렸고, 오솔은 전방에서 부지런히 움직였으나 아쉽게도 이 경기에서는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