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86화
“할 수 없지. 일단은 모나코전부터 생각하자고.”
그나마 다행이라면 징계가 리그 경기에만 국한된다는 것이었다. UEFA 컵 경기에는 이전처럼 반 더 바르트를 내보낼 수 있었다. 돌 감독은 주중에 있을 AS 모나코전에서 주전 선수를 그대로 기용했다.
그렇게 시작된 모나코전.
[골! 또다시 골을 집어넣습니다! 반 더 바르트! 지난 경기의 실수를 오늘 모두 갚고 있습니다.]
반 더 바르트와 바바레즈, 그리고 오솔의 콤비는 놀라운 공격력을 선보이며 모나코의 골문을 흔들었다. 물론 그럴수록 토마스 돌 감독의 속은 더 쓰렸다. 이 좋은 조합을 리그에서 쓰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웠다.
‘물론 UEFA 컵에서의 성적도 중요하긴 하지만 리그에 비하면 그렇게 절박한 것은 아닌데…….’
UEFA 컵 같은 경우는 한 경기만 삐끗해도 바로 탈락이었다. 게다가 선수의 컨디션과 경기 일정, 팀 간 상성 등 변수가 너무 많아서 성적을 장담하기도 힘들었다.
당장 조별리그에서 만난 모나코만 봐도 마르코 디 바이오를 필두로 크리스찬 비에리, 올리비에 카포, 더글라스 마이콘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오늘 양 팀의 경기력이 막상막하입니다. 골을 넣고 달아났다 싶으면 따라오고 역전했다 싶으면 다시 뒤집어지길 반복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경기 막판까지 눈을 떼기 힘드네요. 아쉽습니다. 함부르크가 지금의 모습을 리그에서도 보여줄 수 있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함부르크 구단 관계자는 물론이고 팬들도 내년에는 팀이 챔피언스 리그를 밟을 수 있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려면 리그에서의 성적이 필수적이었다.
[토마스 돌 감독은 이번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도 꿈이 아니라고 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목표는 역시나 챔피언스 리그 티켓을 따내는 것입니다.]
[경쟁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당장 바이에른 뮌헨부터 베르더 브레멘, 샬케 04, 레버쿠젠까지……. 여기에 도르트문트와 헤르타 베를린 같은 중위권 팀까지 합하면 6팀 정도가 실질적인 경쟁자라고 할 수 있겠죠.]
[그중에는 반 더 바르트 선수가 빠진 상태에서 만날 팀들도 많이 보이는군요.]
[12라운드 레버쿠젠전이 가장 큰 문제고요. 14라운드에 만날 도르트문트도 만만치 않은 상대죠. 이후에는 조금 쉬운 상대를 만나겠지만 하필 저 두 팀을 상대할 때 팀의 핵심 선수가 빠지게 되었습니다.]
[순항 중이던 함부르크에 칠흑 같은 밤이 찾아온 셈입니다.]
반 더 바르트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그는 모처럼 골을 넣고도 얌전한 세리머니를 선보이며 팬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 * *
모나코전은 3 대 2, 펠레 스코어로 끝이 났다. 승리는 반 더 바르트의 분투 덕분에 함부르크가 가져갔다.
모나코전이 기분 좋은 승리로 끝나고, 함부르크 선수들은 경기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팬들에게 사인을 해줬다. 여기에는 오늘 2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에 공헌한 오솔도 있었다.
-팬 서비스는 기본이야. 우리가 구단에서 받는 돈, 대우에는 팬 서비스 몫까지 포함되어 있어.
바른생활 사나이, 세르게이 선생의 어록이었다. 그의 가르침대로 오솔도 최근에는 팬 서비스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또 막상 사인을 하다 보니 이게 의외로 재밌었다.
“오솔! 오솔!”
“벌꿀오소리!”
“그래. 더 찬양해라! 흐흐흐.”
“하하하!”
자신에게 열광하는 이들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건 생각보다 기분 전환에 도움이 많이 됐다. 자신에게 인정 욕구가 있었던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오솔 선수! 사인해 주세요! 경기 보려고 서울에서 왔어요!”
개중에는 놀랍게도 오솔에게 사인을 받고자 13시간을 넘게 날아온 사람들이 존재했다. 한국에서 온 팬들이었다. 그들은 오솔의 이름이 박힌 유니폼을 입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오솔은 그들의 등판에 펜을 가져다 댔다.
“오늘 돈 버셨네요. 아마 몇 년만 지나면 이 유니폼 가격이 지금의 몇십 배로 뛸 겁니다.”
오솔이 농담 같은 진담을 건네며 사인을 했다. 특별히 이들에게는 날짜와 경기 상대, 그리고 스코어까지 적었다. 이건 한국어로 적었으니 현지 팬들에게 해주는 사인보다도 소장 가치가 높을 것이다.
와아아! 하에스파우!
한국 팬들이 환호성과 함께 함부르크의 응원가를 불러댔다. 어디서 배웠는지 제법 정확한 가사였고, 현지 팬들은 금방 분위기에 동화되어 응원가를 따라 불렀다. 현장이 금방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미치겠네. 술 한잔씩 해서 그런가, 흥이 감당이 안 되잖아?”
다행히 팬들은 오솔은 안중에도 없이 저들끼리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덕분에 오솔은 주변에 몰려온 팬들에게만 사인을 하면 됐다. 대놓고 선수를 무시하는 조금은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시간이 끌리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좋았다.
“오솔 선수! 사인해 주세요!”
그때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소년이 고사리 손으로 목도리를 내밀었다. 흰 바탕에 파란색 줄무늬가 외곽에 그어진 목도리의 중앙에는 함부르크의 마크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오솔은 녀석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라파엘의 사인이 필요한 건 아니고?”
“전 오솔 선수가 더 좋아요! 우리 클럽 애들은 전부 오솔 선수를 제일 좋아해요!”
“그래? 그거 고마운 일이네.”
“다 같이 별명도 만들었어요! 비록 벌꿀오소리에 밀려서 사람들이 쓰진 않지만……. 그래도 제법 잘 어울리는 별명이에요!”
지난번에 별명을 모집하는 행사 때 소년도 별명을 만든 모양이다.
“뭔데?”
“오거요!”
“뭐라고?”
“Oh-ger요. 오솔의 오와 티거의 거를 합쳤어요.”
오솔이 마치 다리에 스프링이 달린 사람처럼 높이 뛴다고 해서 붙인 별명이란다. 오솔은 아이의 순수함에는 웃음이 나왔지만, 그러면서도 이 별명만큼은 절대로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거 네가 생각한 거니?”
“아니요. 사촌 형이 만들었어요.”
“그놈…… 아니, 사촌 형이 몇 살인데?”
“17살이요.”
그 정도면 발음이 비슷한 다른 단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넌 잡히면 뒤졌다.’
오솔이 17살짜리에게 앙심을 품는 사이 아이의 자랑은 계속 이어졌다.
“형은 우리 팀 에이스예요! 오솔 선수처럼 헤딩도 잘해요. 저도 가끔씩 형한테 헤딩하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그래? 그럼 언제 내가 헤딩 팁을 전수해 줘야겠네.”
“진짜요? 혹시 내일 와주실 수 있어요?”
“미안. 내일은 좀 바쁜 일이 있어서……. 후후.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내일은 데이트가 있거든.”
“에이, 거짓말! 괜히 오기 싫어서 그러는 거죠?”
“아니야.”
“괜찮아요. 저도 이해해요. 프로 선수들은 바쁘니까 저 같은 꼬맹이는 상대하기 귀찮겠죠.”
“거, 아니라니까!”
오솔이 거듭 사실을 밝혔음에도 꼬마는 쉽게 믿지 못했다.
“진짜예요?”
“그래. 진짜로 선약이 있어서 안 되는 거야.”
“이상하네. 데이트라니…….”
‘그게 뭐가 이상하냐! 그 사촌 형이란 놈도 그렇고 이 꼬마도……. 요즘 애들은 다 이렇게 건방진가?’
알고 보니 오솔의 인성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데이트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거였다. 오솔은 한숨이 나왔으나 환히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자 차마 화를 낼 수 없었다.
‘으휴. 귀여운 얼굴만 아니었으면 꿀밤이라도 한 방 먹여줬을 텐데.’
오솔은 꿀밤을 먹이는 대신 소년의 머리를 한 차례 더 쓰다듬었다.
“아무튼 나중에 갈 테니까. 네 이름이랑 클럽을 알려줘.”
“전 요나단 타예요. 팀은 알토나93이고요.”
알토나93이면 홈 경기장 바로 옆에 있는 클럽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였다.
오솔은 나중에 요나단의 사촌에게 훈련을 겸해서 예절 교육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며 경기장을 떠났다. 오늘은 한숨 푹 자고 내일 아침 일찍 민주를 마중 나가야 했다.
* * *
다음 날.
“민주야! 여기!”
“아! 솔아!”
장시간 비행으로 피곤했을 텐데도 여민주는 발랄하게 뛰어왔다. 오솔은 그런 그녀를 끌어안고 가볍게 들어 올렸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 도착했어.”
“어제 경기했다면서? 히잉. 괜히 내가 힘들게 한 거 아니야?”
“걱정 마. 전혀 힘들지 않았으니까. 운전은 여기 승호 씨가 대신 해줬거든.”
“안녕하세요. 윤승호입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차 뒷좌석에 앉았다. 마침 윤승호도 짐을 찾아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상황. 둘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진 찍힐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얼굴을 드러내도 괜찮아?”
“그러면 나야 좋지. 자기가 어디로 도망가지 못하게 꽉 잡아둘 수 있잖아. 헤헤.”
열애설이 나고도 헤어지는 커플은 많았지만, 오솔은 굳이 입을 놀려서 헬 게이트를 열지 않았다. 어차피 그도 헤어질 생각이 없었으니 그녀만 괜찮으면 이대로 공인 커플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얼굴이 알려지면 불편해질 수도 있어.”
“어쩔 수 없지. 우리 자기가 잘난 걸 어쩌겠어. 그렇다고 숨어서 만나는 것도 웃기잖아.”
그래서 스타들은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요트나 섬을 빌려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시간을 보내곤 했다. 물론 지금으로선 그럴 돈도, 시간도 없었다.
“가볍게 시내를 둘러볼까?”
“아니. 오늘은 힘드니까 그냥 쉬자. 자기도 시합 때문에 많이 힘들잖아.”
“내 체력을 어떻게 보고. 지금 당장 경기를 뛰라고 해도 90분은 거뜬히 소화할 수 있다고.”
“오늘은 내가 힘드네요. 우리 에너자이저 아저씨도 좀 쉬시죠.”
“하하. 그럼 바로 집으로 갈까?”
“응!”
오솔은 함부르크 시내를 구경하고 근사한 레스토랑에 간다는 계획을 모두 취소했다. 덕분에 점심 식사는 별수 없이 지난번에 차태민에게 얻어 온 김치로 해결하게 생겼다.
“기다려! 내가 이날을 위해 일주일을 준비했어.”
여민주는 굳이 오솔을 자리에 앉히고 손수 저녁을 차렸다. 한참이 지나고 고소한 냄새가 난다 싶더니 곧이어 김치찌개에 김치볶음밥 콤보가 등장했다.
“요리는 다 재료 맛이라고 했어. 고로 맛없으면 전부다 이 김치 탓이야.”
여민주는 아까보다 훨씬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로는 괜찮다고 했으나 사람들의 시선에 은근히 스트레스를 느꼈던 게 분명했다.
다행히 이곳은 둘만의 공간이었다. 오솔은 한결 편안해진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시작했으나 곧 생각보다 더 불편한 음식을 만나게 되었다.
‘행복하지만 불편하네. 이런 모순의 괴로움을 견디는 게 결혼 생활인 건가?’
오솔은 다가올 결혼 생활에 대한 걱정과 함께 식사를 마무리했다. 입맛에는 안 맞았지만, 이 또한 적응되면 먹을 만할 것이다.
‘정 안 되면 지금처럼 아주머니께 부탁해야지.’
운동선수는 먹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보니 가정식조차 전문 영양사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결코 이걸 먹기 싫어서가 아니라고.’
오솔은 여민주가 안 보는 사이에 반 이상 남은 그릇을 슬그머니 밀어냈다.
“어, 어제 너무 힘들게 경기해서 그런지 오늘은 영 입맛이 없네.”
다행히 그럴싸한 변명이 생각났다.
* * *
그날 밤. 두 사람은 별이 올려다보이는 뜰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함부르크는 엄청 큰 도시라고 해서 공기가 안 좋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별이 많이 보이네.”
“바다는 물론이고 근처에 공원이나 숲도 많아서 그럴 거야. 쓰읍~ 하! 공기가 맛있지 않아?”
“후후. 갑자기 솔이 널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난다.”
“언제, 훈련할 때?”
“아니, 너 신문 배달하는 거 봤던 날.”
“갑자기 그건 왜?”
“그냥. 그때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
“이상해? 내가?”
“아니. 이상하다기보다는 그냥 첫인상이 좀 특이해서.”
“첫인상이라…… 어땠는데?”
“이런 말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처음 봤는데도 그저 좋고, 이상하게 반갑고, 또 이해할 수 없지만 그리웠어. 처음 봤는데 그리웠다니 이상하지? 그런데 요 몇 달을 계속 널 그리워하다 보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아, 처음에도 이런 느낌을 받았었는데 하는……. 헤헤. 좀 이상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