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85화
오솔은 그 모습을 보고 실실 웃음을 쪼갰다.
“흐흐흐. 라파엘이 생각보다 잔인한데요?”
“아마 고의는 아니었을 겁니다. 아마도요…….”
“그런 것치곤 기분이 많이 좋아 보이는데요?”
“혹시나 보복을 당하진 않겠죠?”
옆에서 얘기를 듣던 실비가 급히 물었다. 그녀는 혹시나 남편이 또다시 부상을 당하는 건 아닌지 잔뜩 걱정하고 있었다. 쇠렌 레르비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괜찮을 거예요. 라파엘 녀석이 그렇게 눈치가 없는 놈도 아니고, 알아서 잘 피할 겁니다.”
과연 반 더 바르트는 잔뜩 독이 오른 상대 마크맨들을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좌우에서 흔들고 있긴 하지만 이대로 득점이 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는데요?”
“이런 모습들이 아직까지 함부르크가 강팀이 아니라는 증거죠.”
강팀이 되는 조건 중에 가장 큰 것은 게임을 풀어나갈 수 있는 플레이메이커의 존재였다. 단순히 플레이메이커가 있다 없다를 따지는 게 아니라 그런 선수들이 한 경기에 몇 명이나 뛰느냐의 문제였다.
보통 강팀이라고 평하는 팀들은 적어도 두 명, 많으면 세 명 이상의 플레이메이커가 존재했다.
이 시기 바르셀로나에는 사비와 이니에스타, 호나우디뉴, 그리고 메시가 있었고, 레알 마드리드에는 지단과 호나우두, 구티 등이 있었다.
EPL로 넘어가도 마찬가지였다. 맨유에는 루니와 호날두, 긱스, 스콜스가, 첼시에는 램파드와 조 콜, 로번 등이 있었다.
반면 함부르크는 반 더 바르트 한 사람이 전부였다. 그가 막히는 순간 자연스럽게 모든 게임 운영이 막히는 것이다.
“라파엘의 몸만 정상이었으면 그런 팀으로의 이적을 진행해 봤을 텐데, 정말 아쉬운 일이죠.”
“부상은 다 회복된 거 아니었나요?”
“부상은 거의 나았죠. 하지만 심리적인 압박감은 여전히 남아 있어요. 의사는 이제 멀쩡하다고 했지만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죠.”
“심리적인 요인이군요?”
“전 실제로 차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전에 말했다시피 운동선수는 아주 작은 차이도 느낄 수 있잖아요. 라파엘처럼 섬세한 친구는 그게 더 심하죠.”
부상의 가장 무서운 점은 신체의 균형이 깨진다는 점에 있었다. 제 몸이 자신의 것 같지 않은 ‘생소함’은 생각보다 선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저는 보통 팽이를 예로 들어 설명하곤 하는데……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매끈하게 조각된 팽이에 어느 날 균열이 생기는 것이죠. 혹은 파편이 조금 떨어져 나갔다고 해도 되겠네요. 그럼 어떻게 될까요?”
“글쎄요? 균형이 안 맞겠죠?”
“맞습니다. 균형을 잃게 되죠. 물론 이 상태에 익숙해지면 팽이는 충분히 돌 수 있습니다. 일정한 속도를 내며 쉽게 쓰러지지 않겠죠. 하지만 채찍질을 할수록 느끼게 됩니다. 이전처럼 최고 속도로 돌 수는 없다는 걸 말이죠.”
팽이가 속도를 높일수록 흔들림은 더욱더 커질 수밖에 없다. 표면에는 아주 작은 균열만 있을 뿐이지만 그 작은 균열이 팽이의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라파엘은 자신을 조각난 팽이 같다고 표현했어요. 잃은 균형을 다시 찾지 못할 것 같다고도 했었죠.”
“…….”
“그래서 함부르크에 온 겁니다. 완전한 자신을 되찾을 때까지 몸을 가다듬으려는 것이죠.”
“준비가 끝나면 어떻게 하실 생각인데요?”
“그야…… 오랜 꿈에 도전해야겠죠.”
레알 마드리드를 뜻하는 것이리라. 그곳은 반 더 바르트의 오랜 꿈이자 동시에 쇠렌 레르비의 꿈이기도 했다.
‘내가 받은 축복은 시스템만이 아니었구나.’
어쩌면 운동선수에게 가장 무서운 적일 부상이란 놈. 오솔은 아직까지 그놈을 만난 적이 없었다. 물론 그가 알아서 조심한 것도 있었으나 타고나길 튼튼하게 태어난 것도 한몫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고맙지는 않아요.’
오솔은 문득 떠오른 누군가에게 핀잔을 보내고 다시 레르비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어쨌든 이번 경기에서는 코펠 감독의 도박수가 성공했네요. 두 사람이나 희생하는 건 리스크가 컸을 텐데, 과감하게 라파엘을 막는 데 온 힘을 집중했고 지금까지는 성공적입니다.”
과연, 반 더 바르트가 힘을 쓰지 못하자 함부르크는 수비수들이 잔뜩 운집한 묀헨글라트바흐의 문전을 뚫지 못했다. 공은 금방 상대에게 넘어갔다.
“달려!”
골키퍼의 외침과 동시에 묀헨글라트바흐의 공격수들이 측면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함부르크의 풀백들이 위로 올라간 탓에 공격을 전개하기에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
중앙 수비수들이 좌우로 넓게 벌리고 서서 상대의 역습에 대비하고 있었으나 하필이면 상대의 발 빠른 공격수와 발이 느린 반 바이텐이 붙게 되었다.
삐이익!
반 바이텐은 상대의 빠른 방향 전환과 질주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뚫려 버렸다.
최종 수비수가 벗겨진 후에는 그야말로 무인지경이었다. 공격수는 페널티 에어리어 외곽까지 아무런 방해 없이 도달했고, 너무도 쉽게 골망을 뒤흔들었다.
“제대로 당해 버렸군요.”
“여기서 공격을 무르면 더 최악일 텐데요.”
“토마스 돌 감독도 포기할 수는 없을 겁니다. 승점 3점을 반드시 따내야 하는 경기 아닙니까. 게다가 시간도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역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함부르크의 전술이나 선수에는 변함이 없었다. 차이점이라면 아까와는 달리 바바레즈가 밑이나 외곽으로 빠져서 게임을 만들어가려 노력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바바레즈가 밖으로 나오면서 결과적으로 중앙에서 선수가 하나 더 빠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나 마찬가지였다.
결국에는 다시 반 더 바르트에게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아까 알을 잃을 뻔했던 선수가 그를 잔뜩 벼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공만 잡아봐라. 오늘 경기에 출장했다는 사실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진심이 듬뿍 담긴 협박에 반 더 바르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지난번 부상으로 선수로서의 기량까지 떨어졌던 그인지라 부상에 관련된 얘기에 유독 민감했다.
‘상대의 반칙을 유도할 수만 있다면 어쩌면 더 좋을 수도 있어.’
반 더 바르트가 눈을 서늘하게 떴다. 각오가 선 얼굴이었다. 지금은 워낙에 큰 부상을 당한 후라 그렇지 사실은 아약스에서 뛸 때부터 이 정도 협박과 견제는 밥 먹듯이 당해왔었다. 그에 대한 대처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저놈에게 옐로카드가 하나 있었지?’
그의 목표는 이미 카드에 이름을 올린 닐스 호프만이었다. 일단 한 명만 퇴장시키면 한 사람의 마크 정도는 얼마든지 떨쳐낼 자신이 있었다.
마침 그에게 패스가 들어왔다. 그는 공을 잡으며 평소보다 천천히 개인기를 펼쳤다. 상대가 태클을 하는 타이밍에 맞춰 피하기 위해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를 노리고 들어오는 태클은 생각보다 더 과격했다. 알을 희생해서 골을 막은 용자 중의 용자, 닐스 호프만이 폭력이나 다름없는 백태클을 시도한 것이다.
‘이런 미친 새끼가…….’
반 더 바르트는 깜짝 놀라 급히 점프했다. 밑으로 발을 들어 올린 호프만이 지나갔다. 대놓고 발목을 노리는 태클이었다. 그가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대로 시즌이 끝날 뻔했다.
“뭐 하는 짓이야!”
“뭐!”
반 더 바르트와 호프만이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을 것처럼 가까이 붙었다. 그러자 선수들이 몰려들며 2차 충돌이 일어났다. 쇠렌 레르비는 고개를 저었다.
“경기가 지저분해지는군요. 어쩌면 이것도 코펠 감독의 작전일지 모르겠어요. 경기가 질질 끌리고 있어요.”
이후 경기는 다시 지지부진해졌다. 옐로카드를 받은 것 때문에 상대 선수들의 태클이 약해졌으나, 이미 경기를 풀어나가야 할 반 더 바르트의 플레이가 잔뜩 위축된 상태였다.
삑, 삑, 삐이익-!
경기는 그렇게 하는 둥 마는 둥 진행되더니 금방 끝을 맞이했다.
경기 결과는 1 대 0. 함부르크로서는 뼈아픈 패배였다.
반 더 바르트는 씁쓸한 얼굴로 관중석에 앉은 아내를 바라봤다. 답답하고 화가 나는 경기였으나 그래도 아내를 생각하며 많이 참았다. 그렇게 그가 남은 감정을 털어낼 때였다. 등 뒤에서 놈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제2의 요한 크루이프라더니 별것도 아니네.”
“그러게, 너무 쉽잖아? 하하. 퇴장당할 각오를 하고 태클한 건데 겁쟁이처럼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흐흐. 다음번에 보내면 되지.”
“그럴까?”
그들로서는 다음 경기에서도 심리적인 우위를 갖겠다는 의도였겠으나 반 더 바르트 입장에서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울컥해서 호프만과 푼켈을 노려봤다.
“너희는 진짜 개자식들이야. 기본적인 매너라는 것도 없는 것들 같으니!”
“뭐라는 거야. 패배자 주제에. 경기장에서 매너를 찾다니 역시 멍청한 네덜란드 놈답군!”
네덜란드와 독일은 역사적인 사건은 물론이고 축구사(史) 내내 라이벌로 부딪쳐 왔기 때문에 그만큼 서로를 향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물론 소속 팀 경기에서는 국적을 가지고 누군가를 차별하는 일은 없었으나, 오늘은 닐스 호프만이 고자가 될 뻔한 날이라 감정이 많이 격해진 상태였다.
조국의 욕을 들은 반 더 바르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후반기에 두고 보자고. 그땐 제대로 털어줄 테니까.”
“어이구 무서워라. 흐흐흐.”
그들은 과장되게 어깨를 감싸며 떠는 척을 하더니 말을 덧붙였다.
“내가 다음 경기에서 이기는 법을 알려줄까?”
“뭐?”
“바로 네 모델 와이프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는 거야. 그렇게 하면 아마 우리 둘 다 제 실력이 안 나올 거다. 하하하!”
“이…… 개새끼들이!”
내내 참아왔던 반 더 바르트였으나 그들이 아내까지 모욕하자 마침내 꾹 참아왔던 화가 폭발했다. 반 더 바르트는 그들에게 달려들며 멱살을 잡았고, 상대도 그에 대응해서 반 더 바르트를 밀쳐냈다.
삑! 삑!
경기가 끝나고 퇴근을 하려던 심판이 급히 휘슬을 불었고, 경기장 안전 요원들이 달려들었다. 함부르크의 선수들과 묀헨글라트바흐의 선수들이 뒤엉켰고, 관중석에서 쌍욕이 오갔다. 심지어 선수들을 진정시켜야 할 감독들까지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언성을 높였다.
‘내가 저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
오솔은 아쉬움을 삼키며 실비와 사비아를 보호했다.
* * *
라파엘 반 더 바르트, 닐스 호프만, 번드 푼켈 ? 분데스리가 3경기 출전 금지. 4천 유로(약 500만 원)의 벌금.
토마스 돌, 호어스트 코펠 ? 분데스리가 1경기 출전 금지. 2천 유로(약 250만 원)의 벌금.
엄청난 징계가 떨어졌다. 아마도 이들의 충돌이 관중들의 난동을 유발한 원인이었다는 점이 문제가 된 것 같았다.
당장 감독이 벤치에 앉지 못한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반 더 바르트의 출전 금지가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팀의 에이스가 한두 경기도 아니고 세 경기나 빠져야 했다.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었다.
“현재 조사를 계속하고 있어서 자칫하면 추가 징계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걸릴 게 있나?”
“라파엘도 주먹을 휘둘렀다고 합니다. 상대가 맞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맞았겠죠.”
“망할.”
토마스 돌 감독은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잔뜩 꼬여 버린 심사만큼 경기 운영도 엉망이 되어버렸다.
“어쩔 수 없지. 일단은 상대가 먼저 가족을 모욕했다는 사실을 알려야지, 경기 중에 수시로 협박성 발언을 했다는 것도 같이 말이야! 그리고 영상을 확인하면 놈들이 대놓고 라파엘의 발목을 노렸다는 게 드러날 거야.”
사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었다. 아마 반 더 바르트의 징계는 지금 수준에 머무를 것이다.
물론 이런 조치를 바탕으로 묀헨글라트바흐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는 있겠으나 어이없게도 그 이득을 가져가는 건 오히려 남은 경기를 치르게 될 함부르크의 라이벌 팀들이었다.
그래도 항의를 그칠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팀의 에이스를 지킬 수 없었다. 이것은 자칫 반 더 바르트에게 쏟아질 비난을 막고 그의 심신을 보듬어주려는 목적이 더 컸다.
“후우. 이제 겨우 궤도에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반 더 바르트가 부상에서 회복하고, 그사이에 오솔의 실력도 향상되었다. 이제는 전보다 더 강력한 삼각편대를 내보낼 수 있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출전 정지를 당해 버렸다. 감독으로선 너무도 아쉬운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