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84화 (84/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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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과천선 스트라이커 84화

16장 함부르크의 밤

“오랜만이에요, 오솔 선수. 여기 앉아요.”

“예. 잘 지내셨어요?”

오솔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실비 반 더 바르트의 근처에 앉았다.

리그 11라운드 묀헨글라트바흐전.

오솔은 오늘 벤치가 아니라 관중석에서 경기를 관람하면서 마침 남편을 응원하러 온 실비와 같이하게 되었다. 물론 두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에이전트인 쇠렌 레르비도 함께였다. 오솔이 그에게 물었다.

“라파엘은 오늘 뛰어도 되는 거예요?”

“딱히 이동 시간이 길진 않았거든요. 본인도 출전을 원하고 있고요.”

반 더 바르트는 최근 들어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에서 스네이더와 포지션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그의 기량이 우월한지라 스네이더를 벤치로 밀어낸 상태였으나 언제 상황이 반전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소속 팀에서의 활약에 유독 신경을 쓰고 있었다. 모두 내년에 있을 월드컵을 위한 결정이었다.

“저도 출전하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몸 상태라면 멀쩡한데.”

“그래도 쉴 때는 쉬어야 해요. 저도 멕시코 월드컵 때 장시간 비행 때문에 고생했던 적이 있었어요. 분명히 가만히 있을 때는 멀쩡했는데 막상 경기에 들어가면 제 실력이 안 나왔었죠.”

멕시코 월드컵이면 1986년이었다. 무려 20년 전 이야기였으니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지금도 장시간의 비행이 선수의 컨디션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건 확실했다.

“지금은 생체리듬을 되돌리는 데 집중하세요. 운동선수는 아주 작은 차이라고 해도 크게 느끼는 존재들이잖아요. 요즘 들어 좋은 흐름을 타고 있는데 괜히 서두르다가 경기력이 흔들리는 것보단 한 경기 빠지는 편이 나을 겁니다.”

오솔이 출전을 고집하지 않고 휴식을 취한 배경에는 이 같은 레르비의 설득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야. 사비아.”

둘이 이야기를 진행하는 사이에 일행이 더 늘었다. 실비의 친구인 사비아 볼라루즈가 합류한 것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사비아는 칼리드 볼라루즈의 아내였다.

반 더 바르트와 볼라루즈가 네덜란드 동료였고 아내들 역시 친분이 있어서 오늘처럼 남편들이 같이 출전할 때는 두 아내가 같이 경기를 관람하곤 했다.

미녀들이 모이자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심지어 경기 전, 관중석을 비치는 카메라마저 옆에 있는 오솔보다 이 두 사람을 조명했다.

‘민주도 이렇게 주목받게 되려나?’

유럽에서는 축구 선수에 대한 관심만큼 선수들의 여자 친구나 아내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그리고 이 관심은 해당 선수가 인기를 얻을수록 더 높아졌다. 자연히 오솔로서는 장래에 여민주가 느낄 부담감을 생각하면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삐이익-!

그러나 걱정도 잠시, 경기가 시작되자 오솔의 관심은 다시 축구공으로 향했다.

‘내가 빠졌을 때 경기력이 어떻게 될지 궁금했는데 잘됐다. 오늘 볼 수 있겠어.’

지난번에 반 더 바르트가 빠졌을 때에는 경기력이 절반으로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바바레즈가 대신 10번 자리에 서서 고군분투했었으나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마침 오늘 9번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바바레즈였다. 그 사실을 확인한 쇠렌 레르비가 눈을 빛냈다.

“구단 입장에서는 바바레즈 선수가 보물이겠군요.”

“다재다능한 선수잖아요. 프로답기도 하고요.”

팀의 에이스는 누가 뭐래도 반 더 바르트였으나, 실질적으로 현재까지 팀에 기여도가 가장 높은 선수는 바바레즈였다. 오솔과 반 더 바르트의 공백을 제때 메워준다는 점만으로도 그는 높은 평가를 받을 만했다.

삐익-!

경기가 시작되고 선수들이 넓게 퍼졌다. 공은 함부르크의 에이스, 반 더 바르트에게 향했다.

“점점 라파엘을 경계하는 팀이 많아지고 있네요.”

“전술의 핵심이니까 어쩔 수 없죠.”

“그렇다고는 해도 부담이 너무 심해요. 심지어 오늘은 마크맨이 둘이나 붙었네요.”

오솔의 말처럼 오늘 묀헨글라트바흐에선 반 더 바르트를 막기 위해 두 사람을 동원한 상황이었다. 미드필더인 닐스 호프만과 수비형 미드필더인 번드 푼켈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덕분에 반 더 바르트가 뭔가를 해보려고 해도 항상 두 사람 이상이 붙어서 괴롭히는지라 다른 경기에 비해 움직임이 제한되었다.

“오솔 선수가 있었으면 바바레즈 선수가 내려가서 플레이메이킹을 도울 수도 있었을 텐데요.”

묀헨글라트바흐 입장에서는 오늘 경기에 오솔이 결장했다는 게 천운이었다. 그를 대신해서 나온 벤야민 라우트 같은 경우 포스트플레이가 형편없었고, 덕분에 바바레즈는 계속 전방에 묶였다.

결국 함부르크는 계속되는 집중 견제에도 불구하고 반 더 바르트에게 공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위기의 순간, 에이스에게 기대게 되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파앙!

“라파엘!”

팀의 기대대로 반 더 바르트는 패스가 올 때마다 현란한 개인기로 상대 선수들을 제쳐냈다. 과연 함부르크의 구세주로 불릴 만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상대의 커버는 그의 돌파보다 더 빨랐다.

촤아악!

조금이라도 공간이 나왔다 싶으면 반 더 바르트에게 태클이 들어갔고, 덕분에 그는 쉴 틈 없이 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어머. 어떡해!”

실비의 입에서 연신 걱정 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전반전 20분도 지나기 전이건만 반 더 바르트에게 가해진 반칙은 벌써 5개가 넘어가고 있었고, 그 강도도 점점 심해져서 이제는 단순한 몸싸움을 넘어 발목을 건드리는 깊은 태클로까지 이어졌다.

결국 25분이 지났을 무렵 닐스 호프만에게 카드가 하나 주어졌다. 하지만 이런 거친 수비 덕분에 묀헨글라트바흐는 한 수 위의 전력인 함부르크를 상대로 대등한 싸움을 이어갈 수 있었다.

‘또 발목을……! 이런 개자식들!’

일전에 발목에 큰 부상을 당했었던 반 더 바르트로는 점차 공을 받는 상황에 부담을 느꼈다.

‘젠장. 컨디션만 정상이었어도 상대도 안 됐을 것들이…….’

장시간 이동은 아니었으나 그도 유럽을 오가며 일주일 사이에 두 경기를 치렀다. 그 때문인지 플레이를 펼칠수록 평소와 달리 볼 컨트롤이 조금씩 엇나가는 느낌이었다.

토마스 돌 감독은 마음 같지 않은 경기 상황에 한숨을 쉬었다.

‘후우. 상대가 대놓고 에이스 죽이기에 나섰군.’

묀헨글라트바흐는 다른 곳의 방어를 포기하면서까지 반 더 바르트의 발을 묶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맞불을 놓는 건 팀의 경기력에도, 그리고 반 더 바르트에게도 좋지 않았다.

“마다비키아와 아투바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하라고 지시하게. 그리고 공격 방향도 중앙보다는 측면을 주로 활용하라고 하고.”

상대가 중앙에 한 사람을 더 놓은 덕분에 측면에는 공간이 많이 나오고 있었다. 마침 팀에는 돌파력이 좋은 윙백들이 포진해 있는 상황. 공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후 함부르크는 좌우 측면 윙백의 크로스 위주로 경기를 진행했다.

파앙! 뻥! 팡!

묀헨글라트바흐는 잔뜩 웅크린 채 난타당했다. 아무래도 그들은 중앙 수비에 집중하고 있어서 측면 공격에 취약했다.

그러나 묀헨글라트바흐는 이런 상황에서도 반 더 바르트에 대한 마크를 물리지 않았다. 설령 측면을 탈탈 털리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의 에이스 하나만큼은 자유롭게 놔두지 않겠다는 생각 같았다.

파아앙!

“또 막혔네요.”

결과적으로 묀헨글라트바흐의 감독의 노림수가 적중했다. 무수히 많은 슈팅에도 불구하고 골로 연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함부르크는 월등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공격 방식을 펼쳐야 했고, 외곽에서만 변죽을 울려댈 뿐 실질적인 성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토마스 돌 감독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음……. 역시 코펠 영감이군. 노련해.”

묀헨글라트바흐의 감독 호어스트 코펠은 명장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감독 경력이 벌써 26년을 맞이하고 있는 노장 중의 노장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비교적 약팀들을 맡아왔던지라 수비 전술에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함부르크의 지난 10경기를 분석하면서 팀 전술의 핵심이 반 더 바르트임을 간파했다. 동시에 A매치 때문에 오늘 경기에서 선수들의 컨디션이 정상이 아닐 거라는 것도 예상할 수 있었다.

‘모두가 힘든 상황에서는 결국 팀의 에이스에게 기대게 마련이지.’

그래서 에이스 죽이기 작전을 실행했다. 상대의 전술과 체력적인 상황, 그리고 심리까지 꿰뚫은 결과였다.

뻐어엉!

물론 반 더 바르트는 그런 상황에서도 때때로 유효 슈팅을 기록하며 코펠 감독의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으음. 역시 만만치 않네. 별수 없지. 이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코펠 감독은 번드 푼켈과 닐스 호프만에게 조용히 신호를 보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의 몸싸움이 전보다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심지어 심판이 보지 않을 때 슬쩍 발을 밟고 지나가기도 했다.

‘이 자식들이!’

이들의 에이스 흔들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푼켈과 호프만은 신체와 정신 모두에 타격을 입혀야 한다는 코펠 감독의 철학을 이어받아 반 더 바르트의 아픈 부위를 건들기 시작했다.

“이봐 아까는 발목을 잘못 차서 미안했어.”

“……?”

“흐흐. 제대로 걷어찼으면 지금쯤 실려 가서 편히 쉬고 있었을 텐데 말이야. 괜히 나 때문에 고생이군.”

“뭐라고?”

“워워. 흥분하지 말라고. 조심하라고 미리 경고하는 거야. 우리는 이브라히모비치처럼 살살 밟아줄 생각 없으니까.”

“내 앞에서 그 새끼 이름은 꺼내지도 마!”

“흐흐. 글쎄, 오히려 그놈은 양반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거다. 나는 네 녀석의 발목을 아예 작살을 내버릴 거거든!”

“이런 미친놈들!”

그 말 이후 원래도 과격했던 태클이 더 깊숙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반 더 바르트는 상대가 미리 경고한 덕분에(?) 피할 수 있었으나 전혀 고맙지 않았다.

“심판! 뭘 보고 있는 거예요? 이 새끼가 방금 발목을 고의로 노렸잖아요! 태클 못 봤어요?”

“고의가 아니었어요. 공을 막으려다가 조금 발이 헛나간 것뿐입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저렇게 개인기를 해대는데……. 오히려 저는 고의적인 반칙 유도가 아닌가 싶은데요?”

“뭐? 반칙 유도?”

반 더 바르트의 눈이 돌아갔다. 하지만 다행히도 주변에 동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참아, 라파엘!”

“놔봐!”

함부르크 선수들이 몰려와 반 더 바르트를 뒤로 물렸다. 네덜란드 대표팀 동료인 볼라루즈가 반 더 바르트를 안았고, 상대와의 기 싸움은 덩치가 큰 바바레즈와 반 바이텐이 도맡았다.

“진정해, 라파엘. 지금 실비가 보러 왔다는 걸 잊은 거야?”

볼라루즈의 일깨움에 반 더 바르트의 시선이 관중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가 있었다.

“후우. 이제 괜찮아요. 놔주세요.”

“정말 괜찮은 거야?”

“예, 고마워요. 덕분에 정신을 차렸어요.”

반 더 바르트는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아내가 보고 있는 경기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젠장맞을 놈들 같으니. 어디 두고 보자!’

반 더 바르트는 부글거리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며 이번에 얻은 프리킥을 차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모든 분노를 이번 프리킥에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무조건 넣는다!’

프리킥을 차기 전, 그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뻐어엉-!

뻐어엉!

이 소리는 축구공을 차는 소리가 아니었다. 수비벽을 세운 채 몸을 띄웠던 닐스 호프만의 머릿속을-그리고 국부(局部)를-울리는 소리였다. 공이 호프만의 그곳을 때린 것이다.

“아아악!”

끔찍한 비명 소리가 났다. 호프만은 남성에게 매우 치명적인 부위를 잡고 쓰러졌다. 방금까지 화가 났던 반 더 바르트조차 절로 미안한 마음이 들 만큼 너무도 정확하고, 강하게 맞아버렸다.

그는 고의가 아니었다는 의미로 살짝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나 자꾸만 웃음이 흘러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별수 없이 상대를 등진 채 히죽거렸다. 미안한 마음은 잠시, 어느새 그의 가슴속은 통쾌함으로 가득 찼다.

‘그러게 누가 사람 성질을 자극하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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