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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과천선 스트라이커 80화 (8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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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과천선 스트라이커 80화

차태민이 부드럽게 웃으며 오솔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그런 마음가짐이면 힘들어도 잘 견딜 수 있을 거야. 정 힘들 때는 내년에 있을 월드컵을 생각해. 국가대표는 한 경기 한 경기만 놓고 생각하면 안 돼. 모든 것은 다 월드컵이라는 대회를 향한 여정이야.”

“알겠습니다. 참, 선배님은 2002년 월드컵을 경험하셨잖아요. 그때는 어땠어요?”

이후 이야기는 2002년 월드컵의 비화들로 채워졌다. 한·일 월드컵은 촬영팀 입장에서도 흥미로운 소재였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점점 더 친해진 두 사람은 같이 저녁을 먹을 때가 되자 친근하게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훈훈한 모습이 가득 담기자 마침내 촬영 내내 불안해하던 김 피디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 할게요.”

“같이 밥 먹고 수다 떠는 것만 찍었는데 괜찮겠어요?”

“그럼요. 방송할 거 많이 건졌습니다. 벌써 열 시가 넘었는데 이만 가야죠. 내일 비행시간도 빠듯하고, 여러분도 쉬어야 하잖아요.”

다큐멘터리 1부가 방영되는 건 스웨덴과의 평가전이 치러지기 바로 전날이었다. 고로 남은 시간은 약 8일. 빠듯한 편집 일정을 맞추려면 당장 내일 있을 새벽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야 했다.

“그동안 재미도 없는 절 따라다닌다고 고생하셨어요.”

“아닙니다. 덕분에 유명한 선수들도 보고, 유럽 축구도 직관했잖아요. 그럼 두 분, 친선경기에서 멋진 활약을 보여주시길 응원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촬영팀이 떠나자 집이 다시 적막해졌다. 한껏 끓어올랐던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졌다.

“내일 오전 훈련 있어?”

“아니요. 오후에 나가면 돼요.”

“그래? 그럼 자고 갈래? 방은 많은데.”

“좋죠.”

오솔은 차태민이 침상을 정리하는 걸 보며 은근히 물었다.

“그런데 감독님이랑 대화할 때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까 보니까 표정이 영 안 좋던데.”

“아…… 티 났냐? 실은 조금 고민이 되는 제안을 받았거든.”

“무슨 제안이요?”

“포지션…… 변경을 해볼 생각이 없냐고. 하하. 아무래도 최근에 부진한 모습을 보여서 그런 것 같아.”

“그거 혹시 윙백으로 전향하라는 제안 아니었어요?”

“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맞아. 아드보카트 감독님까지 그렇게 말씀하시더라. 윙백이 되면 더 좋은 모습을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후……. 머릿속이 복잡하더라. 실은 비슷한 제안을 최근에 푼켈 감독님께도 들었거든.”

“그랬군요.”

알고 보니 이미 프랑크푸르트 내에서도 얘기가 오가고 있었다. 덕분에 오솔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저는 좋을 것 같아요. 윙백은 스피드와 몸싸움 능력을 제대로 쓸 수 있는 포지션이고, 또 형은 1선에 서는 것보다는 앞에 동료를 두고 움직일 때 더 위협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 후우. 아무튼 그것 때문에 고민 중이었어. 걱정해 줘서 고맙다.”

“아니에요. 건방질 수도 있는 말인데 진지하게 들어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하죠.”

“후후. 아예 이번 소집에서 풀백으로 뛰겠다고 해볼까?”

차태민 역시 자신의 경쟁자들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오른쪽 윙백도 쉬운 자리는 아니었으나, 측면 공격수라는 자리에 비하면 경쟁력이 있었다.

* * *

토마스 돌 감독은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오솔을 배려해 나흘 뒤에 있을 UEFA 컵 조별리그 경기에서 오솔을 제외했다.

다행히 상대 팀은 불가리아의 클럽, CSKA 소피아로 함부르크보다는 전력이 약한 팀이었다. 그래서 함부르크는 오솔을 비롯한 주력 선수들이 빠진 상태에서도 1 대 0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후 오솔은 A매치 소집일보다 하루 먼저 한국으로 돌아와 여민주를 만났다.

“수능 준비는 잘 하고 있어?”

“몰라. 망했어.”

“또, 또. 잘 볼 거면서 괜히 투정이다.”

“으으. 불안하단 말이야.”

“마음 편히 먹어. 그동안 노력해 온 게 있으니까 잘될 거야.”

“시험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자기 얼굴이나 볼래. 이걸로 스트레스 쌓인 거 다 풀어야지!”

“얼굴만 보는 건데 스트레스가 풀려?”

“당연하지. 우리가 지금 얼마 만에 보는 건데. 헤헤. 이렇게 가까이에 있으니까 너무 좋다. 참, 수능 끝나면 함부르크로 놀러 갈 생각인데, 언제 가야 돼?”

“시합 일정 확인해 볼게. 요즘 UEFA 컵도 치르는 중이라 시간이 조금 빠듯하거든. 그런데 부모님께서 허락해 주셨어?”

“엄마가 사고만 안 치면 된다고, 잘 놀다 오래. 히히히. 그나저나 이번에 친선경기 잘됐으면 좋겠다.”

“잘될 거야. 한참을 헤맸으니까 이제는 지름길로 가야지.”

“응! 우리 자기 파이팅!”

오솔은 여민주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다음 날 바로 파주 NFC를 찾았다. 여전히 천연 잔디로 구성된 필드가 그를 반겼다.

‘실제로는 반년밖에 안 됐는데, 엄청 오랜만에 돌아온 기분이네.’

소년기와 청년기의 차이일까, 아니면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 아니, 어쩌면 청소년 대표와 성인팀 국가대표라는 달라진 위상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찰칵! 찰칵!

달라진 건 오솔의 기분만이 아니었다. 그의 입소를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의 반응 역시 이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오솔이다. 야, 빨리 찍어!”

“오솔 선수, 짧게 인터뷰 좀 해주세요.”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소집되셨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최근에 좋은 활약을 이어가고 있는데 독일 생활은 어떻습니까?”

다행히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에이전트가 따라왔다.

‘물론 레르비 씨는 아니지만…….’

소렌 레르비는 반 더 바르트와 스네이더를 케어하기 위해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을 따라갔고, 지금 오솔을 수행(隨行)하고 있는 건 그의 아들인 니콜라이였다.

“질문은 세 가지만 받겠다고 해요. 미리 제한을 두는 편이 시간도 아낄 수 있고, 쓸데없는 질문도 피할 수 있어서 좋아요.”

오솔은 니콜라이의 조언에 따라 국가대표가 된 소감과 함부르크에서의 생활, 그리고 경쟁에 대한 각오까지 밝혔고, 생각보다 쉽게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럼 훈련 열심히 하세요. 전 그사이에 새로 숙소를 잡고 언론을 상대하고 있겠습니다.”

“알았어요. 수고해요.”

오솔은 귀찮은 일은 모두 니콜라이에게 맡기고 곧장 대강당으로 향했다. 새벽부터 부지런을 떤 덕분에 그는 비교적 일찍 온 편에 속했다.

“솔아!”

“짜식, 요즘 잘나간다면서?”

“당연한 결과죠. 형들은 그동안 잘 지냈어요?”

말을 건 사람은 여민국과 고영주였다. 불과 넉 달 전만 해도 같은 팀으로 뛰었던 선수들이라 그런지 그저 바라만 봐도 웃음이 나왔다.

웅성웅성.

약속 시간보다 빨리 온 사람들은 대부분 이번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신예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K리그에서 활약하는 신인, 혹은 중고 신인들이라 자연스럽게 함부르크에서 뛰는 오솔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칫 질투를 사거나 시기심에 오솔이 고립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두 친구가 나섰다.

“솔아, 인사해. 여기는 FC화랑에서 같이 뛰고 있는 김동준 선배. 알지?”

“그럼요. 최근에 이영신 선배를 밀어낼 기세로 활약 중이시잖아요.”

“솔아, 이쪽은…….”

다행히 별다른 잡음은 없었다. 고영주와 여민국은 오솔과 다른 선수들을 이어주기 위해서 노력했고, 오솔도 되도록 상대를 인정하고자 했다.

‘어찌 보면 벤치를 지키는 게 더 힘든 일이야.’

오솔은 고교 대회 3년과 FIFA 대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 모든 영광이 주전 선수들에게 돌아가는 상황에서도 마치 자신의 일처럼 같이 기뻐하며 뿌듯해하던 ‘팀 동료’들이 있었고, 그들 덕분에 자신도 존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반가워! 잘해보자!”

유럽에서 뛰는, 소위 잘나가는 후배가 먼저 친근하게 다가오자 K리그 선수들 역시 마음을 열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젊은 선수들이 안면을 트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눈초리가 날카롭고 입이 살짝 튀어나온 사내였다.

“뭐야, 화기애애하네?”

툭툭 던지는 말투가 묘하게 신경을 건드렸으나 누구도 그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상대는 이청운이었다.

비록 지금은 K리그 선수였으나, 그는 지난 월드컵에서 어린 나이에 4강 신화를 경험한 데다가 스페인 무대에서도 두 시즌이나 뛰고 돌아온 인물이었다. 같은 무대에서 뛴다고 해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네가 오솔이구나? 함부르크?”

“네. 반갑습니다, 선배님.”

“그러냐? 어쩌지? 나는 네가 반가울지 어떨지는 같이 뛰어봐야 알 것 같은데. 전방에서 많이 휘저어주는 스타일이면 반갑겠지만, 괜히 유럽에서 뛴다고 나대면 피곤할 것 같단 말이야.”

확실히 이청운은 언행에 거침이 없었다. 괜히 ‘혀컴’이라는 별명이 붙은 게 아니었다.

“일단은 감독님의 지시대로 움직일 생각입니다만……. 뭐, 하다 보면 더 효과적인 쪽으로 공격하겠죠. 그게 선배님에게 밀어주는 쪽이 될지 아니면 제가 직접 해결하는 방안이 될지는 두고 봐야겠죠.”

“뭐? 재밌네, 이 자식. 마음에 드는데?”

이청운은 오솔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연습 게임을 기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옮겼다. 이청운이 다가올 때부터 긴장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고영주가 입을 열었다.

“어휴. 네 배짱은 여전하다. 너 이청운 선배님에 대한 얘기도 안 들었어? 어떻게 거기서 선배님을 도발할 생각을 했어?”

“대화는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하는 거지, 그런 걸 왜 계산해요? 그리고 이청운 선배는 저랑 잘 맞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래. 성격은 판에 박은 것처럼 꼭 맞더라.”

이청운 다음으로 들어오는 인물들은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그리고 현재도 유럽에서 한창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이었다.

리그앙에서 뛰고 있는 안태환, 쉬페르리그에서 뛰는 이은령, 잉글랜드 챔피언십의 설현민과 지난번에 만나 호형호제하고 있는 차태민까지 2002년 세대가 차례대로 등장했다.

그리고…….

‘드디어 박해진 선배를 만나는 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토트넘 홋스퍼라니…… 진짜 대단하다. EPL에서 뛰면 어떤 기분일까?’

‘나도 선배들처럼 되고 싶다.’

모두의 관심이 집중됐다. 그 관심 속에서 등장한 것은 황선영과 홍명문이 떠난 국가대표팀에서 새롭게 중심이 된 박해진과 이영신이었다.

“쳇! 왜들 이래? 긴장하지 마. 뛰어보니까 유럽도 K리그랑 큰 차이 없더라.”

괜히 투덜거리는 이청운을 제외하면 모두가 두 사람에게 동경의 눈빛을 보냈다. 덕분에 박해진과 이영신이 곤란해하자 한쪽에 물러나 있던 안태환이 진화(鎭火)에 나섰다.

“야. 이러다 얼굴 뚫어지겠다. 미녀도 아니고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지금 미팅 나왔어?”

멀뚱히 서 있던 이은령도 한마디 보탰다.

“그래. 분위기 어색하게 뭐 하는 거야. 그렇게 좋으면 나중에 사인 받아 가면 되잖아.”

“사인은 무슨…… 하, 진짜 정신들 못 차렸네. 다들 여기 좀 봐봐! 미안한데 내가 딱 한마디만 할게.”

안태환에게 시선이 모였다.

“국가대표로 소집된 이상 우리는 같은 팀이고, 여기에 소속 팀이니 뭐니 하는 건 없는 거야. 맨유나 토트넘 좋지, 멋있지. 그런데! 국가대표로 뛰는 순간만큼은 다른 무엇보다 태극마크가 먼저인 거야. 중계 화면에 너희들의 이름 옆에 걸리는 건 태극마크라고. 소속 팀? 소속 팀은 이름! 나이! 키! 몸무게까지 다 적은 다음에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게 소속 팀이야.”

“…….”

“내 말은 우선순위가 뭔지 보라는 거야. 지금 여기에 친목 도모하려고 모인 게 아니잖아. 우리는 같이 연습하고 친해져야 할 사이지 누가 누구를 동경하고 이러면 안 돼.”

“예!”

“죄송합니다!”

안태환의 따끔한 한마디에 몇몇 선수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자칫 불편해질 수도 있는 분위기가 되자 이은령이 슬쩍 농담을 던졌다.

“그럼 끝나고 너는 사인 안 받는 거지? 근데 난 받을 거야. 해진이랑 영신이, 그리고 저기 솔이도 사인해 주고 가. 알았지?”

“어휴! 이 화상아!”

“왜? 네 것도 받아줄까?”

“됐어! 필요 없어!”

“너 나중에 후회한다. 받을 수 있을 때 받아둬.”

“무슨 사인을 받아! 쯧, 내가 해주면 모를까.”

풉! 푸흡! 하하하!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투닥거리자 여기저기에 웃음이 깔렸다. 덕분에 짧은 시간 만에 진지하면서도 편안한 분위기가 잡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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