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77화
15장 내 나라, 나의 조국, 대한민국
후우우웅.
비행기 이륙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프랑크푸르트 공항.
11월 1일. 함부르크 대 프랑크푸르트의 경기를 이틀 앞으로 남겨놓고 차태민 선수의 다큐멘터리 촬영팀이 도착했다. 그러나 기껏 해외 촬영을 왔건만, 장비를 챙기는 스태프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일정이 빠듯해서?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다.
오늘부터 이틀간 차태민의 일상을 밀착해서 촬영하고, 이어서 함부르크전과 저녁에 있을 오솔 선수와의 식사 장면까지 찍고 쉴 틈도 없이 바로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3박 4일의 일정으로 2주 분량의 영상을 찍어야 했으니 마음이 조급한 것도 당연했다. 차태민도 찍어야 하고, 동료나 감독, 그리고 팬들과도 인터뷰를 해야 했다.
하지만 진짜 걱정되는 건 따로 있었다.
“그런데 선발은 확실한 거겠죠?”
“내가 감독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아?”
조연출의 걱정에 김 피디가 짜증이 섞인 음성으로 답했다.
‘젠장. 이게 어떻게 통과한 건데.’
다큐멘터리, 차태민 편.
이는 분데스리가 시청률을 되살리기 위한 수많은 계획 중 최종적으로 선택을 받은 것으로, 김 피디가 직접 입안(立案)한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그냥 가만히 있을걸!’
김 피디는 자신의 명석하면서도 어리석은 머리를 탓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 것을, 괜히 한마디 했다가 누가 와도 살릴 수 없는 프로그램을 집도(執刀)하게 되었다.
“차태민 선수 만나면 다들 표정 관리 잘 해. 괜히 부담을 주거나 불편하게 하지 말라고!”
누가 봐도 김 피디가 제일 화가 나 있었지만, 스태프들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야, 재형아. 최근에 출전 상황이 어떻게 된다고 했었지?”
“9라운드까지 6경기 출전했어요. 그중 선발은 2경기, 그 외에는 모두 후반전 교체입니다. 지난달 경기만 계산하면 3경기에서 모두 교체로 나왔습니다.”
“처참하군. 이번 경기에 교체로라도 나오길 기대해야 하는 건가?”
6경기 무득점, 2도움.
이번 시즌 차태민의 성적이었다.
차태민은 스피드와 몸싸움이 굉장히 준수한 선수였으나, 발재간도 부족하고 방향 전환도 좋지 않아서 패턴만 익히면 수비하기 굉장히 쉬운 타입이었다.
물론 이런 스타일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준수한 활약을 보였다. 첫 시즌에는 꽤나 파괴력이 있는 돌파를 선보였으며, 두 번째 시즌도 중반까지는 곧잘 골 기회를 잡았다.
문제는 올해였다.
차태민은 분데스리가에 온 지 올해로 벌써 세 시즌째였다. 이미 지난 2년 사이에 그의 장점과 단점, 플레이 스타일까지 모두 까발려진 상태였다. 게다가 그는 꼭 슛이나 패스를 하기 전에 멈칫하는 순간이 있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발이 너무 빨라서 몸이 의식보다 먼저 도착한 탓이다’라고 조롱할 정도로 결코 좋지 못한 습관이었다. 이러니 수비수 입장에서는 막기 너무 쉬웠다.
“오솔 선수 쪽은 어때?”
“저녁에 약속을 잡기로 했습니다. 다만 촬영 시간은 조금 늦춰질 것 같답니다. 경기 끝나고 두 사람 다 아드보카트 감독과 면담을 해야 한답니다.”
“그건 촬영할 수 없겠지?”
“면담 내용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오케이. 그래도 악수하는 장면 정도는 찍을 수 있겠지. 짧게 한마디라도 인터뷰 딸 수 있으면 좋겠는데…….”
축구 선수들은 대부분 심심하고 재미없는 성격이다. 일상 자체가 시합 일정에 완전히 맞춰졌기 때문에 그 외의 일들에는 둔감했고, 당연히 말주변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갑자기 카메라를 들이밀면 평소보다 더 굳었다. 그래서 축구 선수의 다큐멘터리는 자칫 수면제 대용으로 쓰일 위험이 있었다.
그런 위험을 막는 것이 감독이나 현지의 평가, 팀원들의 반응처럼 다채로운 구성이었다. 여기에 신임 국가대표 감독까지 나오면 금상첨화였고, 더불어 오솔이라는 한국 축구계의 신성(新星)까지 등장하면 화룡점정이 된다.
계획을 점검하던 김 피디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참, 오솔 선수는 최근 성적이 어떻게 돼? 이번에 주전 출전이 가능할 것 같아?”
“9라운드 빌레펠트전에서 4골을 넣었고, UEFA 컵 조별리그 경기에서는 결장했습니다. 나흘 전에 있었던 컵 대회에선 풀타임 출전해서 1골을 기록했습니다.”
“그래? 최근에 기세는 좋다는 거지? 그런데 나흘 전에 뛰었으면 이번에는 못 나오는 거 아니야?”
“경기 전까지 6일 정도는 쉴 수 있으니까 체력에는 문제없을 겁니다.”
“그렇단 말이지. 좋아! 짐 다 찾았지? 그럼 이동하자! 재형아, 너는 차태민 선수한테 전화 미리 해놔. 우리 지금 도착해서 찾아가겠다고.”
“예!”
그렇게 차태민이 촬영을 진행하는 사이 오솔 역시 프랑크푸르트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에게는 미안하게도 이번 경기에는 부상에서 돌아온 반 더 바르트와 바바레즈, 그리고 오솔이라는 함부르크의 새로운 트로이카가 출동하게 되었다.
* *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05-2006 시즌 분데스리가의 중계를 맡고 있는 캐스터 임주원.]
[해설에 황정연입니다.]
[황정연 해설위원님. 현재 늦은 밤임에도 많은 분들이 TV 앞을 지키고 계신데 그 이유가 뭐죠?]
[오늘은 국내의 해외 축구 팬들, 그리고 우리나라 선수들의 선전을 기대하는 많은 분들의 기대와 관심이 모아질 수밖에 없는 경기가 치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드디어 운명의 그날이 왔습니다. 함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 프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의 리그 10라운드 경기가 오늘 펼쳐집니다!]
국내 중계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았다. 모두 중계 직전에 들어온 희소식 덕분이었다.
[오늘은 차태민 선수와 오솔 선수가 선발 출전한다는 소식이 들어왔죠?]
[그렇습니다. 커뮤니티에서는 벌써부터 코리안 더비 매치라며 뜨거운 관심이 모이고 있습니다.]
[솔직히 국내 팬들 입장에서 봤을 때는 두 선수 다 잘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저희야 두 선수 다 골을 기록하고 경기는 사이좋게 비겼으면 하지만, 양 팀 감독과 선수, 그리고 팬들의 생각을 다를 겁니다.]
[오늘 어느 팀이 우세하다고 보십니까?]
[아무래도 리그 선두로 올라서 있는 함부르크입니다. 비록 프랑크푸르트 홈경기이긴 하지만, 팀 전력에 차이가 있다 보니 함부르크를 상대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근 프랑크푸르트는 분위기가 영 좋지 않습니다. 오늘까지 지면 자칫 강등권까지 떨어질 수 있어서 한 경기 한 경기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합니다.]
중계를 이어가는 사이 화면에 딕 아드보카트 감독의 모습이 잡혔다.
[최근에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사령탑을 맡게 된 딕 아드보카트 감독입니다.]
[최근이라곤 하지만 벌써 취임한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슬슬 자신의 뜻을 펼칠 때도 됐죠.]
[이번 유럽행을 통해 해외파 선수들의 경기력 확인은 물론 개인 면담까지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나 박해진 선수에 대한 평가가 아주 좋았죠?]
[박해진 선수가 비록 출전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세계적인 팀에 속한 선수이기 때문에 좋은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EPL에 관련된 이야기가 길어지자 피디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중계권도 없는 EPL 얘기를 해봐야 다른 방송사만 도와주는 꼴이었다.
[선수들이 입장합니다.]
다행히 베테랑 캐스터인 임주원이 적절히 화제를 전환했다.
[마침 차태민 선수와 오솔 선수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네요.]
[참, 감개무량한 장면이네요. 세계 최고의 무대 중 하나인 분데스리가에서 우리 선수들이 맞대결을 펼치는 날이 오다니요.]
[두 선수가 웃으며 대화를 나누네요.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요?]
[글쎄요. 아마 오늘 경기 잘 하자는 덕담이겠죠.]
화면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오솔의 얼굴이 잡히고 있었다.
“선배님. 오늘은 이기는 사람이 밥 사는 걸로 하죠.”
“됐어. 내가 살게. 원래 이런 건 선배가 사는 거야.”
“그러면 제가 너무 죄송한데요. 경기도 이기고 밥까지 얻어먹으면…….”
“뭐?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이겼다 이거냐?”
“흐흐. 죄송하지만 오늘은 제가 무리를 해서라도 실력을 발휘할 생각이거든요. 한국에도 중계되고, 국가대표 감독님도 보고 있는데다가 다큐멘터리로 찍기도 하잖아요. 선배님 덕에 생긴 기회인데 밥 정도는 제가 사게 해주세요.”
“짜식! 배짱은 있네. 그래도 너무 들뜨지 마라. 이게 기회인지 아닌지는 경기가 끝나봐야 아는 거니까.”
두 사람의 농담은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뚝 끊겼다.
삑!
오솔은 마지막으로 차태민과 악수를 하고 포메이션에 맞춰 섰다. 휘슬이 울린 이상 이제는 온정신을 시합에 집중해야 했다.
[프랑크푸르트의 선축(先蹴)으로 경기 시작합니다. 공을 뒤로 돌리는 차태민. 아직까지는 양 팀 다 서두르지 않습니다. 황 해설위원, 여유가 있을 때 오솔 선수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좀 해주실까요?]
[오솔 선수는 올 시즌 처음으로 프로에 올라온 선수입니다. 프로 데뷔 무대가 분데스리가인 아주 특이한 경우죠. 그래서 많은 분에게 낯설 수 있는데요. 기본적인 플레이 스타일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는 뤼트 반 니스텔루이 선수와 유사합니다. 큰 키를 이용한 포스트플레이나 헤딩을 아주 잘합니다.]
[실력은 어떤가요, 국가대표에 발탁될 만한가요?]
[나이는 어리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박해진 선수와도 잘 맞을 것 같은 게, 박해진 선수가 작년에 하셀링크 선수와 합을 맞추며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 골까지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오솔 선수라면 충분히 하셀링크 정도의 역할을, 혹은 그 이상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말씀이 끝나는 순간, 차태민 선수의 돌파! 아! 공이 수비수의 발에 걸리고 맙니다!]
차태민은 음펜자와 비슷하게 직선적인 돌파를 주로 시도하는 타입이었다. 특히나 그는 질주 속도가 대단해서 공을 치고 달리기 시작하면 웬만하면 막기 힘들었다.
‘그래서 나중에 윙백으로 전환하지 않았나?’
일직선 돌파가 위력적인 차태민에게 윙백이란 포지션은 생각보다 잘 맞았다. 오솔은 남의 일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차태민의 포지션 변경은 꽤나 독특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을 먹으면서 슬며시 얘기를 꺼내봐야겠군.’
자칫 건방진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었으나, 어차피 포지션을 변경할 거라면 최대한 빨리 바꾸는 편이 차태민 본인에게도 좋았다.
‘뭐, 충고를 안 들으면 별수 있나. 남들 경기할 때 혼자 해설하는 거지.’
오솔은 그렇게 생각하며 슬금슬금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차태민을 위한 충고도 좋지만, 일단은 본인부터 대표팀에 합류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플레이를 모두 보여주는 거야.’
운이 좋게도 오늘 함부르크는 반 더 바르트와 바바레즈 두 선수가 플레이메이커처럼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전방에는 평소처럼 오솔이 자리했다.
단순히 공의 움직임만 좇는 사람들은 함부르크의 공격을 보며 경기를 만들어가는 게 바바레즈와 반 더 바르트 두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쉬웠다.
얼핏 보기에 오솔은 별로 하는 일이 없었다. 그저 꼭짓점의 끝에 서서 공격을 연결하거나 수비의 시선을 끄는 것 외에는 움직임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두 명의 플레이메이커를 동시에 운용하는 전술은 원톱 자리에 오솔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어서 가능했다.
시시때때로 위치를 이동하며 공간을 이용하는 두 사람의 움직임에 맞춰서 연계, 침투, 시선 끌기를 하려면 그들과 비슷한 수준의 시야와 판단력을 지녀야 했는데, 현재 함부르크에서 그게 가능한 공격수는 오솔이 유일했다. 아니, 사실상 이 나이 대에 이 정도 축구 지능을 지닌 이는 세계적으로도 많지 않았다.
당연히 딕 아드보카트 감독 정도 되는 이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움직임이 좋은 선수로군. 너무 빠르지도,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도 않아.’
적기(適期)에 움직인다는 건 상대가 반응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오솔 선수! 수비 뒤 공간을 파고듭니다! 아! 수비수들이 손을 들어보지만 오프사이드가 아닙니다!]
노마크 찬스였다. 거기다 반대편에서는 바바레즈가 빠르게 쇄도하고 있었다. 툭 건네주기만 해도 무조건 골인 상황. 그러나 오솔은 오늘만큼은 원래도 심했던 욕심을 조금 더 내기로 했다.
‘미안, 세르게이. 네 건 네가 알아서 차려먹어.’
툭-! 철썩!
전반 10분, 오솔은 송곳처럼 찌르고 들어온 스루패스를 받아 반대편 골대를 향해 가볍게 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