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75화
찰칵! 찰칵!
이란과의 평가전이 끝나고 바로 열린 기자회견장에 플래시가 쏟아졌다. 이번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게 된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모아이 석상을 연상케 하는 아드보카트 감독의 커다란 얼굴에는 구슬땀이 잔뜩 맺혀 있었다. 국가대표팀을 맡은 직후 치러진 첫 번째 친선경기에서 패배한 탓이리라.
좌우에는 통역을 도와줄 직원과 협회에서 나온 직원, 그리고 주장인 이영일 골키퍼가 앉아 있었다. 준비가 끝나자 기자들의 질문이 시작됐다.
“취임 이후 첫 경기를 패배하게 되었는데, 국가대표팀 선수들에게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색깔을 입혀 나갈 생각이신지 궁금합니다.”
아드보카트 감독의 대답은 통역을 한 번 거쳐서 전달됐다.
“비록 패배하긴 했지만 선수들은 전체적으로 수준 높은 축구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따로 전술을 맞춰볼 시간이 없어서 이전까지 해왔던 전술에서 큰 변화 없이 첫 경기를 치렀음에도 이 정도면 괜찮은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경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선수들 개개인에 대해 파악하는 시간이었고, 선수 파악이 모두 끝난 후에야 전술에 대해 논할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긴 힘들지만, 남은 8개월 안에 경쟁력이 있는 팀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군요.”
기자들도 이제 막 팀을 맡은 감독에게 까칠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어지는 질문들에서 공격적인 어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에 박해진 선수를 선발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박해진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지 이제 겨우 세 달이 지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표팀 경기가 중요하긴 하지만 선수가 컨디션을 조절하고 팀에 적응할 기간을 주는 편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더 도움이 되는 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함부르크에서 뛰고 있는 오솔 선수를 소집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인가요?”
“누구요?”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통역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협회 직원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마, 맞습니다. 해외파 중에 당장 컨디션 조절이 중요한 선수들에게는 배려를 했습니다.”
질문은 다음으로 넘어갔으나 아드보카트 감독은 여전히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자 회견이 끝나고 아드보카트 감독은 기사를 보고 버럭 화를 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함부르크에서 뛰는 한국 선수라니? 왜 이런 정보를 나만 몰랐던 거죠?”
“아까 말했듯이 팀에 적응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립니까. 설혹 그런 의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선수 정보는 당연히 있었어야죠. 제가 지난 한 달간 살펴본 선수들만 70여 명이 넘습니다. K리그에서 뛰는 선수부터 2부 리그 선수까지 빠짐없이 건네줬다면서, 어떻게 함부르크에서 뛰는 선수를 빼먹을 수 있습니까?”
“아, 아마도 중간에 누락이 된 듯합니다.”
“누락이요?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겁니까?”
아드보카트 감독의 두 눈에서 레이저가 쏘아져 나왔다. 국내파 52명, 해외파 18명을 일일이 확인하며 그중에서 옥석을 가르고자 했건만, 알고 보니 국가대표 상비군 명단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선수를 확인하기도 전에 이 선수, 저 선수를 언급하며 주의 깊게 봐달라고 하더니, 이런 목적이었습니까? 누구요? 성지훈? 이따위 놈을 추천할 시간에 제대로 된 선수들을 추천하란 말입니다.”
축구 협회 직원은 아드보카트 감독을 진정시키기 위해 진땀을 흘려야 했다.
‘이런 망할! 나는 그저 전달만 했는데 왜 날 잡도리를 하냐고. 따지려면 기술위원장한테 따지든지…….’
협회 직원은 그렇게 한참을 딴생각을 하며 아드보카트 감독의 불평을 흘려보내다가 갑자기 입술을 쭉 내밀었다.
‘이게 다 그놈이 이상한 말을 해서 그런 거잖아. 미친놈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난리야. 에이 씨, 짜증 나.’
직원이 말한 ‘그놈’은 이번에 이란 대표팀으로 출전해서 2도움을 기록한 우측 미드필더 메디 마다비키아였다. 동시에 그는 오솔의 팀 동료이기도 했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오솔에 관한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거론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자들에게 미리 선수 소집과 관련된 질문은 최대한 자제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디 마다비키아가 보인 기행 아닌 기행은 언론의 관심을 끌었고, 자연스럽게 팀 동료이자 제법 괜찮은 활약을 보이고 있는 오솔의 이름도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실제로 최근에 작성된 기사 중에 새로운 감독이나 대표팀의 경기력에 대한 내용을 제외하면 다음과 같은 기사들이 가장 인기를 끌고 있었다.
[오솔의 동료, 메디 마다비키아. 여기가 치맥의 나라입니까?]
[두 유 노우 마스터, 메디 마다비키아. 해진 박, 윤아 킴, 김치와 불고기까지 한국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
[Of course, I know! 함부르크에서 예습하고 왔어요!]
[한국어 인사를 선보이는 메디 마다비키아. 동료인 오솔이 직접 붙여준 별명 ‘메디카솔’도 자랑.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른다고…….]
[초코과자 사랑을 전하는 마다비키아. 오솔에게서 한국의 정을 느꼈다.]
국가대표팀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가만히 있기 심심했던 오솔은 메디 마다비키아가 한국에 간다는 소리를 들은 즉시 반강제적인-거의 세뇌 수준의-교육에 들어갔고, 이렇게만 하면 한국의 팬들에게 초코과자를 잔뜩 받을 수 있다는 설득에 마다비키아도 훌러덩 넘어갔다.
덕분에 경기에 뛰지 못했음에도 오솔은 다른 선수들 못지않게 자주 언급되었고, 협회에서 벌어지던 은폐 시도 역시 엉겁결에 무마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아드보카트 曰 “11월에 예정된 스웨덴전은 해외파를 모두 소집할 것.”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유럽행을 결정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신임 감독인 딕 아드보카트(58세)는 10월 둘째 주부터 한국을 떠나 약 3주간 유럽파 선수들의 기량을 직접 확인할 예정이다.
맨 먼저 잉글랜드에서 뛰고 있는 박해진, 이영신의 경기를 확인하고, 그다음으로 프랑스의 안태환을, 이어서 다음 달 초에 있을 프랑크푸르트 대 함부르크 SV의 경기를 관람하며 차태민과 오솔을 확인할 예정이다.]
결국 감독의 입에서 유럽에서 뛰는 해외파를 모두 소집하겠다는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이에 대한 네티즌의 반응은 평소와 같았다.
[역시 해외파가 있어야 돼. 솔직히 J리그나 K리그에서 뛰는 애들로는 경쟁력이 없지. 당장 이란한테 2 대 1로 져버렸잖아.]
[그건 조봉래가 이전까지 망쳐놓은 영향이고, 이제 감독도 바뀌었으니까 잘되겠지.]
[감독 하나 바뀐다고 뭐 얼마나 변한다고 그러냐. 그리고 이제 월드컵까지 고작 8개월 남았다. 남들은 이제 매듭만 맺으면 끝나는데, 우리는 아직 뼈대조차 제대로 못 세웠잖아.]
[원래 한국은 월드컵을 이렇게 준비한단 말입니다!]
[빼액거리지 좀 마라. 네가 단비냐?]
[훗! 8개월이면 세 경기를 준비할 시간으론 충분하지.]
[야. 그래도 16강은 가야지. 지난 대회에서 4강까지 갔는데, 이번에 16강도 못 가면 거품이라느니 오심 덕분에 올라간 거라느니 별별 소리가 다 나온다고.]
[2002년 월드컵이 사람들 다 망쳐놨네. 우리가 언제부터 16강, 8강 갔다고 이 난리냐? 냉정하게 말해서 우리는 아직 조별리그까지밖에 안 되는 수준이다. 6회 연속 본선 진출에 만족하고 조용히 짐 싸자.]
[아직 독일에 가지도 않았는데, 뭔 벌써 짐을 싸?]
[독일에 가려면 짐을 싸야지.]
[아, 그 소리였어?]
[물론 풀기도 전에 돌아오겠지만.]
[아니다. 이 악마야!]
농담 따먹기가 한차례 지나가고 자칭 올드 축구 팬 하나가 2002년의 추억을 떠올렸다.
[확실히 돌아보면 2002년 멤버가 사기였어. 골키퍼부터 수비수, 미드필더, 그리고 공격수까지 어느 하나 부족한 포지션이 없었는데.]
[2002년에 축구 본 거 맞음? 그 선수들 대부분 이번 월드컵에 남아 있는데? 물론 몇 명은 은퇴했지만, 당시 20대 초반이던 선수들의 기량은 오히려 이전보다 늘었고, 그중 대표적인 게 이번에 맨유에 진출한 박해진임.]
[맞는 말이야. 이번 월드컵은 솔직히 멤버만 놓고 보면 굉장히 좋은 편이지.]
[그럼 뭐 함? 공격수가 없는데. 솔직히 안태환도 요즘 안 좋고, 차태민도 프랑크푸르트에서 죽을 쑤고 있더라.]
[성지훈은?]
[성지훈이야 말할 것도 없지. K리그에서도 휘청휘청하는 중인데.]
[오솔인가 뭔가도 있다며. 분데스리가에서 뛴다는 애.]
[걔는 축구 선수 맞냐? 난 무슨 문화 사절단인 줄 알았다. 도대체 팀원들한테 뭘 가르치고 있는 거야? 아니, 지가 무슨 보빙사야? 헤이그 특사냐고! 축구나 할 것이지 독일까지 가서 김치는 왜 알리고 있어?]
[보빙사 진짜 오랜만에 듣는다. 너 급식이냐?]
[급식 아니다.]
[그래도 오솔은 그나마 성적이 괜찮음. 유럽에서 뛰는 선수 중에서는 확실히 제일 낳다고 봄.]
[낳다 X. 낫다 O. 얘는 확실히 급식이네.]
[일단은 지켜보자. 감독이 바뀌었으니까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 관심을 갖는 건 좋지만 과도한 비난은 좋지 않아.]
[과도한 비만으로 보고 뜨끔했다.]
[222.]
[33333.]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열 받아서 성토하다가 다시 기대하는, 한국 축구 팬들에게는 지극히 일상적인 패턴이었다.
* * *
일주일 후, 다시 리그 경기가 재개되었다. 이어지는 리그 9라운드 상대는 강등권 팀인 DSC 아르미니아 빌레펠트였다.
토마스 돌 감독은 반 더 바르트를 포함한 선수들에게 휴식을 주고, A매치 기간에 쉬었던 선수들을 대거 기용했다.
빌레펠트 선수단에는 국가대표가 없어서 1군 선수 대부분이 쌩쌩한 모습을 보였으나, 사정은 함부르크의 1.5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일주일이 넘게 푹 쉰 덕분에 노장 바바레즈의 움직임이 더 살아났다. 그 증거로 상대를 베어낼 듯한 날카로운 패스가 몇 번이고 오솔의 앞에 떨어졌다.
‘그래. 이런 패스를 원했다고!’
이전보다 더 빨라진 오솔의 스피드, 그리고 일주일간 합을 맞추며 패스 타이밍을 익힌 바바레즈, 마지막으로 발이 느린 빌레펠트의 수비수와 골키퍼가 만나자 경기가 일방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고오올! 또다시 골을 넣는 오솔!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화력이네요.]
[빌레펠트 감독의 얼굴을 좀 보세요. 완전히 혼이 나간 듯한 모습입니다.]
[오늘 함부르크가 1.5군을 대거 기용했기 때문에 해볼 만하다는 생각으로 왔을 텐데 말이죠. 결과적으로 바바레즈와 오솔, 단 두 사람에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바바레즈의 스루패스와 번개처럼 달려가 공을 잡아채는 오솔의 플레이에 빌레펠트의 수비진은 전반전 30분 만에 벌써 두 골을 헌납하고 말았다.
빌레펠트의 감독은 더 이상 라인을 유지할 수 없다는 생각에 수비진을 내리고 잔뜩 웅크리는 선택을 했다. 그러나 토마스 돌 감독은 역습의 위험이 없는 상대에게까지 수비적인 운영을 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함부르크의 좌우 풀백은 거침없이 전진했고, 빌레펠트로서는 좌우에서 올리는 크로스와 오솔의 헤더에 계속해서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꼬오오올! 분데스리가에서 첫 번째 해트트릭(Hat trick)을 터트리는 오솔 선수! 오늘 빌레펠트를 제대로 침몰시킵니다.]
[박스 안에 여섯 명이나 되는 수비수가 버티고 있었음에도 공을 따낸 것은 결국 오솔 선수였습니다. 이 장면만 봐도 이 선수가 단순히 키가 크고 힘만 센 선수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어요. 굉장히 영리하고 눈치가 빠른 선수입니다.]
오솔은 국내의 시선이 몰린 타이밍에 맞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마음껏 과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