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62화
데니스 쿤츠는 함부르크 지역지에서 축구 칼럼을 쓰는 사람이다. 그래서 평일에 치러지는 컵 대회 경기를 보는 데 부담이 없었다. 취미와 일이 같을 때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이득 중 하나였다. 물론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마실래?”
“지금 놀리냐?”
그는 친구인 미하엘 자이어가 건네는 맥주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게 가장 큰 단점이었다. 축구 경기를 보면서 마음껏 맥주를 마시지 못한다는 것.
“흐흐흐. 그럼 실례.”
자이어는 얄밉게 웃으며 맥주 캔에 입을 갖다 댔다.
표면에 맺힌 이슬과 꼴깍거리며 넘어가는 목울대, 그리고 점점 커지는 눈동자까지 두 눈에 선명하게 맺혔다.
“망할 맥주광 같으니라고.”
“네 직업을 탓하라고, 친구.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나도 알아!”
“왜 성질이야. 마시면 되지.”
“난 술이 약하다고 했잖아!”
쿤츠가 신경질적으로 자리에 앉았다. 술이 조금만 강했어도 한 모금씩 마시면서 관람하겠는데, 하필 그는 주량이 딱 맥주 한 캔이었다. 술을 조금이라도 마셨다간 글도 꼬이고 경기 분석도 엉망이 되기 십상이었다.
‘젠장. 언제쯤 마음 편히 맥주 한잔하며 경기를 볼 수 있을까.’
잠시 달콤한 상상을 했던 쿤츠는 곧 고개를 휘휘 저었다. 계약이 끊기면 당장 내일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짜증은 나더라도 지금처럼 일이 있는 편이 나았다. 그는 뭐라도 할 심산으로 홈페이지에 올라온 선발 명단을 확인했다.
“투톱에 오솔? 그리고 타카하라로군. 오솔이라. 새로 영입한 한국 선수잖아?”
“그러면 오늘 공격진은 동양인들로 구성되는 거야? 이거 영 불안한데.”
“확실히 타카하라는 매번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줬지. 그래도 작년에는 7골을 넣으면서 나름대로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줬잖아. 또 새로운 이적생이 어떤지 아직 모르는 거니까 벌써부터 실망하지 말자고.”
“오솔인가 뭔가는 이전 팀 정보가 아예 없어. 아마추어였다고.”
“그래도 차붐과 같은 나라에서 온 선수이니만큼 잘하지 않을까?”
“프랑크푸르트에 차붐의 아들이 뛰는 거 못 봤어? 그냥 차붐이 특별했던 거야.”
그들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 선수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우와. 저 녀석이 오솔인가 본데? 엄청 크잖아?”
“그, 그러게. 키도 레인하르트 못지않게 크고, 덩치도 어마어마한데?”
아닌 게 아니라 오솔은 멀리서 봐도 눈에 확 들어왔다. 체구가 얼마나 큰지, 나란히 선 타카하라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었다.
“피지컬 하나만큼은 확실하겠어.”
“그 대신 동작이 굼뜰 것 같아.”
함부르크의 팬들은 선발로 나온 동양인 듀오에게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새로운 이적생과 그동안 부진했던 공격수의 투톱은 아무래도 믿음이 안 갔다.
와아아!
그러나 정작 경기가 시작되자 경기장을 찾은 2만 3천여 명의 팬은 환호성을 지르기 바빴다. 초반부터 오솔과 타카하라의 파상공세가 매섭게 이어지며 상대 팀 골키퍼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덕분에 슈투트가르트 키커스의 골키퍼는 거의 5분에 한 번꼴로 몸을 날려야 했다.
“또 돌파에 성공했어! 오늘 타카하라가 아주 매서운걸?”
“새로운 이적생은 또 어떻고! 저 무지막지한 파워와 제공권은 정말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타카하라의 자신감 넘치는 움직임과 오솔의 힘과 높이는 상대 수비진을 말 그대로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무엇보다 위력적인 건 두 사람의 호흡이 이제 막 투톱을 결성한 선수들답지 않게 잘 맞는다는 사실이었다.
와아아!
“골이야! 나이스 타카하라! 하하! 저 초밥 폭탄 녀석, 이제야 공격수다운 모습을 보여주네!”
전반 27분경, 오솔의 헤딩 패스를 받은 타카하라가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를 맞아 가볍게 골을 넣었다. 세 번의 유효 슈팅 끝에 나온 골이었다.
득점 후 물이 오른 타카하라는 측면 돌파를 시도하여 크로스를 올리거나 2선으로 내려와 플레이메이킹을 돕는 등 보다 다채로운 움직임을 선보였다.
점유율은 거의 8 대 2까지 벌어졌다. 상대는 슈팅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슈투트가르트 키커스의 선수들이 막기에는 함부르크의 선수들의 실력과 투지가 너무 강했다.
결국 전반전이 끝나기 직전에 골이 하나 더 들어갔다. 오솔이 뛰어난 위치 선정과 점프력을 선보이며 코너킥을 골로 연결한 것이다.
“경기가 시원시원하니까 맥주를 마실 맛이 난다!”
“에잇! 안 되겠다. 나도 한잔해야지!”
후반전에는 쿤츠도 맥주를 입에 댔다. 입이 근질근질하기도 했고, 경기가 이미 치우친 상태라 더는 볼 것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경기는 반전 없이 끝이 났다.
최종 스코어는 4 대 0.
오솔은 헤딩으로만 두 골을 뽑아냈고, 타카하라는 선제골 이후 좋은 움직임을 보였으나 그 이상의 득점은 없었다.
추가 득점을 한 사람은 중앙에 선 트로초프스키였다. 그는 골대에서 25m 떨어진 거리에서 쏜 중거리 슛으로 이날 경기를 멋지게 마무리했다.
오오오오!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은 어깨를 맞잡고 흥겨운 노래를 불러댔다. 칼럼을 써야 한다고 내내 진지했던 쿤츠 역시 술이 한껏 오른 얼굴로 목청껏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에스파우! 영광이 영원하기를!(HSV For Ever And Ever!)”
오솔을 비롯한 선수들이 인사를 하러 오자 미하엘 자이어가 웃통을 벗어서 손에 쥐고 빙빙 돌려대며 저질 춤을 추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무래도 술이 과했던 모양이다.
다음 날 아침. 함부르크의 지역지 모르겐포스트(Morgenpost)에는 골을 넣고 기뻐하는 함부르크 선수들의 사진과 함께 DFB 포칼 64강전 승리 기사가 실렸다. 사람들은 간단한 소식과 함께 더 깊은 내용을 알고자 데니스 쿤츠의 칼럼을 찾았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좋은 모습을 보였다.
공격진은 날카로웠고, 미드필더는 활발했으며, 수비진은 견고했다. 심지어 골키퍼는 아예 할 일이 없었다!(필자는 매 경기 이랬으면 좋겠다.)
선수들은 온몸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펼쳐 보였고, 이는 주전 경쟁에 대한 열망이 없으면 불가능한 퍼포먼스였다.
선수들에게 열정을 불어넣은 토마스 돌 감독의 지도력에 경의를!
동시에 차원이 다른 힘과 제공권을 선보인 새로운 이적생, 오솔의 성공적인 데뷔 역시 축하해 주고 싶다.
……
그러나 우리는 이쯤에서 현실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
냉정하게 말해서-동시에 상대에게 미안한 말이지만-슈투트가르트 키커스는 4부 리그 팀이다.
선수는 모두 아마추어로 구성되어 있고, 감독이나 스태프, 훈련장의 수준은 감히 HSV와 비교할 수 없다.
이러한 수준 차이를 생각한다면 준비가 착착 되어가고 있다거나 선수들의 기량과 호흡이 만족할 만하다고 평가하기 이른 측면이 있다.
고로, 우리는 다가오는 리그 개막전을 지켜봐야 한다.
마침 홈에서 벌어지는 FC 뉘른베르크와의 경기에서는 우리의 새로운 스타 반 더 바르트는 물론이고, 항상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세르게이 바바레즈와 에밀 음펜자가 선발로 나올 예정이다.]
데니스 쿤츠의 칼럼대로 슈투트가르트 키커스와의 경기는 검증 측면에서 부실함이 있었다.
함부르크 선수들이 올 시즌 어떤 모습을 보일지 가늠하려면 역시 리그 개막전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중요한 개막전 경기에 오솔과 타카하라가 나란히 교체 명단에 포함되었다.
“어때? 오늘 데뷔할 수 있을 것 같아?”
타카하라에게서 질문과 공이 동시에 날아왔다. 오솔은 공을 가볍게 받으며 분데스리가 데뷔에 대해 생각했다. 5만 7천 명의 관중이 가득 들어찬 홈경기에서 데뷔하고 골까지 넣을 수 있다면 최고의 시작일 것이다.
‘뉘른베르크는 수비가 그렇게 강한 팀은 아니니까 잘하면 기회가 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오솔은 패스를 돌려보내며 레벨 업까지 남은 경험치에 대해 생각했다. 지난 컵 대회에서 두 골을 넣으면서 경험치를 대폭 얻을 수 있었다. 아마 오늘 출전한다면 경험치가 100%까지 찰 것이다.
“오늘 데뷔해야죠.”
오솔은 강한 열망이 드러나는 웃음을 지으며 마저 몸을 풀었다.
* * *
오솔은 지난 DFB 포칼에 선발 출전하고 지역지의 칼럼을 통해 그 활약상이 알려졌지만, 아직까지는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렇기에 호불호가 갈릴 수 없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싫어할 수는 없는 일이니 당연했다.
하지만 여기에 그런 오솔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다.
“저 녀석을 데려오는 데 80만 유로나 들다니, 나는 아직도 납득을 할 수 없구먼.”
오솔을 직접 샀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내는 함부르크 SV의 운영이사 회장-구단주-베른트 호프만이었다. 그는 구단의 운영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했고, 자연스럽게 선수 영입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장래가 기대되는 선수고, 지금도 충분히 영입한 값을 할 겁니다. 토마스에게 들어보니 연습 경기나 훈련에서 아주 좋은 모습을 보인다고 하더군요.”
오솔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인물은 선수 영입에 관해 전권을 쥐고 있는 기술고문-단장-디트마르 바이어스도르퍼였다.
그는 구단주와 나란히 앉아 개막전을 관람할 정도로 팀에서 요직을 맡고 있었고, 협상 실력도 굉장히 뛰어난 편이었다.
실제로 빅 클럽에 들어갈 만한 재목인 반 더 바르트를 고작 500만 유로에 데려온 것은 모두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끄응.”
호프만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제대로 실적을 낸 바이어스도르퍼가 오솔을 변호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그가 구단주라 하더라도 대놓고 불만을 표출할 수 없었다.
“그래도 조금 더 깎을 수 있었지 않은가. 저기 일본 국가대표인 타카하라도 고작 20만 유로밖에 안 들였는데, 아직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애송이를 사는 데 80만 유로라니…….”
호프만은 뒤로 갈수록 홀로 구시렁거리듯 말끝을 흐렸다. 대놓고 반대를 할 수는 없지만 선수 영입에 불만이 있음을 계속 어필하는 것이다.
‘이런 수전노(守錢奴) 늙은이 같으니.’
바이어스도르퍼는 티 나지 않게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동안 선수를 영입할 때마다 호프만은 지금처럼 은연중에 자신의 의사를 내보이곤 했다.
그러나 이적 자금을 어떻게 쓰느냐는 온전히 단장과 감독의 영역이었다. 구단주가 지금처럼 행동하는 건 엄연히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자연히 단장 입장에서는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은 계속 구시렁대겠군. 흐음. 저 친구가 잘해줘야 할 텐데.’
사실 오솔의 영입은 그의 뜻이 아니었다. 토마스 돌 감독의 강력한 요청이 있어서 그가 허락한 경우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도 싸게 영입한 건지, 아니면 바가지를 쓴 건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저 감독이 팀에 필요한 선수라고 해서 그럼 데려오라고 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호프만의 말에 맞장구를 쳐줄 수는 없었다. 거듭 말하지만 선수 영입에 관한 권한과 책임은 온전히 단장과 감독에게 있었다.
“선수 영입은 신중해야 해. 괜히 성적이 나온다고 돈을 펑펑 써봐. 도르트문트 꼴이 나기 딱 좋다니까.”
호프만의 입에서 또 도르트문트의 이야기가 나왔다. 이는 벌써 백번도 넘게 들은 이야기였다.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03/04 시즌, 챔피언스 리그를 위해 좋지 않은 자금 상황에도 무리하여 선수들을 영입했었다. 지속되는 재정난을 챔피언스 리그의 중계권료를 바탕으로 극복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결과는 처참했다.
야심차게 영입했던 선수들이 줄줄이 부상을 당하면서 챔피언스 리그는 본선에 오르기도 전에 짐을 싸야 했고, 그해 중계권료로 들어온 돈은 영입 자금을 감당하기에 턱도 없이 부족했다.
결국 클럽은 부도를 맞았고, 200만 유로가 없어서 최대 라이벌인 FC 바이에른 뮌헨에게 돈을 빌리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론 실책이 됐지.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도약도 없는 법이야. 사업가라는 사람이 그런 것도 모르진 않을 텐데?’
바이어스도르퍼는 문득 이번 시즌에 좋은 성적을 거두더라도-예를 들어 챔피언스 리그 진출 확정 같은 성과를 얻어도-투자금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