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56화
똑똑. 노크 소리에 토마스 돌의 고개가 돌아갔다.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자 함부르크 SV의 팀 닥터인 토마스 마르쿠아트가 들어왔다.
“오솔 선수의 메디컬 테스트 결과입니다.”
“그래?”
“네. 근력, 순발력, 지구력과 심폐 능력 등에 관련된 내용은 첫 장에 있고, 병력이나 부상 위험도 등은 다음 장에 있습니다.”
“설명해 주게.”
돌 감독은 보고서를 훑으며 설명을 들었다.
“일단 근력이 뛰어납니다. 신체적으로 이미 성인에 도달했다고 봐야 할 수준이죠. 힘만 놓고 본다면 공격진 중 최고 수준이고, 어쩌면 다니엘을 상대로도 몸싸움이 통할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토마스가 말한 다니엘은 다니엘 반 바이텐을 뜻했다.
반 바이텐은 196㎝의 큰 키에 96㎏에 달하는 거구의 중앙 수비수였다. 그는 이미 2001년부터 벨기에 국가대표가 되어 활약하는 선수로 지난 시즌 분데스리가 최고의 센터백으로 뽑힌 바 있었다.
“대단하군. 진짜 그 정도인가?”
“네. 그 외에 주목할 만한 특징은 점프력과 심폐 능력입니다. 또한 지구력 역시 돋보였습니다. 아직 비행의 피로가 쌓였을 텐데도 체력이 리그 평균 수준을 웃도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체력은 확실하겠지. 그 살인적인 토너먼트 일정을 무리 없이 소화할 정도였으니 말이야.”
“하지만 부족한 부분도 보였습니다. 일단 주력이 상당히 느린 편에 속합니다. 속도 경쟁에서는 살아남기 힘들어 보입니다.”
이 정도는 돌 감독도 감안했던 부분이었다. 덩치도 크고 달리기까지 빠르면 최선이겠으나 실제로는 둘 중 하나라도 잘하기만 하면 되는 게 축구였다.
“음……. 몸 상태는 어떤가?”
“말씀드렸다시피 아주 좋습니다. 회복 속도가 아주 빠른 선수예요. 아마 관리만 잘 한다면 시즌 후반기까지 쌩쌩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런가?”
“따로 병력도 없고, 지금 몸 상태도 아주 멀쩡합니다.”
“아주 좋군! 수고했네.”
팀 닥터가 나가고, 돌 감독은 선수 명단에 적힌 오솔의 이름을 가만히 바라봤다.
세르게이 바바레즈, 에밀 음펜자, 벤야민 라우트, 나오히로 타카하라, 그리고 오솔.
이번 시즌은 이렇게 다섯 명의 공격수가 준비되었다.
‘좋아. 이번 시즌에는 반드시 일을 내고 만다!’
* * *
메디컬 테스트 결과가 나온 당일, 오솔은 함부르크 SV와 계약을 마무리했다.
계약서에 사인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등판에 19번이라 적힌 유니폼을 들고 감독과 같이 사진을 찍었다. 이후에는 단장인 디트마르 바이어스도르퍼와 같이 사진을 찍고, 그에게서 한 사람을 소개받았다. 독일에서 만난 첫 번째 동양인 남자였다.
“이쪽은 자네의 적응에 도움을 줄 피터 윤이네.”
“반갑습니다, 오솔 선수. 피터 윤, 윤승호입니다.”
윤승호는 재독 교포 2세로서 함부르크의 사정에 빠삭한 것은 물론이고 한국어도 할 줄 알아서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없었다.
“오후에 시내를 둘러보시고 집도 알아봐야 합니다. 구단에서 시내의 호텔을 잡아줬지만 일주일이 지나면 사비로 방을 잡으셔야 하거든요.”
듣기로는 오솔의 매니저 겸 통역사로 고용되었다고 한다. 적어도 이번 시즌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계속 함께 다닐 사람인 것이다.
“반 더 바르트 선수는 단장님이 직접 안내를 했는데, 오솔 선수는 제가 하게 되었군요. 혹시나 서운한 건 아니시죠?”
“전혀요. 그런 할아버지와 다니는 것보다는 승호 씨와 함께 있는 편이 더 낫죠.”
“후후. 감사합니다. 편하게 매니저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사실 아무리 마음이 잘 맞는 매니저를 만난다고 해도 단장이 직접 선수를 챙기는 것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이는 단순히 누가 안내하느냐가 아니라 해당 선수가 팀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지표였기 때문이다.
단장이 직접 신경을 써주는 선수, 이는 누가 봐도 팀의 핵심이었다.
‘지금 함부르크에서는 반 더 바르트가 에이스라는 소리겠지.’
듣기로는 그의 주급이 무려 4만 유로라고 한다. 이는 오솔의 주급의 다섯 배에 달하는 수치이자 팀 내 최고 연봉이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함부르크에서 살아서 개인적으로도 하에스파우의 팬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한국 선수가 들어오고, 제가 그 선수의 매니저가 되었다니 너무 신나네요.”
“많이 도와주세요. 독일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습니다.”
“물론이죠. 아무쪼록 멋진 모습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자, 일단은 시내부터 구경하러 가시죠.”
오솔은 관광한다는 기분으로 가볍게 시내를 둘러봤다. 번화가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엘베강이 내다보이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거 데이트 코스 아닌가요?”
“분위기가 너무 아늑한가요? 하하. 나중에 데이트할 때 오시라고 알려 드리는 겁니다.”
“확실히 풍경이 좋네요. 그나저나 숙소는 어디로 잡는 게 좋을까요?”
“함부르크 중심가도 나쁘지 않습니다. 훈련장까지 40분이면 이동이 가능하거든요. 대중교통도 좋지만, 평상시에는 제가 픽업해 드릴 겁니다. 독일은 운전면허를 따기가 상당히 힘들거든요. 시간도 많이 걸리고. 여유가 되시면 따시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시즌 중에는 그만한 시간이 안 나올 겁니다.”
독일의 운전면허 시험은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8시간의 응급처치 교육도 받아야 하고, 이론 교육도 280시간이나 받아야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물론 주행 교육도 따로 받아야 한다.
면허증을 따는 데 빠르면 3개월, 늦으면 6개월 정도 걸리고,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도 적지 않은 편이었다. 오솔이 작정하고 따려고 해도 올 시즌에는 힘들었다.
“픽업까지 업무에 포함된 건가요?”
“그럼요. 매니저라고 했잖아요.”
“혹시 매니저님께 독일어도 배울 수 있을까요? 이건 따로 급료를 드리겠습니다.”
“듣기로는 영어에 능통하다고 하셨는데 굳이 독일어까지 배우시려고요? 어차피 전술 설명할 때 영어 통역사가 대동될 거라 필요 없으실 텐데요?”
“팀 동료들과 친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독일어를 쓰는 친구들이 많을 것 아닙니까.”
“저야 좋죠. 어차피 붙어 있는 시간도 많을 테니까 금방 배우실 수 있을 겁니다.”
다음 날, 오솔과 윤승호는 시즌 내내 지낼 숙소를 잡기 위해 함부르크 곳곳을 돌아다녔다.
“4천 유로……. 시내는 이 정도가 기본이겠네요. 이보다 낮게 사려면 방만 하나 구하는 식인데, 그건 지내기가 불편할 겁니다.”
“한 달에 4천 유로라니 조금 비싸네요. 지금 제가 세금을 제하고 한 달에 버는 돈이 만 칠천 유로 정도인데, 이렇게 되면 그 돈의 4분의 1가량을 숙소에 쏟아부어야 하잖아요. 조금 더 싼 곳 없습니까?”
“그러면 조금 외곽으로 나가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거 좋네요. 사실 너무 시끄럽고 번잡하면 휴식을 취하는 데 괜히 방해만 되거든요. 되도록 조용하면서도 훈련장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북쪽으로 올라가시죠.”
윤승호는 밤사이 조사를 많이 해 왔는지 곧장 조건에 맞는 곳을 찾아냈다.
바로 스텔링겐(Stellingen)이었다.
이곳은 함부르크 중심가에서 북서쪽으로 10㎞쯤 떨어진 지역으로, 훈련장과는 겨우 4㎞만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 정도면 차로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시내와는 너무 다른데요?”
“조용하죠?”
주변에 큰 건물이 거의 없었다. 낮은 주택들과 상점들, 그리고 숲과 자연으로 가득한 지역이었고, 덕분에 전체적으로 시골 특유의 분위기가 많이 풍겼다.
“저쪽으로 가시면 동물원도 있어요. 이 길을 따라 쭉 가면 공항도 나오고요. 그 사이로 숲이 펼쳐져 있어서 비행기 소리는 들리지 않을 겁니다.”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편안한 곳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임대료 역시 비싸지 않았다. 한 층을 다 빌리는 데 매달 2천 유로에 불과했다. 시내 중심가의 정확히 절반 수준이었다.
“한 층을 통째로 빌린다는 거죠?”
“네. 유학생도 아니고, 방 한 칸에서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오솔은 경기력에 악영향을 주지 않는 수준에서 저렴한 숙소를 정했다. 주위에 오락 시설 같은 건 없었으나 축구 선수에게는 오히려 이런 환경이 더 좋았다. 이후 윤승호는 이불과 식기 등, 생활에 필요한 용품들은 재주껏 구해 왔다.
‘확실히 돌봐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편하긴 하네. 겨울 휴식기에는 에이전트를 구해봐야겠어.’
이번에는 첫 시즌이라 구단에서 매니저를 대신 고용해 줬지만, 내년에도 그러리란 법은 없었다. 게다가 구단과의 협의는 물론 이적 제의 대응 그리고 협회와의 의사소통 등을 대신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이제는 진짜 축구에만 집중해야 할 때니까.’
그날 저녁 포르투갈로 떠났던 선수단이 인터토토컵 3회전 1차전을 1 대 0으로 이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내일이면 드디어 선수단과 만나는 건가?’
사생활에 관련된 문제는 거의 다 해결한 상황이었다. 몇 가지 사소한 일들은 윤 매니저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고, 오솔이 관여할 필요는 없었다. 오솔은 함부르크에 적(籍)을 둔 지 사흘 만에 클럽 내부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조건을 완성할 수 있었다.
* * *
오솔은 선수단 전체에게 소개되기 전, 토마스 돌 감독을 다시 만났다.
돌 감독은 그 자리에 주장인 다니엘 반 바이텐 선수와 부주장 세르게이 바바레즈를 함께 불렀다. 196㎝의 덩치를 자랑하는 반 바이텐과 만만치 않게 큰-188㎝의-바바레즈가 나란히 서서 오솔을 주의 깊게 보았다. 물론 오솔도 역시 그들을 관찰했다.
‘이 선수가 반 바이텐인가? 덩치가 진짜 장난이 아니구나. 분명 나중에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는 선수였지?’
반 바이텐은 온몸에 철갑을 두른 듯 근육이 두텁기 그지없었다. 오솔조차도 한 수 접어줘야 할 법한 덩치였다. 얼핏 AC 밀란에 있는 야프 스탐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쪽이 세르게이 바바레즈 선수…….’
바바레즈의 얼굴을 본 오솔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는 만 34세의 나이로 축구 선수로서는 백전노장에 속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서른넷이란 나이는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한창 청춘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훤히 드러난 이마와 듬성듬성 난 머리카락은 그를 족히 10년은 더 늙어 보이게 했다.
“여기는 새롭게 팀에 합류한 오솔이다. 대한민국에서 온 선수고, 아직 만 18살의 어린 선수니까 너희들이 잘 챙겨주길 바란다.”
“네. 걱정 마십시오.”
“좋아. 다들 나와 있겠지? 그럼 다 같이 훈련장으로 나가지.”
토마스 돌 감독은 오솔을 세심하게 챙겼다. 그는 오솔이 아직 어린 나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고, 해외에서 적응하기 쉽도록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려 했다.
터프하게 생긴 겉모습과는 달리 섬세한 면이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훈련장에 나가기 직전, 오솔의 어깨를 감싸며 부드럽게 말했다.
“같은 동양인인 타카하라도 잘 적응했으니 너도 별일 없을 거다. 혹시나 불편한 일이 있으면 바로바로 얘기하도록 해라. 코치를 통해도 좋고, 나한테 바로 와도 좋다.”
“네. 걱정 마세요. 제가 생각보다 유럽 생활에 잘 맞는 체질이거든요.”
오솔은 날씨가 지랄 맞기로 유명한 런던에서도 잘 적응했던 이력이 있었다. 함부르크 정도면 꽤나 쾌적한 편이었다.
또 외지인에 대한 차별도 독일은 영국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6~70년대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진출로 한인이 많은 데다가 차범근이 이룩했던 성과들 덕분에 한국인 축구 선수에 대한 인식도 나쁘지 않았다.
“자, 모두들 주목! 오늘 새로운 이적생이 또 한 명 왔다.”
오솔에 대한 설명은 길지 않았다. 나이와 국적, 그리고 포지션을 제외하면 다른 것들은 꺼내지도 않았다. 어차피 뛰게 되면 실력은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으니, 굳이 첨언(添言)을 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실용적이고 심심한 독일인다운 설명이었다.
“저기 공격수들이 있는 곳에 가서 서라.”
토마스 돌의 목소리에는 군기가 가득 들어 있었다. 개인적으로 대화할 때는 나름 살갑게 대하더니, 전체 선수단 앞에 섰을 때는 사람이 바뀐 듯 말투조차 딱딱했다. 동독에서 태어나서 국가대표까지 했다더니 아직까지도 그 시절의 습관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오솔은 군말 없이 바바레즈 옆에 섰다. 공격진에는 오솔과 바바레즈를 제외하면 키가 180이 넘어가는 선수가 없었다.
타카하라가 간신히 180㎝에 걸리는 수준이었으나 188㎝인 오솔과 바바레즈에 비하면 작은 키에 속했다. 타카하라는 오솔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전형적인 일본인 캐릭터군. 공격수라고 해서 조금은 터프한 스타일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뭐, 아직은 모르는 거지. 평상시 모습과 경기장에서의 모습이 다른 선수들도 있으니까.’
오솔은 공격수 한 명, 한 명을 바라보며 주전 경쟁이 어떻게 돌아갈지 가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