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55화
11장 함부르크의 에이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고, 오솔은 독일에서 날아온 손님을 맞이했다. 그는 변호사와 함께 계약서를 확인한 뒤 어머니를 불러 법적 대리인의 동의를 받았다.
“이제 계약이 체결되었다고 봐도 됩니다. 메디컬 테스트에서 큰 문제를 발견하지 않는 한, 계약이 취소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구단 관계자는 며칠 더 한국에서 머물다가 오솔이 출국할 때 같이 떠나기로 했다. 그는 숙소로 돌아가기 전 오솔에게 비행기 티켓과 연락처를 남겼다.
‘다시 유럽으로 가는구나.’
함부르크행 비행기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사흘 후에 출발한다. 독일은 이동 시간만 최소한 10시간이 걸리는 먼 곳이었다.
‘민주와 떨어지게 되겠네.’
오솔은 지난 2년 동안 여민주와 거의 매일 보다시피 해왔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적어도 5분은 함께할 시간을 가졌고, 그 잠깐의 시간은 그의 정신을 더 굳건하게 만들어줬다.
‘이제 해외로 나가면 얼마나 볼 수 있을지…….’
국내에서 뛰더라도 시즌 중에는 정신없이 바쁜 게 축구 선수의 일상이었다. 해외로 진출하면 가족이라 할지라도 일 년에 한두 번밖에 못 볼 정도로 시간이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이게 축구 선수의 삶이니까. 이렇게 된 거 하루라도 빨리 자리를 잡아서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하는 수밖에 없겠어.’
오솔은 그렇게 성공에 대한 각오를 다지며 전화기를 들었다. 곧 잔뜩 피곤에 전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감독님. 방금 계약서에 사인했습니다.”
“어, 솔이구나. 그래. 가서도 잘하고, 몸 관리 잘해야 한다.”
“어차피 감독님도 독일에 가실 거잖아요.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뵐게요.”
아닌 게 아니라 상대는 곧 독일로 연수를 떠나기로 한 최주혁 감독이었다.
“됐어. 나도 바쁘고, 너는 더 바쁠 텐데.”
“그래도 가끔씩 한국 식당에서 외식하면 좋잖아요. 저번에 그분, 김민수 코치…… 님? 맞죠? 아무튼 이렇게 셋이 만나서 저녁이라도 먹게요.”
“그래. 나야 좋지.”
“참, 이유리 기자님께도 전해주세요. 저 계약했다고.”
“들었어요! 축하해요, 오솔 선수! 독일 가서도 파이팅!”
수화기 너머에서 느닷없이 이유리 기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 감독이 왜 그리 피곤해했는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그날 저녁, KBC 스포츠 뉴스에 반가운 소식이 하나 올라왔다.
지난 8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해서 한국 축구 팬들을 기쁘게 했던 박해진에 이어서 또 한 명의 유럽파 축구 선수가 생긴 것이다.
이유리 기자 단독으로 출고된 기사에는 오솔의 고교 시절 성적부터 국제 대회에서의 활약상, 그리고 함부르크와의 이적 협상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처럼 지난 20세 이하 FIFA 세계 청소년 선수권에서 결승전까지 무려 11골을 넣으며 맹활약한 오솔 선수(만 18세)는 국내외에서 차세대 대형 스트라이커로 각광받고 있는 상황이다. 관계자에 따르면 오솔 선수는 함부르크 외에도 유수의 유럽 구단으로부터 관심을 받았었고, 그중에는 유럽의 명문 유벤투스 역시 포함되었다고 한다.
……오솔 선수는 다가오는 14일, 함부르크로 떠날 예정이다. 일각에서는 K리그를 거치지 않고 곧장 유럽에 도전하는 건 너무 큰 모험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또 한편에서는 2002년 월드컵의 성공과 유소년에 대한 투자가 벌써부터 성과를 보이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아무쪼록 본 기자는 유럽에 진출한 한국 선수들이 멋진 활약을 보여서 안방에서 응원하는 국내의 유럽 축구 팬들을 즐겁게 해주길 바란다.]
이유리 기자는 이어서 유럽에 진출한 선수들의 근황을 전하며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차태민 선수와 오솔의 만남이 기대된다는 말로 기사를 끝맺었다.
축구 팬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오솔이 누군데 갑자기 유럽 진출이냐?]
[세계 선수권 안 봤냐? 이번에 기사도 많이 나왔는데.]
[그거 박해진 맨유행에 다 묻혔음.]
[제발 한국인이면 맨유 얘기만 합시다. 함부르크는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곳인데 떠들어서 뭐 합니까.]
[위에 대항해시대도 안 해봤냐? 슈파이어 상회 모름?]
[아~ 릴 선택하면 시작하는 곳?]
[거긴 암스테르담이고;;]
잠시 딴 곳으로 튀었던 관심사는 곧 분데스리가에 대한 궁금증으로 번졌다.
[그것보다 독일이면 괜찮은 편이냐? 거기가 빅리그라고 할 수 있나?]
[70년대에는 세계 최고의 리그였고, 그 이후에도 90년대까지는 유럽 3대 리그 중 하나였음. 차범근이 전설인 이유도 그 당시 분데스리가가 그만큼 잘나갔을 때라서임. 대충 지금의 EPL이라고 보면 됨.]
[저 새끼는 꼭 설명을 위해 태어난 놈 같네. 그나저나 연봉 40만 유로면 어느 정도 수준이냐?]
[우리 돈으로 치면 5억이 넘지. 참고로 해진이 형 연봉은 200만 파운드, 한화로 거의 29억 원쯤 된다.]
[여윽시~ 위송빠레에 비하면 허접하군. 거의 6배나 차이 나잖아?]
*위송빠레 : 박해진이 아인트호벤에서 뛸 때 팬들이 불렀던 응원가.
[심지어 해진이 형은 이적료로 730만 유로나 줬는데, 쟤는 이적료 빵 원인데 저것밖에 안 됨. ㅋㅋ]
[야. 쟤 18살인 거 잊어먹었냐? 저 나이에 벌써 연봉 5억이다. 4년 계약이면 22살에 20억 원이나 생긴다는 소리인데, 비웃는 게 가당키나 하냐? 그리고 박해진이랑은 상황이 다른 게 쟤는 무려 아마추어 선수가 곧장 유럽의 1군으로 입단한 거야.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고!]
[워워. 흥분하지 마. 국동이 형처럼 나중에 조용히 국내로 리턴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그때도 국동이 형 베르더 브레멘 간다고 좋아했었는데 결과가 어땠냐? 6개월 단기 임대 후 곧바로 팽당했잖아. 괜한 기대 하지 마라.]
‘성공한다’와 ‘망한다’.
커뮤니티의 반응은 정확히 반반으로 나뉘었다.
* * *
이후 오솔은 여민주와 시간을 나누는 데 집중했다. 여민주 역시 수능이 120일만 남은 상황이라 이번에 출국하고 나면 서로 통화할 시간도 없을 게 분명했다.
“히잉. 보고 싶어서 어떻게 하지?”
“전화 자주 할게. 나도 도착해서 한 반년은 정신없이 바쁠 거야. 그러니까 자기도 그사이에 수능 잘 준비해서 좋은 대학 가야지.”
전생에 여민주는 가고 싶은 대학도 못 가고 아이를 키웠다. 오솔은 아이를 두고 떠났다는 것 못지않게 그녀의 미래를 막았다는 죄책감도 느끼고 있었다.
“아쉽다. 이럴 때일수록 내가 내조를 해줘야 하는데…….”
“지금도 충분히 도와주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네 존재만으로도 힘이 나니까.”
“그래? 그러면 내가 자기한테는 부적인 셈이네?”
“부적이라기보다는 기적에 가깝지. 자기를 만난 건 나한테 진짜 기적 같은 일이었어.”
정확히는 ‘다시 만난 건……’이었다.
“헤헤. 좋다. 솔아, 독일에서도 항상 다치지 않게 조심해! 그리고 혹시나 김치 같은 거 필요하면 말하고. 김치냉장고를 다 터는 한이 있어도 보내줄 테니까.”
“그러다가 괜히 어머님, 아버님한테 미움받는 거 아니야?”
“오빠한테 보냈다고 하면 돼.”
“이젠 그 핑계 안 먹힐 것 같은데…….”
“아, 그러려나?”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어울렸다. 오솔은 웃다 말고 여민주를 꼭 끌어안았다. 정수리에서 향긋한 꽃 냄새가 흘러나왔다. 문득 돌아와서 처음 그녀와 입을 맞췄던 순간이 떠올랐다.
“헤헤. 나한테 또 반했어?”
“응?”
“지금 자기 표정…… 딱 그때 그 얼굴인데?”
오솔은 가만히 입을 맞췄고, 여민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서로의 숨결이 때로는 가을바람처럼, 때로는 강아지풀처럼 부드럽게 다가와 볼을 간지럽혔다. 그 기분 좋은 간지러움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푸흡!”
결국 두 사람의 키스는 짧게 끝이 났다. 그들은 대신 빙긋 올라간 입술로 버드 키스를 계속 이어갔다.
“사랑해, 민주야.”
“나도 사랑해, 솔아.”
“우리 결혼할까?”
“좋아!”
정말이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철이 없다고 비웃을 수는 없었다. 오솔은 그녀가 전생에 보여준 모습을 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도 결코 즉흥적인 대답이 아닐 것이다. 그녀도 나름대로 고민하고 생각한 끝에 나온 대답임이 분명했다.
“내년에 성인이 되면 정식으로 프러포즈할게. 제대로 된 곳에서, 제대로 된 모습으로.”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난 이걸로도 충분해. 만약 그렇게 화려하게 프러포즈한다 해도, 지금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거야!”
“왜?”
“네 입에서 처음으로 평생 함께하자는 소리가 나왔잖아!”
너무도 사랑스러운 대답이었다. 덕분에 오솔은 허벅지를 한껏 꼬집으며 솟구치는 욕구를 참아야 했다.
***
2005년 7월 14일, 오솔은 구단 관계자와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아직은 프리 시즌이지만 현재 구단은 인터토토컵 준비로 바쁩니다. 벌써 2회전을 통과했죠.”
“그거라면 저번에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내일은 인터토토컵 3회전을 치르기 위해 포르투갈로 가야 하거든요. 그래서 오늘 입단한다고 해도 적어도 3일 정도는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경기는 17일에 잡혀 있었다. 선수단은 전날인 16일에 포르투갈로 이동해서 경기가 끝난 다음 날 돌아온다. 귀국한 당일은 훈련을 하지 않을 테니, 아마 정식으로 선수단과 만나는 건 19일 아침일 것이다.
“아, 하필이면 스케줄이 그렇게 잡혔네요.”
“괜찮을 거예요. 그사이에 메디컬 테스트도 해야 하고, 시내를 구경하면서 숙소를 알아보는 시간도 필요할 겁니다. 함부르크는 굉장히 크거든요. 물론 구단에서 도와줄 사람이 붙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의 말대로 함부르크는 굉장히 크고 아름다운 항구도시였다.
과거 13세기에 만들어진 한자동맹으로 큰 부를 쌓은 함부르크는 현재 독일에서 2번째로 큰 도시이자 유럽에서 7번째로 큰 도시였다. 그래서 함부르크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시, 축구 클럽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강했다.
그들은 한자동맹 시절부터 자신들이 독일의 북부를 대표해 왔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독일 남부를 대표하는 강팀, FC 바이에른 뮌헨에게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다.
“반 더 바르트 선수와 더불어 오솔 선수까지 더해졌으니 이번 시즌은 정말 만만치 않을 겁니다. 맥주 파티의 주인공은 우리가 될 거예요!”
바이에른 뮌헨은 지난 시즌 막판에 무려 9연승으로 경기를 마쳤다. 이에 독일의 맥주 회사 비트코르거에서 바이에른을 꺾는 팀에게 1만 리터의 맥주를 무료로 제공하겠다며 현상금 아닌 현상금을 내건 상태였다.
“물론 그들이 우리가 아닌 다른 팀에게 진다고 해도 기쁘겠지만요!”
FC 바이에른 뮌헨은 특이하게도 자국 내에서 팬보다 안티팬이 더 많은 구단이었다. 아니, 사실상 바이에른의 팬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구단의 팬들이 그들을 싫어했다.
바이에른은 최근 10년간 무려 6번의 리그 우승과 4번의 포칼컵 우승을 거둔 막강한 팀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강하다고 해서 해당 팀을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놈들은 순 날강도 같은 새끼들이에요!”
논란이 된 것은 바이에른의 선수 영입 방침이었다.
그들의 선수 영입 방침은 간단했다. 바로 분데스리가에서 활약을 보인 좋은 선수들을 위주로 영입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러나 그 대상이 필연적으로 해당 구단의 에이스들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건 문제였다.
팀의 스타플레이어가 고작 1~2년 만에 바이에른으로 훌쩍 떠난다고 생각해보자.
게다가 자신들의 전력은 낮아진 반면, 바이에른은 원래도 강했던 전력이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져서 돌아온다?
여기에 직전까지 에이스로 있던 선수가 불그죽죽한 유니폼을 입고 뛰는 모습을 보면 화가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이건 한두 해에만 있었던 일도 아니었다. 70년대 중반부터 거의 30년간 지속된 행태였다.
이 정도면 득도한 고승이라도 울화통으로 열반에 오를 만한 일이었다.
“문제는 바이언 놈들은 계속 강해지는 데 반해 리그 내 다른 팀들은 계속 약해진다는 거죠. 이대로 가다가는 자연스럽게 놈들의 독주(獨走) 체제로 굳고 말 겁니다.”
절대적으로 강한 하나의 팀은 재미가 없다. 거기에 그 팀이 강해진 비결이 치사하다고 느껴지면 재수도 없어진다.
“요는 이겁니다. 정당한 경쟁이 아니라는 거죠. 솔직히 다른 리그에서 스타 선수를 데려오는 거면 답답하기는 할지언정 지금처럼 짜증이 나지는 않을 텐데, 바이언 놈들은 꼭 지들 라이벌 팀에서 선수를 사 간단 말이죠.”
“그렇군요. 하암. 그것 참 문제네요.”
오솔은 건성건성 대답하며 안대를 찾았다. 이 수다쟁이의 입을 막을 방법은 피곤하다는 핑계로 눈을 감는 것밖에 없었다.
‘독일인은 다 무뚝뚝한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구나.’
***
“오솔 선수 일어나세요. 도착했습니다. 함부르크 공항이에요.”
오솔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정신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여기가 함부르크!’
창밖으로 넓은 들판과 안개가 얕게 깔린 푸른 숲, 그리고 저 멀리 길게 뻗은 엘베강과 함부르크 시의 전경이 보였다.
“저기가 폴크스파르크 슈타디온(Volkspark stadion)입니다. 훈련장도 경기장 바로 옆에 붙어 있죠.”
동행인의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과연, 하얀 지붕이 덮인 경기장이 하나 보였다.
‘저곳이 내가 새롭게 축구를 할 곳이구나!’
유럽 진출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건만 새삼 가슴이 뛰었다. 이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도전이라는 게 이렇게 사람을 설레게 한다는 것을.
‘좋아. 이번이 처음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도전하는 거야.’
전생의 경험을 가져가되 방심은 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전생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공항에는 미리 안내인이 나와 있었다.
“반갑습니다. 오솔 선수. 숙소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오솔은 준비된 차를 타고 함부르크 시내에 있는 호텔로 이동했다. 오늘은 휴식을 취하고 내일 가볍게 몸을 풀 예정이었다. 모래에는 본격적으로 메디컬 테스트 등을 치를 예정이고, 이후에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일만 남았다.
“마침 내년에 있을 월드컵이 독일에서 열리는구나. 이거 잘하면 대표팀에 선발되는 데 플러스 요인이 되겠어.”
오솔은 월드컵에 참가해서 경험치 폭탄을 터트릴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