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052화
과연 카리스마가 대단하다 싶더니, 무려 감독이 직접 나타난 것이었다.
오솔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독일과 네덜란드가 붙어있다고 해도 함부르크면 상당히 멀리 떨어진 지역이다. 감독이 직접 올 줄은 몰랐다.
토마스 돌 감독은 갑작스러운 등장만큼이나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악수 후, 곧장 본론으로 넘어갔다.
“솔직히 말하지. 난 자네가 아주 마음에 들었네. 경기를 다 챙겨봐서 필드에서의 활동량이나 몸싸움에 얼마나 능한지도 다 확인했지. 모든 게 완벽했어!”
토마스 돌 감독은 강한 확신을 보였다. 두 눈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고, 목소리도 크고 또렷했다. 척 보기에도 열정이 대단한 사람 같았다.
“특히나 위험지역에서 집중력은 아주 뛰어난 편이더군. 11골이나 넣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지. 단순히 하드웨어만 좋다고 이렇게 많은 골을 넣을 수는 없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 함부르크에는 이미 네 명의 스트라이커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제가 입단하게 되면 팀 내 위치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직 확정된 건 없네. 시즌 전에 호흡을 맞출 것이고, 그중 가장 나은 두 사람이 주전이 될 걸세.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는 선수들의 몫이고, 나는 객관적인 판단으로 가장 나은 사람을 선택하겠지.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약속할 수 있네. 자네에게 적응할 수 있는 기간을 적어도 6개월 정도 줄 것이고, 그 사이에 1군에서 출전의 기회를 적어도 십여 번은 주겠다는 거지.”
지금까지 들어온 제안 중에서는 가장 호의적인 편이었다. 게다가 계약 내용도 제법 마음에 들었다.
4년 계약에 계약금 80만 유로(10억 원), 주급으로 8천 유로(1,000만 원) 보장.
거기다가 득점 시 2천 유로(250만 원)에 1군 승리 수당으로 800유로(100만 원)를 지급하는 보너스 조항도 들어 있었다.
유벤투스에 비하면 주급이 적은 편이었으나 그마저도 매년 15%씩 주급 인상을 약속하는 조항이 들어있어서 1년만 지나면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갈 것이다.
‘계약 기간 4년이라.’
계약 기간이 길다는 건 그만큼 우리는 너를 믿는다는 표시였다. 물론 허접한 계약 조건이었다면 ‘너를 노예로 부려먹고 싶다.’는 뜻이었겠지만, 지금 오솔의 계약 조건 하에서는 전자의 뜻이 맞았다.
“비록 지난 시즌에는 8위에 그쳤지만, 올 시즌 우리의 목표는 더 높은 곳에 있네. 바로 챔피언스리그 진출권 확보지!”
챔피언스리그 소리에 오솔의 눈이 번뜩였다.
“일단 당장의 목표는 인터토토컵에서 우승해서 UEFA컵에 진출하는 것이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바로 어제 인터토토컵 2회전 경기가 있었고, 마케도니아의 축구 클럽을 만나 4-1로 가볍게 이겼다고 한다.
UEFA 인터토토컵은 우승팀으로 총 세 팀을 결정해서, 그해 UEFA컵에 참가 자격을 주는 대회였다.
UEFA컵은 현재 챔피언스리그 다음으로 큰 유럽 대륙권 대회인데, 토마스 돌과 함부르크의 이번 시즌 목표는 UEFA컵 제패였다.
*UEFA컵 : 2009년 7월 이후 UEFA 유로파리그로 명칭이 바뀜.
돈도 만족할 만큼 주는데다가 공정한 주전 경쟁도 기대할 수 있었다. 아직은 확정된 것은 아니었으나 탄탄한 전력을 바탕으로 UEFA컵 우승과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노린다는 점이 오솔의 마음에 들었다.
‘좋아. 더 볼 것도 없다.’
오솔은 토마스 돌의 설득에 넘어갔다. 계약을 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네. 하하하. 웬만하면 바로 합류했으면 좋겠지만, 아직 미성년자라 계약에 시간이 걸릴 테지? 부디 순조롭게 끝났으면 좋겠군.”
토마스 돌은 나중에 한국에 구단 관계자와 변호사를 보내기로 약속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귀국 당일이 되었다.
여민국은 샤워 후 머리를 털면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처음 숙소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일말의 설렘이 있었는데, 약 한 달을 머물렀더니 네덜란드 시내의 모습에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자신의 가방 쪽에 쭈그려 앉아있는 오솔의 뒷모습이 보였다.
“거기서 뭐하냐?”
“아! ……무것도 아니에요. 혹시나 로션이 있나 해서요.”
“로션? 여기, 밖에 내놨어. 써.”
오솔은 급히 로션을 찍어 바르며 여민국의 눈치를 봤다. 여민국은 자신의 가방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거울만 보고 있었다.
“참, 공항에 부모님이랑 민주가 마중 나오겠다고 하더라. 이탁수 감독님도 오실 거래.”
“그래요? 왜 저한테는 말씀해주지 않으셨지?”
“몰래 오신다고 했는데, 내가 미리 스포일러 하는 거야.”
이탁수 감독이 마중 나온다는 소리에 오솔의 얼굴이 환해졌다.
‘녀석…….’
오솔의 사정이야 여민국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리 말했다. 쓸쓸한 귀국이 아니라 너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공항에 취재진들이 몰려있을 텐데, 행동거지 조심해. 이제는 단순히 청소년팀 막내가 아니라 대회 득점왕이야. 사람들의 관심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거야.”
“걱정 마세요. 그런 쪽으로는 자신 있으니까.”
기자들에게 시달리는 건 이미 익숙했다. 물론 전생에는 마음 내키는 대로 화도 내고, 하고 싶은 말도 전혀 거르지 않고 말했었기에 논란을 일으킨 적이 많았다.
‘그때처럼만 안 하면 되는 거잖아. 조금 참고, 말하기 전에 한차례 필터링을 돌리기만 하면 되는 건데, 뭐. 음…… 생각해보니 쉽지는 않겠네.’
언론을 상대하는 건 당연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 생에는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사람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해내지 못할 것도 없었다.
* * *
청소년 대표팀은 무려 11시간이 걸리는 긴 비행시간을 마치고 공항에 들어섰다.
인천 국제공항 입국장에는 백여 명의 환영인파와 십여 명의 스포츠 기자들이 모여서 시끌시끌했다. 그중에는 이탁수 감독과 김영은 선생, 그리고 여민주와 그 가족도 같이 있었다.
“어? 나온다!”
와아아!
기자의 외침에 팬들의 함성과 플래시가 동시에 터졌다.
선수들은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어색해하던 것도 잠시, 이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거나 포즈를 취했다.
협회 직원이 미리 준비한 꽃다발을 선수들에게 나눠줬고, 협회의 부회장이 친히 나와서 악수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최주혁 감독에게 공통 질문이 한차례 쏟아진 다음에는 대회 득점왕으로 선정된 오솔에게 질문이 몰렸다.
네덜란드까지 따라가지 못했던 언론사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대회를 치르면서 세계적인 수준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만, 동시에 우리 한국 축구가 세계에서 통한다는 자신감도 얻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오솔은 기자들이 원하는 대로 국뽕이 잔뜩 섞인 감상을 전달했다. 이에 기자들은 어린 선수가 기사 포인트를 안다며 희희낙락(喜喜樂樂)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오솔은 한쪽에 모여있는 여민주 가족과 이탁수 감독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대뜸 이탁수 감독을 끌어안았다.
“징그러워 이놈아!”
이탁수 감독은 괜한 타박과 함께 오솔을 끌어안았다. 이에 오솔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속사였다.
“김 선생님이랑 잘 되어가나 보네요. 여기까지 같이 오시고…… 곧 있으면 계약하니까 나중에 결혼하시면 제가 약속했던 혼수 해드릴게요.”
그는 농담처럼 했던 혼수로 집을 해드리겠다는 약속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신혼집이니까 2억 정도면 되겠지.’
노총각 은사님의 결혼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도 못할까 싶었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3년 동안 지원받은 돈이 거의 1,500만 원에 달했다. 전생에 못 갚아서 생긴 마음의 빚까지 합하면 보답해야 할 돈은 억 단위를 쉬이 넘어섰다.
“쓸데없는 소리!”
이탁수 감독은 곧바로 오솔의 말을 끊었다. 그러나 환히 벌어지는 입꼬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의 몸은 솔직했다. 이후 오솔은 여민주의 부모님께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오솔이라고 합니다.”
“어, 그래요.”
여민주의 부모님은 그저 아들의 학교 후배이자 청소년 대표 동료로 생각하고 인사를 받았으나, 이어지는 오솔의 소개에 눈이 휘둥그레 떠질 수밖에 없었다.
“저…… 실은 민주와 교제하고 있습니다. 늦게 인사드려 죄송합니다.”
“네?”
“뭐라고요?”
“졸업을 한 후에도 민주와 계속 만나고 싶어서, 그전에 아버님, 어머님께 정식으로 허락을 맡고 싶었습니다. 놀라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오솔의 폭탄선언을 가만히 듣고 있던 여민주가 잽싸게 한 마디 보탰다.
“엄마! 아빠! 나 솔이랑 결혼할래!”
아니, 폭탄 한 무더기를 더했다.
* * *
이후 여민주의 부모님과 오솔 그리고 이탁수 커플은 다 같이 식사 시간을 가졌다.
이탁수 감독은 오솔뿐만이 아니라 여민국에게도 은사님이었기에 함께하는 자리가 어색하지 않았다.
여기서 이 감독은 오솔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계속해서 그의 전도유망한 장래와 성실함을 어필했고, 김영은 선생 역시 그를 도왔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리고 선생님.’
계속되는 설득 작업에 결국 여민주의 부모님은 두 손을 들어 올리고 말았다. 여민주의 아버지는 손사래까지 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잘 알아들었으니까 이제 그만 하셔도 됩니다. 애초에 정식으로 인사를 한 것부터 마음에 들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네, 그리고 감독님이랑 선생님까지 좋게 보는 아이인데 저희가 나쁘게 볼 리 없잖아요. 저는 처음부터 인상이 아주 마음에 들던걸요?”
여민주의 어머니가 웃으며 남편의 말을 받았다.
오솔을 좋게 봤다는 소리에 내내 설득을 하던 이탁수 감독이 오히려 놀라고 말았다. 그러다가 문득 여민주의 아버지를 보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민주의 아버지는 단아하고 우아한 인상의 어머니와 달리 풍채(風采)가 좋고 우락부락한 겉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민주가 왜 오솔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됐다.
‘민주는 다행히 어머님 쪽을 많이 닮았구나. 민국이도 덩치는 아버님에게 물려받았지만, 얼굴만은 어머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
의외로 부모님의 반발은 크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는 편에 속했다. 얌전하고 정중한 태도를 취하는 오솔에 비해 딸인 여민주는 내내 어리광을 부리며 아직도 결혼을 하고 싶다고 떼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없는 딸내미의 모습에 비하면 오솔은 동갑내기라기보다는 한 열 살쯤 더 먹은 듯 진중했고, 부모님은 그 모습을 퍽 마음에 들어 했다. 여민주의 아버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 이거 잘하면 우리 집에 국가대표 공격수가 들어오겠는데? 내 오랜 바람이 민국이가 국가대표 스트라이커가 되는 거였거든, 그러다가 이 녀석이 포지션을 바꾸면서 무산됐었는데 우리 민주 덕분에 곧 이루어지겠어.”
“이 사람도 참, 쓸데없는 부담 주지 말아요.”
여민주의 어머니는 남편의 허벅지를 살짝 꼬집는 것으로 단번에 제압했다. 그녀는 남편이 입을 다물자 오솔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고자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번에 경기 잘 봤어요. 실력이 아주 대단하던데요? 골도 많이 넣었죠?”
“네, 운이 좋아서 기회가 많이 왔었습니다.”
“어머, 겸손하기까지 하고, 듬직한 게 아주 마음에 드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경기라면 어떤…… 혹시 한국 경기를 다 보신 건가요?”
“그럼요. 웬만한 건 다 챙겨봤죠. 우리 민국이도 나오는 대회니까요. 그런데 왜 그래요?”
“아니, 저…… 네, 네덜란드전도 보셨는지 해서요.”
“아~ 등신이라고 한 걸 들었을까 봐요? 후후. 안심해요. 재밌게 잘 봤으니까.”
오솔은 회귀해서 처음으로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후회했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때는 너무 흥분해서 말이 잘못 나왔었습니다.”
“아니에요. 유쾌한 모습이 보기 좋던걸요? 저는 솔이 학생이 앞으로도 우리 민주 만나면서 든든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요.”
“감사합니다. 민주한테도 그리고 어머님, 아버님에게도 진짜 잘 하겠습니다.”
오솔은 큰 절이라도 하고 싶은 걸 참으며 재차 고개를 꾸벅 숙였다.
* * *
이탁수 감독은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며 슬쩍 뒤편을 바라봤다. 마침 오솔과 눈이 딱 마주쳤다.
“피곤할 텐데, 한숨 자.”
“아니에요. 비행기에서 많이 잤더니 피곤해도 졸리진 않아요.”
“그래. 차라리 들어가서 푹 자는 게 낫겠다.”
“네.”
“좋게 봐주셔서 다행이다.”
여민주의 부모님 얘기였다.
“그러게요. 감사합니다. 감독님 덕분에 어머님, 아버님께 좋은 인상을 심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벌써 그런 호칭을 쓰는 거냐? 너무 빠르지 않아?”
“전혀요. 그분들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저는 되도록 빨리 결혼하고 싶어요.”
“지금처럼 성실하게 축구하고 그분들께 한결 같은 모습을 보이면, 금방 그렇게 될 거다.”
“예, 그래야죠.”
오솔은 이번에는 진짜 잘하겠다고 다짐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은 화창하니 맑은 날이었다.
구름이라고는 한두 점밖에 없는 아주 맑은 날…….
‘가만, 뭔가 잊은 거 같은 기분이 드는데? 흐음. 에이, 모르겠다. 중요한 일이면 기억이 났었겠지.’
오솔은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 * *
한편 여민주의 가족도 다 같이 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여민국까지 같이 본가로 향했다. 국제대회를 다녀왔기 때문에 구단에서 특별히 3일간의 휴가를 준 덕분이다.
“집에 네가 좋아하는 갈비 해놨으니까, 잘 먹고 푹 쉬었다 가.”
“네, 이맘때쯤 집에 오는 건 진짜 2년 만이네요.”
“고생하네, 우리 아들.”
여민주가 그 갈비를 오솔에게도 조금 나눠줘도 되냐고 물었다가 가볍게 핀잔을 들은 것을 제외하면 아주 평온한 귀가였다. 문제는 여민국이 샤워를 하러 들어가면서 발생했다.
“어서 씻어. 짐 정리는 엄마가 대신해줄 테니까.”
“네, 엄마. 땡큐!”
여민국은 가방에 뭐가 들어갔는지도 모르고 태연히 씻으러 들어갔다. 하긴 직접 넣은 오솔 조차 까먹었는데, 그가 뭘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