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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과천선 스트라이커 037화 (37/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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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과천선 스트라이커 037화

8장 세계의 벽

미켈을 중심으로 공격을 펼치는 나이지리아와 오솔을 필두로 반격을 하는 한국의 싸움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양 팀 선수들의 개개인의 기량이 워낙에 뛰어난 덕분에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두 팀 다 상대의 빈틈을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스코어는 변하지 않았다.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는 여민국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었다.

‘젠장. 이런 괴물 같은 놈…….’

여민국의 발전 속도는 어떻게 생각하면 굉장히 빠른 편이었다. 2년 전만 해도 고영주를 어떻게 막을지 고민했던 선수가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유망주 중 하나인 존 오비 미켈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할까.

그렇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존 오비 미켈은 87년생, 만으로 18세에 불과한 선수였다. 그런 선수를 상대로 이렇게 밀린다는 건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2살이나 어린놈을 상대로 이렇게 밀리다니…… 혹시 나이를 속인 건 아닐까?’

지금까지 많은 선수들을 상대했으나 미켈은 그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다른 선수들이 피부와 머리카락, 눈동자 색만 다른 그저 ‘축구 선수’였다면, 미켈은 그들보다 한두 차원 높은 축구를 하는 소위 말하는 ‘클래스’가 다른 선수였다.

‘이런 게 세계의 벽인가?’

문득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가 떠올랐다.

선배들은 어떻게 이런 괴물들을 상대로 승리를 일궈냈을까. 포르투갈의 피구는 어떻게 막았고, 이탈리아의 비에리와 토티는 무슨 수로 저지를 했을까?

분명 그들은 미켈보다 더한 괴물들이었을 텐데…… 그러나 생각을 이어갈 여유는 없었다.

파앙!

“훗!”

미켈은 여민국을 뒤에 두고도 거리낌 없이 패스를 시도했다. 그러면서 가볍게 코웃음을 쳤는데, 그 모습이 꼭 간신히 돌파만 막고 있는 그를 비웃는 듯했다.

덕분에 여민국은 순간적으로 이성의 끈이 끊기고 말았다. 시야에서 주위의 동료들이 사라지고 눈앞의 미켈만 보였다.

‘제기랄!’

주장으로서의 ‘책임감’을 잃은 여민국은 자신의 장기인 침착함을 놓고 그 자리에 분노를 가득 채웠다. 마침 패스가 다시 미켈에게 돌아왔다.

여민국은 이때다 싶어 거칠게 달려들었다. 상대의 팔이 그를 밀어내는 걸 막으면서, 동시에 자신은 상대의 유니폼을 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조 오비 미켈이 ‘등지고 딱딱’을 하자 어느새 공은 저만치 멀어져 있었고, 여민국은 상대에게 막혀 꼼짝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이……!’

늘 평점심을 유지했던 여민국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는 공을 갖고 돌아가는 미켈을 향해 거침없이 몸을 날렸다.

촤자작!

삐익!

주심의 손가락은 페널티 마크를 찍었고, 여민국에게는 노란 카드가 올라왔다. 다행히 상대를 위협하는 비신사적인 태클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반칙은 반칙이었다.

[아…… 지금은 페널티 에어리어 바깥쪽 같은데요.]

[느린 화면으로 보면 확실히 바깥쪽에서 들어간 태클이었는데, 존 오비 미켈 선수가 안쪽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주심이 살짝 헷갈린 것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으로선 조금 억울한 판정이었다. 이 치명적인 오심은 곧 골로 연결되었고, 한국은 2 대 1로 하프 타임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완전히 무너져 버린 듯한 여민국의 모습이었다. 팀의 주장으로 분위기를 이끌어가야 할 선수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으니 라커룸의 분위기가 살아날 리 만무했다.

‘젠장. 바보 같은 놈. 이게 무슨 꼴사나운 플레이냐.’

단순한 실수였다면 여민국도 툴툴 털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실수는 감당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나서 나온 결과였다.

아직 경기는 45분이나 남았고, 상대는 여전히 건재했다. 도저히 남은 시간 동안 상대를 막을 자신이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절망이란 순간의 괴로움이 아니라 지금처럼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찾아오는 놈이었다.

“참나, 제가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우리 형님 또 이러시네.”

“……미안하다.”

“뭐가 미안해요? 그놈의 ‘내 잘못이다.’ 병 좀 고쳐요. 잘못한 건 막판에 이성을 잃고 태클한 거 하나니까.”

“하지만…….”

“첫 번째 실점은 패스를 못 막은 형님 책임도 있지만 중앙에서 제대로 커트하지 못한 수비수들의 책임이 더 커요. 솔직히 2 대 1로 붙는 건데 무조건 막았어야죠.”

“괜히 분란이 될 수 있는 말은 꺼내지 마.”

“또 그러시네. 그러지 말고 따라 해보세요. ‘내 잘못은 하나도 없다.’”

“뭐?”

“너무 심했나? 그럼 ‘내 잘못은 좁쌀만큼만 있다.’ 이건 괜찮죠?”

“지금 뭐 하는 거야?”

“아니, 따라 해보라고요. ‘나는 잘했는데 팀원들이 병신이다.’”

“참나…….”

여민국은 허탈하게 웃었다. 오솔이 어떤 마음으로 꺼내는 말인지 알기에 화를 내지도 못했다.

‘내가 그 정도로 궁지에 몰린 상태라는 거겠지.’

오솔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가끔 그런 날이 있어요. 도저히 상대를 막을 수 없는 날이…… 그럴 땐 정말 절망적이죠. 저를 상대하는 모든 수비수들이 느끼는 감정이라 저도 잘 알아요.”

“…….”

“알았어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어쨌든 그때는 상대를 억지로 막으려고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반드시 탈이 나게 되어있거든요. 이럴 땐 그놈을 적당히 날뛰게 하되 골이 될 확률이 제일 낮은 쪽으로 플레이를 유도해야 하죠.”

웬일로 오솔이 그럴듯한 말을 했다.

여민국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평상시에는 오만한 바보로만 보이던 놈이 가끔씩 이렇게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곤 했다.

처음에는 동생이 이런 놈을 왜 만나나 했는데, 보면 볼수록 생각이 깊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집안 살림을 갖다 바친 게 용납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여민국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오솔과 동생이 벌였던 첩보작전을 떠올리자 괜히 웃음이 나온 것이다. 똑같은 놈들이라는 생각과 함께 의외로 둘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러다가 이놈을 매제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그렇게 생각하자 다시 눈살이 찌푸려졌다. 지금도 ‘형님. 형님.’하며 달라붙는 게 소름이 돋는데 나중에 가면 오죽할까.

“즉, 지금처럼 패스를 유도하는 게 최선이라는 말이에요. 상대의 장점은 결국 탈 압박 능력을 활용한 돌파와 패스거든요. 그러니…… 앞에서 전진 패스를 막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효과가 있다고요. 나머지 수비는 다른 선수들의 몫이자 책임이죠. 그러니까 뚫려도 형님 책임이 아니라고요.”

“아니, 내가 일차적으로 막지 못한 탓이 커.”

“그렇게 동료들이 못 미더워요?”

“그게 무슨 말이야?”

“남 탓하기 싫다면서 결국 우리 팀 수비는 나 없이는 안 된다는 듯이 말하고 있잖아요.”

“내가…… 그랬다고?”

여민국은 뜻밖의 말을 듣고는 충격에 빠졌다.

항상 주장이자 수비라인의 핵으로 책임감을 갖고 뛰었는데, 그게 남들의 눈에는 같은 팀을 신뢰하지 않는 모습으로 비춰졌다니…….

‘내가 우리 팀을 믿지 못한다고? 나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굴었단 말이야?’

선수에게 책임감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강한 의지를 바탕으로 굴하지 않는 정신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상대가 자신을 압도해 버리면 상황은 역전된다. 팀원을 자신이 이끌어야 하는 존재로 보기 때문에 자신이 묶였을 때 갑갑하다 못해 불안해지는 것이다.

여민국의 문제는 그것이었다. 반드시 자신이 막아야 한다는 과도한 책임감.

확실히 나이지리아를 상대할 때는 미켈을 어떻게 묶느냐가 해결의 열쇠가 된다. 그를 꽁꽁 묶을 수 있다면 상대의 공격력은 반 이하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그를 압도할 수 없다면 차라리 공을 다른 선수에게 돌리게 하는 편이 수비하기 더 쉬웠다.

“만약 감독님이 미켈의 패스까지 막으려고 했다면 한 사람을 더 붙였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공격력이 그만큼 약해지겠죠. 지금 우리 팀은 최소한의 리스크는 감수하기로 한 거라고요.”

“그런 건가…….”

“앞서서 다른 분들 욕을 하긴 했지만, 이번에는 제 탓이 제일 크죠. 골을 넣겠다고 해놓고 겨우 한 골만 넣었으니…… 이거, 제가 아주 죽일 놈입니다.”

“목소리에 영혼이 전혀 안 실려 있는데?”

“사실 패스만 잘 들어왔으면 두 골 정도 더 넣을 수 있었는데, 다 영주 형이랑 주원이가 패스를 그지 같이 해서 놓친 거예요. 다 저 새끼들 탓이죠.”

고영주 등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으나 오솔의 주먹을 보곤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여민국의 입에서 다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굳이 오솔의 농담이 아니었어도 여민국의 정신은 슬슬 미몽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덕분에 무거운 책임감, 압박감에 짓눌렸던 사고가 원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포백을 비롯한 선수들과 눈을 맞췄다. 무의식중에 그들을 믿지 못한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마음이 두 눈에 오롯이 담겨있었다.

“모두들 미안하다. 내 생각이 너무 얕았어. 서로 믿고 하나가 되어야 겨우 막을 수 있는 건데…….”

여민국은 확실히 이런 면에서 성지훈과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는 겸손함을 갖춘 것은 물론이고, 어떻게 하면 팀원들의 의욕을 끌어올릴 수 있는지 그 방법까지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솔직하며 정중한 태도 그리고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높아지는 리더십은 자연스럽게 선수들을 하나로 묶었다. 어느새 이들의 머릿속에서 지고 있다는 생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삐익!

그렇게 다시 시작된 경기. 여민국을 위시한 수비진은 나이지리아를 맞아 끈끈한 수비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이 녀석, 덩치는 솔이랑 비슷하지만 힘은 훨씬 약하다. 단지 균형 감각이 남들에 비해 뛰어날 뿐이야. 그리고 그 균형 감각의 비밀은 저 팔에 있어.’

미켈의 탈 압박은 선천적으로 뛰어난 균형 감각과 길게 뻗은 팔에 기인했다.

교묘하게 뻗은 팔로 상대를 기둥 삼아 버티고, 방향을 바꾸며 상대의 균형을 흩뜨려 놓는 능력이 탁월했다.

‘이 녀석을 힘으로 누르는 건 불가능해. 팔을 사용해서 견제하다가 방향을 전환하는 때를 노려야겠어.’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여민국의 수비 방법이 미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힘으로 버티고 상대를 막아서는 편이었다면, 이제는 상대의 팔을 쳐내서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힘과 균형의 싸움에서 균형과 균형의 싸움으로 변한 것이다.

‘좋아. 씨름이라고 생각하자.’

여민국이 마치 디에고 고딘을 연상케 하는 끈적이는 수비로 돌변했다. 상대의 균형감각을 흔들면서 틈을 보아 기습적인 슬라이딩 태클을 선보이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여민국에게 이미 카드가 하나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는 한 번이라도 태클이 잘못 들어갔다가는 바로 퇴장이었다.

‘신중하게…… 최적의 타이밍을 잡아야 한다.’

여민국은 열심히 손을 쓰는 한편, 언제라도 몸을 날릴 수 있다는 듯 페이크를 줬다.

태클 페이크는 학생 때부터 익혀왔던 기술이라 숙련도가 높았다. 그래서 미켈도 페이크가 들어올 때마다 몸을 움찔거렸다.

균형이 서로 동일하고, 페이크로 상대의 정신도 교란시켰다. 이제 슬슬 여민국이 우위를 점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미켈의 플레이가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젠장. 이런 팀을 상대로 주춤했다간 내 실력을 의심받게 되는데…….’

이번 대회로 자신의 몸값이 천지차이가 날 수 있었기에 플레이가 막힐수록 신경질적인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미켈이 조급함에 조금 일찍 몸을 움직였고, 여민국은 그 약간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다!’

콰콰각!

자칫하면 카드가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온 슬라이딩 태클. 그래서 더 위력적이었다.

실제로 미켈은 이처럼 과감함 태클이 나올 줄 꿈에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본 것은 여민국이 공을 잡고 일어나는 모습이었다.

“받아!”

파앙!

여민국의 패스는 오솔에게 닿았고, 다시 그 공은 우측의 우주원에게 갔다. 우주원의 낮고 빠른 크로스는 준족의 고영주에 닿아 논스톱 슈팅으로 귀결됐다.

철썩!

“고오올!”

한국팀은 후반전 들어 처음으로 시도한 역습으로 골을 넣는 데 성공했다. 기뻐하는 선수들 틈에서 오솔이 물었다.

“어떻게 한 거예요? 이렇게 갑자기 각성을 하다니, 진짜 무슨 시스템 같은 거 있는 건 아니죠?”

“생각해보니까 끈질기게 붙으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 몸싸움을 이미 해본 적이 있더라고.”

“언제요?”

“AC 밀란 유니폼 레플리카(복제품)를 샀을 때, 민주가 셰브첸코의 이름과 번호를 몰래 말디니의 것으로 바꿨었거든.”

“……?”

“그래 놓고 이건 자기 거라고 들고 도망갔었지. 그때 진짜 치열하게 붙었었는데……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오솔은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화를 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방금 이 인간 몸싸움하면서 팔꿈치 쓰지 않았나?’

알고 보니 여민국이 유일하게 거칠어지는 상대가 동생 여민주였다. 물론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싸우지는 않았으나 그때의 기분이 도움이 된 것만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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