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036화
최주혁은 성질이 나는 걸 참으며 차분히 설득에 들어갔다.
“나이지리아전이나 브라질전은 우리가 수비적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어. 기존의 전술대로 갔다간 형편없이 밀리게 뻔하잖아. 그러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라. 후반전에 빠른 역습이 필요해지면 널 투입할 생각이니까.”
“그런다고 한국이 16강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꿈 깨세요. 어차피 조별 예선 세 경기가 끝일 텐데 교체 출장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요. 선발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요.”
“너…….”
애초에 성지훈에게 16강에 진출하겠다는 생각 같은 건 없었다. 브라질 등과 한 조에 묶인 순간부터 그는 기껏해야 세 경기가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승리를 위해 어떤 전술을 사용해야 하는지, 상대에게 어떻게 대처할지 따위에 신경을 쓸 리 없었다. 그딴 것보다는 한 경기라도 더 출전해서 자신의 얼굴을 알리는 게 중요했다.
이유리가 참다못해 끼어들었다.
“오솔 선수는 교체 출장해서 35분 사이에 세 골이나 넣었는데, 지금 교체 출장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는 거예요?”
“당신은 또 뭐야?”
“KBC 스포츠국의 이유리 기자예요.”
“기, 기자?”
기자라는 말에 성지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축구 선수면 골을 넣을 생각을 해야지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죠? 꾀병에 멋대로 훈련 불참, 클럽에서 담배까지 피우고! 이건 축구로 치면 해트트릭을 아군 골대에 한 셈이라고요!”
“다, 담배라니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사진으로 다 남겨놨으니 발뺌할 생각 마시죠.”
알코올 냄새를 뿜어내던 입이 마침내 다물어졌다. 실력도 없는 놈이 의지도 박약이라는 제 3자의 평가가 아프게 다가왔다.
“이런 씹탱구리!”
“어, 지훈아!”
성지훈은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러곤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훈련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더욱더 가관인 것은 그의 소재를 언론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20세 이하 FIFA 대회에 참가 중이던 성지훈, 극비 귀국. 이유는?]
감독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멋대로 귀국해버린 것이다. 정말이지 무책임한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황당해하던 최주혁 감독은 그날 저녁, 기술위원장으로부터 두 번째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이번 대회에는 전권을 주겠네. 대신 사진이 유포되는 일이 없도록 해주게. 그럼 더는 간섭하지 않겠네.”
“당연히 그럴 생각입니다.”
애초부터 최 감독에게 성지훈을 매장시킬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사진이야 이유리가 찍은 것이었고, 그가 직접 말했던 대로 후반전에 펼칠 역습을 생각하면 성지훈의 존재는 팀에 꼭 필요한 자원이었다. 그렇기에 아니꼬워도 끝까지 설득하려 했던 것인데,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다.
“지훈이 놈은…… 언론에는 발목 염좌라고 할 테니까 자네도 그렇게 말을 맞추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참, 어디서 기자를 하나 구워삶은 모양인데, 그깟 사진 하나 갖고 있다고 허튼짓을 할 생각은 하지말기 바라네.”
“이번 대회에 터치만 하지 않는다면 더는 바랄 것도 없습니다.”
“그래, 결국엔 자네가 원하는 대로 됐군. 대회 결과도 그렇게 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말이야.”
“응원 감사합니다.”
“허! 한번 잘 해보게.”
전화가 끊어졌다. 옆에서 숨죽이며 듣고 있던 이유리가 입김을 불어 앞머리를 들어 올렸다. 당사자인 최주혁은 멀쩡한데 오히려 그녀가 더 흥분한 모습이다.
“확 그냥. 사진 다 까버릴까요? 기사는 못 내도 관광하다가 우연히 찍었다고 하면 한 방 먹일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 마세요. 지훈이도 이번 일로 좀 반성했겠죠. 그리고 그렇게 해봐야 지훈이만 다치지 그 위로는 닿지도 않아요.”
“그 자식도 싸가지 없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걔라도 혼내줘야죠.”
“됐어요. 이제 스무 살짜리 애잖아요. 그리고 그 녀석도 정신이 없을 거예요. 언론에서 하도 띄워줘서…….”
최주혁은 인생이 풍전등화에 처한 주제에 태평한 소리만 내뱉고 있었다. 이유리가 그 대신 한숨을 쉬었다.
“으휴. 감독님은 너무 물러 터졌어요.”
“어쨌든 이번에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덕분에 대회가 끝날 때까진 목이 붙어 있게 되었네요.”
“감독님은 화도 안 나요?”
“어…… 조금 그랬는데, 그날 유리 씨가 대신 욕해주신 덕분에 다 풀렸습니다. 게다가 사진 덕분에 위원장에게 뻗대 보기도 해봤으니…… 하하. 생각할수록 유리 씨 도움이 컸네요.”
최주혁은 감사한 마음을 담아 손을 내밀었다. 이유리에게 감독과 기자 사이에서 생성되기 힘든 인간적인 유대감이 느껴졌다.
이유리는 그 손을 옆으로 치우고 그대로 최주혁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당황해하는 최주혁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럼 엊그제 못다 한 데이트나 해요, 우리.”
최주혁은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은 다 어디다 뒀는지 제대로 저항조차 못하고 질질 끌려갔다.
다음 날.
나이지리아전 전에 열린 기자회견, 최주혁 감독이 초췌한 몰골로 입장했다. 기자들은 고작 사흘 사이에 수척해진 감독의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성지훈 선수가 다쳤다더니 최 감독의 고심이 깊었나 봐. 안색이 많이 어둡네.”
한국 언론은 앞 다퉈서 성지훈이 조기 귀국한 이유를 물었다. 이에 대한 최 감독의 대답은 앞서서 기술위원장과 논의한 대로였다.
“발목 염좌 때문에 남은 대회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본인은 끝까지 남아서 선수단을 응원하고 싶다고 밝혔으나, 되도록 빨리 한국에서 치료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조기에 귀국시켰습니다.”
최 감독은 최대한 좋게 꾸며줬다. 이제는 더 볼일도 없는 사이인데 악담을 하는 것도 그렇고, 괜히 성지훈 관련 이슈로 경기력에 영향이 가는 것도 걱정이었다.
이후에는 성지훈 대신 원톱으로 뛰게 된 오솔에 관한 질문이 주를 이뤘다. 아무래도 스위스전의 활약 때문에 언론의 관심이 높았다.
그렇게 무난하게 기자회견이 끝나려는 찰나 누군가 물었다.
“그런데 성지훈 선수는 뭘 하다 다친 겁니까?”
“어…….”
최 감독도 거기까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단순히 훈련 중에 다쳤다고 둘러대면 되는 것인데 막상 거짓말을 하려다 보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설상가상, 지난밤에 잠이 부족했던 탓에 머리도 잘 굴러가지 않았다.
결국 최 감독은 더듬거리며 변명을 덧붙여야 했다.
“어…… 아마 뛰다가 넘어졌을, 맞아요. 넘어졌어요.”
“선수들끼리 충돌이 있었나요?”
“아니요. 음…… 혼자, 혼자 뛰다가 넘어졌어요.”
“네? 혼자요?”
“여, 여기까지 합시다. 그럼 시합을 준비해야 해서…….”
최 감독은 기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고 황급히 기자회견을 끝냈다.
그날 저녁, 대회를 앞두고 나온 기사에는 ‘성지훈, 제 발에 걸려 넘어져…….’라는 워딩이 크게 박혀 있었다고 한다.
* * *
우여곡절 끝에 맞이한 나이지리아전, 최주혁 감독은 시합에 앞서 마지막 브리핑을 시작했다.
“오늘 나이지리아는 4-2-3-1로 나올 거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 전술은 중앙에 위치한 공격형 미드필더에게 공이 몰리게 되어 있지.”
4-2-3-1은 공격형 미드필더의 능력에 따라 그 위력이 천차만별로 변화하는 전술이었다. 이 자리에 선 선수의 패스나 돌파, 슈팅 등이 어떤가에 따라 해당 팀의 공격력이 달라지곤 했다.
“나이지리아의 핵심 선수는 공격형 미드필더인 존 오비 미켈이다. 체격 조건도 좋고, 브라질 전을 보니까 공을 지키는 능력이 특히 대단한 선수였다. 아마 나이지리아는 이 선수를 중심으로 공격을 펼칠 거야.”
존 오비 미켈(이하 미켈)은 188㎝의 건장한 체격의 흑인 선수였고, 나이는 오솔과 같은 87년생이었다.
그는 원래 역사에서는 이번 대회에서 나이지리아를 준우승으로 이끌게 되고 그 결과 맨유와 첼시, 아스날 같은 EPL 팀은 물론이고 레알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같은 명문 구단까지 모조리 그를 주목하게 된다.
미켈은 탁월한 볼 간수(看守) 능력 덕분에 차후 ‘축구 물리학자’라는 별명을 갖게 된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딱 두 마디로 표현할 수 있었는데, 바로 ‘등지고 딱딱’이다.
공을 지키기 위해서는 상대 선수와 공 사이에 자신의 몸을 끼워 넣고 버텨야 한다. 자신의 몸을 방어막 삼아 공을 지키는 것이다.
미켈은 이런 플레이에 굉장히 능숙해서 상대를 ‘등진’ 상태에서 공을 두어 번 ‘딱딱’ 터치하는 것만으로 어느새 상대의 압박에서 벗어나고는 했다. 그만큼 그는 공을 지키는 능력이 뛰어났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발이 좀 느리다는 것뿐인데, 워낙에 탈(脫)압박이 뛰어나다 보니 그리 단점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존 오비 미켈은 민국이가 전담 마크한다. 어려운 역할이지만 네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후 최 감독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선수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상대 공격진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는 선수들로 포진해 있었다.
원톱에는 치네두 오바시(188㎝)가 포진했고, 우측 날개로는 빅터 오빈나(178㎝)가 있었다.
덩치 큰 타깃형 스트라이커와 발이 빠른 우측 날개가 있다는 점은 한국팀과 유사했다.
차이점은 한국에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여민국이 있다는 것이고, 나이지리아에는 공격형 미드필더의 자리에 미켈이 있다는 점이었다.
원래 이렇게 전술이 맞물리면 수비형 미드필더가 있는 쪽이 더 유리하다. 둘의 기량이 동일하다면 말이다. 그러나 상대는 세계 제 2의 유망주로 불리는 존 오비 미켈이었다.(1위는 당연히 메시다.) 여민국이 그를 상대로 얼마나 대등한 모습을 보여줄지, 누구도 장담하기 힘들었다.
‘이번 경기의 키(Key)는 민국이에게 달렸다.’
두 사람이 만나는 곳, 그곳이 바로 이번 경기 최대 접전지역이 될 것이다.
* * *
경기가 시작되고 처음 몇 분 동안은 한국팀이 앞서갔다. 4-4-2를 공략하러 4-2-3-1을 꺼내 든 상대에게 4-3-3이 제대로 카운터로 작용한 것이다.
본래라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을 미켈도 여민국에게 가로막히게 되었고, 덕분에 한국팀은 한층 수월하게 방어에 임할 수 있었다.
“계획 대로군.”
최주혁 감독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지난 2년 동안 4-4-2를 유지한 덕분에 4-3-3에 대한 정보가 거의 노출되지 않았다.
상대 감독 입장에서는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일 것이다.
한국은 전술도 하나만 쓰는데다 선수 선발도 거의 베스트 일레븐만 가동하는 팀이었는데, 느닷없이 자신들의 카운터 전술을 들고 나왔으니 말이다.
당장은 전술에 변화를 주기도 힘들었으니, 최 감독의 노림수가 제대로 먹혀들었다고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약팀이니까 선 수비 후 역습이 적격이지.’
최주혁이 구상하는 4-3-3은 조세 무리뉴의 첼시가 선보인 실리 축구였다. 살짝 다른 것은 수비 시에는 고영주 대신 오솔이 밑에 내려온다는 점이었다.
발이 빠른 고영주를 역습의 선봉장으로 세우는 동시에 그의 체력적인 약점을 지우기 위한 결정이었다. 물론 오솔의 백만돌이급 체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전술 운용이었다. 덕분에 초반은 한국팀이 잘 막아내고 있었다.
문제는 20분이 지났을 즈음에 생겼다. 잘 틀어막았다고 생각한 중앙에서 슬슬 여민국이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미켈은 멋진 균형감각과 몸싸움을 뽐내며 한국팀 중심부를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는 등 뒤에 여민국을 놓고도 편안하게 움직였다.
여민국은 처음에는 상대의 공을 끊어내려 했으나 이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공을 끊어내려 접근했다가 돌파를 허용하곤 했다.
한 번의 위협적인 돌파를 허용한 후, 여민국은 상대가 뒤로 돌아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하지만 미켈의 입장에서는 굳이 직접 돌파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발이 느려서 돌파하기도 힘들었고, 나이지리아는 좌우는 물론이고 전방에도 훌륭한 골잡이들이 포진해 있었다.
‘돌파는 막는다고 애를 쓰는군. 하지만 이래서야 패스하기 너무 쉽잖아.’
파앙!
여민국이 앞에 버티고 있음에도 미켈의 패스는 거리낌이 없었다. 여민국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발을 뻗기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몇 번의 날카로운 패스가 연결되었고, 한국팀의 수문장은 서너 번의 놀라운 세이브 끝에 치네두 오바시에게 골을 헌납해야 했다.
전반 32분에 벌써 실점이 기록됐다.
초반은 자연스럽게 여민국의 완패 분위기로 흘러갔다.
‘이건 좋지 않은데…….’
오솔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하필이면 미켈을 만나서 여민국의 약점이 드러나고 말았다.
여민국은 확실히 다방면에서 재능이 많은 선수였지만, 딱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다. 바로 무자비함이었다.
‘형님은 저렇게 거칠게 경합한 적이 거의 없어.’
비록 여민국이 K리그에 올라와서 제법 거친 몸싸움을 경험했으나, 유럽 축구의 몸싸움 수준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손색이 있었다.
‘게다가 너무 곱게 자랐지.’
고교 대회 우승과 프로리그 등 여민국은 축구선수로서 충분히 많은 경험을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너무 올곧은 플레이만 펼치고 있었다.
그가 수비를 위해 사용했던 반칙들도 모두 상대를 제지하기 위한 것일 뿐, 실질적으로 상대를 위협하기 위한 동작은 거의 없었다.
유럽 축구를 겪었던 오솔이 보기에 여민국의 수비는 너무 얌전했다. 유럽 축구의 몸싸움을 패싸움이라고 한다면 여민국의 그것은 왈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몇 년 만 더 지나면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지금 당장은 힘들어 보이네.’
조금만 더 쉬운 상대를 만났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너무도 아쉬웠다.
오솔은 실점 후 진땀을 흘리고 있는 여민국에게 다가가 말했다.
“형님,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해요.”
“누가 형님이냐?”
“형…… 어쨌든 이대로만 버텨요. 골을 먹혀도 흔들리지 말고요. 실점한 만큼 넣으면 되니까.”
오솔처럼 시스템의 도움을 받지 않는 한, 경기 중에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럴 때 한계를 극복한답시고 평소와 다른 플레이를 펼치다가는 탈이 날 수도 있었다.
‘현실은 만화처럼 분노하고 소리 좀 지른다고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그러니 당장은 할 수 있는 것만 해요.’
그리고 오솔은 약속한 대로 전반이 끝나기 전에 만회골을 넣었다. 한층 정교해진 헤딩 실력을 뽐내며 넣은 골에 경험치가 순식간에 20%나 올랐다.
‘어디 누가 더 많이 넣나 시합으로 가보자고. 많이 넣을 수 있으면 나는 무조건 이득이니까.’
지금처럼 서로 대등한 조건이라면 오솔은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을 자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