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033화
“상현이가 빠지고 그 자리에 영주가 대신 들어간다. 전술은 4-4-2를 유지하는데 대신에 영주가 밑으로 내려와서 공을 운반하는 역할을 맡도록 해.”
감독의 선택은 내내 죽을 쒔던 이상현을 빼는 것이었다.
덕분에 성지훈의 얼굴이 밝아졌다. 고영주가 밑에서 플레이 메이킹을 해주면 그만큼 기회가 많이 생길게 분명했다. 비록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조합이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이상현의 분진(奮進)을 기다리는 것보단 나아 보였다.
“실점 장면에서 뭐가 문제였는지는 파악했어?”
모두가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여민국이 입을 열었다.
“반대편에서 한 칸씩 중앙으로 이동해줬어야 했는데 그게 좀 늦었습니다.”
“맞아. 상대 선수를 놓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방금처럼 우측에서 공격을 진행할 때에는 이렇게 한 칸씩 움직여서 빈 공간을 커버하는 움직임이 필요해. 이건 사실, 우리가 다 연습했던 것들이야. 기억나지?”
몇 번이고 훈련했던 상황이었지만, 정작 실전에서는 커버가 늦고 말았다. 전반전 종료 직전이라 집중력이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바르네타가 생각보다 더 빨랐기 때문이다.
비록 한순간의 실수였지만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제 상대팀은 라인을 더 밑으로 내리고 역습 위주의 경기를 펼칠 게 분명했다. 후반전에는 아까보다 더 단단해진 스위스 수비진을 뚫어야 했다.
“아직 경기는 절반이나 남았는데, 왜 이렇게들 축 처져있어? 겨우 한 골 차이고, 잘 생각해보면 경기력은 대등했었어. 맞지? 혹시 벌써부터 경기를 포기한 놈이 있으면 말해. 내가 빼줄 테니까. 그런 놈 있어?”
“없습니다!”
선수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대답했다.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성지훈이나 센데로스에게 탈탈 털려서 한 톨의 투지도 남아있지 않은 이상현만 예외였다.
“좋아! 그럼 나가서 보여줘라. 너희들의 실력을 전 세계에 알릴 절호의 기회야!”
세계라는 말에 선수들의 눈동자에 빛이 들어왔다. 유럽에서 열리는 경기인만큼 지금 경기장에는 수많은 스카우트들이 몰려왔을 것이다.
여기서 활약하면 어쩌면 단번에 유럽 진출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완전히 겁을 먹었던 이상현마저 뒤늦게 욕심이 생겼는지 아쉬운 표정이 되었다.
“한 번 해보자!”
“그래, 까짓 거 그렇게 어려운 상대도 아니잖아.”
각오를 다진 선수들이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밖으로 향했다. 그렇게 하나둘씩 라커룸을 나가고, 결국에는 오솔과 최주혁 감독만 남게 되었다.
“후반전이 시작하면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게 몸을 풀어둬. 봐서 전술이 통하지 않는다 싶으면 바로 교체할 생각이니까. 늦어도 15분 안에는 교체할 테니, 그렇게 알고 준비하면 돼.”
“알겠습니다.”
오솔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라커룸을 벗어났다. 드디어 출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비록 기대했던 선발 출장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30분은 뛸 수 있었다. 그 정도 시간이면 골을 넣기에 충분했다.
삐익!
이윽고 시작된 후반전.
투톱의 성향이 바뀐 탓일까? 후반전은 한국팀의 계획대로 진행됐다. 꽉 막힌 하수도처럼 답답했던 공격이 고영주를 중심으로 슬슬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확실히 성지훈 저놈은 에이스라고 부르기 힘들어.’
성지훈은 제법 골을 잘 넣는 편이었으나, 스스로 게임을 풀어나가는 능력은 다른 팀 에이스에 비해 많이 부족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한 스타일이다.
물론 주어진 찬스를 잘 살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실질적으론 그조차 못하는 선수들이 널린 게 현실이다. 그래서 사람들도 성지훈의 골 결정력에 열광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제는 영주 선배를 중심으로 패스가 돌아가고 있어.’
후반 초반은 한국 팀의 공세가 매서웠다. 고영주가 적극적으로 내려오면서 중원에서 세 명의 미드필더가 뛰는 효과를 낸 것이다. 단 두 명의 미드필더만 있는 스위스로서는 정신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 스위스의 측면 미드필더들이 중앙으로 오면, 그때는 공을 다시 측면으로 돌리면서 빈 공간을 공략할 수 있었다.
한국팀은 중앙에서 측면으로 다시 측면에서 중앙으로 패스를 주고받으며 상대 수비진을 휘저었다.
고영주의 드리블은 적재적소에 들어가며 빈틈을 이끌어냈고 그렇게 만들어진 틈은 결국 중앙 수비수를 앞으로 나오게 만들었다.
성지훈은 공간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지훈 선배!”
때마침 살짝 띄운 패스가 그의 앞에 떨어졌다.
‘찬스다!’
성지훈은 대각선으로 달려 들어가며 골대와 골키퍼의 위치를 확인했다. 공의 진행 방향이 바깥쪽으로 향하고 있어서 논스톱으로 때리기는 힘들어 보였다.
‘안으로 한 번 접은 다음에 차는 게 낫겠다.’
성지훈이 공을 잡기 위해 속도를 더 높일 때였다. 뒤에서 누군가가 팔을 뻗어 그의 상체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센데로스가 뒤늦게 따라온 것이다.
성지훈은 손을 미리 뻗어서 상대의 손을 쳐냈어야 했다. 달리기 속도는 그가 더 빨랐기 때문에 방해만 없었다면 이번에 득점을 올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제때 방어하지 못한 탓에 상대에게 붙잡혔고, 몸싸움을 하는 사이에 공은 벌써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주인 없는 공은 그대로 골라인 밖으로 빠져나갔다.
“반칙이잖아! 레퍼리(Referee, 심판)! 헤이!”
성지훈은 센데로스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내며 심판에게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심판의 반응은 ‘왜? 그거 반칙 아니야.’ 정도에 불과했다.
센데로스는 이미 프로에서 뛰는 만큼 반칙을 불리지 않는 선에서 손을 쓰는 것에 익숙했다. 대놓고 잡거나 때리는 게 아닌 이상에야 휘슬을 불리 없었다.
“젠장! 넣을 수도 있었는데…….”
뒷공간이 너무 협소했다. 공은 살짝 길었고, 센데로스의 방해는 거셌다. 라인을 올릴 수는 없으니, 골을 넣으려면 조금 더 정교한 패스가 들어가거나 센데로스와의 몸싸움에서 승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지만 말이야.’
오솔은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기 시작했다. 96%까지 올라와 있던 컨디션이 준비 운동과 함께 조금씩 오르더니 마침내 100%까지 회복되었다.
‘확실히 센데로스가 쉬운 상대는 아니지. 아니, 어쩌면 지금 당장은 디에고 고딘보다 더 까다로울 수도 있는 선수야.’
센데로스는 차후에 생각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는 평가와 함께 아스날을 떠나게 된다. 솔 캠벨의 대체자로 불리는 현재와는 너무도 다른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사실 축구계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축구를 1,500m 달리기로 치면 스무 살이라는 나이는 이제 막 출발 선상에 선 것과 마찬가지였다. 끽해봐야 100m 남짓 뛰었다고 할 수 있다.
게임처럼 선수의 잠재력이 보이지 않는 이상에야 구단 관계자들은 이 100m의 기록을 보고 해당 선수의 1,500m 기록을 추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종종 실패한 영입이나 영원한 유망주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누구나 한계가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 한계가 남들보다 유독 빨리 찾아온다.
센데로스가 딱 그러했다. 초반에는 누구보다 빨리 산에 올랐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산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센데로스가 제일 높은 곳에 있다는 게 문제지.’
공격수의 전성기는 언제일까? 보통은 20살에서 25살까지로 본다. 이때는 신체의 폭발력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이고, 정서적으로 겁도 없는데다가 감각도 예민하다.
동물에 비유하자면 공격수는 포식자인 것이다.
사자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젊은 놈은 다리 근육도 튼실해서 순간 속도도 빠르고, 발톱이나 이빨도 날카롭기 그지없다.
반면 늙은 사자는 다리는 얇실해져서 잘 뛰지도 못하고, 발톱과 이빨은 닳고 닳아서 예전의 날카로움은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사자는 늙으면 사냥을 못하고, 공격수도 마찬가지로 골 사냥이 힘들어진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루카 토니처럼 대기만성(大器晩成)형 공격수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에게는 20대 중반까지가 전성기다. 그래서 세계적인 공격수들은 젊은 나이에 벌써 커리어 하이를 찍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수비수는 20대 중후반부터 30대 초중반까지를 전성기로 본다. 신체적인 능력은 떨어지더라도 그동안 쌓은 경험이 수비에는 더 도움이 되는 것이다.
즉, 수비수는 동물로 치면 코끼리였다. 나이를 먹을수록 덩치와 상아가 커져서 나중에는 웬만한 포식자에게는 밀리지도 않는다는 점이 꼭 닮아있었다.
그래서 20대 초반에 주전 수비수로 뛰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하부 리그나 작은 구단에서는 종종 볼 수 있지만, 아스날 같은 빅 클럽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면 20대 초반부터 주전 수비수로 활약했던 선수에는 누가 있을까?
네스타나 말디니, 푸욜처럼 이름 앞에 ‘전설’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간 이들이 대표적인 선수들이었다. 심지어 이들이 뛰었던 곳은 모두 각 리그를 대표하는 빅 클럽이었다.
센데로스의 현재 퍼포먼스는 앞선 전설들의 초창기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으으. 빨리 출전하고 싶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솔은 의욕을 불태우기에 바빴다. 센데로스의 현재 모습이 얼마나 대단한지 설명했으나 오솔은 전혀 겁을 먹거나 긴장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전생에 센데로스를 상대로 골을 넣은 경험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약점이 무엇인지 어떤 플레이를 곤혹스러워하는지 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성지훈에게는 말해주지 않았다. 같은 팀이라는 연대감도 없었고, 말해준다고 아무나 공략할 수 있는 약점도 아니었다.
“이런 X바아아알!”
기어이 성지훈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센데로스의 밀착 수비에 자꾸만 막히자 제 분에 못 이겨 성질을 내는 것이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지훈은 압박을 견디는데 젬병이었다. 항상 투톱을 고집하는 이유도 그만큼 상대의 압박을 분산해줄 동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영주가 미드필더 지역으로 내려가는 순간, 성지훈은 공격진에 홀로 고립되어 두 명의 중앙 수비수와 부대껴야 했다.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것도 센데로스 같은 덩치들을 상대해야 했으니 오죽할까.
‘빌어먹을! 내가 이런 꼴을 당하다니…….’
성지훈은 잘만 뛰고 있는 고영주를 노려봤다. 고영주의 발에서 몇 번의 결정적인 패스가 도착했으나, 그는 매번 놓치고 말았다.
‘이래서야 내가 너무 못하는 것 같잖아.’
수적 우위를 가진 중원에서 활약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는데, 상대적으로 힘겹게 싸워야 하는 자신만 욕을 먹게 생겼다.
“이번에는 내가 내려갈게!”
성지훈은 이번에는 고영주를 전방에 두고 자신이 밑으로 내려갔다. 전술에 다양성을 주고자 하는 목적은 아니었다. 순전히 자신도 멋진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다.
“뒤에 조심해요!”
의도가 불순했기 때문일까? 성지훈은 뒤에서 몰래 다가온 수비형 미드필더에게 그대로 공을 뺏기고 말았다. 그리곤 전반전의 역습이 그대로 재현되기 시작했다.
이번엔 우측의 발론 베라미에게 공이 갔고, 베라미는 중앙으로 침투하는 척하다가 그대로 측면을 따라 올라갔다. 수비수는 간신히 따라갈 뿐, 태클할 엄두를 못 냈다.
[위험합니다. 뚫렸어요!]
베라미는 아무런 방해 없이 크로스를 올렸다. 공은 빠른 속도로 올라왔고, 하필이면 여민국이 마크하지 않는 선수에게 향했다.
[발론 베라미의 크로스! 아, 막아냅니다! 정선우 선수의 선방입니다.]
[아직 위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스위스에는 장신 선수가 많기 때문에 코너킥이 아주 위협적이에요.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해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이 올라왔다. 공은 별다른 회전 없이 중앙으로 날아왔다. 선수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며 자리를 잡는 사이 센데로스가 불쑥 솟아올랐다.
툭!
짧게 깎은 머리에 부딪힌 공은 그대로 그물망을 뒤흔들었다.
후반 11분, 만회하기는커녕 한 골을 더 먹히고 말았다.
최주혁 감독은 곧장 선수 교체를 요청했다.
[교체가 있는 것 같습니다. 19번, 오솔 선수가 준비 중이네요.]
[이렇게 되면 누가 나가죠? 아!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던 성지훈 선수가 나가게 되는군요.]
[오늘 성지훈 선수가 열심히 뛰긴 했는데, 생각보다 컨디션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잘 했습니다. 성지훈 선수! 우리 응원단과 교민들도 성지훈 선수의 헌신을 알고 기립 박수로 위로를 보내고 있습니다.]
중계 화면에는 교체되어 나가는 성지훈의 모습이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성지훈은 하이파이브를 하려는 오솔에게는 시선조차 안 주고 속칭 개무시를 하더니, 어깨를 두드리려는 최주혁 감독을 피해 벤치로 들어갔다. 벤치에 들어가고 나서도 짜증이 났는지 바닥에 정강이 보호대를 거칠게 집어던졌다.
[어, 어?]
[하하…… 마, 많이 아쉬웠나 봅니다. 이해합니다. 본인도 속상하겠지요.]
상상하지도 못 한 안하무인(眼下無人)격 행동에 캐스터도, 그리고 해설도 얼떨떨한 얼굴이 되었다. 화면은 빠르게 전환되었으나 이미 전파를 탄 후였다.
성지훈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여전히 벤치에 앉아 욕설을 뱉고 있었다. 감독을 자신의 아래로 여기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