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032화
F조의 경기가 있는 6월 12일.
네덜란드 북동부에 위치한 에멘 시는 이른 저녁부터 축구를 즐기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F조에는 브라질이 속해 있었기에 다른 경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높았다.
FIFA U-20 대회는 차세대 스타를 미리 만나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축구팬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브라질에는 그들의 기대를 충족해줄 만한 선수들이 특히 많았다.
와아아아.
구슬땀을 흘리는 축구 선수들과 그들의 열정을 꼭 닮아있는 축구팬들, 그리고 빛나는 보석을 찾아 두 눈을 번뜩이는 각지의 스카우트들까지…….
위니베 경기장에서 치러진 브라질과 나이지리아의 경기는 총 8,500명의 관중이 몰리며 호황을 이뤘다.
0 대 0.
아쉽게도 골이 터지지는 않았으나 경기 내용 자체는 재미있었다. 양 팀 다 공격적인 플레이 스타일을 선보이며 경기 내내 치고받는 시합이 펼쳐진 것이다.
관중들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대부분 그대로 남아, 한 시간 뒤에 이어질 대한민국과 스위스의 경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들 틈에는 턱수염이 목덜미까지 난 중년의 사내 역시 섞여 있었다.
‘브라질은 브라질이라고 해야 하나? 역시나 이번 세대에도 빛나는 재능들로 넘치는군.’
브라질은 언제 보아도 풍요로운 나라였다. 그의 조국도 만만치 않게 많은 스타들을 배출했으나 브라질리언들이 갖고 있는 특유의 재기 발랄함을 가진 선수는 흔치 않았다. 그러나 브라질 선수라고 다 같진 않았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선수가 있었다.
금년에는 지에구 히바스 다 쿠냐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그는 정확한 패스를 구사하면서도 브라질 선수답게 발밑이 깔끔했다.
아직은 마무리 실력이 부족해 보였지만, 경험을 더 쌓으면 빅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할만한 재능이었다.
누군가 만약 지에구 말고 한 선수만 더 뽑아 달라고 한다면, 턱수염 남자는 주저 없이 페르난두 루이스 호자를 선택할 것이다.
페르난지뉴는 중원에서 유독 많이 뛰며 공수에 두루 기여했는데, 축구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그 선수의 움직임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수비 시에는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상대 패스 루트를 차단하고, 공격을 할 때는 같은 편에게 패스 코스를 만들어 주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지. 이런 선수는 비록 뛰고 있을 때는 티가 안 나지만, 없을 때는 그 존재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법이지.’
비록 그는 공을 잡고 뭔가를 보여주는 선수는 아니었으나,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지에구의 빈자리를 적절히 메워주는 전형적인 살림꾼 스타일이었다.
턱수염 남자의 분석은 무척 날카로웠다.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페르난지뉴는 이후 우크라이나의 FC 샤흐타르 도네츠크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그 성공을 바탕으로 2013년 여름,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해서 수년간 드러나지 않은 영웅으로써 활약하게 된다.
그랬다.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페르난지뉴 같은 선수 3명만 있으면 리그에서 우승할 수 있다며 극찬했던 이가 바로 저 선수였다.
‘나이지리아에도 괜찮은 선수가 생각보다 많이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브라질을 상대로 대등한 경기를 펼치지 못했을 것이다. 본래 역사에서는 결승전까지 진출했던 팀인 만큼 나이지리아도 만만치 않은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가 막 나이지리아 선수를 되뇌려 할 때, 안내 방송과 함께 한국 대 스위스 전이 시작하려 했다.
턱수염 남자는 두 눈을 빛내며 스위스 선수들을 훑어봤다. 그는 좌측 날개로 출전한 바르네타를 발견하고 그대로 시선을 고정했다.
‘과연 저 선수가 그를 대체할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군.’
턱수염이 난 남자, 치로 페레라는 한국 선수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 * *
“상현아!”
이상현은 뒤에서 길게 넘어온 패스를 보고 높이 뛰었다. 역시나 한국의 몇 안 되는 공격 패턴 중 하나인 킥 앤 러시였다.
킥 앤 러시, 큰 키의 공격수를 믿고 후방에서 공을 냅다 멀리 차는 전술로 흔히 뻥 축구라고도 말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단순한 걸 전술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냐고 묻겠지만, 원래 전술이란 게 다 그렇다. 팀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가리는 게 중요한 거지 얼마나 복잡한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거듭 말하지만 단순해도 효과만 좋다면 훌륭한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효과가 좋다면 말이다.
“읏! 젠장!”
이상현의 몸은 같이 뛴 센데로스 때문에 형편없이 밀리고 말았다. 193㎝의 거구가 헤딩 실패와 동시에 그라운드를 뒹구는 모습은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성지훈은 자꾸만 쓰러지는 이상현이 답답했는지 애꿎은 잔디를 차며 투덜거렸다.
“좀 버텨봐! 벌써 몇 번째 밀리는 거야?”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니까!”
이상현도 짜증이 났는지 그답지 않게 성지훈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실 그럴만도 했다. 지금 제일 답답한 건 직접 센데로스를 상대해야 하는 이상현이었다.
그는 아시아에서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거대한 벽의 등장에 어찌해야 할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여민국도 제법 단단하다고 느꼈는데 이놈은 그보다 더 심했다.
‘역시 아스날이라 그런가? 너무 강하다.’
아무것도 모르고 붙어도 밀렸을 판에 설상가상 상대가 아스날 소속이라는 배경까지 더해졌다. 그것 때문에 이상현은 저도 모르게 위축이 되고 말았다. 유럽 명문 구단 소속이라는 후광에 무의식적으로 짓눌린 것이다. 덕분에 경기가 시작한 지 25분을 넘어가도록 그는 전혀 힘을 못 쓰고 있었다.
“어후, 답답해! 안 되겠어. 바로 나한테 패스해줘!”
성지훈은 더는 참지 못하고 직접 패스를 요구했다.
다행히 미드필드 지역에서 한국팀이 수적 우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중원에서 패스를 돌리는 건 비교적 수월했다. 문제는 어떻게 이 공을 공격진까지 무사히 연결하느냐였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떡하니 버티고 있는 젤송 페르난드스와 그 뒤에 석상처럼 버티고 선 포백의 모습은 미드필더로 하여금 어디로 패스를 해야 할지 머뭇거리게 했다.
오솔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단단한 팀이야.’
스위스는 기본적으로 공수의 균형을 고루 가져가는 스타일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성향을 따지자면 수비를 안정화시키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었다.
공수 비율에서도 공격보다는 수비에 치중했다. 사실상 공격에 참여하는 건 공격수 둘과 앞선 미드필더 세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라인을 물린 채 상대의 공격을 대비했다.
보통의 팀이 공격 시 최소 6명의 선수들을 동원한다는 걸 생각하면 다소 수비적인 운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수비 시에도 압박을 가하기보다는 라인을 내리고 견고히 지키는 형태를 고수했는데, 덕분에 한국 선수들은 상대를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다.
센데로스를 비롯한 수비수들은 전체적으로 신장이 크고, 덩치들이 대단했다. 지금처럼 공중볼 경합을 벌여선 답이 없었다. 그렇다고 공을 굴려주기도 힘든 것이 수비형 미드필더가 중앙에 떡하니 서서 패스의 길목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이 따로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이 무적이란 것은 아니었다. 사람인 이상 모두 하나 정도는 약점을 갖기 마련이었고, 센데로스를 비롯한 스위스 수비진의 약점은 느린 발이다.
골리앗을 이기는 건 다윗인 것처럼 이들도 자신들과 정반대인 작고 빠른 선수들에게 유달리 약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저렇게 라인을 내리고 있으면 발이 느리다는 건 더 이상 약점이 되지 않지.’
아무리 발이 빠른 선수라고 해도 달릴 공간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었다. 지금처럼 라인을 내리면 수비진의 발이 느리다는 단점을 효과적으로 상쇄할 수 있었다.
‘이럴 때야말로 크랙의 존재가 필요한 건데…….’
크랙(crack)은 말 그대로 상대 수비진을 뒤흔들거나 완전히 박살내는 선수를 뜻했다.
지금 한국팀에는 드리블로 저 덩치들 사이를 자유롭게 돌파하거나 그렇게 발생한 틈으로 대포알 같은 중거리 슛을 꽂아 넣을 선수가 필요했다. 아마 몇몇 선수가 떠오를 것이다. 우주원이나 고영주 같은 선수들 말이다.
그러나 우주원은 측면 돌파와 크로스에 특화된 선수라 스위스를 상대로는 효과를 보기 힘들었다. 안에서 호응해야 할 이상현이 전혀 힘을 못 쓰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영주는 벤치에 앉아 있으니 아예 논외로 쳐야 했다.
결국 지금으로선 성지훈만이 유일한 크랙이었다.
“지훈아!”
마침내 한국팀 에이스 성지훈이 공을 넘겨받았다. 그는 양 발을 번갈아가며 공을 바삐 몰았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틈을 발견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바쁘게 움직이던 잔발은 외곽을 따라 빙빙 돌아갈 뿐, 진전이 전혀 없었다.
뻥!
결국 성지훈의 공격은 골대를 한참이나 벗어나는 중거리 슈팅으로 마무리됐다. 응원단의 열기를 쏙 빼버리는 허무한 마무리였다.
[성지훈 선수의 슛! 아! 아깝게 빗나갑니다. 하지만 좋은 시도죠?]
[그렇습니다. 지금은 어설프게 공을 질질 끄는 것보다는 저렇게 슛으로 마무리하는 편이 훨씬 좋습니다. 자, 우리 선수들! 서두르지 말고,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시작하면 됩니다.]
캐스터가 어떻게든 분위기를 띄우려 했고, 해설위원도 애써 긍정적인 해설을 늘어놨다. 그러나 이미 분위기는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은 후였다. 그나마 다행히도 한국팀은 해설위원의 말처럼 수비 완성도가 꽤 높았다.
중앙에서 수적 우위를 갖는데다 원체 많이 뛰는 선수들로 중앙을 짠 덕분에 협력 수비가 적절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바르네타나 베라미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두 명, 세 명씩 들어오는 협력 수비를 상대로는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잘 막고 있다며 방심할 수는 없었다. 지금 스위스는 결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만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도 틈이 보이면 날카로운 공격을 선보이는 것이 스위스의 공격진이었다.
“이런…… 마크해!”
결국 전반전이 끝나기 직전에 사달이 났다. 혼자 고군분투하는 성지훈을 돕기 위해 미드필더 한 사람이 위로 올라갔는데, 그 사이에 성지훈이 공을 뺏긴 것이다.
그때부터 스위스의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역습이 시작됐다.
공은 빠르게 좌측면의 바르네타에게 향했고, 그는 중앙의 빈 공간을 향해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올라갔다.
측면 수비수가 허겁지겁 따라붙었으나 한 걸음이나 더 뒤처져 있었다. 덕분에 스위스는 순간적으로 중원에서 수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비상사태였다.
바르네타는 공을 좌측 공격수에게 패스한 뒤 살짝 속도를 늦췄다.
여민국은 바르네타가 멈춘 걸 확인한 즉시 공격수에게 달라붙었다. 상대가 돌아서면 바로 슈팅을 시도할 수 있는 위치였으니 바짝 붙는 게 당연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공격수의 선택은 몸을 돌려 슈팅 찬스를 잡는 게 아니라 받았던 공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었다.
중앙에서 잠시 호흡을 조절하던 바르네타는 되돌아오는 공을 향해 빠르게 쇄도했다. 측면 수비수는 이번에도 한 발짝 늦게 따라붙었다.
완벽한 노마크 찬스였다.
바르네타는 공을 냅다 후려갈겼다.
뻐엉!
공은 여민국이 이동해서 생긴 약간의 틈으로 절묘하게 파고들었다. 중간에서 막으려 했으나 상대 공격수의 방해 때문에 여민국도 몸을 날릴 수가 없었다.
골키퍼의 반응도 최악이었다. 하필이면 몸을 살짝 띄운 타이밍에 슈팅이 날아오는 바람에 반응이 한 박자나 늦은 것이다. 결국 골키퍼가 손을 뻗었을 때 공은 이미 골라인을 넘은 뒤였다.
촤르륵!
[아! 골이 들어갔습니다. 트란퀼로 바르네타 선수에게 중거리 슛을 허용하고 마는 한국입니다!]
캐스터의 목소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졸전을 펼치다가 너무도 허무하게 골을 먹히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게다가 하필이면 전반전이 끝나기 직전에 터진 골이었다. 0 대 0으로 전반을 마치는 것과 1 대 0으로 끝내는 것은 팀 사기 측면에서 굉장히 차이가 컸다.
한국팀은 졸지에 한 점 뒤쳐진 상태로 하프타임을 보내게 되었고, 당연히 라커룸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최주혁 감독이 도착했을 땐, 공을 뺏겨서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던 성지훈이 도리어 다른 선수들을 탓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내 호흡을 맞춰왔던 이상현도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야이, 풍선인형 같은 새끼야! 어떻게 전반전 내내 헤딩 한 번을 못 따냐? 아주 그냥 허우적대기만 하고, 아주 가관이다.”
“뭐 인마? 이 자식은 지가 실수해놓고 지금 누굴 탓하는 거야?”
“그만! 모두 조용히 해!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야. 서로 탓하기나 하고!”
성지훈은 최주혁 감독이 왔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씩씩대는 숨소리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최주혁 감독은 두 눈을 부라리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는 과도하게 열을 내는 성지훈과 잔뜩 위축된 선수들의 눈동자가 차분해질 때까지 팔짱을 낀 채 침묵했다.
감독은 성지훈의 어깨가 완전히 멈추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후반전에는 전술에 변화를 준다.”
간신히 가라앉혔던 성지훈의 눈초리가 다시금 사나워졌다. 혹시나 오솔이 자신을 대신할까 싶어 저도 모르게 짜증을 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