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031화
7장 넘어졌어요.
이탁수 감독은 창고에서 나오는 인물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결코 그 사람이 싫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였기에 나온 반응이었다.
“또 정리한 거야? 이제는 하지 말라니까.”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생각을 정리할 때도 좋고, 괜히 마음도 좀 편안해지고…… 좋아요.”
오솔은 지저분해진 손을 털며 부드럽게 웃었다. 지난 2년 사이에 정말 많이도 변했다. 이전 같으면 하기 싫어서 도망갔을 만한 일을 이제는 스스로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아쉽네.’
괜히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두 번의 여름과 전국 대회를 위해 흘린 땀이 연습실 곳곳에 묻어있는 것 같았다.
“죄송해요, 감독님.”
“또 그 얘기냐. 이제는 너 없이도 충분히 전국대회에 나갈 수 있다니까 그러네.”
오솔이 출전했던 지난 2년간 청송고는 전국대회 진출은 기본이고, 말 그대로 전국을 제패하며 고교 최강팀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올해는 그를 엔트리에 넣을 수 없을 것 같다. 지난해 9월에 열렸던 AFC U-19 대회와는 달리 이번 FIFA U-20 대회는 6월에 열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제가 힘을 보태야 하는데…….”
“됐어. 어떻게 잡은 기횐데, 나가서 이름도 알리고 잘 되는 게 우릴 도와주는 거야. 그리고 솔직히 이제는 여기에서 뛰기에는 레벨이 안 맞잖아? 요즘 말로 양민학살이다, 그거.”
“대체 언제 적 유행어를 하시는 거예요?”
“흠흠. 시끄럽고, 출국일은 언제야?”
“5월 22일이요”
FIFA U-20 대회는 6월 10일부터 시작해서 7월 2일까지 진행된다. 이번 개최지는 튤립과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였다.
비행시간만 약 12시간이 걸리는 긴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도착하면 시차는 물론 현지의 기후와 잔디에 적응한다고 정신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풍차의 나라답게 바람이 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오솔은 헤딩을 주 무기로 하는 만큼 도착해서 크로스나 코너킥 등 공중볼에 관련된 훈련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아직 시간이 좀 있구나. 다행이다. 잠깐 나랑 어디 좀 다녀오자.”
“어디요?”
“따라와 보면 아니까 잔말 말고 타.”
이탁수 감독은 오솔을 차에 태우고 어딘가를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뭔가 생각해놓긴 했는데 미리 준비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감독님은 축구에 관련된 거는 철두철미하면서, 그 외의 것들은 영 무계획하단 말이야.’
어디로 가는 건지 궁금해지려는 찰나 차가 멈췄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말에 별생각 없이 내렸던 오솔은 뜻밖의 장소를 보고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뭐해, 안 들어와?”
“감독님…….”
이탁수 감독은 매장 입구에 서서 거듭 손짓했다. 오솔은 여러 차례 심호흡을 반복하며 걸음을 옮겼다. 매장 쇼윈도에는 멋들어진 양복을 걸친 마네킹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렇게 비싼데 아니니까 너무 감동받지는 말아라.”
“제가 언제 감동을 받았다고 그러세요?”
“어허, 뚝!”
“안 울었거든요?”
이탁수 감독은 어렴풋이 자리 잡아가는 감동 모드를 단박에 깨트렸다. 어지간히 오글거리는 걸 싫어하는 양반이었다. 덕분에 오솔도 아무렇지 않은 척 매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여기요. 양복 하나 하려고 하는데요.”
“어머, 아드님 양복 맞춰 주시려고요?”
“예? 아, 예. 처음이니까 잘 좀 봐주세요.”
이탁수 감독은 오해가 싫지 않았는지 은근슬쩍 말끝을 흐렸다. 그래놓고 제단사가 오솔의 신체 치수를 잴 때는 또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솔은 어색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다가 말했다.
“맞춤은 너무 비싸지 않아요? 저 그냥 기성으로 입어도 되는데…….”
“네 덩치에 맞는 기성복이 어디 있냐? 그리고 첫 정장은 무조건 좋은 걸로 하는 거야. 그래야 복도 들어오고 하는 일마다 다 잘 된다.”
재단사가 디자인이 다른 양복 몇 개를 오솔의 가슴께에 올릴 때마다 이탁수 감독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가 다 잘 어울린다며 어떤 게 마음에 드냐고 물을 때마다 오솔은 괜스레 목이 막히곤 했다. 오솔은 침을 몇 번이고 넘긴 후에야 간신히 한 마디 할 수 있었다.
“다…… 다 마음에 들어요.”
뒷말은 차마 잇지 못했다. 감독님이 아닌 다른 호칭으로 부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속 스킬, ‘스타의 밤은 낮보다 화려하다.’에 변동이 생깁니다. 이제는 컨디션이 91%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멈췄던 컨디션이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 * *
5월 21일, 파주 NFC.
FIFA U-20 대회에 출전하는 청소년 대표팀이 한 자리에 모였다. 출국에 앞서 간단한 언론 인터뷰를 마치고 가려는 것이다.
선수들은 모두 멋들어진 양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출국 전에는 편한 옷을 입어야 하니, 미리 기념사진을 남기기로 했던 것이다.
이전과는 달리 깔끔한 정장차림의 오솔도 보였다. 확실히 옷이 사람을 나타낸다고, 저렇게 입으니 한층 단정하고 성숙한 느낌이 들었다.
오솔은 그제야 이탁수 감독의 심정을 눈치챌 수 있었다. 지난 소집 때, 그 혼자만 운동복이었던 게 마음에 걸렸던 게 분명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제가 꼭 성공해서 감독님 결혼하실 때 축의금으로 신혼집 해드릴게요.’
오솔은 최근 들어 부쩍 같이 다니는 이탁수 감독과 김영은 선생님을 떠올리며 각오를 다졌다.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합니다. 믿겠습니다.’
오솔은 최주혁 감독의 뒤통수를 향해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그가 했던 기다리라는 말 따위, 이전 같았으면 분명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누군가를 믿는 일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오솔은 최주혁 감독의 약속을, 그의 눈빛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의 눈빛에서 이탁수 감독의 눈빛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 * *
경기를 일주일 앞두고 스위스전 선발 명단이 정해졌다.
역시나 4-4-2 전술에 이상현-성지훈을 투톱으로 삼았다. 여민국과 우주원은 무난히 선발 명단에 들었으나, 아쉽게도 오솔과 고영주는 후보였다.
오솔은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몸상태가 빠르게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기에 더 그랬다.
‘드디어 컨디션이 100%에 도달했는데…….’
컨디션에 걸려있던 마지막 페널티마저 사라졌다. ‘스타의 밤은 낮보다 화려하다.’라는 스킬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순식간에 깎였던 능력치 10%가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한두 달 사이에 오솔의 레벨 자체가 달라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괄목상대(刮目相對).
그야말로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변화였다.
현재 오솔의 상태는 이러했다.
-오솔(오른발잡이, 왼발 숙련도 28%)
-신체 : 균형감각 68/ 힘 73(+5)/ 반응속도 65/ 순간속도 62/ 주력 70(32.5%↓)/ 점프력 60/ 지구력 90(21.3%↓)/ 강인함 90(+5)
-기술 : 개인기 44/ 드리블 44/ 볼터치 49/ 슈팅 49/ 패스 46(13%↓)/ 헤딩 58(10.2%↓)/ 스로인 15/ 태클 34/ 일대일 마크 34
지난 1년 사이 레벨은 겨우 하나만 올랐다. 이제는 고교 대회로 얻는 경험치가 너무 적어진 탓이다. 하드 모드라 필요 경험치가 두 배로 늘어난 것도 한몫했다.
그래도 희소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훈련과 시합을 꾸준히 한 덕분에 ‘게으른 천재가 진짜 천재지.’ 스킬과 ‘이제 축구는 재미없어졌어. 다 돈 때문에 하는 거지.’ 스킬이 사라진 것이다. 덕분에 훈련 효율이 두 배로 늘었다. 60대에 있던 신체 능력은 1씩 올랐다.
레벨 업으로 얻은 포인트 3개는 점프력에 써서 61으로 만들었다. 어중간하게 이것저것 올리느니 지금 가지고 있는 장점을 극대화하는 편이 나아보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미드필더진에서는 킬러 패스가 나오기 힘들어. 지금 당장은 달리기 속도를 올려봐야 효과를 볼 수 없어.’
만약 패스 실력이 출중한 미드필더가 있었다면 오솔도 얻은 포인트를 주력과 순간속도 쪽에 투자했을 것이다.
라인을 깨고 들어가는 움직임은 지금도 세계적인 수준이었으니, 조건만 맞으면 이쪽으로 발전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확실한 지원만 받을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의 청소년 대표팀에선 우주원이라는 수준급 윙어만 존재할 뿐, 전문적인 공격형 미드필더는 없었다.
고영주가 그나마 비슷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지만, 그도 드리블 실력이 뛰어난 것이지 패스 자체는 평범한 편이었다.
‘됐어. 어차피 페널티를 감안해도 주력이 47이면 그래도 평균은 되니까.’
뻥!
오솔은 생각하길 멈추고 코너에서 올라온 공을 낚아채듯 들이받았다. 공은 늘 그렇듯이 그물망을 가로질렀다. 최주혁 감독은 오솔의 헤딩 성공률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10개 중에 9개를 따내다니…… 솔이의 경기력이 상상 이상이구나. 다른 애들은 적응하느라 다들 제 실력이 안 나오는데, 혼자만 펄펄 날아다니고 있어.’
오솔이 최상의 컨디션을 보이고 있다는 건 최주혁 감독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송곳이 자연스럽게 주머니를 뚫고 나오듯 훈련 중에 위협적인 플레이가 거듭 나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상현, 성지훈 투톱을 기용한 이유는 그들에게도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이들만으로는 강팀들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걸 국민들과 협회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쯤 되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차라리 왼쪽 측면에 고영주를 넣어서 플레이 메이킹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고영주가 왼쪽 날개에 적응했으니 나름대로 시너지가 나오지 않겠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었다.
맞다. 그렇게 하면 답답했던 중앙의 공격이 조금은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공격과 수비의 밸런스가 무너지게 된다.
고영주는 수비에 능숙한 선수가 아니었고, 활동량도 그리 많지 않았다.
필연적으로 많이 뛰어야 할 네 명의 미드필더 중 한 사람이 수비를 등한시한다?
그것은 곧 구멍이 송송 뚫린 한지로 바람을 막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스위스의 좌우 날개가 심상치 않아.’
왼쪽 날개는 레버쿠젠 소속의 트란퀼로 바르네타였고, 오른쪽 날개는 세리에A의 제노아에서 같은 리그의 라치오로 이적한 발론 베라미였다.
두 선수의 실력은 소속팀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이들은 체력과 속도, 기술을 두루 갖춘 선수들이었고, 측면은 물론이고 중앙으로 침투하는 법도 아는 선수들이었다.
‘스위스의 전술은 아마도 4-1-3-2, 수비형 미드필더를 하나 두고 그 위에 세 명의 미드필더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스타일이다.’
중원에는 중거리 슈팅이 장기인 블레림 제마일리가 서고, 수비형 미드필더로는 젤송 페르난드스가 나와 단단히 틀어막을 것으로 예상된다.
스위스의 공격은 패스&무브를 바탕으로 진행하는 스타일이었다. 두 명의 공격수와 세 명의 미드필더가 세 개의 삼각형을 유지하며 끊임없이 패스를 주고받는 형식이다.
이를 막으려면 한국의 중앙 미드필더 두 사람이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중원을 꽉 틀어막는 동시에 수시로 측면에 협력 수비를 하러 가줄 필요가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훈련도 대부분 중원에서 역할 배분을 어떻게 나누고 커버하느냐에 집중되어 있었다. 우주원조차 지금은 수비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만큼 스위스의 양쪽 날개는 위협적이었다.
‘좋아. 수비는 착착 준비되고 있다. 문제는 공격인데…….’
최주혁 감독은 다음으로 공격진을 살폈다. 마침 이상현이 측면 크로스를 노리고 점프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큰 키를 살려 공을 어떻게든 성지훈에게 떨어뜨려주려고 애썼으나 여민국이 적절히 붙어 방해하자 공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현의 머리에 맞고 높이 뜬 공은 그대로 골키퍼 품에 안겼다.
‘역시…….’
이상현은 균형 감각이나 몸싸움 능력이 너무 부족했다. 아무리 여민국이 몸을 키웠다곤 하지만 193㎝의 큰 선수가 저리 쉽게 흔들린다는 건 문제가 있었다.
설상가상 이번에 스위스전에서 그가 상대해야 하는 선수는 여민국보다 더 컸다. 키가 무려 190㎝에 달하는데다가 덩치도 크고 꽤나 터프한 수비를 펼치는 선수였다.
‘파이터형 수비수의 전형이지. 이름이 필리페 센데로스였었나?’
스위스 수비의 핵은 필리페 센데로스였다. 그는 2003년에 아스날 유스로 영입된 선수로 작년-2004년-부터 솔 캠벨의 백업으로 뛰기 시작했다.
조금 느린 스피드 탓에 뒷공간이 불안하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큰 키와 단단한 신체 그리고 준수한 수비로 아스날에서 솔 캠벨의 대체자로 자리 잡고 있었다.
결국 스위스전의 핵심은 상대의 양 날개를 꺾고, 센데로스의 머리를 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결코 말처럼 쉬워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