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027화
“아. 잘 먹었다.”
“배 좀 찼어? 이제 겨우 4인분 먹었는데.”
여민주의 시선이 오솔의 배를 슥 훑는다.
“괜찮아. 충분히 먹었어.”
사실은 조금 부족했지만, 얻어먹는 처지에 차마 더 먹겠다고 말하기 민망했다.
오솔은 식어버린 불판을 보며 물을 홀짝이고 있었다.
그걸 본 여민주가 알아서 2인분을 더 시켰다.
오솔은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기분이 좋았다. 단순히 고기를 더 먹는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 자신을 위한다는 느낌. 그것이 너무도 생소하고 간질간질해서, 그래서 웃었다.
‘게다가 그게 너라서 더 좋아.’
“헤헤. 역시 배고팠구나? 2인분 더 시키니까 눈에서 하트가 뿅뿅 생기는데?”
여민주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잔뜩 담겨있다. ‘아니야, 네가 좋아서 그러지.’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게 분명했다.
오솔은 ‘우리 불쑥 결혼하자.’는 말을 하고 싶어 졌다. 지난 생에선 이루지 못했던 미래를 약속하고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그래도 여기서 하는 건 좀 그렇지.’
오솔은 애써 참았다. 장소도 장소였고, 고기를 추가한 직후라 시기도 영 안 좋았다. 그래서 흘러넘치는 진심과 미래의 계획을 꾹꾹 눌러 담았다.
“민국이 형은 요즘 좀 어때? 잘 적응하고 있어?”
“응, 이번에는 선발 풀타임 뛰었다고 했어.”
여민국은 구단에서도 수비수와 수비형 미드필더를 오가며 최적의 포지션을 찾는 중이었다. 이건 뭐 청소년 대표팀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특이할 게 없었다.
‘게다가 그 인간, 전술 이해력이 좋으니…….’
고영주가 중앙과 측면을 오가다가 감을 잃고 결국에는 슬럼프에 빠졌다는 걸 생각하면 여민국은 좀 유별나다시피 축구 지능이 뛰어났다.
“참, 오빠가 하는 말이 요즘 프로리그가 심상치 않대. 성지훈 때문에 난리라던데?”
“음…….”
아직 8월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부터 성지훈의 이적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는 성지훈을 원하는 구단이 벌써 십여 개가 넘어간다고 난리였고, 그중에는 독일의 명문 FC 바이에른 뮌헨도 껴있었다.
‘무려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직접 원한다고 했다지?’
기사인지 소설인지 모를 내용이 이적 시장 전반에 흘러넘쳤다. 아직 정규리그는 끝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몸값을 올리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성지훈은 해외로 나가지 않았다. 그는 한층 높아진 관심 속에서 K리그에 남는다. 기존에 자신을 지원해준 팀이 아닌, 더 높은 이적료를 부른 팀에 입단하는 것이다.
‘이제 연맹에서는 드래프트제의 부활을 논의하겠군.’
하필 오솔이 프로에 데뷔하기 직전이었다. 드래프트 제도만 아니었다면 K리그에서 한두 시즌 뛰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손해가 너무 막심했다.
‘슬슬 결판을 내야겠다.’
마침 여민주도 오솔이 생각하는 바를 물어왔다.
“청소년 대표팀은 좀 어때? 성지훈이 주축이잖아.”
여민주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녀의 오빠도 그렇고 오솔도 성지훈을 언급할 때마다 안 좋은 말만 한 덕분에 자연스레 부정적인 인식이 자리 잡았다.
“다시 예전 전술로 돌아갔어. 간간히 4-3-3을 훈련하긴 하는데, 실전에 나선 지는 좀 됐지.”
AFC 결승에서 해트트릭을 터트린 덕분에 성지훈에 대한 여론이 너무 좋았다. 감독이 차마 그를 뺀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마 성지훈 대신 오솔을 투입했다간 당장 감독부터 바꾸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성지훈의 위상은 루니나 호날두와 비교되는 세계 4대 유망주 중 하나였다.
‘그래도 감독으로서 주체성(identity)이 있는 사람이라고 봤는데, 내 착각이었나?’
이제 FIFA U-20 대회까지는 고작 9개월밖에 시간이 없었다. 오솔도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었다.
‘다음번 소집에는 한번 면담을 신청해야겠어.’
* * *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 두 사람은 나란히 낙엽을 밟아갔다. 벌써 가을이고, 곧 있으면 겨울이다. 그때쯤이면 둘이 사귄 지도 햇수로 3년 차가 된다.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여민주의 스킨십이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원래도 스킨십을 상당히 좋아했었지만, 이번 생에서는 더 심해진 것 같아.’
그녀는 걷다가 장난스럽게 엉덩이를 토닥인다든지, 아니면 팔짱을 낀 채 바짝 붙어서 팔뚝에 뭉클한 감동을 전달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오솔은 속으로 애국가를 외며 팔자에도 없던 애국심을 불러일으켜야 했다. 그거로도 안 될 때는 불경을 외거나 찬송가를 읊었다.
그렇게 오솔이 저도 모르게 종교 대통합을 이루고 있는 사이 여민주의 집 앞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영주 형? 형이 여기서 왜 나와?”
“쩝. 솔이냐?”
슬럼프에 빠져있던 고영주가 여민국을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민국은 여기 없었다. 그는 지금 구단 숙소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고영주는 딱히 실망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냥 마음이 답답해서 발길 닿는 대로 걸었을 뿐, 반드시 여민국을 만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단다.
결국 꿩 대신 닭이라고 오솔이 대신 상담해주기로 했다.
“솔아. 잘 들어가고, 힘내!”
여민주는 고영주가 번듯이 서 있었음에도 오솔의 입술에 뽀뽀를 날리고 들어갔다. 아니, 본래라면 조금 더 진한 키스를 했을 것이니 그녀도 많이 자제한 셈이다.
“민국이 형이랑은 완전히 반대되는 성격이네.”
“그게 매력이죠.”
“뻔뻔한 게 둘이 아주 잘 맞겠다.”
“눈치 없는 훼방꾼을 위해 친히 상담까지 해주겠다는데, 지금 투덜대시는 겁니까?”
“……그냥 부러워서 한 마디 해봤어.”
“그렇게 본다고 해서 가지를 친다거나 할 일은 없으니 꿈 깨세요.”
“됐어. 지금 내 코가 석잔데 무슨 연애냐.”
오솔은 자판기에서 음료를 하나 뽑아서 건넸다.
“고맙다.”
“상담료 청구할 때 더할 거니까 마음껏 드세요. 2만 원만 받을게요. 참고로 안 주면 줄 때까지 찾아갑니다.”
“정말…… 고맙다.”
“그런데 무슨 고민이에요?”
“너도 알잖아. 내가 요즘 포지션 변경 때문에 힘든 거.”
“그러니까 그게 무슨 고민이냐고요, 하면 되지.”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잖아. 네가 내 처지였어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겠어?”
고영주는 오솔이 너무도 쉽게 말하자 괜히 울컥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놈과 무슨 상담이냐 싶어졌다. 그러나 고영주의 항변에도 오솔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제가 형의 처지였으면 어땠을 거 같아요?”
“너는 잘 적응했을 거라는 소리야? 민국이형처럼?”
“아니요. 저도 그렇게까지 다재다능하지는 못해요.”
“그럼 뭘…….”
“저 같았으면 포지션 변경 안 해요.”
“뭐?”
“뭐하러 꼬리 만 강아지처럼 도망갑니까? 경쟁에서 이기면 되죠. 경쟁자보다 제가 더 뛰어나다는 것만 보여주면 해결되는 일이잖아요.”
“…….”
“어때요, 참 쉽죠?”
“그래서 너도 지금 벤치에 있는 거냐?”
오솔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고영주는 움찔하며 가드를 올렸다.
“그건 실력에서 밀린 게 아니잖아요. 이게 무슨 삼국지 게임도 아니고, 정치력에서 밀린 건 논외로 합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잖아. 어차피 이 판에서는 지훈이 형 파벌에 속하지 않는 한 가망이 없어.”
고영주가 처음에 성지훈 패거리와 어울린 이유가 이것이었다. 애석하지만 지금 청소년 대표팀에서는 실력보다 인맥 그리고 정치가 더 중요했다.
“그래서 그 밑에 들어간다고 뭐 달라졌어요? 도대체가 경쟁자 밑으로 알아서 들어가면 어쩌자는 겁니까? 평생 백업이나 하겠다는 거랑 뭐가 달라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소꿉놀이하듯 친하게 지내자.’가 아니라 하나뿐인 자리를 두고 뺏고 빼앗기는 경쟁이야말로 프로 선수의 기본이자 정체성이었다.
꼬리를 만 강아지가 되느니 싸움에서 져서 떠나는 개가 되는 편이 낫다. 오솔이 마인드는 결국 이런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지훈이 형이잖아. 인맥도, 실력도 상대가 안 된다고.”
“제대로 붙어보긴 했어요? 제풀에 안 된다고 하기 전에, 형·동생하며 하하호호 하기 전에 말이에요.”
“…….”
“그런 사람은 내가 감독이었어도 안 뽑아요. 어떤 향상심도 없고, 승부욕도 부족하잖아요. 주전 경쟁조차 포기했는데 상대 선수와는 어떻게 붙겠어요?”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있었지만 오솔도 답답했다. 자신의 처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게 봐야 했다. 당장 청소년 대표가 끝이 아니었다.
지금은 비록 주전 경쟁에서 밀려났다고 해도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나는 알고 있지. 성지훈은 자만해서 고꾸라지고, 영주 형은 그럭저럭 유럽 무대에서 뛰게 되지.’
비록 4대 리그는 아니었으나 고영주는 미래에 포르투갈 리그에서 한동안 활약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지금처럼 한참 성장할 나이에 주춤하지만 않는다면 어쩌면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확신에 찰 수 있는지 모르겠다. 정말 부러워.”
“형이 가진 무기를 생각해요. 자신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는 플레이를 하란 말이에요. 그렇게 하다 보면 슬럼프는 자연스럽게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
‘나만의 무기라…….’
오솔은 생각에 빠진 고영주를 뒤로 하고 상태창을 떠올렸다. 지난 1년 사이에 레벨은 고작 두 계단만 올랐다. 레벨이 오를수록 필요한 경험치는 더 많아졌고, 이제는 고교대회 정도로 얻는 경험치로는 레벨을 올리기 너무 힘들었다.
-오솔(오른발잡이, 왼발 숙련도 23%)
-신체 : 균형감각 67/ 힘 73(+5)/ 반응속도 64/ 순간속도 61/ 주력 70(35.2%↓)/ 점프력 55/ 지구력 90(23.3%↓)/ 강인함 90(+5)
-기술 : 개인기 41/ 드리블 39/ 볼터치 45/ 슈팅 47/ 패스 41(15%↓)/ 헤딩 56(13.2%↓)/ 스로인 15/ 태클 34/ 일대일 마크 35
레벨이 오르면서 얻은 6개의 포인트는 헤딩과 점프에 3개씩 투자했다. 덕분에 한층 더 강력해진 헤딩을 선보일 수 있었다.
그외에 눈에 띄는 부분은 헤딩과 패스의 페널티가 크게 줄었다는 점이다. 헤딩 같은 경우야 포인트를 투자하기도 했고, 허슬 플레이를 하면서 극복할 수 있었지만, 패스는 전혀 의외의 포인트에서 크게 감소했다.
바로 우주원과 호흡을 맞추면서 줄어든 것이다. 그날 친해진 후 단번에 5%정도 줄었으니, 그야말로 경천동지할만한 변화였다.
더불어 발에 땀이 나도록 달리고 부지런히 돌아다닌 덕분에 주력과 지구력에 걸려있던 페널티도 큰 폭으로 줄어 있었다. 이제는 페널티를 감안해도 프로 선수 수준은 되었으니, 마냥 느리다고 할 수도 없었다.
아! 그리고 절대 놓쳐서는 안 될 한 가지 변화가 더 있었다.
-‘게으른 천재가 진짜 천재지.’ 연습으로 얻을 수 있는 경험치가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이제 축구는 재미없어졌어. 다 돈 때문에 하는 거지.’ 시합으로 얻을 수 있는 경험치가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바로 이 스킬 설명문이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글씨의 투명도가 높아지는 느낌이랄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머지않아 사라질 것 같았다.
‘열심히 연습한 덕분일까?’
회귀 이후 연습도 꾸준히 했고, 이전과 달리 축구하는 것도 즐거웠다. 지금 오솔은 페널티 구성 요건과 정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었다.
* * *
2004년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돌아오는 2005년, FIFA U-20 대회를 준비하는 청소년 대표팀의 1차 소집이 있었다.
K리그 화이트 타이거즈(금백호, 金白虎)에 입단한 성지훈, FC 나인 테일드 폭스에 입단한 고영주 그리고 FC 도깨비(Goblin)의 여민국까지 K리그의 예비 스타들이 입장했다.
더 이상 앳된 선수들이 아니었다.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에는 대표팀 선수라는 자부심이 강하게 느껴졌다.
스포츠 기자들은 그 모습을 정신없이 카메라에 담아냈다. 그중 백미는 K리그 사상 최고 이적료를 기록하며 입단한 성지훈이었다. 옅은 미소와 얼마든지 찍으라는 듯한 느긋한 발걸음에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반면 오솔의 등장은 다소 초라했다. 정장이 없어서 입고 있는 것은 선수단에서 나눠준 바람막이가 전부였고, 신발도 다 낡아빠진 것이었다.
“뭐야. 어떻게 찍으라고 저렇게 하고 오는 거냐?”
“놔둬. 아직 어리잖아.”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기본 예의라는 게 있는 건데…….”
수군거리며 카메라를 내리는 기자들 틈에서 오직 한 사람만은 셔터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남자 선배들이 즐비한 이곳 스포츠 분야에서 벌써 3년째 현장에서 뛰고 있는 여자 기자, 이유리였다.
그녀는 KBC 스포츠국에 있는 11명의 기자 중 유일한 여성 기자였다. 그녀에게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여자로서 스포츠 기자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여성의 섬세함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극한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유일한 여성 지원자인 만큼, 그녀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오솔에게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기자들이 이렇게 많으면 긴장할 법도 한데, 오히려 시큰둥한 표정이네?’
게다가 부실한 옷차림을 했음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예의 운운하며 손가락질하는 기자를 봤음에도 콧방귀를 살짝 뀔 뿐, 미동조차 없었다. 마치 너 같은 쓰레기 기자는 질리도록 봤다는 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