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021화
5장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라
협회에서 선수를 찾을 이유는 많지 않았다.
“내년에 있을 19세 이하 AFC 축구 선수권 대회에 네가 참가할 수 있을지 물어보더구나.”
여기서 AFC는 아시아 축구 연맹을 의미했다. 즉 협회에서 오솔을 청소년 대표로 뽑고 싶다고 말한 것이다.
“경기를 보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나이가 어려서 걱정하고 있더라.”
2004년에 있을 AFC U-19 축구 선수권 대회는 아시아 전역에서 총 46개국이 참가하여 16개 팀을 뽑아 본선을 치른다. 여기서 19세라는 제한은 만 나이를 의미했다. 보다 정확한 규정은 만 15세 이상 19세 이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에서 제한에 딱 맞춰서 만 19세의 선수들을 선발하곤 했다. 이 나이 때에는 한 살만 지나도 큰 격차를 보이기 때문이다.
AFC U-19 대회는 내년에 있었으니 지금은 만 18세인 선수-고등학교 3학년-들을 주축으로 삼는 추세였다. 당연히 2살이나 더 어린 오솔을 뽑는 건 여러모로 모험에 가까운 짓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는데요?”
“뭐라고 하긴, 경기 안 봤냐고 물어봤지.”
이탁수 감독은 그 말과 함께 악동처럼 웃었다. 오솔은 3~4일 간격으로 치러진 토너먼트를 결승까지 풀타임 출장했다. 체력적인 면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솔이는 웬만한 성인 선수들보다 체력이 강하다. 2년 선배들이랑 붙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어.’
협회 관계자는 이탁수 감독의 확신에 강한 인상을 받고 돌아갔다. 나중에 정식으로 공문을 보내겠다는 말과 함께.
‘청소년 대표팀이라니…….’
오솔은 얼떨떨한 얼굴로 서서 두 눈을 끔뻑였다. 전생에서도 뽑히지 못했던 청소년 대표팀 소집을 페널티가 범벅인 2회 차에 들어가게 되다니, 믿기 힘들었다.
전생에서는 2학년이 되어서야 주전으로 뛰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는데, 이때는 이미 청소년 대표로 선발되기 늦은 시기였다. AFC U-19 축구 선수권 대회는 9월 말에 개최되기 때문이다.
이 대회에서 한국 청소년 대표팀은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오솔은 한 번도 소집 요청을 받지 못했었다. 청소년 대표팀은 새로운 멤버를 들이는 대신 기존의 우승 멤버를 유지하며 조직력을 다지는 선택을 했다.
마침 이탁수 감독도 비슷한 얘길 꺼냈다.
“알고 있지? 19세 이하 AFC 대회에서 우승하면 내후년에 있을 FIFA 대회 본선에 갈수 있다는 거.”
오솔의 두 눈에 욕심이 가득 깃들었다. 20세 이하의 FIFA 월드컵이라면 이 나이 때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유일한 대회였다.
‘다이아몬드 원석을 찾으려는 스카우트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오겠지.’
이번 대회는 특히 더 심할 것이다. 아르헨티나에서 ‘그’ 선수가 나올 테니까.
전 세계 유망주 1위, 차후 신계에 올랐다고 평가받는 선수이자 살아있는 전설.
리오넬 메시 (Lionel Messi).
메시 역시 이 대회에서 87년생의 어린 나이로 출전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나라고 못하란 법은 없지.’
* * *
오솔은 적당히 먹다가 회식자리를 빠져나왔다. 여름이 코앞까지 다가와서 그런지 저녁이 늦었음에도 그리 춥지 않았다.
‘청소년 대표팀에 소집되면 2주 정도는 집을 떠나야 하는데, 괜찮을까?’
오솔은 이번에 전국대회를 하기 전, 엄마와 여동생에게 축구를 한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다만 아버지에게는 의도적으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지난번 생과 같은 일이 반복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긴, 원체 자식들한테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 상관없겠지.’
이번에도 대회 때문에 집을 2주간 떠나 있었는데,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오솔은 아버지를 떠올리자 괜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덕분에 걸음걸이가 조금 빨라졌고, 약속 장소에 금방 도달할 수 있었다.
“솔아!”
오솔은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저 멀리서 여민주가 마주 웃고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녀에게는 근심·걱정을 지워주는 초능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야. 나도 방금 나왔어.”
오솔은 여민주와 함께 공원을 걸었다. 그녀와 함께라면 가로등불에 꼬인 날파리마저 별빛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다. 향기를 쫓아 옆을 보니 앙증맞은 정수리가 보였다.
왜 사람 머리에서 꽃향기가 날까? 이 아이는 살아있는 꽃이라도 되는 걸까?
“대회도 우승하고, 득점왕에 기사까지 났네. 이제 인기 많아지는 거 아니야?”
“인기? 딱 한 번만이라도 그래 봤으면 좋겠다. 고영주는 벌써 팬클럽도 있는 거 같던데.”
“난 그 사람 비리비리해서 싫던데, 그리고 너도 곧 그렇게 될 거야. 부러워할 것 없어. 그것보다 인기 많아졌다고 나중에 한눈팔면 안 된다!”
“걱정 마. 그럴 일 없어.”
오솔의 대답에는 영 힘이 없었다. 연인에게 사랑을 약속을 하는 말투도, 그렇다고 안심시키고자 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것은 흡사 미래를 알고 있는 자의 우울감에 가까웠다.
‘빌어먹을 외모 지상주의!’
오솔은 혹여 놓칠세라 여민주의 손을 꼭 잡았다. 여민주는 아까보다 더 환히 웃으며 그의 두꺼운 팔뚝에 머리를 기댔다.
* * *
무더위가 한 풀 꺾인 9월의 어느 날.
오솔과 여민국은 나란히 서서 파주 NFC(National Football Center, 축구국가대표팀 트레이닝 센터)에 들어섰다. 재밌게도 나이가 더 많은 여민국은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고, 반대로 오솔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여전히 시설이 좋네. 아니, 여전히가 아니라 이때부터라고 해야 하나?’
“우와!”
여민국의 입은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하더니, 천연잔디로 된 6개의 축구장을 보곤 더 벌어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여기서 훈련을 받나봐. 시설 좀 봐. 진짜 좋다.”
그는 잔디구장에서 연습할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잔뜩 신이나 보였다. 그에 반해 오솔은 별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내부로 향했다. 안내를 맡은 직원은 두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곤 방으로 안내했다. 같은 학교임을 배려했는지 둘이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오솔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그나마 다행이군. 따로 애송이들 비위를 맞춰줄 필요는 없겠어.’
두 사람은 간단히 짐을 풀고 강의실로 향했다. 제법 서둘렀음에도 이미 반 이상이 도착해 있었다.
앞줄에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고영주의 모습이 보였다. 연령대별 대표팀에서 빠진 적이 없다더니 안면이 있는 선수가 많은 듯했다.
반면 오솔과 여민국은 이번이 첫 소집이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두 사람은 별 수 없이 남들과 조금 떨어져 앉았다.
달칵!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와 이어지는 구둣발 소리에 웅성임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양복을 차려입은 평균 정도의 신장을 가진 마른 남자가 정면에 섰다. 그러자 강의실은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모두 반갑다. 나는 19세 이하 대표팀을 맡은 최주혁이라고 한다. 편하게 감독님이라고 부르면 된다. 이 중에는 이전부터 날 아는 이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이번이 처음인 선수도 있을 것이다.”
최주혁 감독의 시선이 고영주 쪽과 오솔 쪽을 천천히 오갔다.
“앞으로 2주 동안 체력과 기술, 전술 훈련과 실전 연습을 할 예정이니 잘 배우고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길 바란다. 참, 우리가 뭘 목표로 하는지 먼저 알려주마.”
감독은 목표를 언급하며 살짝 표정을 굳혔다. 덕분에 원래도 진지했던 인상이 한층 더 진중해졌다.
“우리의 목표는 내년에 있을 AFC U-19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 그리고 내후년에 있을 FIFA U-20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다.”
다소 비현실적인 목표에 막 모인 선수단이 웅성거렸다. 아니, 정확히는 새롭게 합류한 선수들만 어수선한 모습을 보였고, 기존의 멤버들은 익히 알고 있다는 듯 감독의 포부를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축구 교실처럼 하하호호 훈련하는 날은 많지 않을 거다. 난 이기기 위해 훈련할 것이고,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한 선수에게 다음은 없다.”
초장부터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새로 소집된 선수 대부분이 바짝 긴장한 채 각을 잡고 앉아있었다. 늘어져라 하품을 하는 오솔을 제외하면 말이다.
‘음? 저 녀석은?’
감독이 바라보자 오솔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하품을 한 건 미안했지만 이건 엄연히 생리현상이었고, 소리도 안 냈고, 입도 가렸으니 나름 예의는 다 차렸다.
‘오솔이라고 했던가? 고작 16세의 나이로 고교 득점왕에 오른…… 생각보다 평온한 얼굴이군.’
아니, 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온몸에서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요즘 애들은 겁이 없다고 하더니. 두 살 차이고 뭐고, 이길 수 있다는 건가?’
감독은 대단한 패기라고 생각하며 시선을 거뒀다. 그는 짧게 박수를 쳐서 분위기를 전환했다.
“자! 이제 짐 좀 풀다가 저녁을 먹도록 해라. 이동하느라 힘들었을 테니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아침부터 훈련을 진행하겠다.”
감독은 밥 이야기를 꺼내며 처음으로 웃었다. 푸근한 미소가 보는 사람까지 편안하게 했다. 할 땐 하고 쉴 땐 쉬는 스타일 같았다.
감독이 나가고 선수들도 하나둘씩 자신들의 방에 돌아갔다. 그들을 따라 오솔과 여민국도 방으로 가려할 때였다.
“너희들 청송고 맞지? 이번에 우승한.”
오솔이 돌아보니 네 명의 선수가 나란히 서 있었다. 거만한 표정과 팔짱이 너무 대놓고 악당임을 표시하는 것 같아서 당혹스러웠다.
‘일전에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거 같은데?’
오솔은 기시감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대는 그걸 달리 이해했는지 자신의 소개를 시작했다.
“반갑다. 영신고의 성지훈이다.”
놈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여민국은 아는 이름인지 ‘아!’라며 감탄사를 뱉었다.
영신고의 성지훈.
이 이름은 오솔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이번에 우리 학교를 결승에서 아주 뭉개버렸다면서?”
전국대회 결승에서 만난 그 팀이 영신고였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없었다.
“흐흐. 하필이면 내가 없을 때를 잘 골랐더라? 영국 유학만 아니었어도 내가 상대해줬을 텐데 말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고교시절 영국에서 1년 간 축구 유학을 했다는 건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성지훈은 FC 화랑 워리어스의 유스팀에 소속된 선수였는데, 영국 유학 역시 프로 구단에서 지원을 해준 돈으로 갔었다. 약 1년에 이르는 기간을 구단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차후 성지훈이 프로에 입단할 나이가 되었을 때 FC 화랑 워리어스와 우선적으로 협상할 수 있는 권리를 받는 거래가 있었다.
‘하지만 결국엔 다른 곳에 입단했지.’
졸업 후, 성지훈은 FC 화랑 워리어스가 아닌 다른 팀으로 갔고, 이를 두고 계약 위반이다, 아니다 말이 많았다.
여러 논란이 있었으나 K리그에서는 우선협상권이 법적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점과 그가 아직 자유계약 신분이라는 점을 들어 ‘법적인 문제는 없다.’는 결론이 났다.
그러나 도의적인 책임까지 없다곤 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사건이 드래프트제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었다.
대형 신인, 성지훈의 이적을 두고 벌어진 영입 전쟁은 K리그 모든 구단이 얽혀있었고, 그 과정에서 그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뛰게 되었다.
이후 과열된 이적 시장에 부담감을 느낀 K리그 구단들은 프로축구연맹과 논의 끝에 드래프트제를 부활시키게 된다.
선수 영입에 드는 돈을 담합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사실 이런 결론이 나온 이면에는 오솔의 존재도 크게 작용했다.
이미 성지훈으로 한번 홍역을 치른 구단들은 또 다른 대형 유망주, 오솔을 누가 갖던지 되도록 싼 가격에 영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누구 한 선수의 잘못이라기 보단 연맹과 K리그 구단들이 생떼를 부린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