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018화 (18/213)

 # 18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018화

“……정말 기가 찬다.”

“예?”

“내가 널 왜 교체했을까? 방금 네가 한 말에 답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지 않니? 아니, 반대로 묻고 싶구나. 넌 무엇 때문에 뛰고 있는 거냐?”

“전…….”

“한 줄 적어 넣을 소개글과 대학교 추천장 때문이지?”

지금 이탁수의 눈동자에는 제자를 향한 애정 대신 경멸이 가득 담겨있었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덕분에 불같이 화를 내진 않았지만, 그 대신 까맣게 타고 남은 감정의 찌꺼기가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익!”

최도영은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평소 우습게 여기던 감독에게 무시의 눈길을 받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그러나 들끓는 속마음과 달리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스승에 대한 예의로?

설마, 그딴 건 없었다. 단지…….

‘빌어먹을 왜 저렇게 보는 거야?’

그래, 저 눈이다.

이탁수 감독의 두 눈.

그곳에는 어느덧 경멸이 아닌 다른 것이 서려있었다.

현실의 벽 때문에 신념이 무너졌을 때의 심정, 구겨진 자존심과 불현듯 찾아온 자괴감 그리고 더 날아오를 수 있음에도 문턱에서 주저앉아야 했던 제자들에 대한 미안함까지…….

정말이지 많은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물론 최도영은 이탁수 감독의 심정 같은 건 알지 못했다. 다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에 눌려 그 지랄 맞은 성질을 꾹 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이탁수 감독은 곧 모든 감정을 수습할 수 있었다.

“다시는 내 앞에서 징징거리지 마라. 그렇게만 하면 네가 그렇게도 원하는 추천장, 얼마든지 써줄 테니까.”

“…….”

“원래 선수기용은 감독의 전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네가 멋대로 자신하고 결정하지 마라. 선발 원칙이 뭐냐고? 다른 건 몰라도 승리에 관심 없는 선수는 뽑을 생각 없다. 그러니 기대하지 마라.”

재능만 넘친다고 해서 그 선수가 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극단적인 비유였지만 감독과 틀어져서 태업을 벌이는 경우도 있고, 없어져야 할 일이지만 승부조작에 가담해서 원하는 결과에 맞춰 뛰는 선수도 있었다.

이탁수가 느끼기에 최도영이 하는 짓은 위에 서술한 이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연습 경기이지만 전국대회 본선 진출을 가늠할 수 있는 경기다. 설렁설렁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 감독은 잔뜩 얼어있는 최도영을 그대로 버려두고 벤치로 돌아왔다. 황량한 흙바닥에 오래된 교실 의자가 몇 개 놓여있다. 어설프게 마련된 벤치였으나 그 앞에서 서자 미소가 흘러나왔다. 이곳은 자신에게 단순한 직업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졌지만 잘 싸웠다 같은 건 없어. 내게 좋은 경기는 이긴 경기뿐이다.’

그는 의자 앞에 서서 준비운동에 한참인 선수들을 바라봤다. 크게 소리를 지르며 호흡을 맞추는 제자들의 모습에 그제야 팔에 힘이 빠졌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악바리 근성을 보여줘라, 얘들아.’

마침 전장에 선 투사들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솔은 이승훈과 공을 주고받으며 말했다.

“후반전에는 어떻게든 한 방 먹여주자.”

“알았으니까 인상 좀 풀어라. 누가 보면 진짜 때리겠다는 뜻으로 알겠다.”

“그것도 좀 땡기네.”

“……뭐라고 농담을 못하겠네.”

“농담한 거야.”

“농담이면 좀 웃으면서 하라고!”

오솔은 이승훈의 충고를 받아들여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자, 농담 받아라.

“아무튼 골(Goal)을 때려 넣든 골(骨)을 쪼개 놓든 둘 중 하나는 해야겠어. 흐흐.”

“이런 살벌한 놈…….”

이승훈은 한층 살벌해진 농담에 질색했다.

삑!

“자, 선수들 모이세요!”

양 팀 선수들은 심판의 지시에 따라 포메이션을 맞춰 섰다. 청송고의 선 공격이었다. 오솔과 이승훈은 킥오프를 위해 센터 서클에 들어섰다.

고영주는 건너편에서 그 모습을 발견하고 놀란 듯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뭐야? 너 수비수 아니었냐?”

“때로는 중앙 수비수, 때로는 전담 마크맨, 하지만 내 진짜 정체는…….”

“설마 큐티 허니?”

“정답! 이 아니고, 최전방 공격수다.”

이승훈은 두 사람의 만담에 정신이 어질어질해졌다.

‘젠장. 갑자기 나란히 서 있는 게 무지 쪽팔리기 시작했다.’

삐익!

다행히 경기는 곧장 시작됐다.

오솔은 시작 전 장난스럽던 모습은 모두 날려버리고 무시무시한 얼굴로 전방으로 달려 나갔다.

짧은 시간에 집중력을 끌어올렸는지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모습이었다.

고영주는 재빨리 경고를 날렸다.

“조심해요! 이 녀석 보기보다 힘이 세요!”

“보기에도 충분히 세보여!”

백운고 선수들은 고영주의 경고에 맞춰 오솔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제법 덩치가 큰 중앙 수비수 두 사람이 좌우에서 어깨를 맞대자 묵직한 중량감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순간적이나마 오솔의 움직임을 거슬리게 할 정도는 되었다. 안 그래도 발이 느려진 상황이었기에 개인 돌파는 요원해 보였다.

‘이거 정말 쉽지 않겠네. 중앙이 꽤나 두터워.’

수비수 두 사람을 등지고 정면을 보니 두 명의 미드필더가 경호원처럼 서 있는 게 보였다. 위에서 보면 두 명의 중앙 수비수와 두 명의 중앙 미드필더가 사대천왕처럼 서서 네모난 박스를 형성하고 있었다.

오솔은 그 안에 꼼짝없이 갇힌 형국이었다. 혹시나 공이 오더라도 말 그대로 사방에서 압박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안타깝지만 그의 현재 테크닉으로는 그들의 압박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이걸 어떻게 한다?’

개인기가 부족한 공격수도 나름의 생존법이 있다. 특히 오솔처럼 체격이 좋고 키가 큰 선수는 상대가 압박을 가하기도 전에 사이드에서 올라오는 크로스를 헤딩이나 발리슛으로 처리해서 공격을 마무리하면 된다.

‘하지만 헤딩은 확률이 많이 떨어져. 발리도 제대로 차기에는 개인기 수치가 너무 낮아.’

이럴 때는 의외성을 띤 플레이로 극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솔아!”

때마침 그를 찾는 목소리가 있었다. 황태곤이었다. 그는 측면에서 중앙으로 공을 몰고 오다가 대각선의 오솔에게 패스했다. 입부 테스트 때 오솔을 앞장서서 왕따를 시켰던 것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든 플레이였다.

‘좋아. 일단은…….’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패스는 오솔의 좌측면으로 굴러왔다.

공을 잡으러 이동하자 순간적으로 세 사람이 달라붙었다. 황태곤을 쫓아오던 측면 미드필더와 중앙 미드필더 그리고 중앙 수비수였다.

오솔은 순식간에 짓쳐들어오는 선수들을 보면서도 여유로웠다. 다년간의 경험과 아직까지 남아있는 일말의 뻔뻔함 덕분이었다.

‘원래 공격하다 보면 10번 중에 5번은 뺏기고, 2번은 슈팅이 빗나가게 되어있어.’

나머지 3번은 유효 슈팅을, 그중에 한둘 정도는 골로 연결된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공격을 실패하는 건 꽤나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물론 기회를 함부로 날려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반대로 ‘잘해야 돼!’라며 부담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솔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 몰라. 쓰벌!’

오솔은 공을 받는 척 흘리며 자연스럽게 몸을 180도 틀었다. 앞선 연기가 자연스러울수록 상대를 속이기 쉬운 보디 페인팅이었다.

‘헛! 여기서 돈다고?’

뒤에서 따라오던 수비수는 그만 깜빡 속고 말았다. 앞서 부딪혔던 오솔의 파워가 뇌리에 깊이 박힌 탓에 접근하면서 저도 모르게 몸싸움을 대비한 탓이었다.

사실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오솔의 개인기만 아니었다면 잠깐 버티는 사이 협력 수비로 공을 쉽게 뺏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몸에 힘을 잔뜩 주고 있으면 상대의 재빠른 방향전환에 대처할 수 없다는 단점이 생기고 만다.

‘이, 이런…….’

수비수가 급히 옷을 잡아당겼으나 오솔을 막기에는 너무도 미약한 움직임이었다.

“놔라. 여자 친구 있다.”

수비수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번 농담도 별로였나 보다.

오솔은 아무런 저항감 없이 페널티 에어리어로 진입했다. 옷이 길게 늘어났음에도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수비수는 판단을 잘못했다. 그를 막을 거였으면 아예 손을 쓰거나 다리를 걸었어야 했다. 덕분에 오솔에게 자유가 주어졌다. 1초 남짓한 아주 잠깐의 노마크 찬스가.

‘선택을 주저해선 일류가 될 수 없지!’

오솔은 주저 없이 슈팅을 시도했다.

발을 크게 휘두를 만한 여유는 없었다. 달리면서 차는, 드리블 자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슈팅 자세였다. 나쁘지 않았다. 파워는 좀 부족하겠지만 슈팅 타이밍을 속이기에는 좋았다.

뻥!

공은 높이 뜨지 않았다. 그러나 코스가 좋았다. 먼 쪽 골대를 향해 빠르게 굴러갔다. 골키퍼가 막기 어려운 공이었다.

팅!

‘이런 빌어먹을!’

또 골대에 맞았다. 골대를 맑게 울린 공은 왔던 곳을 그대로 거슬러 왔다.

오솔은 연어를 잡으러 강물에 뛰어드는 알래스카 불곰처럼 공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살짝 뜬 공, 걷어내기 위해 발을 갖다 대는 수비수, 엎어진 자세를 바로잡는 골키퍼의 모습이 차례대로 눈에 들어왔다.

시선은 다시 수비수에게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의 다리 그리고 축구화를 향했다. 축구화 밑바닥, 흙먼지가 묻어 지저분한 스터드가 유독 크게 보였다.

이게 왜 이리 크게 보일까?

‘난 왜 또 몸을 날린 거냐?’

오솔은 스터드에서 다시 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공은 어느새 코앞에 있었다.

우당탕!

공을 향해 몸을 날린 두 사람이 무섭게 엉켜 들었다.

공은…….

공은 터치라인을 넘어가 있었다. 코너킥…… 아니, 골킥인가?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청송고 선수들, 가까이에 있는 백운고 선수들과 이탁수 감독까지 오솔에게 달려갔다.

‘치명적인 부상! 이후 오솔은 2년의 재활을 거쳤으나…… 에이, 재미없다.’

오솔은 멀쩡한 얼굴로 일어났다. 눈썹 위로 살짝 긁힌 자국이 나있었지만 비교적 양호했다. 모두 마지막 순간 백운고 수비수가 발을 뺀 덕분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스터드에 긁혔는데 피부만 까졌다니…… 실로 태노쓰급 육신이었다.

‘이럴 땐 나도 내가 무섭구나. 후우. 이제 6개의 보석만 찾으러 가면 되는 건가? 아니, 회귀했으니 타임 트래블 젬은 이미 있는 건가?’

놀란 가슴을 농담으로 가라앉히는 사이, 반가운 소식이 하나 더 들려왔다.

-‘모난 머리가 공 맞는다.’에 변동이 생깁니다. 헤딩이 42% 확률로 부정확해집니다.

헤딩에 걸려있던 페널티가 한번에 5%나 줄어들었다.

‘설마 몸을 아끼지 않는 플레이를 펼쳐서 올라간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이런 페널티가 생긴 것도 따지고 보면 전생에 헤딩을 기피한 탓이 아니었던가.

‘그렇다고 해도 단번에 5%라니, 설마 위험도에 따라서 변동이 더 커지나?’

확실히 방금은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심하면 두개골 골절도 올 수 있었고, 눈 쪽에 부딪쳤으면 실명이나 시력 저하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이래서야 방법을 알았다고 해도 자주 써먹긴 힘들겠군.’

아쉽지만 오솔에게는 몸이 곧 재산이었다. 나중에 여민주와 알콩달콩 살려면 오래오래 건강해야 했다.

그때 이탁수 감독이 다가와 눈앞에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솔아. 괜찮아? 어때, 잘 보여? 이게 몇 개 같냐?”

“손가락을 그렇게 피니까 꼭 닭발 같네요.”

“뭐?”

“세 개라고요. 아주 잘 보이니까 걱정 마세요. 저는 멀쩡합니다.”

“휴. 조심해 이놈아!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간이요? 맞다. 감독님, 술 끊으세요. 영은 쌤은 술 취한 남자, 별로 안 좋아합니다.”

“뭐, 뭣?”

이탁수 감독은 갑자기 거론된 김영은 선생의 이름에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천기누설을 조금만 더 하자면, 고백할 때는 무조건 제정신에 하세요. 술기운에 질렀다간 두고두고 고생하실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냐?”

“아무튼 전 괜찮으니까 빨리 나가보세요. 감독이 필드에 너무 오래 들어와 있는 거 아니에요.”

오솔은 기껏 걱정돼서 들어온 이탁수 감독을 도로 쫓아냈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