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017화
‘고영주를 이렇게 자유롭게 놔둬서는 이길 수 없어.’
게다가 수비진에서도 비효율이 생긴다. 여민국과 오솔을 포함한 세 명의 수비수가 겨우 한 명의 공격수만 마크하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올라가야 하지?’
역시나 문제는 오솔이었다. 고영주를 일대일로 마크하려면 그만한 속도와 스킬을 두루 갖춰야 하는데 당장은 여민국밖에 대안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올라가면 수비진에는 오솔과 3학년 수비수 둘만 남는다. 오솔은 아직 판단력이 형편없었고, 다른 수비수 역시 누군가를 리드한 적이 없었다.
‘솔이를 빼고 수비수나 수비형 미드필더를 넣어야 하는데.’
하지만 경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36분이었다. 벌써 누군가를 교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선수의 부족한 실력도 문제였지만 아무런 대책 없이 기용한 감독의 잘못도 지적받게 된다. 교체는 할 수 없었다.
‘과연 둘이서 할 수 있을까?’
오솔과 동료 수비수가 나란히 선 모습이 영 불안했다.
“올라간다!”
다급한 경고 덕분에 길게 생각할 틈도 없었다. 전방을 살펴보니 고영주가 공을 몰고 올라오는 게 보였다. 여민국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솔아, 여기서 수비하고 있어.”
여민국은 아예 오솔을 배제하고 혼자서 고영주를 막아섰다. 만약 여기서 자신이 뚫린다면 또다시 골이 들어갈 것이다.
‘내가 막아야 해!’
뒤가 없다는 생각에 여민국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이번에는 아까 당했던 것처럼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행히 그와 고영주 사이를 가로막는 장해물도 없었다.
아까는 오솔에게 막혀 태클 타이밍을 뻔히 보고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대가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몸을 날려서 태클을 할 생각이었다.
고영주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히죽거렸다.
“드디어 형이랑 일대일로 붙게 됐네요.”
“너무 웃지 마라. 징그럽다.”
“너무하네. 이 웃음을 좋아하는 소녀 팬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고영주는 그 말과 함께 헛다리를 짚으며 상대를 현혹시키려 했다. 좌우로 빠르게 오가는 두 다리는 일전에 안수찬 사장의 부실한 스텝 오버와 차원을 달리했다.
‘왜 수비수가 됐는지 모르겠지만 겨우 2년 훈련한 걸로 저를 이길 수는 없다고요, 형.’
탓!
고영주는 여민국의 중심이 한쪽으로 향했다고 느끼고 칼을 빼들었다. 한 호흡이 지나기도 전에 공과 몸이 동시에 앞으로 나갔다.
공은 너무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고영주를 따라갔다. 놀라운 드리블 실력이었다. 하지만…….
‘지금!’
여민국은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기합소리를 속으로 삼키며 몸을 날렸다. 풀떼기 하나 없는 흙바닥을 길고 탄탄한 다리가 빠르게 가로질렀다.
고영주의 몸에 딱 붙었다고 느껴졌던 공이 쏙 하고 빠져나왔다. 고영주는 여민국의 허벅지에 발이 걸려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쿠당탕!
공은 다시 청송고 소유가 되었고, 여민국과 고영주는 사이좋게 흙투성이가 되었다.
“퉤퉤. 아우. 설마 거기서 태클이 들어올 줄이야.”
“지금까지 너무 편하게 축구했다 싶지?”
“형이 비정상인 거예요. 이런 곳에서 슬라이딩 태클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것도 연습 경기에서…….”
고영주는 생각했다. 이번에는 여민국의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 플레이 덕분에 막히고 말았다고. 그러나 그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여민국이 상대에게 속은 척 페인트를 넣었다는 점이다.
보통 공격수와 수비수가 일대일로 붙게 되면 공격수가 상대를 속이기 위해 애를 쓴다. 반면 수비수는 가만히만 있어도 동료가 도와주러 오기 때문에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상대를 저지하고 패스를 뒤로 돌리게 하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수비수도 상대를 속일 때가 있었다. 한쪽으로 상대의 공격을 유도하면 그만큼 다음 동작을 예측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여민국은 공격수 출신이라 그런지 수비할 때 가만히 기다리기보다는 이런 식의 페인트를 먼저 걸어서 상대의 플레이를 유도하는 걸 더 좋아했다.
이는 고등학교 레벨에서는 쉽게 구사하기 힘든 수비 방법이었고, 덕분에 여민국은 짧은 수비 경력에도 불구하고 도에서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물론 여민국이 수비로 전환한 후 처음 붙게 된 고영주는 아직 모르는 사실이었다.
“연습 시합도 시합이야. 살살할 생각은 없다.”
고영주에겐 안타깝게도 여민국의 승부욕은 이제 막 불이 붙었을 뿐이었다. 이후 여민국은 고영주의 전담 마크맨이 되어 운동장을 누볐다.
고영주가 공격형 미드필더 위치에서 많이 활동했기에 여민국도 자연스럽게 수비형 미드필더처럼 움직였다.
오솔은 한참 뒤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나도 공격수로 뛰고 싶다.”
불끈 욕망이 샘솟았다. 공격수로 뛰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수비수로 뛰는 게 도움이 된다는 건 알겠다. 실제로 많은 것을 느끼고 페널티도 많이 줄어들었으니까. 그러나 역시 자신은 공격수가 아니면 안 됐다.
거대한 벽을 억지로 뚫어내고 좁은 틈을 찾아 골을 넣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역할이요, 사명이었다.
삐익!
여민국의 놀라운 수비 덕분에 전반전을 1 대 0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솔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공격수로 뛰지 못하는 상황이 답답했고, 벤치 주변에서 몸을 풀고 있는 선수들의 모습이 자신의 교체를 뜻하는 것 같아 아쉬웠다.
‘주전 수비수도 몸을 푸는구나, 쯧. 여기까지인가?’
처음부터 오래 뛸 거란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반쪽짜리 수비수였으니까. 먹히면 계속 쓰이고 아니면 교체되리라 예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나마 전반이라도 다 뛴 게 다행이었다.
‘그래도 조금 더 뛰고 싶다.’
한번 불붙은 의욕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옮겨 붙은 불길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지금의 상황에 대한 울화였는지 아니면 눈부시게 빛나는 두 청년에게서 옮겨 붙은 것인지. 한 가지 확실한 건 그의 심장이 계속 뛰려 한다는 사실이었다.
오솔의 눈빛을 읽었는지 이탁수 감독이 그를 따로 불러냈다.
“그래, 수비수로 뛰어보니 어떠냐?”
“동료들에게 미안했습니다.”
“그게 끝이냐?”
“그리고…… 분했습니다.”
이탁수 감독은 잠시 제자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됐다.”
교체인가 싶어 오솔의 고개가 툭 떨어진다.
“후반전에는 네가 어떤 선수인지 제대로 보여줘라.”
후반전에도 출장한다는 말에 숙였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막 오솔이 크게 대답하려는데, 이탁수 감독이 먼저 선수들에게 입을 열었다.
“후반전에는 선수 교체가 있다. 신입생들도 좀 뛰어 봐야지. 김태원, 이승훈, 황태곤이 들어가고 최도영…… 이 나온다. 포지션은.”
오솔이 최전방 원톱이었다. 우측 날개로 이승훈이, 그 밑을 받쳐주는 오른쪽 미드필더는 황태곤이다. 이승훈의 빠른 다리로 우측을 공략하고, 활동량이 좋은 황태곤이 공수에 걸쳐서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는 배치였다.
3학년 수비수 김태원은 오솔 대신 중앙 수비수로 들어가고, 원톱에 있던 최도영은 아웃이었다. 마지막으로 이탁수 감독은 여민국을 가리켰다.
“상대는 이제 4-5-1에 가깝다. 덕분에 우리도 4-3-3에 가깝게 변해버렸지. 주장은 이곳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서 지금까지처럼 고영주를 막는다. 그리고 상황을 봐서 공격에 가담해라. 고영주는 따라오지 않을 거다.”
고영주가 따라오지 않으면 공격에서 수적 우위에 서게 된다. 설혹 따라온다고 해도 상대 공격의 시작점을 뒤로 물리는 것이니 나쁘지 않았다.
물론 위험요소도 있었다. 고영주가 전방에 남아있고 상대가 수비에 성공한다면 그때는 비수처럼 날카로운 역습이 되돌아올 것이다.
“지금 우리는 한 골 지고 있다. 위험을 좀 감수하더라도 공격적으로 나서야 한다.”
새롭게 출진하는 선수들과 오솔, 여민국까지 모두가 열의에 가득 차 있었다. 그중 2, 3학년의 각오가 특히 대단했는데, 모두 지난해와 지지난해에 백운고에게 막혀 전국대회 본선 진출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다.
이탁수 감독은 선수들의 각오를 확인하고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라면 이런 방법은 쓰지 못했겠지만…….’
맞불을 놓으면 불길이 더 센 쪽이 다 잡아먹게 되어 있고, 서로 창을 내질러도 창이 긴 쪽에서 먼저 찌르게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청송고와 백운고의 싸움이 그러했다. 백운고가 딱 한 치 정도 더 강하다고 해야 할까?
‘백운고를 상대로 민국이를 공격적으로 돌리지 못한 이유지.’
청송고가 도내 1, 2위를 다툰 것은 모두 여민국 덕분이었다. 탄탄한 수비와 더불어 공격수 출신답게 적극적으로 공격에도 가담하는 플레이 스타일은 청송고의 전력을 몇 배나 증가시켰다.
그야말로 리베로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활약이었다.
덕분에 청송고는 백운고를 제외한 모든 팀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백운고를 상대로는 여민국을 앞으로 내보내지 못했다.
백운고의 공격력은 여민국이 수비에만 전념해야 겨우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몇 번 공격에 가담해 봤지만, 여민국이 빠지면 금방 실점의 위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이제는 붙어볼 만하다.’
오솔의 성장세가 뚜렷했다. 전생에 밥 먹고 축구만 한 사람처럼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었다.
덕분에 오솔의 등장으로 기존의 공격수-최도영-로는 불가능했던 폭발적인 공격이 가능해졌다.
이제 창의 길이는 대등하다고 할 수 있었다. 여기에 여민국까지 가담하면 상대보다 더 날카로운 창날을 보유하게 된다.
‘동시에 찌르면 누가 더 치명상을 입느냐의 싸움이 되겠지.’
이탁수 감독은 만약 이번 경기에서 유의미한 결과가 나온다면 당장 이번 해 전국대회에서 오솔과 여민국의 콤비로 본선 진출을 노릴 생각이었다.
* * *
하나 지금의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이도 있었다. 졸지에 1학년에게 제 포지션을 뺏긴 최도영이 그랬다.
‘진짜 날 뺀 거야? 아무리 연습 경기라고는 하지만 날 빼고 그 자리에 저 자식을 넣다니, 지금 제정신인가?’
전술 지시가 끝나고, 후반전에 교체 투입 될 선수들은 운동장에 나가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제는 한가해진 벤치, 최도영은 감독을 향해 인상을 썼다.
제법 도전적인 눈빛. 아니, 너른 마음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이탁수 감독이 보기에도 싸가지 없는 눈빛이었다.
“최도영, 할 말 있어?”
“……왜 절 교체했는지 모르겠네요. 바꿀 거면 차라리 저 쓸데없는 오솔이 놈을 바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음. 잠시 따라와라.”
이탁수 감독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팔짱을 꼈다. 그 권위적인 자세에서 최도영을 보는 시선이 영 곱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교체의 이유가 궁금하다고?”
“네, 아무리 연습 경기라고 해도 이건 아닙니다. 저는 주전이 보장되어야 하잖아요. 게다가 다른 놈이라면 모를까 제 자리에 1학년 나부랭이를 넣다니,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주전 보장이라…….”
이탁수 감독은 말을 끊고 잠시 감정을 추슬렀다. 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화가 치솟았지만 아직 어린 학생에게 감정을 그대로 내보일 수는 없었다.
“역시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네?”
“네가 훈련하는 모습을 보며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들으니 정말…….”
그러나 말을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참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