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016화
4장 좋은 경기는 이긴 경기뿐이지
‘엄청난 중량감이잖아? 어떻게 이렇게 꿈쩍도 안 하지?’
사실 오솔의 어설픈 실력으로는 공을 잡기 전에 가로채거나 깔끔한 태클로 걷어내는 건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피지컬을 이용한 강한 압박뿐이었다.
어찌 보면 고육지책에 불과한 수비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이게 먹혔다.
고영주는 오솔을 등진 상태에서 끝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측면 미드필더가 협력 수비를 위해 내려오기 전에 백패스를 보내는 게 최선이었다.
쿠웅!
고영주는 리턴패스를 생각하며 안쪽으로 파고들었으나 오솔에게 막혀 더는 들어갈 수 없었다.
오솔은 아예 공을 보는 걸 포기하고 고영주만 쫓아다녔다.
달릴 때는 무조건 어깨를 붙여서 속도를 내지 못하게 만들었고, 고영주가 공을 잡았을 땐 직접적으로 공을 노리는 태클보다는 몸싸움으로 균형을 잃게 만드는데 집중했다.
그렇게 고영주를 강풍에 휘청거리는 버드나무처럼 만들면 여민국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다가와 공만 쏙 빼갔다.
고영주는 은은히 아려오는 어깨를 만지며 여민국에게 물었다.
“아이고 아파라. 형, 이 터미네이터는 어디서 나타난 거예요?”
“글쎄…… 터미네이터니까 미래에서 왔겠지?”
여민국은 오솔이 뜨끔할만한 농담을 던지곤 중앙으로 빠졌다.
고영주는 놀라서 움찔거리는 근육을 풀어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힘에서 밀리니 상대하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확실히 컨디션이 90%로 올라온 오솔의 피지컬은 일개 고등학생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고영주가 오솔과 마주 선 상태에서 공략에 들어간다면 상황이 달라졌겠지만, 지금처럼 오솔을 등진 상태에서는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가 원톱이 아닌 투톱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도 포스트 플레이 능력이 다른 재주에 비해 많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야. 좀 살살 하자. 어차피 연습 게임이잖아. 나는 다치기 싫다고. 지금 다치면 여름에 있을 전국대회에 못 나간단 말이야.”
“지금 최대한 살살하고 있는 거야. 그 증거로 아직 네 유니폼이 멀쩡하잖아.”
자신이 진심으로 힘을 쓰면 너 같은 건 곧장 땅바닥에 처박힌단 뜻이었다.
“이거 살벌하네.”
“걱정 마. 살려는 드릴게.”
“더 무섭잖아!”
오솔은 아직은 자신만 아는 유행어를 던지고는 고영주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덕분에 백운고에서는 고영주에게 섣불리 패스를 보낼 수 없었다. 아직 초반이었으나 오솔의 존재감은 두드러졌다.
‘솔직히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두드러지는 스타일이지.’
이시기의 한국은 180㎝ 중반만 되어도 대형 공격수라고 말하는 실정이었다. 아직 고등학교 1학년인데 186㎝라는 건 이미 존재만으로 반칙에 가까웠다.
게다가 키뿐만 아니라 중량감까지 같이 갖춘 탓에 그야말로 인간 탱크, 걸어 다니는 통곡의 벽처럼 느껴졌다. 감히 그가 있는 쪽으로 공을 보내기 무서울 지경이었다.
‘이건 진짜 t-800 같은데? 미치겠네. 이런 놈을 어떻게 상대하지?’
사실 고영주도 키는 컸다. 거의 180㎝에 다다른 키 덕분에 지금껏 체격으로 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K리그에서나 겪을 법한 몸싸움을 미리 겪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버티는 게 고작이라니 너무 심하잖아?’
고영주는 이를 악물고 버텨봤으나 소용없었다. 상대는 닻이라도 내렸는지 꿈쩍도 안 했다.
백운고 공격의 핵심이 봉쇄당하자 백운고의 공격도 점차 무뎌져 갔다. 다른 공격수를 이용하거나 좌우 측면으로 돌파를 해봐도 소용없었다. 왕성한 활동량과 압박이 특기인 청송고에게 금방 공을 뺏길 뿐이었다.
‘그래도 틈이 없는 건 아니야.’
오솔의 몸싸움이 비록 위협적이긴 했지만 결정적인 태클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있었다.
오솔 하나만 보면 돌파하는 게 불가능은 아니었다. 물론 혼자서는 무리였지만, 혼자서 안 되면 같이 하면 된다.
2 대 1 패스를 한다거나 절묘한 스루패스를 펼치면 순간이지만 오솔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덩치보다 더 조심해야 할 건 뒤의 민국이 형이지.’
기껏 오솔을 벗겨내 봐야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오는 여민국 때문에 페널티 박스의 잔디를 밟기도 전에 공을 뺏기고 만다.
‘젠장, 또 야!’
이 짓을 두어 번 반복하고 나면 알게 된다. 방금은 자신이 돌파한 게 아니라 상대가 준비한 함정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것임을.
‘어디 두고 보자고.’
오솔과 여민국 콤비에게 막히길 수차례, 결국 고영주는 점점 더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공격수라기보다는 공격형 미드필더에 더 어울리는 위치까지 갔다가, 그것도 부족해서 더 밑으로 내려갔다. 이제는 숫제 미드필더들과 같은 라인에 위치했다.
“그만. 더는 따라가지 마!”
“쳇!”
여민국은 중원까지 따라가려는 오솔을 급히 막았다.
오솔 혼자 따라가 봐야 중원에는 패스 코스가 많아서 금방 돌파당할 게 뻔했다. 게다가 너무 멀어지면 여민국이 적절히 커버를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더불어 스피드가 느린 것도 문제였다. 오솔은 아직 주력에 50%의 페널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지금처럼 수비 라인에서 버티는 거라면 모를까 공간이 생겨서 스피드 경쟁이 붙으면 오솔은 높은 확률로 패배할 것이다.
“좋아. 이제야 편히 공을 받을 수 있겠네.”
고영주는 공을 받고 부드럽게 돌아섰다. 드디어 청송고의 수비진을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되었다. 속절없이 당하며 쌓인 울분을 되갚아줄 차례였다.
공을 몰고 센터 서클을 넘어서자 오솔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오솔은 거리 조절에 특히 신경 썼다.
상대는 자신보다 빠르고, 공격하는 입장이라 한 발 먼저 움직인다. 당연히 반응할 수 있을 만큼 떨어져야 했다.
고영주는 그를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안녕! 흐흐. 이번에는 등 뒤에 질척이던 때와는 느낌이 좀 다를 거야.”
공은 고영주의 발에 꼭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상체는 끊임없이 좌우로 흔들리고 공에 닿는 발 부위도 쉼 없이 바뀌었다. 나름 프로에서도 먹힐 법한 발재간이었다.
덕분에 오솔은 쉽사리 덤벼들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상대의 페인팅에 속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는 수비 경험이 일천해서 상대가 어느 타이밍에 돌파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보통 일대 일에서는 대비하고 있는 수비수가 공격수보다 더 우위에 있었지만, 이렇게 개인 기량에서 차이가 나면 아무 소용없었다.
'이런. 자칫하면 뚫리겠다.'
여민국은 위험한 상황임을 눈치 채고 재빨리 커버하러 왔다. 고영주는 침착하게 공을 몰고 나갔다. 그는 태산처럼 서 있는 오솔을 오히려 방패막이 삼아 그 뒤의 여민국을 피했다.
“이봐. 1학년! 다음에 만났을 땐 멍하니 서 있지만 말고 좀 덤벼보라고.”
고영주는 놀리는 말과 함께 좌측 사이드로 달려 나갔다. 깜짝 놀란 오솔이 급히 따라붙으려 하자 달리다 말고 왼발 발뒤꿈치로 공을 툭하고 쳤다.
공은 몸의 진행 방향과 반대로 흘러갔다. 국내에선 백숏으로 알려진 힐 찹(Heel Chop)이란 개인기였다.
제대로 속은 오솔은 관성에 의해 앞으로 끌려갔고, 고영주는 그대로 방향을 전환해 중앙으로 뛰었다.
그러나 노마크 상태도 잠시, 곧바로 중앙을 커버하고 있던 여민국이 달려들었다.
‘움직이는 수비수만큼 제치기 쉬운 것도 없지.’
아마 여민국은 지금이 태클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막 개인기를 써서 균형이 흩어졌을 테니 쉽게 뺏을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하지만 안타깝게도 힐 찹은 그리 어려운 기술이 아니었다. 몸에 익으면 방향 전환 속도도 빠르고 몸의 균형도 크게 흐트러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영주는 이 기술 하나만큼은 눈감고도 펼칠 정도로 익숙해져 있었다.
‘무슨 소리냐고? 그야, 내가 먼저 공을 잡는다는 뜻이지.’
고영주가 먼저 공을 잡았다. 그리곤 우측으로 바디 페이트를 넣었다. 오른쪽으로 달리는 와중에 넣은 페인트라 여민국도 깜빡 속아 넘어갔다.
막 여민국의 몸이 우측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고영주는 공을 오른발에서 왼발로 옮기며 그대로 왼쪽으로 치고 나갔다.
팬텀 드리블(Phantom Dribble) 혹은 라 크로케타(La Croqueta)라고 부르는 개인기였다.
파바박!
운동에너지가 오른쪽으로 쏠린 여민국, 그 틈에 훤히 열린 왼쪽 공간으로 돌파하는 고영주.
일련의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마치 수비수가 알아서 비켜 주는 것 같았다.
오솔이 뒤를 돌아봤을 땐 마침 여민국이 돌파당하고 있었고, 여민국이 뒤를 돌아봤을 땐 고영주는 이미 무주공산이 된 공간을 내달리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앞을 막는 건 잔뜩 긴장한 표정의 골키퍼 한 사람뿐이었다.
툭, 철썩!
너무도 쉽게-혹은 쉬워 보이는- 골이 들어갔다. 전반 36분 만이었다.
인상적인 돌파와 마무리까지 선보인 고영주는 탈춤을 추는 듯한 골 세리머니를 펼쳐 보였다. 그 모습이 묘하게 얄미웠다.
“어때? 이 정도면 형님이라고 불러야겠지?”
오솔에게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쿨한 척했으나 전반전 내내 당했던 게 속에 쌓였던 모양이다.
* * *
‘이런…… 생각보다 빠르게 간파됐군.’
이탁수 감독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확실히 고영주는 천재과였다. 벤치에서 지시가 없었음에도 선수가 스스로 해법을 찾아냈다.
자신이 급조한 작전이 허접했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18살의 어린 선수가 제법 경험이 많다는 걸 뜻하기도 했다.
‘생각하는 것도 유연하고…… 나중에 제법 좋은 선수가 되겠어.’
투톱에서만 활약할 수 있는 스타일이라 원톱 중심의 팀에선 중용되긴 힘들어 보였지만, 측면 공격수나 공격형 미드필더의 포지션을 훈련한다면 나중에 뛰어난 플레이 메이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캡틴은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네.’
이탁수 감독은 사전에 말해 놓았다. 전반은 주장인 여민국이 알아서 대처하라고. 자신은 하프 타임부터 작전지시를 하겠다고. 그는 고영주가 그랬듯이 여민국도 자체적으로 해결책을 내놓길 바랐다.
‘어찌 보면 감독은 경기를 준비하는 역할에 불과해. 즉각적인 전술 변화나 선수 교체도 결국엔 미리 연습한 대로 바뀌는 것뿐이니까.’
축구는 야구처럼 경기 중간에 사인을 보내고 작전을 변경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설사 한다 해도 아주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경기가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중간에 쉬는 시간이라든지 작전 타임 같은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가 예상외의 변화를 보였을 때 감독이 대책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필드에 있는 선수들이 알아서 대처를 해야 했다.
그 역할은 보통 주장이나 각 포지션을 리드하는 선수들이 맡았는데, 청송고에서는 여민국이 외에 그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기억해내라 민국아. 다 훈련 중에 겪었던 상황들이다.’
작전 본부에서 아무리 멋들어진 작전을 짜더라도 결국 최전선에서 병사들이 믿는 건 야전사령관의 판단이었다.
이탁수 감독은 제자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 기대하며 재개되는 경기를 지켜봤다.
‘백운고의 포메이션이 4-4-2에서 4-5-1에 가깝게 변했다.’
여민국은 미간을 좁힌 채 어떻게 할지 고민에 빠졌다. 좌우를 둘러보니 이제 막 수비 기술을 익힌 오솔과 지난 2년간 같이 호흡을 맞춘 3학년 수비수가 보였다.
‘결국 우리 중 한 사람이 올라가야 해.’
이대로라면 중원에서 수적 열세에 놓이고 만다. 중원에서 반드시 한 사람은 노마크가 되는 상황이었고, 그 대상이 고영주가 되었을 때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