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개과천선 스트라이커 008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오솔은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지는 듯했다.
‘여…… 민주?’
오솔은 미치도록 보고 싶었던,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번 생에는 만나지 않길 바랐던 여인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분 맞죠? 뒷모습이 완전히 똑같은데요?”
“…….”
“혹시 축구부예요? 우와. 신기하다. 우리 오빠가 축구부 주장이에요. 헤헤. 저는 여민주라고 해요.”
오솔은 차마 그녀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과거였지만, 그리고 그녀에게는 자신은 이제 막 처음 만난 사람이겠지만…… 그렇지만 오솔에게 그녀는 미안함과 죄책감의 대상이었다.
“저기요?”
오솔은 그녀의 계속된 재촉에 결국 몸을 돌렸다. 여민주의 호기심 가득한 두 눈에는 심각한 얼굴을 한 거한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솔은 그 눈망울을 보며 생각했다. 여전히 티 없이 맑고 아름다운 눈망울이라고…….
‘언젠가는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벌써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아. 너는 지금이나 10년 후나 변하질 않는구나.’
민주의 변함없는 외모가 지난 10년의 세월을 떠올리게 했다. 엄청난 죄책감이 오솔을 짓눌렀다. 그는 압박감을 견디다 못해 도망치고 싶어졌다.
‘도망…… 도망이라.’
도망하니 문득 처음 그녀의 곁을 도망치듯 떠났던 날이 떠올랐다.
* * *
때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겨울날이었다.
“나 엄마가 된대.”
“뭐?”
“이 안에 우리 아이가 있다고.”
“내가 아빠가 된…… 다?”
“이 안에 우리 아이가 있다니 너무 신기하지 않아?”
“나, 난…….”
“우리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자.”
“…….”
기쁘기에 앞서 덜컥 겁부터 났다.
아빠가 된다? 어떻게?
그날 오솔은 제대로 대답조차 못하고 집에 돌아와야 했다.
힘겹게 돌아온 집. 다행히 집안의 독재자는 보이지 않았다. 또 어디서 진탕 술을 마시고 있을 것이다.
방 한 구석에는 소주병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술을 모두 뱉어낸 녹색 병에는 잘려나간 담배꽁초가 가득 들어 있다. 무척이나 익숙한 광경이었다.
오솔에게 소주병이란 저처럼 방구석을 뒹굴거나 혹은 펭귄처럼 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었다. 양이 적으면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양이 많으면 개를 잠들게 하는 것이 소주였다.
아! 한 가지 모습이 더 있었다.
아주 가끔씩, 소주병은 가족들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기도 했다. 깨진 유리조각을 따라 흘러내리는 알코올 방울은 굶주린 들짐승의 침 마냥 가족의 목숨을 위협했다.
‘내가 아빠가 된다? 나의 아이가 생겨?’
오솔은 아빠가 되는 법을 몰랐다. 그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그저 폭력과 방임, 나태의 상징이었다.
‘나는 절대로 아버지처럼 되지 않을 거야!’
아빠가 되는 법은 모르지만, 적어도 해선 안 될 짓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가족을 배신하지 않는 것, 사랑과 믿음으로 가정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집안은 한시도 잠잠한 날이 없었다.
“어떻게 하니, 솔아. 이 사람이 진짜 미쳤나 보다. 그게 어떤 돈인데 들고 나가.”
오솔의 모친은 돈을 지키지 못했다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미안하다는 말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그는 급히 통장을 확인했다. 계약금으로 받은 500만 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부친이 돈을 들고 갔을 곳은 뻔했다.
도박장이다.
역시나 3일 후 돌아온 부친은 혼자가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쉽게 말해서 네 아버지가 우리한테 돈을 빌렸다 이 말이야. 빚을 졌다고, 이해했지?”
“그게 어쨌다는 거죠?”
“어쩌기는 이 도박쟁이가 무슨 수로 돈을 갚아, 네가 대신 갚아야지. 너 프로축구 선수라며? 그럼 돈 많이 벌겠네.”
홀로서기는 물론이고 겨우 월세 살이를 벗어나나 했던 희망도 모두 박살이 났다.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은 지긋지긋한 현실 앞에서 너무도 사치스러운 생각이었다.
“미안해.”
오솔은 여민주에게 이별을 고하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토록 좋아했던 눈망울이었건만 도저히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그날의 참담한 이별 이후, 오솔은 조금씩 술을 입에 대고 연습을 게을리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실력은 점점 늘어났고 버는 돈도 그에 맞게 늘어났다.
그래, 모두 시스템 덕분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끝내 도박중독을 끊지 못했고, 오솔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가족들과도 아예 연락을 끊어 버렸다.
에이전트를 통해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간간히 일정량의 돈을 쥐어줄 뿐, 몇 년간 간단한 안부조차 나누지 않았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오솔은 상하이의 호텔에서 우연히 여민주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안녕. 솔아.”
“민주야…….”
그녀의 옆에는 다부진 표정의 소년이 서 있었다. 이제 겨우 10살 남짓한 나이임에도 곧고 당당한 눈빛이었다. 아이는 제 엄마를 참 많이 닮아 있었다.
“대한아, 인사해야지.”
“누군데요?”
“응, 엄마 친구야.”
“안녕하세요! 오대한이라고 합니다!”
“옳지, 이제 삼촌한테 가보렴.”
아이는 1층 식당으로 뛰어 들어갔다. 오솔의 눈동자는 아이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좇았다.
저렇게 뛰는구나. 웃음소리가 참 밝고 경쾌하다. 녀석, 축구는 좀 하려나?
“어떻게······.”
“부모님이랑 오빠 도움을 좀 받았어. 부족함 없이 자랐으니까 걱정하지 마.”
“미안해.”
“뭐가 미안하니, 그날 헤어지자는 말만 남기고 도망치듯 사라진 거?”
책망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한없이 담담하고 사무적이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에서 너에 대한 기대는 이미 예전에 접었다는 뜻이 전해졌다.
오솔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전부 다.”
“적어도 나한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지 그랬어? 같이 노력이라도 해봤으면 얼마나 좋아. 힘들어서 도망칠 거면 적어도 아이가 ‘엄마. 아빠.’거리며 옹알이하는 거는 보고 가지, 밤새 울며 떼쓰는 거, 웃으며 걸음마를 떼는 거는 보고 가지…… 아니, 최소한 아이가 태어나는 모습은 봐야 하는 거 아니니? 태어나 처음 맞는 세상인데, 꼭 그렇게 아빠 없이 눈을 뜨게 해야 했니?”
민주의 맑은 눈망울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지난 10년의 세월이 결코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똑같은 10년의 세월 그러나 두 사람의 행보는 정반대였다. 오솔이 현실을 애써 회피하고 외면할 때, 그녀는 고개를 들고 꿋꿋이 이겨내 왔다.
미혼모에 편모 가정이었지만 부족하지 않게 키웠다. 호텔을 뛰어다니는 아이의 얼굴에 그늘이라곤 전혀 없었다.
“미안해. 미안…… 정말 미안해.”
오솔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는 도망쳤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이미 민주와 아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던 무책임한 가장이 되었고, 아버지의 부재를 아이에게 남기고 말았다.
그래서였다.
빠아아앙!
차도로 굴러가는 축구공과 열 살 남짓한 아이를 발견하고 몸을 날린 것은 그런 이유였다.
죄책감, 미안함, 그리움, 후회.
온갖 종류의 감정이 그를 차도로 달려들게 했으나 마지막에 그의 뇌리를 채운 것은 오로지 후회, 후회뿐이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 * *
“몇 학년이세요? 혹시 1학년? 아니면 선배님?”
“아…….”
따뜻하고 정감 어린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자신을 만나기 전의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소녀가 눈앞에 있었다.
오솔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사과하고 싶은 걸 참고, 고개를 돌렸다. 그가 무슨 낯으로 그녀를 다시 만나겠는가.
‘그래, 차라리 나랑은 안 엮이는 게 나아.’
이번 생에는 달라지리라 마음먹었으나 전생의 기억 때문인지 영 자신이 없었다.
‘이번엔 진짜 잘해줄게.’라고 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번엔 나 말고 다른 좋은 놈 만나.’가 더 맞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요? 내 말 안 들려요?”
그러나 민주는 오솔이 무시한다고 포기하고 돌아갈 사람이 아니었다. 혼자서도 꿋꿋이 아이를 낳고 훌륭히 가르친 여자였다. 보통 내기일리 없었다.
그런 그녀가 오솔의 옆에 바짝 붙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마치 금맥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반짝였다.
“오늘 새벽에도 그쪽 모습을 봤어요. 드리블을 하면서 신문 배달하는 사람은 처음 봤는데, 설마 그 사람을 여기서 딱 마주칠 줄이야. 헤헤. 진짜 신기하지 않아요? 누굴까 계속 궁금했는데, 이렇게 딱 만나다니.”
오솔은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애써 무시하려해도 그게 마음처럼 잘 안됐다.
제 멋대로 움직이는 표정이 영 어색했다. 그는 모진 가정환경 때문인지 행복할 때 그리고 즐거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오솔은 상대에게 날을 세우는 것에는 익숙해도 누군가를 아무런 경계 없이 받아들이는 것에는 서툴렀다. 어쩌면 그래서 더 여민주를 대하기 어려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밑도 끝도 없는 호의와 사랑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때의 오솔은 알지 못했다.
“우와. 전에는 스탐 같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까 가투소를 더 많이 닮은 거 같네요.”
오솔은 순간적으로 감상에 젖었다. 저것도 전생에 들었던 말이었다. 그의 몸싸움 실력을 보고 감탄하며 내뱉은 표현이 저것이었다.
-우와! 너 가투소랑 플레이 스타일이 완전히 판박이다. 생긴 것도 비슷하고.
당시 그는 유럽 축구에 무지했다. 그래서 가투소가 누군지 몰랐다. 그게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민주는 얄밉게 웃으며 말했다.
-이탈리아 대표팀 선수야. AC 밀란의 중원을 책임지는 살림꾼이지. 활동량도 엄청나고 얼마나 파워풀한지 몰라!
그녀의 입에서 온갖 미사여구가 튀어나왔다.
얼굴은 물론 이름도 잘 모르는 선수였으나, 기분이 좋았다. 길거리의 거지도 잘생겼다는 이탈리아 사람을 닮았다고 하니, 칭찬이라고 지레 짐작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찾아본 젠나로 가투소 (Gennaro Gattuso)는 얼굴에 털이 수북이 난 털보 중에 털보였다.
“가투소 몰라요? 작년에 월드컵에서 8번 달고 뛰었었는데. 그 선수 진짜 잘생겼어요.”
물론 면도를 한 모습은 상당히 잘생겼다. 치렁치렁한 머리와 털을 잔뜩 기른 모습도 마초적인 멋이 있었다. 그러나 빈말로도 오솔과 닮았다고 하긴 힘들었다.
“가투소가 어떻게 생겼는지 면도기를 얼마나 안 쓰는 지도 다 아니까, 그만 놀려.”
“앗! 드디어 대답했다. 헤헤.”
민주는 혀를 빼물며 밉지 않게 웃었다. 오솔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과거에도 그랬다. 그녀와 얘기하다 보면 자꾸만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들곤 했다.
“가투소가 싫으면 스탐이라고 불러줄까요? 스탐은 어떤 선수냐면…….”
“대머리잖아.”
“스탐은 단순한 대머리가 아니에요!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데.”
“아무리 대단한 선수라도 머리를 자라게 할 순 없지.”
“그건 그렇죠. 히히! 그보다 그쪽만 말을 놓는 건 뭔가 불공평하지 않아요? 이름이랑 나이를 알려줘야 저도 말을 놓죠.”
“…….”
“오케이. 정식으로 자기소개 할게요. 아까 말했듯이 제 이름은 여민주예요. 1학년 7반.”
‘제기랄.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잖아.’
오솔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솔. 1학년 3반이야.”
그는 말을 마치면서 단순한 친구사이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오솔이 재잘거리는 여민주를 옆에 두고 훈련 도구를 정리하는 사이 여민국이 나타났다. 안쪽에서 나오는 걸 보니 감독을 만나고 온 모양이다. 그는 동생과 오솔이 같이 있는 걸 보더니 멈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둘이 같이 있었구나. 잘 됐네. 마침 감독님이랑 솔이, 네 얘기를 했었는데.”
“제 얘기요?”
“응, 한번 가봐. 감독님께서 찾으시더라.”
오솔이 떠나자 민국은 재빨리 동생을 붙들었다.
“둘이 아는 사이야?”
“내가 오늘 아침에 말했었던 그 사람 기억나? 야프 스탐.”
“야프, 뭐? 아~ 그 신문 배달원?”
“응.”
“그게 저 녀석이었다고?”
여민국은 오솔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신문배달을 하면서 동시에 새벽 훈련까지 한다니, 이는 웬만한 열정이 아니고서야 힘든 일이었다.
“짜식. 그래도 열심히는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