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에필로그
이성현은 좌선한 채 눈을 감았다.
다양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여러 상념을 흘려보낸 끝에, 그가 택한 것은 과거로 돌아온 후 흐른 시간을 되짚어 보는 것이었다.
열일곱 살- 고등학교 1학년의 몸으로 돌아온 지 어느덧 팔 년의 시간이 흘렀다.
수많은 명경기를 만들어내며 아직도 전설이라 칭송받는 2021년 춘계 전국 중 · 고등학교 검도 대회가 벌써 칠 년 전.
지금 그는 대학까지 완전히 졸업한 스물다섯 살의 건장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팔 년이라. 시간이 참 빨리 흐르는구나.’
본래 시간이라는 게 흐를 때는 모르다가도 뒤돌아보면 어느새 쌓인 세월에 놀라게 되는 법.
그건 과거로 돌아와 새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성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이 보낸 시간의 양에 감탄하면서, 그는 과연 본인이 혹여나 그 세월을 무의미하게 보내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잠깐의 고민 끝에 나온 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였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자신의 시간을 아무런 가치도 없이 흘려보내고 있었다면, 지금 그를 향하고 있는 수많은 칭송이 존재할 리가 없을 테니까.
검도계의 살아있는 신(神).
전 세계 검도인 위에 우뚝 선 자.
어린 나이에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오른 뒤 한순간도 왕좌를 내준 적 없는 패왕.
공식전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하여 ‘전승의 괴물’이라.
그 모든 미사여구가 도리어 표현에 아쉽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을 정도니.
과거로 돌아온 이성현이 검도 역사에 새겨 넣은 자신의 신화가 얼마나 확고한지 감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사실 요즘에는 저런 말 대신, 단 하나의 단어로 이성현에 대한 설명을 끝내곤 했다.
‘검도의 신(神)’이라고 말이다.
성현이 팔 년간 쌓아 올린 신화는 칠 년 전 대회 우승 후에 했던 생각처럼, 그를 번듯한 신의 자리에 올려두고 있었다.
‘하하.’
‘전’의 스물다섯 살 때와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라 할 만했다.
당시의 성현은 아직 자신의 재능을 깨닫지도 못하고 무턱대고 죽도만 휘두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처지에 엄청난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때 그 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던 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았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쌓이고 쌓여 ‘전’의 그를 세계 최강에 이르게 했던 것이며, 지금의 그가 엇나가지 않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있다는 걸 깨달은 까닭이다.
‘노인일 때는 알지 못했지만.’
이십 년을 허망하게 흘려보냈다거나, 내버린 시간이 아깝다거나.
자신이 노인일 적 때때로 했던 생각을 떠올린 성현이 흐린 미소를 머금었다.
시간의 부족이 눈을 흐린 탓이리라.
본래 사람이란 자신이 가진 것보다 잃은 게 더 눈에 아프게 들어오는 법이므로.
‘그래서, 확인은 됐으려나···.’
자신을 과거로 돌려보낸 ‘목소리’가 했던 말을 떠올린 성현은 차분히 숨을 내쉬었다.
그 스스로는 ‘전’과 확실히 달라졌다- 라고 장담하고 있었지만, 아마도 신과 같은 존재일 목소리가 보기에는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아직은 무언가 말하는 걸 들어본 적 없는 까닭에 만족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할 따름.
생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지난 팔 년의 세월 동안 워낙 많은 일이 있었기에 되짚어 보는 과정은 쉬이 끊기지 않았다.
성현은 과거로 돌아온 후 한순간도 허투루 살고 싶지 않다는 의지에 차 있었고, 그만큼 밀도 높은 삶을 살고자 노력했었기 때문이다.
온통 검도에 관한 생각들이 서서히 다른 것으로 잠식된 건, 되짚던 팔 년 세월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이었다.
“으음-”
대개 생각을 정리할 때는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는 편인 성현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어느새 머릿속을 메운 문제에 대해서는 답이 없는 듯, 저도 모르게 나직한 침음을 흘렸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에도 평생 검도만 바라봐왔고, 과거로 돌아온 지금도 팔 년의 대부분을 검도에 쏟아부은 그다.
그런 그가 어떻게 작금 그를 덮쳐온 가장 큰 문제─ 어느새 꼬여버린 연애사에 대해 이렇다 할 답을 낼 수 있겠는가?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전’의 그가 칠십 평생 모태 솔로로 살지는 않았으리라.
지금 그의 연애 세포는 뿌리까지 죽어 있었다···.
‘답을 내긴 해야 하는데-’
성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렵건 어쨌건 답을 내야 하긴 했다.
본디 연애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말인즉, 지금의 고민이 오롯이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가 답을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으니 그 또한 어떻게든 답을 내야 했다.
기다리는 이를 위해서라도.
문제는.
‘그게 한 명이 아니라는 거지.’
답을 기다리는 게 셋이나 된다는 점.
성현이 쉽게 답을 낼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재차 한숨을 푹 내쉰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한 번 생각이 그쪽으로 닿은 이상, 더 앉아 있어 봐야 의미가 없다는 걸 그는 잘 알았다.
괜히 계속 끙끙대고 있어 봐야 해결 힘든 고민만 깊어질 뿐이니.
더불어, 슬슬 시간이 되기도 했다.
경기를 치를 시간 말이다.
“마침 나왔구나. 안 그래도 슬슬 나와야 한다고 말하려 했는데.”
개인실을 나선 성현을 맞이한 건 정철이었다.
말마따나 그는 문을 두드리려는 듯 손을 들어 올린 상태였다.
성현이 나오는 것을 보고 곧 내리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어.”
“형도 같이 가시지 그러셨어요.”
“아니! 어떻게 그래? 우리 한국 대표팀 주장이자 에이스가 아직 안 왔는데! 절대 안 되지!”
정철의 말에 성현이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과장 섞인 반응이 퍽 우스웠던 탓이다.
하지만 딱히 부정하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정철이 했던 말은 전부 진실이었으니까.
LA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국가 대표 검도팀의 주장이자 에이스, 그게 바로 지금의 성현이었으니 말이다.
말없이 어깨를 으쓱거린 성현은 앞장서 걸었고, 그 뒤를 정철이 따랐다.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귀에 어딘지 나른하고 힘 빠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독특한 느낌으로 말하는 건 단 한 명 백성호뿐이었고, 실제로 나타난 것도 그였다.
한국 검도 국가 대표팀의 부장, 백성호.
일찍이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졌다 하여 천재라 불리던 그는 ‘전’과는 달리 불운한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일 없이 건강했다.
신계에 홀로 선 ‘검도의 신’ 이성현을 제외하면 인간계 원탑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물론, 그런 말은 하는 이들은 대개 백성호의 팬들이었다.
다른 선수들의 팬들은 백성호가 강한 건 인정하지만, 인간계 원탑까지는 아니라며 펄쩍 뛰었다.
정철도 있고, 김규호도 있고, 최영준도 있는데 어떻게 백성호가 원탑일 수 있냐는 논리로.
특히나 가장 극성으로 반응하는 건 김규호의 팬이었다.
일찍이 실업 검도 대회에서 김규호가 기어코 백성호를 꺾은 뒤 결승에 진출했는데 진짜 인간계 원탑은 김규호가 아니냐면서 말이다.
그럼 다시 백성호가 상대 전적을 압도하고 있는데 뭔 소리냐면서 백성호의 팬들이 반발했고.
여담이지만, 김규호가 백성호를 꺾고 올라간 결승에서 만난 건 성현이었다.
결과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우리 주장님, 오늘은 생각이 더 길었네?”
한 손에는 호면을, 다른 손에는 죽도가 들어 있는 죽도집을 든 백성호가 성현을 보며 히죽 웃었다.
마치 ‘나는 네가 뭘 생각했는지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이래저래 주워들은 게 있는 티를 팍팍 내는 모양새에 성현은 쓰게 웃었다.
“뭔가, 걱정되는 게 있나 봐?”
“난 뭔지 알 거 같은데.”
백성호에게 대꾸하며 나타난 건 김규호였다.
한국 검도 국가 대표팀의 중견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그는 어딘지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성현을 바라보았다.
“뻔하지, 뭐. 인기 많은 남자의 고민 아니겠어?”
“아아- 난 또. 그런 줄도 모르고-”
“······얼마 전에 헤어졌다고 저한테 화풀이하시면 안 됩니다. 규호 형.”
“윽.”
“푸핫-”
성현의 자비 없는 반격에 김규호가 헛숨을 토하고, 그걸 보던 최영준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영준은 현재 한국 검도 국가 대표팀의 2위로 합류한 상태였다.
4년 전에 있었던 파리 올림픽에서는 아직 후보 선수에 머물렀었는데, 그간 발전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주전 자리를 꿰차는 데 성공한 것이다.
‘광천고의 황금 세대’라 불리는 일원답게.
“솔직히 부럽긴 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 내 여친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포기하시죠. 포기하면 편합니다. 선배님.”
“팍 씨!”
후보 선수로 국가 대표팀에 합류한 김수민, 손대현, 강찬울, 그리고 김은우와 이서준이 제멋대로 떠들어댔다.
왁자지껄 이야기하는 그들을 보며 성현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딱히 비밀이라 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도대체 어디까지 퍼져나갔는지 황당했기 때문이다.
‘뭐, 나였어도 호기심이 생기긴 했을 거 같지만.’
현재 성현은 세계 최강이며 ‘검도의 신’이라고까지 불리는 위치다.
그런 이가 한국 검도의 여제라 불리는 두 사람을 비롯해 유명 스포츠 브랜드의 팀장까지 총 세 사람과 연애 관련으로 얽혀있으면 궁금해질 수밖에.
안 그래도 얼마 전부터 기자들도 인터뷰할 때마다 은근히 질문하려는 낌새를 드러내곤 했었다.
전부 잘 얼버무린 덕에 아직은 별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있었지만, 그게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성현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다.
“자자, 성현이 놀리는 건 여기까지 하고! 다들 각오 단단히 해! 이제 시작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위기에 빠진 성현을 도와준 건 정철이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보여준 특유의 통솔력으로 산만하던 대표팀 선수들을 집중시킨 거다.
슬쩍 눈으로 감사 인사를 표한 성현은 이내 진지한 표정이 된 그들과 하나 되어 경기장을 향해 나아갔다.
“······.”
“······.”
복도를 나아갈수록 서서히 한국 국가 대표팀의 기백이 서늘해져 갔다.
전쟁터에서 웃고 떠드는 병사는 없다.
한국 검도를 대표해서 나선 그들에게 있어서는 지금 이곳, 올림픽이 전쟁터였다.
절대로 패배해서는 안 되는 전쟁터.
이윽고, 그들이 경기장으로 들어섰을 때.
──!
다양한 기합과 관객들의 외침, 다른 국가 대표 선수들의 시선까지 그들에게로 모여들었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저도 모르게 짓눌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강한 압박감!
하지만 성현을 비롯한 한국 국가 대표팀 선수 열 명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지금의 압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처럼.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검도는 이성현을 중심으로 전 세계 검도의 꼭대기에 서 있다.
‘세계 최강’ 한국 검도, 그리 말할 수 있을 만큼.
검도 종주국 일본도, 그 자리를 뺏기 위해 칼을 갈아온 미국도, 어느새 바싹 올라온 캐나다도 제치고 그 위에 섰다는 뜻이다.
그러니 더욱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그 순간, 다른 나라들이 달려들어 물어뜯을 테니.
최강은 최강답게 있어야 한다.
한국 국가 대표팀은 그걸 아주 잘 알았다.
“······그럼, 가볼까요.”
슬쩍 대표팀 팀원들을 돌아본 성현이 씩 웃었다.
어느새인가 다른 이들의 얼굴에도 그와 비슷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자신감 넘치는, 승리를 확신하는 웃음.
“우승하러?”
“우승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