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도의 신-149화 (149/150)

149화: 검도의 신(神)

‘이번에는-’

다시금 죽도를 들어 올리는 백성호.

작은 행동에서도 자신이 찾아낸 답을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팍팍 묻어났다.

이제 곧 시작될 두 번째 판이야말로 이 시합의 진정한 승부처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건 경기를 유심히 지켜보던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승부는 이제부터다- 라고.······백성호에게 주어졌던 시간이 모두 끝났음을 알지 못한 채.

‘여기까지··· 인가.’

같은 생각만 벌써 세 번째.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에 했던 두 번의 생각과는 느낌이 완전히 정반대였다.

‘어느새 여기까지 성장했어?’가 이전의 ‘여기까지’였다면 ‘그래도 여기까지인가.’가 지금의 ‘여기까지’였다는 뜻이다.

성현이 벌써 백성호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가늠을 끝마쳤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백성호의 급격한 성장은 확실히 성현에게도 꽤 놀라운 일이었던 건 맞다.

설마하니 그도 전성기가 시작될 무렵에 오른 수 싸움의 경지에 열아홉 살의 나이에 들어설 줄은 예상도 못 했으니까.

설령 그게 간단한 속임수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어설픈 수준이라고는 해도, 그곳에 들어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했다.

‘전’에 성현이 상대했던 적 중 그 경지에 오른 건 열 명 남짓이었으니 말이다.

그만큼 대단한 발전인 것!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성현은 이미 같은 수준에 오른 적을 그만큼 상대해봤다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지금의 백성호처럼 속임수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비슷하게 거짓을 섞을 수 있는 이들로만.

백성호의 발전이 그를 놀랍게 하고, 더해서 기쁘게 할지언정 위협적으로 느끼도록 만들지 못한 건 바로 그래서였다.

오십 년의 경험에 과거로 돌아와 젊고 건강한 육체를 얻으며 비로소 한발 더 나아간 성현에게 위협적으로 되기를 위해서는, 겨우 이 정도에 그쳐서는 안 됐다.

더 상상도 안 되는 수준으로, 백이면 백 불가능하다 고개를 저을 만큼.

그래야 비로소 닿을 길이 열리리라─

이번에 백성호는 그러지 못했다.

단지 그게 전부였다.

“······.”

성현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보면 이제 겨우 일 년이다.

고작 그만큼의 시간을 내어주고 전성기의 그를 따라잡기를 바라는 게 오히려 가혹한 요구이리라.

아무리 백성호가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졌다 해도 마찬가지.

그가 가진 ‘눈’ 또한 하늘에 닿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오롯이 재능만으로 모든 걸 해결하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더 성장하고 나아갈 재료로 가장 필요한 건 역시나 시간과 경험이니···.

‘그래도 일 년도 안 되어 여기까지 왔으니, 앞으로 오 년이면 그럭저럭 따라올 수 있지 않을까.’

그저 그리 기대해볼 따름이다.

‘오늘은 이만 끝내야겠어.’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알려주면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기 마련.

아무리 백성호가 하늘이 내린 재능의 소유자라 해도 세계 최강에 올라섰던 자의 가르침은 절대로 가볍지 않으니까.

그러니, 오늘은 여기까지였다.

“······.”

“······.”

성현과 백성호는 다시금 서로를 마주했다.

중단세를 취한 두 사람의 표정은 기이하게도 첫 번째 판의 결과와는 달랐다.

이긴 성현은 무덤덤하고 냉랭했고, 진 백성호는 도리어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니까.

주심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본 뒤, 이내 단호하게 “두 번째!”하고 소리쳤다.

그리하여 시작된 두 번째 판.

이번에도 두 사람은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본래 경지에 이른 이들끼리의 승부는 공세에서 시작되어 끝나는 까닭이다.

극단적으로 ‘이기기 전에는 기술을 내지 않는다!’라고 말해질 정도니, 공세 싸움에 얼마나 무게를 싣는지 알 수 있으리라.

그리고 수 싸움의 경지에 이르면 그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다.

자신과 상대의 행동에서 이어질 결과를 예측하여 들어갈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다 보니 쉽사리 기술을 내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보는 맛이 떨어지는 건 절대로 아니었다.

“······!”

“······!”

남다른 기백이 만들어내는 긴박감도 긴박감이지만, 찰나에 결판이 난다는 걸 알기에 관객들은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잠깐 한 눈이라도 팔았다가 결정적인 장면을 놓친다면 그만큼 후회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바로 그것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인데.

그렇게 관객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와중, 먼저 움직인 건 성현이었다.

소리 소문도 없이 나아간 발이 바닥을 디뎠다.

다소 먼 거리(遠間)였던 두 사람의 사이가 급격히 좁혀지며 일족일도(一足一刀)의 거리가 되었다.

지독하리만치 대담한 성현의 전진에 백성호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펼쳐지던 수 싸움이 급격히 엉키며 흐트러졌다.

첫 번째 판에 그러했던 것처럼.

‘온다!’

그래도 첫 번째 판과는 달리 당황은 없었다.

이미 한 차례 당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아등바등 버티며 답을 알아내기도 했으니까.

지금은 그걸 증명할 때였다.

백성호는 차분히 감각을 가다듬었다.

공세 중 가능성이 희박한 것들을 걸러내어 눈앞에 생겨난 검로(劍路)들을 지우니, 비로소 성현의 진정한 의도가 보였다.

첫 번째 판에서 성현이 드러낸 정보들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던 ‘실수’를 단시간에 고쳐낸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실수를 깨닫는 데 성현의 도움이 컸다는 점 정도일까.

만약 ‘수 싸움을 너무 믿지 말라’라는 말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는 아직도 맹점을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무래도 막 올라선 경지는 낯선 법이니.

‘어디 한 번, 들어와 봐!’

굳건하게 선 백성호가 죽도를 애매하게 들어 성현에게 겨누었다.

성현이 노리는 것이 치고 들어오는 기세를 살린 찌르기라는 사실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찌르기는 선이 아닌 점의 격자인 데다가, 그려내는 궤적 또한 직선이다 보니 여러 기술 중에서도 특히나 빠르고 강력했지만, 그 대신 이러한 가벼운 동작만으로도 막아내는 게 가능했다.

상대의 칼끝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찌르기는 점수로 인정받지 못하기에.

따라서 지금의 자세만으로도 견제는 충분하다.

백성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그의 패착이었다.

타악!

무소의 뿔처럼 내밀어져 있던 성현의 죽도가 백성호의 죽도를 왼쪽으로 강하게 후려쳤다.

이전의 공세들과는 달리 본격적인 타격이었다.

백성호는 그것에 놀라는 대신, 재빠르게 반응하기를 택했다.

이미 성현의 죽도가 자신의 죽도 끄트머리를 후려치기 전부터 그 동작에 담긴 힘이 범상치 않음을 파악하고 대비한 덕에 퍽 어렵지 않았다.

타격에 밀렸던 죽도는 순식간에 원래 자리를 찾아 돌아왔고, 성현의 공세는 이번에도 별 이득을 취하지 못한 듯 보였다.

그러나.

“─!”

백성호의 죽도가 원래 자리를 찾는 그 찰나.

두들겼던 성현의 죽도는 타격으로 얻어낸 반탄력을 살려 위쪽으로 휘도는 중이었다.

백성호가 다시 중단세를 취하는 것과 성현이 죽도를 휘돌려 왼쪽에서 손목을 노리는 두 가지 행동이 맞물리듯 이루어졌다.

애초에 반응할 거라 예상하지 않았다면 하지 못했을 완벽한 쇄도!

끔찍하게도, 성현은 백성호가 빠르게 반응할 것조차 예상한 뒤 공세를 걸었던 거다.

“하아아앗-!”

동시에, 성현이 왼발로 바닥을 박차고, 오른발을 세차게 굴렀다.

굳건한 하반신에서부터 전해진 탄력은 허리를 타고 상체에 이르렀으며, 이내 휘도는 팔에 한층 더 강한 기세를 실었다.

그럼으로써 죽도에 실리는 힘은 발을 구르지 않고 팔만 휘두르는 것을 아득히 넘어서게 된다.

저 백성호마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만큼.

“크읏-!”

머리를 치려고 죽도를 내지른 것이 백성호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이었다.

그마저도 성현이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인해 어깨를 두드렸을 뿐이지만.

반면, 성현의 죽도는 무방비하게 드러났던 백성호의 손목을 발 구름의 힘을 살려 찍어버렸다.

만약 진검이었다면 이 일격으로 손목이 잘려나갔을 것이고, 그건 다시 말해 득점으로 인정되기에 충분한 타격이었다는 이야기다.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듯한 ‘죽도 바깥치고 손목’이었다.

“후우···.”

성현은 끝까지 존심을 드러내며 물러섰다.

그에게 있어 격자 이후의 존심은 이제 숨 쉬는 것보다 더욱 자연스러웠다.

오십 년간 꾸준히, 계속해서 해왔기에.

지금 와서는 도리어 하지 말라 해도 저도 모르게 격자 뒤에 존심을 할 터였다.

‘뭐, 나쁠 건 없지만.’

성현이 흐릿한 미소를 머금은 순간.

“백색, 머리-! 시합 끝!”

““와아아아아-!””

광천고를 알리는 하얀 깃발을 들고 있던 주심이 우렁찬 목소리로 그의 승리를 선언했다.

연이은 득점으로 시합이 끝을 맞이한 것이다.

혹여라도 득점 장면을 놓치랴 집중하고 있던 관객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비록 결과만 보면 일방적으로 생각될 만한 경기였지만, 내용은 그야말로 알차기 그지없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고교 검도 팬이라면, 아니 검도 팬이라면 이 경기를 보고 감탄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으리라.

“역시 이럴 줄 알았어! 결국 이성현이 이겼네!”

“그래도 많이 발전하긴 했어. 이만큼 박진감 넘치게 붙은 건 처음 아니야?”

“다음번- 아니 다다음번이라면 혹시-”

“이번 춘계 대회 대체 뭐냐고.”

“줄줄이 확 성장하고 있네. 김수민, 김규호, 백지호에 백성호까지···.”

숨소리마저 참아왔던 반동인지 관객들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떠들어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번 춘계 전국 대회는 이야깃거리가 넘쳐나듯 많았고, 백성호의 극적인 발전은 그것의 정점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근데 아직 경기 안 끝나지 않았어?”

결승전이 끝나지 않았다는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이 ‘어?’하는 표정이 된 건 말이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현재 광천고와 경중고의 시합 결과는 3승 1무 3패로, 대표전을 치러야 우승이 결정되었다.

분명히 대표전에는 성현과 백성호가 나올 테니 그들의 시합은 아직 한 번 더 남았다는 뜻이었다.

‘아직 모른다!’라든가, ‘혹시 막판 대역전?’ 같은 말이 나올 무렵, 관객석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권도연이 옆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끝났다고 봅니다.”

김동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단호한 대답이었다.

진심으로 결승전이 여기서 끝이 났다고 생각하기에 낼 수 있는 반응이기도 했다.

“한 경기가 아니라 몇 경기가 더 남았어도 거기서 백성호가 이길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니까요.”

대표전이 남아있으면 뭐 할까.

결국, 중요한 건 거기서 백성호가 이성현을 이길 수 있는지의 여부다.

그리고 김동안이 봤을 때 그럴 일은 없었다.

주장전에서도 이성현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자 여지없이 밀려나다 패배한 백성호가 대표전에 갑자기 각성해서 이길 수 있을 리가.

한 점도 따내지 못하고 패배한 시점에서 이미 승부는 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역시 그렇죠?”

“네. 거의 십중팔구는.”

김동안의 예상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이어진 대표전에서도 주장전과 마찬가지로 이성현과 백성호가 출전하여 다시 맞붙었는데, 결과 또한 주장전과 똑같았던 거다.

아니, 시합 내용까지 따지면 오히려 주장전 이상으로 일방적이었다.

백성호의 성장을 충분히 만끽한 성현이 대표전에서는 더욱 대차게 그를 몰아친 까닭이다.

시합을 치르면서도 빠르게 성장한 백성호였지만, 작정하고 끝내려 드는 성현을 넘어서기에는 아직 한참이나 부족했다.

구체적으로는 대략 오 년 정도가.

“아직도, 멀구나···.”

“많이 따라잡았어요. 그래도.”

“그걸 말하는 게, 네가 아니라 나였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하하.”

이것이 마지막 격자에 넘어져 있던 백성호를 성현이 일으켜 세우며 한 대화였다.

두 사람은 차분히 인사를 나누었고, 그렇게 대표전까지 끝을 맺었다.

광천고가 작년 추계 전국 대회에 이어 춘계 전국 대회마저 제패하며 고교 최강의 자리에 또다시 우뚝 서는 순간이었다.

““우아아아-!””

“우승이다!”

‘······이걸로 일 년인가.’

일제히 달려나온 광천고 주전들에게 파묻히면서, 성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과거로 돌아온 지 이로써 일 년.

그는 ‘전’과는 달리 이 일 년간 수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유망주 대회 우승, 회장기 검도 대회 우승, 국가 교류전 전승, 승룡기 검도 대회 우승, 추계 · 춘계 전국 대회 우승까지.

고교 검도에 한해서는, 그야말로 신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한 업적이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지금처럼 성과를 낸다면-’

고교 검도에서 그치지 않고 실업 검도, 나아가서는 국제 대회에서도 지금과 같다면.

그럼 이성현이라는 이름의 신화는 고교 검도에 한하는 게 아니라, 검도 역사 자체에 깊숙하게 새겨넣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아마도- 아니 분명히 그러하리라.

“하하.”

성현이 밝게 웃었다.

상상만 해도 즐거워진 까닭이다.

검도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았던 ‘전’을 넘어서, 아예 검도계에 자신만의 신화를 쓰고 있다는 점이 특히나.

‘신화(神話)’란 즉 신의 이야기이므로, 그걸 자신의 활약을 바탕으로 써 내려가고 있다는 건 이미 번듯한 신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다른 무엇도 아닌 “검도의 신(神)”으로서.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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