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검도에 미친 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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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걸어 나온 두 사람이 마주 섰을 때.
지켜보던 관객들은 한 차례 크게 술렁였다.
마침내 이 순간이 온 것이다.
많은 이들이 기다렸던 순간이.
일찍이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 불렸던 소년과 그런 그를 단칼에 쓰러뜨리며 하늘 그 자체가 되어버린 소년의 맞대결.
두 사람의 시합 결과에 따라 광천고와 경중고, 고교 최강을 다투는 두 고교의 승자가 결정되리라.
춘계 전국 대회의 왕좌를 차지한 고교 또한.
“누가 이길까?”
“당연히 이성현이지. 상대 전적 봐봐.”
“공식전 전승이 우습냐. 백성호가 천재니 뭐니 해도 이성현한테는 안 되지.”
“혹시 몰라. 이번에 진짜 칼 갈고 나왔을지.”
“그거 전에도 했던 말 같은데···.”
누가 이길 것인가?
관객들은 설왕설래하며 승자를 점쳤다.
전체적으로 의견이 우세한 건 성현 쪽이었다.
아무래도 여태 보여준 압도적인 모습과 백성호를 상대해서 단 한 번도 점수를 내어준 적도 없다는 사실 때문이리라.
하지만 백성호가 이길 것이라는 의견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비록 작년 한 해 동안은 패배를 거듭했을지언정,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분명히 존재했던 거다.
그만큼 백성호가 학생 검도에 미친 영향력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이리라.
성현과 백성호, 두 사람은 관객들의 웅성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신경 쓸 여력이 없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주위의 반응 따위는 그들의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다.
서로에게 집중하고, 파악하여,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가져가기도 바쁜데 여유롭게 관객들을 둘러볼 이유가 없으니.
“······.”
“······.”
천천히 죽도를 뽑아 대치하는 두 사람을 보며 주심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학생 검도 대회에서 심판으로 활약한 지 벌써 몇십 년이 다 돼가는 중이지만, 지금 같은 긴장감을 느끼는 건 처음이었다.
저들이 든 죽도가 마치 예리하기 짝이 없는 진검처럼 보일 지경!
가끔 일반부나, 실업 검도 쪽 시합의 심판을 보았을 때조차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건만.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수도 있겠다.’
검도는 찰나의 순간에 승부가 결정된다.
그래서 심판은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는 게 기본이지만, 이들의 시합은 그보다 더하리라고 주심은 장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번 시합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심판역이 될지도 모른다.
혹은, 가장 보람찬 심판역이거나.
“─시작!”
우렁찬 개시 구령과 함께 시작된 시합!
그러나 성현과 백성호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석상처럼 중단세로 멈춰, 서로를 가만히 응시했을 뿐.
이렇다 할 기부림은 물론이요, 타돌조차 없이 가만히 선 두 명에게서는 왠지 모르게 보기만 해도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바로 직전에 있었던 윤호와 김민재의 경기가 장전된 총으로 서로를 겨누고 있는듯하다고 했었던가?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였다.
지금 여기 있는 두 명이 자아내는 소름 끼치는 긴박함에 비하면, 그들이 만든 긴장감은 서로를 향해 칼을 들이댄 것이나 진배없는데.
술렁이던 관객들마저 하나둘씩 입을 다물고, 종내에는 오로지 정적만이 내려앉는다.
기백만으로 모든 이를 압도한 것이다.
성현과 백성호는 그제서야 느릿하게 서로를 향해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벌어져 있던 거리가 좁혀지고, 이윽고 선혁이 맞닿은 뒤, 죽도가 조심스럽게 교차하는 순간.
오싹-
““──!””
경기를 보던 모든 이들의 등골을 타고 서늘한 소름이 끼쳤다.
성현과 백성호, 두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칼집에 있던 칼이 바깥으로 뽑혀나오듯이.
이전까지의 긴장감은 장난이었다고 말하는 듯한,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
두 사람의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바로 그때였다.
죽도와 죽도가 으르렁대며 우위를 점하려 한다.
검선을 바깥에서 안쪽으로 돌리며 중심을 차지하려 들거나, 위아래로 툭툭 두드리며 틈을 만들어내려 든다.
언뜻 보면 의미 없어 보이는 자잘한 행위에 숨겨진 뜻을 담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순간 물어뜯으려 상대를 살폈다.
어디 그뿐이랴.
공세는 본래 칼끝으로만 하는 게 다가 아니며, 나아가는 움직임, 정신적인 기백까지도 하나하나가 공세인바.
성현과 백성호도 한 걸음 크게 앞으로 내디디며 압박하거나 금방이라도 공격할 듯 오싹한 기백을 내뿜다가 줄이는 등 온갖 수단으로 상대를 흐트러뜨리려 하고 있었다.
선혁이 닿은 곳부터 자신이 칠 수 있는 거리까지 어떻게 맞지 않고 들어갈 것인가.
상대의 중심을 어떻게 무너뜨리고, 어떤 식으로 기술을 결정지을 것인가···.
두 사람의 공세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렇게까지 성장하다니.’
성현은 날카로운, 그러나 어딘가 흐뭇함을 감추지 못하는 눈으로 백성호를 바라보았다.
기대했던 대로, 아니 그 이상의 성장이었다.
이 정도면, 어쩌면 십 년 내로 전성기였던 ‘전’의 그를 따라잡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전’의 그가 전성기였을 무렵에는 세계 최강이라 불리고 있었으니, 백성호도 십 년 안에 세계 최강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극찬이었다.
‘김규호의 발전이 자극이 된 건가.’
4강이 끝나고 스쳐 지났던 백성호의 모습을 떠올린 성현이 흐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김규호의 발전은 그에게도 굉장히 의외의 것이었으므로, 백성호가 그것을 보고 자극을 받았다 한들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한 수 아래로 생각했던 이가 문득 돌아보니 턱 밑까지 쫓아왔을 때야말로 위에 선 이가 가장 크게 흔들리는 순간이니.
그러한 성현의 예측은 절반만 맞는 것이었다.
김규호가 보여준 예상치 못한 선전에 백성호가 꽤 충격을 받은 건 맞았다.
자칫 잘못하다간 뒷덜미를 잡힐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니, 그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큰 지는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진정으로 백성호에게 다대한 영향을 미친 건 성현 본인이었다.
성현은 김규호를 상대하며 여지껏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진정한 ‘적’을 상대할 때의 그를.
백성호는 자신보다 먼저 김규호가 그의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했고, 그리하여 이전과는 명백히 다른 태도로 시합에 임하게 된 것이다.
‘뭐, 좋아.’
성현 본인은 짐작도 하지 못 했지만.
‘그럼 나도- 최선을 다해볼까.’
성현의 두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김규호와 마찬가지로 백성호 또한 충분히 자격이 있음을 알았다.
진정한 그를 상대해볼 자격이.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그는 후배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생각을 버렸다.
지금 그의 앞에 선 이는 제대로 된 ‘적’이다.
쓰러뜨릴 가치가 충분한 적-
중단세를 취한 성현의 온몸에서 무시무시한 기백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백성호는 단숨에 성현의 변화를 깨달았다.
누구보다 성현에게 집중하고, 직접 검을 맞대고 있는 상황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건 그에게 아찔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멀리서 지켜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위압감이 그를 덮쳐온 까닭이다.
그의 앞에 선 이는 더는 이성현이 아니었다.
저건, 그냥 귀신이었다.
사람의 형상을 한, 검도에 미친 귀신!
‘······이성현의 진심!’
하지만 백성호는 그에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납고 흉포한, 그러면서도 즐거움이 한가득 느껴지는 미소였다.
성현의 변화가 그만큼 그에게 기꺼웠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그가 바라마지 않던 일이었으니까.
김규호처럼, 아니, 김규호를 뛰어넘어 이성현에게 기억되는 단 한 명의 호적수가 되는 것.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걸 원했으니까!
‘집중하자-’
백성호의 눈에 새하얀 불꽃이 피어오른다.
고조된 정신이 이제까지 없던 집중력을 일으켰고, 그는 그걸 온전히 성현에게 쏟아부었다.
적막한 세상 속,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둘 뿐.
한계를 넘어선 집중력이 눈앞의 상대를 완전히 해체하여 재구성했다.
그 끝에, 백성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성현이라는 괴물이 얼마나 극단에 서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이제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그에게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을.
“──.”
극한에 이른 집중력이 체감 시간마저 느리게 만든 상황.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었지만, 백성호는 자신이 이 세계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단숨에 인지하고 깨달았다.
만약 다른 검도인이 알았다면 불합리하다고 외쳤을 만한 급격한 성장이었다.
그러나, 하늘이 내린 재능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모든 게 불합리하고, 노력의 가치를 한없이 퇴색시키는 것.
그게 ‘천재(天才)’이니까.
탁-타앗-!
죽도를 내리누르는 것과 동시에 나아간다.
소리마저 거의 엇비슷하게 들렸을 만큼 유사한 찰나에 이루어진 격자!
이순간, 백성호는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지금 그의 기술은 한없이 완성에 가깝노라고.
본디 기술이란 완성이 없고, 그저 그를 향해 나아갈 뿐이나, 만약 완성이라는 게 있다면 지금 그가 내지른 것이 가장 가까울 것이라고!
“하-아-아-앗-!”
체감 시간이 한없이 늘어지기 때문일까.
자신이 내뱉은 기부림 소리가 마치 망가진 테이프 속 소리처럼 들려왔다.
그것을 들으면서도, 백성호는 방심하지 않았다.
처음, ‘이겼다’라고 생각하다가 패배한 이래, 그는 심판이 자신의 승리를 알리기 전까지 절대 안심하지 않는 성격이 된 까닭이다.
필시 그 덕분이었으리라.
호면 너머, 새카맣게 빛나는 이성현의 눈을 보고 오싹함을 느낀 것은.
‘위험!’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몸이 반응했다.
완성에 가깝다고 자찬했던 기술을 억지로 어그러뜨리며 필사적으로 허리를 뒤튼다.
죽도의 궤적이 틀어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일 초를 열 개로 쪼개쓰는 것 같은 체감 시간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행동이지만, 그는 끝끝내 해냈다.
오롯이 재능으로 이루어진 폭거.
하지만 그 덕에.
사아앗-!
아래에서부터 치솟아 오른 죽도를 피해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분명 모든 게 느리게 보이는 체감 시간 속에서도 명백히 ‘빠르다’라고 느껴지는 공격에 백성호에게 전율이 짜르르 흘렀다.
만약 그가 위험을 감지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이 됐기 때문이다.
반격에 목을 찔리고 무너져 내렸을 테지.
“──”
“──”
두 개의 죽도가 모두 빗겨나간 와중.
성현과 백성호의 시선이 교차했다.
하얗고, 검은 불꽃이 담긴 눈.
‘아.’
그걸 본 백성호는 알게 되었다.
지금 자신이 들어선 경지가 결코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언제나 그렇듯 이성현은 그의 앞에 서서 그를 돌아보며 자신에게 도달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거다.
‘······그래, 이렇게 쉬울 리가 없지.’
스스로조차 놀란 발전이 결국 상대의 손아귀 내였다는 절망적인 상황.
하지만 백성호에게 좌절은 없었다.
이미 이성현이라면 그럴 지도 모른다는 예상도 있었을뿐더러, 천재에게 그런 감정은 허락되지 않기도 했다.
지금의 경지가 상대의 상정 내라면, 이조차 넘어서면 그만.
그는 할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이기에.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아니, 1초 전보다 지금이, 지금보다 1초 후가 더 강한 그였으니까!
"하아아앗-!"
수 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