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장전된 총
“-시작!”
단호히 울려 퍼지는 심판의 시작 구령.
그러나 이전의 시합들과는 달리 이번에는 섣불리 움직이는 이가 없었다.
대현과 심재경 두 사람 모두 차분하게 서로에게 다가서며 칼끝으로의 공세에 집중했을 뿐, 타돌로 기선을 제압하려 들지는 않은 것이다.
시작부터 이어진 대치 상황에 심재경은 물론이요, 많은 관객이 의외라고 생각했다.
평소 대현은 타돌을 특기로 삼고, 또 시작과 동시에 득달같이 달려들기를 즐겼던지라, 이처럼 냉철하게 공세부터 가하는 모습이 낯선 까닭이다.
‘쫀 건가?’
심재경이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일단 치고 들어가는 검도 스타일이었던 대현이 몸을 사리는 듯이 보였으니.
‘하긴, 상황이 상황이니-’
자신이 패배하면 팀이 그대로 패배하는 상황.
아무리 대현이라 해도 엄청난 중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테니, 평소처럼 거침없이 타돌을 시도하기는 힘들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불리한 상황에서 공격적으로 나서기보다는 일단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생각을 먼저 하기 마련이므로.
게다가 검도에는 무승부라는 규칙이 존재했다.
‘버티기만 하면 된다’라고 생각하고 수비적으로 운영하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
“······.”
정적 속에서 이어지는 대치 상황.
심재경이 먼저 기회를 몇 번 주었음에도 대현은 그 이득을 살리기보다 뒤로 한발 물러서는 것을 택했다.
다른 경기에서는 단숨에 타돌을 시도하였을 만한 기회였는데 그걸 포기한 거다.
이쯤 되면 대현의 의도는 명백했다.
무승부를 원하는 것일 터.
‘부장전과 주장전에서 이기면 3승 1무 3패가 돼. 그럼 대표전에서 이성현이 한 번 더 나올 수 있다는 계산인가.’
잇는 순서인 5위의 역할에 충실한 계산이다.
만약 이 추측이 옳다면, 이제 선택권은 심재경에게 주어진 셈이었다.
무승부가 목적인 상대는 공격을 최소한으로만 하고, 되도록 방어에만 충실할 테니까.
‘자, 그럼 어떻게 한다.’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다.
‘무리하지 않고 무승부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공격을 통해 기회를 얻어내느냐.’
심재경은 이내 날카롭게 웃었다.
말이야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니 어찌하니 했지만, 결국 그가 택할 길은 하나뿐이었기에.
여기서 상대를 잡고 경기를 끝낸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손으로 이 경기의 종지부를 찍으리라.
마음을 정한 심재경이 죽도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가 그런 선택을 하기를 누구보다도 대현이 원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채로.
‘걸렸나?’
웅크린 채 심재경의 기색을 살피던 대현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공세가 적극적으로 변한 것을 느낀 까닭이다.
이전까지는 ‘이래도 안 와?’라고 약 올리는 듯했다면, 이제는 ‘그럼 내가 간다!’라고 윽박지르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러한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탓!
“흐아아압-!”
기회를 잡은 심재경이 기부림을 내지르며 과감하게 달려들었다.
상대의 죽도를 툭 내리누르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진 지독하리만치 날카롭고 단호한 격자!
경중고 주전으로 뽑혔다는 건 고교 검도계에서도 알아주는 강자라는 말이 있다.
심재경은 그 말의 산증인과도 같았다.
당장 내지른 기술의 수준이 어지간한 고교 주장과 비교할만 했으니.
타아악-!
그러나 대현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심재경의 격자를 막아냈다.
이미 각오하고 있던 바,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생각보다 견고한 기술적 완성도가 놀랍긴 했지만, 그뿐.
기술의 궁극이라 할 수 있는 끝판왕 성현에게 철저하게 훈련받은 대현을 당혹게 하기에는 아직 한참 부족했다.
“흐아아압-!”
주도권을 쥔 심재경은 계속해서 몰아쳤다.
시작한 이상 끝을 보려는 것처럼.
반면 대현은 이렇다 할 반격 의사조차 드러내지 않고, 철저히 수비적으로 경기를 이어나갔다.
자신의 목적이 대놓고 무승부라는 것을 암시하는 모습이었기에 심재경의 공격은 더욱 거칠어졌다.
제대로 기세를 탄 것이다.
“······.”
묵묵히 상대의 격자를 막아내며, 대현은 기회를 엿보았다.
그는 현성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세를 탔다는 게 꼭 좋은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던 가르침을.
물론 제대로 기세를 타고 몰아붙여서 이긴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만약 그러지 못할 때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고 했지.’
바로 지금의 심재경처럼.
기세를 살려 계속해서 몰아치니 동작이 커졌다.
동작이 커지면 힘을 싣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기술적 완성도는 떨어지기 마련.
만약 이기고 있는 상황이 아니거나, 대현이 무승부를 노리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면 심재경도 곧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좀 더 여유롭게 공격을 이어나갔으리라.
어디까지나, 그랬다면 말이다.
심지어 지금 심재경에게는 자신의 손으로 결승전을 끝맺고자 하는 욕심까지 있었다.
그 상황에서 냉정하게 자신의 동작을 살펴 지나치게 과감해졌다는 걸 깨달을 만한 학생 선수는 많지 않았고 심재경은 그중 하나가 아니었다.
‘지금!’
"이야아압-!"
경기 시간이 절반 이상 흐르고.
마침내 후반에 들어섰을 무렵.
기다리던 기회가 도래하였음을 깨달은 대현이 심재경의 죽도를 빗겨내며 자신의 죽도를 내질렀다.
치면 치는 대로 맞기만 하던 대현의 반격이 심재경을 깜짝 놀라게 했느냐, 하면─
‘이럴 줄 알았지!’
─그건 아니었다.
유리한 와중에도 상대가 반격을 나설 수 있다는 걸 분명하게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몰아치고 있다 해서 반격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바보는 경중고의 주전이 될 수 없으니.
심재경은 기다렸다는 듯이 죽도를 끌어당기며 대현의 공격을 막으려고 시도했다.
“─!”
심재경이 예상치 못했던 건, 대현이 지옥 훈련을 통해 얼마나 성장했는지였다.
승룡기 검도 대회에서의 치욕─본인들이 생각하기에 그랬다는 거다─ 이후, 대현을 비롯한 광천고 주전들은 성현에게서 엄청나게 훈련받았다.
합숙 훈련 당시 수민이 받았던 때보다 더한 강도로, 춘계 전국 대회가 시작하기까지 계속.
그를 통해 발전을 거듭한 성과는 춘계 전국 대회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고, 승리의 경험을 쌓으며 대현은 더욱 발전했다.
심재경의 생각보다, 훨씬 더.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타아악-!
“백색! 손목!”
경기 종료가 슬슬 아른거릴 즈음에 터진 득점.
그 주인공은 경기 내내 몰아치던 심재경이 아니라, 전과 달리 수비적으로 굴던 대현이었다.
참고 참았다 내지른 단 한 번의 반격으로 선취점을 올린 것이다.
‘당했다.’
그제야 모든 상황을 깨달은 심재경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확실한 승리를 위해 상대가 파놓은 함정에 자신이 신나서 들어갔음을 깨달아 버린 까닭이다.
남은 경기 시간도 아슬아슬한데, 뚫어내기도 힘들뿐더러, 설령 죽을힘을 다해 뚫어낸다 해도 1대1 무승부에 그치고 말 터.
상대의 의도대로 놀아났음에 심재경은 분노하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러나 그건 대현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안일하게 굴었던 스스로에 대한 분노였다.
‘어떻게든 뒤집어야 해. 아니라면, 최소한 무승부라도 되어야 한다!’
이를 악문 심재경이 어떻게든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 했으나, 그것을 받아줄 대현이 아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결국 추가 득점은 없는 상태로 경기는 끝.
1대0으로 대현이 승리를 가져갔다.
1승 3패로 몰려 있던 광천고에 숨통을 틔워주는 꿀맛 같은 승리였다.
“이기고 왔다.”
“굿. 잘했어.”
경기를 마치고 내려온 대현이 윤호와 주먹을 가볍게 맞부딪쳤다.
그를 보며 씩 웃은 대현은 활짝 웃고 있는 영준을 한 차례 쓱 훑어보더니, 이내 윤호의 어깨를 짚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꼭 이기고 와라. 윤호 네가 이겨야 쟤 놀려 먹을 수 있으니까.”
‘쟤’가 누구인지는 뻔했다.
대현과 윤호가 이긴다면, 3학년 트리오 중에서 이기지 못한 이는 딱 한 명뿐이었으니까.
중견 시합에서 진 영준이 미간을 꿈틀거렸다.
“손대현, 너어-”
“어허! 어디 진 녀석이 입을 열어!”
““죄송합니다.””
“아니, 너희한테 얘기한 거 아냐. 얘들아!”
“아이고- 진 사람들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안 그래, 후배님들?”
““죄송합니다···.””
“아니라니까!”
영준을 놀려먹으려다가 본의 아니게 1학년들을 시무룩하게 만든 대현이 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영준이 낄낄대며 비웃었고, 수민과 성현도 1학년들이 곁들여진 3학년들의 만담에 어렴풋한 미소를 머금었다.
경기를 나설 준비를 하던 윤호 또한 그 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
“좋아, 그럼 가볼까!”
“이기고 와라!”
“꼭 이겨!”
““응원하겠습니다!””
부원들의 응원을 등에 업고 나가려 하던 윤호가 문득 고개를 돌려 물었다.
“···나 이기고 오면 엄청 놀릴 건데. 괜찮겠냐?”
“···하아- 그래! 이 자식아! 이기고 오면 마음대로 놀리게 해줄 테니까 이기고 와!”
“푸하핫!”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영준과 빵 터진 대현을 뒤로 한 채, 윤호는 언제나처럼 냉정한 인상으로 시합장으로 나섰다.
절대 패배해서는 안 되는 절박한 상황임에도 불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설령 자신이 진다 해도 부원들이 아쉬워할지언정 따뜻하게 맞아줄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진 영준이처럼 말이지.’
피식 웃은 윤호가 상대를 바라보았다.
경중고의 부장, 김민재.
익숙한 얼굴이었다.
졸업한 현성이 부장을 맡고 있었을 때부터 경중고의 부장이었던지라 그가 경기하는 모습을 몇 번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인즉, 2학년 때부터 전통의 강호 경중고 검도부에서 부장을 맡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길 수 있을까.’
막강한 상대에게 불안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날숨 한 번에 쓸모없는 감정들을 모두 털어낸 윤호는 중앙을 향해 나아갔다.
‘이겨야 해.’
주장까지 순서를 이어주기 위해.
그게 부장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역할이니까.
윤호의 얼굴에 차분함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피땀 어린 노력의 성과를 보여줄 때였다.
이겨야 할 때 끝끝내 이기지 못했던 작년의 한을 지금 이 자리에서 풀어내리라···.
마침내 심판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두 사람.
그들의 검도 스타일은 비슷한 면이 많았다.
영준의 ‘작은 머리치기’나, 대현의 ‘타돌’처럼 특별한 무기는 없지만, 단련된 공세를 기반으로 안정적인 운영을 추구하는 것이 특히나 그랬다.
따라서, 마침내 심판의 시작 구령을 들은 그들이 공세 대결로 들어간 건 당연한 흐름이었다.
스으으-
갑작스러운 타돌도 없고, 강렬한 기부림도 없다.
그런데도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압박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총알이 장전된 총이 겨눠져 있는 모습은 보는 사람을 저도 모르게 긴장시키기 마련이다.
그게 누군가를 쏠 준비를 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서로를 향해 겨눠져 누가 먼저 쏘고 맞출지 대결하고 있을 때는 더더욱.
지금 대치하고 있는 윤호와 김민재처럼 말이다.
“······.”
“······.”
살 떨리는 대치가 이어졌다.
이는 두 사람의 공세 능력이 거의 대등한 탓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서로가 공세에서 취한 이득을 굴리는 경기 운영을 하는 까닭에 공세에서 승기를 취하지 못하다 보니 그대로 고착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이게 윤호에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현재 성적은 2승 3패.
즉, 그가 패배하지만 않으면 주장인 성현에게까지 순서를 이어줄 수 있고, 그러면 공식전 전승의 괴물이 승리를 가져다줄 테니─
마침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