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그래도, 한다
“······.”
백지호는 앞에 선 최영준에게 시선을 향했다.
호면 너머로 딱딱히 굳어 있는 얼굴이 보였다.
한 번 비기고, 한 번 이겼던 상대.
어찌 보면 이미 넘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무시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방심하지 마라!’라는 가르침을 어려서부터 받아왔을 뿐만 아니라, 광천고 주전들은 전에 이겼다 해서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쳤다고 생각해서 안심하고 있으면 어느 사이엔가 다가와 뒷덜미를 잡아채는 이들이었으니.
비단 최영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성현이 불쑥 튀어나온 뒤부터 광천고 주전들은 뭔가 달라졌었다.
주장 자리에서 선봉으로 간 정철의 변화는 굳이 말할 것도 없고, 약소부의 그저 그런 주전들이었던 이들조차 무슨 가르침을 받았는지 빅4의 주전들과 대등하게 싸웠으니 말이다.
만약 그들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광천고가 고교 최강 타이틀을 가져가는 일도 없었으리라.
단체전은 혼자 힘으로 이길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음···.’
문득 ‘이성현이라면 또 모른다.’라는 생각이 드는 건, 아마 그에게 너무 많이 압도된 탓이리라.
백성호는 저도 모르게 쓰게 웃고 말았다.
상대에게 괜한 오해를 줄까 싶어 금방 다시 무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그래도 역시···.’
눈을 가늘게 뜬 백지호가 최영준을, 자신의 앞에 선 상대를 응시했다.
결승전까지 올라온 검도부의 주전.
실력은 이미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광천고가 아직 약소부일 때조차 빛나던 재능이니, 한국 학생 선수들의 수위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래, 분명 그럴진대─
‘···전혀, 질 것 같지가 않아.’
딱히 최영준을 얕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방심을 한 건 더더욱 아니었고.
그저, 이렇듯 마주 서보니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절대로 패배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만약 이번 춘계 전국 대회 4강전을 보지 않았던 때의 백지호였다면 이 정도로 강렬한 확신은 갖지 못했으리라.
기껏해야 자신이 좀 더 우위에 있다고 판단하는 데 그쳤을 테지.
하지만 지금은- 김규호가 끝끝내 백성호와 이성현 두 사람만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는 걸 본 지금은 달랐다.
“──.”
아직도 뇌리에 선명했다.
오롯이 천재들만의 권리라 생각하여 반쯤 포기하고 있던 영역, 거기에 김규호가 들어서는 모습이.
그건 백지호에게 있어 엄청난 충격이었다.
몇 년간 이어진 패배로 인해 은근히 그를 잠식해 가던 체념마저 한순간에 싹 날아갔을 정도로.
백지호가 아는 김규호는 절대 천재가 아니다.
기껏해야 그와 같은 수재 정도에 그치리라.
그런 이가 오직 자신의 노력만으로 천재들의 영역에 발을 들였고, 이성현과 역대급 명경기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내심 형편없이 깨질 거라 예상했던 백지호였기에 더욱 충격적인 결과였다.
자신과 같다고 내심 생각했던 이가, 자신이 포기했던 일을 이루어내며, 목표로 삼았던 이들과 같은 선상에 서고야 만 것이니.
경악.
그다음에 온 건 우습게도 환희였다.
같은 수재인 김규호가 할 수 있다면, 자신 또한 할 수 있다는 뜻이었기에.
백지호를 더 나아가지 못하게 옭아매고 있던 체념의 사슬이 마침내 산산이 깨어져 나간 것이다.
김규호라는 명확한 근거를 가진 확신으로써.
“후우우···.”
요컨대, 비로소 각오가 됐다는 이야기다.
반쯤 포기하고 있었던, ‘형을 이긴다’라는 목표에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마음가짐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겨우 마음가짐이 좀 변했다 해서 뭐가 달라지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나 명확한 의지를 품고, 모든 것을 바칠 각오를 한 이와 그렇지 않은 이의 차이는 감히 비교하는 게 우스울 정도로 크다.
눈앞에 보이는 불구덩이에 들어갈 각오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니까.
바로 직전까지의 백지호에게는 그러한 각오가 부족했었다.
형과 함께 검도를 시작한 초등학생 이후, 단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다는 사실이 그를 점차 좀먹어가고 있던 까닭이다.
‘전’에는 그러다 백성호가 불의의 사고로 죽었고, 이미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이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여 그저 그런 검도인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고.
하지만 김규호가 직접 보여주지 않았던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럼 해야지.’
분명 어마어마하게 힘들고 고될 것이다.
백성호는 물론, 이성현이라는 더한 괴물까지 이기기 위해서 얼마나 피땀 흘려 노력해야 할지 짐작도 되지 않았으니.
이쪽이 한 걸음을 걸어나갈 때 저쪽은 두, 세 걸음씩 나아갈 테니 잠시도 쉬어서는 안 될 터.
끔찍한 여정이 될 거란 건 정말이지, 뻔했다.
‘그래도, 한다.’
그런데도 포기라는 선택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죽을힘을 다하고, 그리하여 설령 아무것도 못 이룬 채 죽을지언정, 도전하고 싶었다.
검도인으로서의 백지호가 가진 자존심을 걸고.
백성호고, 이성현이고, 김규호고 간에 전부 때려잡고 그 위에 서서 자신이 최고라는 외침을 내지르고 싶은 욕망이 들끓고 있었다.
만약 그를 위해 수라가 되어야 한다면, 기꺼이 그리 할 수 있을 만큼.
‘반드시 해내고 말겠어!’
성현이 가장 먼저 시도했던 ‘새싹 밟기’의 대상이 마침내 활짝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시작!”
“으랴아앗-!”
이윽고, 심판이 시작 구령을 외쳤을 때.
백지호는 망설이지 않고 나아갔다.
대비하고 있던 최영준마저도 깜짝 놀랐을 만큼 날카로운 타돌이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고, 백지호가 내지른 죽도가 깔끔한 궤적을 그리며 최영준의 머리를 노렸다.
보는 이조차 등골이 서늘할 만큼 사납고 흉포한 기세는 덤이었다.
물론, 가만히 당하고 있을 최영준이 아니다.
생각 이상으로 위협적인 기세에 잠시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점수를 내어줄 이유는 없었으니까.
최영준은 달려오는 백지호를 향해 마주 전진하며 양 주먹을 다소 비스듬히 위로 들어 올려, 자신의 죽도를 궤적에 끼워 넣었다.
타아악-!
죽도와 죽도가 맞부딪치며 특유의 대나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담긴 힘을 증명이라도 하듯 쩌렁쩌렁한 소리였다.
“으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묵직한 감촉에 최영준이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과장 좀 보태면 백지호가 휘두른 죽도가 대나무가 아닌 쇳덩어리 같을 지경이었다.
그럴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느껴지기에 그렇다는 거다.
“으랴아앗-!”
심지어 백지호의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달려든 기세를 그대로 살린 몸 받음을 시도했고, 이미 한 번 흐름을 내어준 최영준은 어쩔 도리 없이 그것을 받고 말았다.
절로 헛숨이 튀어나오는 충격!
타돌의 여력을 그대로 살린 몸 받음에 최영준이 주춤 두어 걸음 물러났다.
백지호가 원했던 그대로.
‘기회!’
“으랴아아앗-!”
한 번 잡은 주도권을 쉽사리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백지호는 쉴 새 없이 최영준을 몰아쳤다.
연격에서 몸 받음으로, 거기서 다시 연격으로.
물 흐르듯 이어지는 공세의 흐름은 최영준이 반격할 틈조차 찾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전에 붙었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수준이 되어버린 상대의 실력에 최영준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크윽-!”
‘백지호가 원래 이렇게 강했나?’
엄밀히 말해서, 백지호와 최영준 두 사람의 실력은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
누가 이기든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런데도 백지호가 최영준을 압도하는 듯 보이는 건, 기백으로 그를 짓누르고 있는 까닭이다.
주도권을 잡았다는 건 부차적인 문제일 뿐.
가장 기본인 마음가짐에서 밀리니 동등한 실력에서도 밀릴 수밖에 없는 거다.
“흐음.”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성현은 단숨에 그 사실을 눈치챘다.
‘과연, 이런 느낌인가···.’
이전부터 백지호 특유의 지칠 줄 모르는 투지를 좋게 봤던 성현이다.
따라서, 지금 백지호가 보여주고 있는 발전은 그에게 있어 굉장히 바람직하게 느껴졌다.
‘전’의 무기력한 백지호를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심지어 이건 그가 했던 ‘새싹 밟기’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되려 이상한 일이리라.
‘이번에는, 아니 이번에도- 인가? 여하튼 영준이 형이 지겠네.’
성현은 그리 생각했고, 과연 경기는 그가 예상했던 것과 같은 결말을 맞이했다.
주도권을 쥔 백지호의 공세를 꾸역꾸역 막고 있던 영준이 이내 아차 하는 사이 무너져내리고 만 것이다.
아주 짧은 순간 방어하던 영준의 집중력이 끊어졌는데, 백지호는 그걸 놓치지 않고 물어뜯었고, 그대로 득점으로 이어갔다.
그리고 경기는 그대로 끝났다.
최종적인 결과는 1대0으로 평범했지만, 시합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모두 알았다.
이번 중견전이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백지호의 뜻대로 이루어졌음을.
‘다음에 볼 때가 기대되는걸.’
성현은 백지호의 뒷모습을 보며 옅게 웃었다.
내년에는 백성호가 졸업할 테고, 그럼 경중고의 주장을 맡는 건 백지호가 되리라.
말인즉, 한 꺼풀 벗은 백지호를 직접 상대해볼 날이 그리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그날이 벌써 기대가 됐다.
“······미안하다.”
되돌아온 영준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그의 안색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주전 중에서 승리조 역할을 맡고 있던 자신이 패배했으니, 뒤에 있는 이들에게 엄청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아는 까닭이다.
하다못해 비기기라도 해야 했건만, 그조차도 하지 못했으니···.
“걱정하지 마. 아직 끝난 거 아니잖아.”
“우리가 다 이기면 성현이한테까지 이어갈 수 있어. 그럼 되는 거야.”
“너희들-.”
히죽 웃으며 영준의 등을 세차게 두드린 대현이 사레들린 듯 콜록거리는 그를 보며 키득거렸다.
“내가 이기고 올 테니까 딱 기다리고 있어.”
4강전에 이어 또다시 벼랑 끝까지 몰린 상황.
하지만 대현은 오히려 마음이 들뜸을 느꼈다.
‘극복하는 맛’을 알아버린 탓이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상대가 강할수록, 그를 이기고 암울함을 타개한 뒤 느낄 성취감은 크다는 걸 그는 경험으로 배웠다.
이번에도 다를 건 없었다.
위기는 극복하면 그만이니.
대현이 성큼 걸음을 옮겨 경기장에 나섰다.
‘자, 어디 한 번 볼까.’
자고로 단체전에서 ‘잇는 순서’란, 나쁜 흐름은 끊어내고 좋은 흐름은 이어가는 역할.
지금처럼 상대방이 승기를 가져갔을 때는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번쩍 들게 해주고, 빼앗긴 흐름을 되찾는 게 5위의 몫이었다.
이제는 졸업한 선배, 장현성에게서 배운 것들을 떠올린 대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
“······.”
시합에 앞서 허리를 꾸벅 숙이는 와중에도 대현의 시선은 끊임없이 상대를 살폈다.
기세를 탔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앞으로 딱 한 번만 이기면 된다, 그런 생각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마음을 놓게 되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아직은 괜찮아.’라며 생각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지고 있는 팀의 잇는 순서가 노려야 할 부분은 바로 그곳이라고, 장현성은 대현에게 말했었다.
‘걸음걸이에 힘이 꽉 들어갔어. 자기 차례 때 끝을 보고 싶은 거겠지.’
대현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아주 작긴 해도, 분명한 틈이 보였다.
장전된 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