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발전
“아쉽네.”
선봉전에서 패배한 정대진이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왔을 때, 그의 등을 두들기며 백성호가 말한 건 그게 전부였다.
딱히 더 해줄 말도 없었을뿐더러 수민의 변화를 보고 이미 패배를 직감했던 까닭이었다.
오늘 수민이 보여준 모습은 백성호조차 제법 놀랐을 정도였으니까.
언젠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을지도 모를 적.
내심 그렇게 평가했을 정도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질만 했어.’
만약 4강전의 수민이라면 정대진도 꽤 좋은 승부를 펼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의 수민은 이야기가 달랐다.
승화를 통해 변화한 그는 정대진의 실력으로는 어찌 비벼볼 수도 없을 만큼 차이가 났으니까.
경중고에서는 백성호 자신이나, 혹은 동생인 백지호가 나서야 겨우 승부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가 말한 “아쉽네.”의 뜻은 하필 딱 이 타이밍에 상대가 각성했다는 게 아쉽다는 거고, 시합에서 아쉽다는 건 절대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그걸 입 밖으로 낼만큼 백성호는 인간관계에 무지하지 않았다.
흔히 천재는 괴짜라 그런 걸 막 내뱉는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최소한 검도를 하는 이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속설이었다.
검도는 예시예종(禮始禮終)의 무도(武道)이기에.
‘예(禮)로 시작해(始) 예(禮)로 끝맺는다(終)’라는 그 말처럼, 검도는 시작 전 · 후부터 지도받기 전 · 후, 검을 뽑기 전 · 후에 이르기까지 전부 인사로서 예절을 지켰다.
그런 검도를 수련하면서 인간관계에 무지한 괴짜 천재가 될 수 있을 리가.
“다음에는, 다음에는 꼭 이길게요. 성호 형.”
“그래. 그러면 돼. 지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는 거야. 알겠지?”
“네!”
다시금 가볍게 등을 두드려 정대진을 격려해준 백성호가 다음으로 바라본 건 다음 시합 순서인 안정철이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안정철은 특유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삼 년간 함께 지낸 그들은 굳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지 않고,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 말하고 싶은 걸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절대로, 지면 안 돼. 알지?’
‘당연하지.’
백성호를 응시하는 안정철의 눈빛은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숙지하고 있음을 속삭였다.
그렇기에, 백성호가 내뱉은 건 딱 한 마디였다.
“믿는다.”
“그래.”
짤막하게 대답한 안정철이 견고한 걸음걸이로 경기장으로 나아갔다.
마침 반대편에서도 상대가 올라오고 있었다.
서로를 향해 다가서는 짧은 순간.
안정철은 상대를 조사한 것들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정리해보았다.
광천고에서 갑자기 순서를 바꾸지 않는 한 자신의 상대가 될 것이 분명했던 만큼 그를 집중하여 조사했기에 정보는 제법 많았다.
‘김은우. 올해 광천고에 입학한 1학년. 중학교 최강 검도부인 재영 중학교 출신.’
중학교 때부터 끗발 날리는 유망주.
딱히 특별한 정보는 아니었다.
백씨 형제도, 김규호도, 강찬울도 모두 중학교 시절부터 알아주는 유망주였고, 당장 안정철 본인 또한 그러했으니까.
아마 고교 검도계에서 이름 좀 있는 유망주들 대부분은 그러하리라.
‘···이성현은 고1 때부터 시작했었나.’
지극히 드물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긴 하지만, 여하튼.
‘승룡기 검도 대회 때 주전 합류, 춘계 전국 대회까지 총 2회 출전. 경기 기록은 그리 안 좋고- 그래도 간간이 활약하긴 했지.’
간단히 말해, 아직 실력은 부족하지만, 재능은 넘치는 중학교 유망주 수준이라는 거다.
“······.”
“······.”
꾸벅.
시합장 중앙으로 가기 전, 가볍게 인사를 하며 안정철은 표정을 더 단단히 굳혔다.
패배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을 놓고 있다가 허를 찔렸다든가, 상대를 얕보고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따위의 변명은 절대 용납되지 않았다.
상대는 현재 광천고의 뚜렷한 약점!
훗날에는 어찌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즉, 반드시 후벼 파야 한다는 뜻이다.
경중고의 승리를 위해서는.
‘무조건 이긴다.’
용암고의 2위도 해낸 일.
경중고의 2위가 해내지 못할 리가 없다!
왜냐하면─
‘경중고는 용암고보다 더 강하니까!’
“으아아압-!”
단호하게 기부림을 내지르며 달려든 끝에, 안정철은 결심했던 대로 김은우를 꺾어내며 승리를 가져갔다.
선봉전에서 광천고를 향해 기울어졌던 저울이 다시금 평행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이 결과가 예상외라고 보는 이는 적었다.
은우와 서준은 이미 앞선 경기들에서 그리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고 있었고, 당연히 고교 검도계의 베테랑이라 할 수 있는 경중고 3학년을 상대로 이기리라 생각하지 않은 탓이다.
“음.”
승리를 거둔 안정철은 여전히 견고한 걸음걸이로 주전들에게 돌아왔다.
딱히 요란한 축하는 없었다.
경중고 주전들은 당연히 그가 승리하리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이제 막 고등학교로 올라온 새파란 풋내기─설령 중학교 최강의 검도부 소속이었다 해도!─에게 강호 경중고의 주전이 패하는 일은 없을 테니.
안정철 또한 담담한 태도를 고수하며 백성호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좋았어! 이번에는 제 차례네요!”
새롭게 경중고의 주전이 된 2학년, 한철수는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2위인 안정철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으니 이제 그가 나서서 상대를 쓰러뜨릴 차례였기에.
호면을 쓴 채 이리저리 몸을 푸는 그는 꽤 경박해 보였지만, 백성호는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여기는 꼭 이겨야 해.”
“당연하죠, 주장! 걱정 붙들어 매세요. 정철 선배처럼 단번에 박살 내버리고 오겠습니다! 올해 입학한 1학년한테 질 수는 없죠! 하하!”
“···너무, 무시하지는 마라.”
히죽대며 말하는 한철수를 보며 백성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그리 걱정되는 표정은 아니었는데, 검도부를 이끄는 주장인 만큼 한철수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늘 실실 웃고, 경박하고 체통 없는 데다가 은근히 잔머리도 잘 굴리지만, 검도만큼은 진심인 소년.
그게 바로 한철수였으니.
실제로 경기장으로 나아가는 한철수의 표정은 언제 히죽거렸냐는 듯 차분했다.
심판의 구령이 외쳐졌을 때가 아니라, 경기장에서 서로를 향해 다가서는 그 순간부터 시합이 시작된다는 생각을 하는 그였기에, 기어를 곧장 시합용으로 돌린 까닭이다.
이 정도가 아니었다면 전통 있는 강호 경중고에서 주전을 맡지 못했으리라.
“후우우-”
상대를 향해 허리를 숙인 한철수가 천천히 경기장 중앙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시합을 지켜보는 관객들의 시선이 송곳처럼 온몸을 찔러 드는 게 느껴졌다.
물론 눈빛에 그런 힘이 있을 리가 없으니, 분명 그의 착각일 테지만.
‘전국 대회 역사상 가장 많은 숫자의 관객들이 모였다고 했지?’
한철수는 씩 웃었다.
심장이 기분 좋게 뛰고 있었다.
이렇듯 많은 이들의 앞에서 실력을 발휘할 생각을 하니 벌써 기분이 좋아진 까닭이다.
그리고 그건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본인의 실력으로 관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으니 지켜보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게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한 번 제대로 놀아볼까!’
“끼야아앗-!”
서준과 한철수의 시합은 누군가 완벽하게 압도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압도적 베테랑인 안정철과 이제 갓 고등학교에 입학한 은우 구도와는 달리,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아직 날개를 완전히 펴지 않은 유망주였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끼야아앗-!”
“윽!”
타악!
치열하게 진행되던 3위 시합의 행방을 결정지은 건 경험의 차이였다.
1학년과 2학년.
두 학년 사이에는 절대 메울 수 없는 일 년이라는 간극이 존재했다.
봄-여름-가을-겨울이 모두 지날 만큼의 시간.
재능 면에서는 서준이 더 뛰어났지만, 그는 그것을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기를 만한 시간이 부족했고, 그 차이가 결국 승패를 가른 것이다.
경중고가 또 한 번 더 승리를 거두었다.
‘일 년, 아니 반년만 더 있었어도-’
뒤돌아 내려가는 한철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준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는 은우처럼 안정철 같이 압도적으로 경험이 풍부한 이에게 패배한 게 아니었고, 그래서 더욱 괴로웠다.
조금 더 차분하게, 조금 더 냉정하게 대처했다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믿어준 선배님들과 감독님, 그리고 응원해주신 팬분들께 조금이나마 보답할 기회였건만 그걸 이처럼 날려버리다니.
“젠장···.”
자괴감에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돌아온 서준을 맞이한 건 성현이었다.
호면 너머로 보이는 찡그린 얼굴에 성현은 별말 없이 서준의 어깨를 두드려 격려했다.
패배 앞에서 가장 괴로운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이다.
진정한 재능을 깨닫기 전까지, 자신보다 강한 이들에게 셀 수도 없이 많이 졌던 성현은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억지로 달래주며 응원하느니, 패배를 곱씹고 다시 일어나는 걸 기다리는 게 낫다는 것 또한.
‘가끔은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
만약 서준이 그 정도로 나약하다는 게 밝혀진다면 성현은 이번과 마찬가지로 별말 없이 주전에서 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검도에서 성현의 잣대는 잔인하리만치 엄격했기에.
여태 해온 ‘새싹 밟기’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일단 되는 대로 짓밟은 뒤, 일어서는 이들을 만족스럽게 키운다는 미친 계획이 바로 작년에 그가 했던 ‘새싹 밟기’였으니.
이번 일을 계기로 무너진다면 서준도 그저 그중 하나, 밟혀 일어서지 못한 자가 될 뿐이다.
‘뭐, 그럴 일은 없겠지.’
가볍게 잡념을 털어낸 성현이 이제 나갈 중견, 최영준을 바라보았다.
영준은 답지 않게 꽤 긴장한 표정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성현이 알기로 영준과 백지호 중에서 상대 전적 우위를 가져간 건 백지호 쪽이었으니까.
한 번 비기고, 한 번은 백지호가 이겼다.
대등했다가 상대가 더 강해졌다··· 그렇게도 보이는 그림이었다.
“이길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저번 패배를 복수해야지.”
영준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리 말한 뒤, 경기장 위로 성큼 나아갔다.
반대편에서도 기다렸다는 듯이 백지호가 경기장 중앙을 향해서 다가서는 게 보였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두 사람.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성현의 눈동자가 살짝 크게 뜨였다.
‘오?’
성현은 칠십 대 노인이었던 시절, 검도 도장을 운영하며 많은 제자를 가르쳤었다.
본인의 재능인 ‘눈’을 사용한 완벽하고도 직관적인 교육은 도장에 수많은 검도인이 가르침을 청하고자 찾아오게 만들기도 했다.
달인이니, 대가니 하는 낯뜨거운 별명이 붙은 것도 그 무렵이었고.
그렇게 무려 이십여 년이 흐르고 나니, 이제 ‘척하면 척!’하고 제자들의 상태나 발전에 대해서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부상을 간파하는 건 물론,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까지도 훤히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교학상장(敎學相長)!
‘가르치면서 배운다.’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몸소 깨닫게 된 좋은 경험이었다.
‘백성호만이 아니라 이거지.’
그리고 지금.
바로 그 경지가 성현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저곳에 서 있는 백지호에게도 엄청난 변화- ‘발전’이 있었다고!
그래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