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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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에서의 패배는 충격적이었다.
당연히 이기리라 생각하고, 또 이겼어야 할 경기에서 진 것이었으니까.
상대가 용암고의 차기 주장이라든가, 일찍이 성현과도 맞붙었다든가, 한때는 백성호와도 비견되는 재능이라 불렸다든가 하는 건 무의미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패배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말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뿐.
수민은 졌다. 지고 말았다.
그것도, 성현이 이기리라 직접 말한 시합에서.
“······.”
하지만 그 사실이 수민이 가진 성현에 대한 믿음을 꺾어버렸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겨우 단 한 번의 패배로 부러질 만큼 그의 믿음은 가볍지 않기에.
바로 말해서, 그가 성현에게 갖는 믿음은 차라리 광적이라 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괜히 ‘눈이 멀었다(盲目)’라고 하는 게 아니다.
그건 이미 신앙의 영역이었다.
성현이라는 검도의 신에게 바치는 신앙!
따라서, 수민이 패배의 원인을 성현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성현이 잘못되지 않았음에도 자신은 패배했으니, 잘못이 자신에게 있으리라는 사고의 흐름은 지극히 자연스러웠으니.
만약 그게 아니라면 성현이 잘못되었다는 건데, 그건 그에게 신성모독과 마찬가지였으니까.
‘뭐가 문제였지?’
수민은 계속해서 생각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패배했는지.
그러한 그의 고뇌는 결승전이 시작되고, 선봉 순서로 경기하기 위해 나섰을 때까지도 이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또 성현이 한 번 이긴다고 말한 경기에서 패배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머저리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잖은가.
“···아.”
수민이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이 된 건, 상대- 정대진과 마주 섰을 때였다.
호면 너머로 보이는 정대진의 표정과 몸짓, 시합 전 인사에서까지도 묻어나는 자신감을 통해 답을 찾아낸 것이다.
그가 생각건대, 자신에게 존재하는 패배의 원인.
그건 바로······.
‘믿음이 부족했구나.’
······믿음의 부족이었다.
단순히 시합 전에 성현이 하는 이길 거라는 말을 더 굳게 믿어야 한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더욱 본질적인 믿음을 말하는 거다.
수민을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해준 성현의 가르침, 그에 대한 믿음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이게 내 실력이라고 생각했었어. 그게 잘못이었던 거야.’
숨겨져 있던 재능의 자각부터, 그를 이용한 경기의 운영, 더해서 상단세를 통한 재능을 극대화하는 법마저도.
현재의 수민을 만들어낸 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성현이 베풀어준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수민은 오만하게도 그게 자신의 실력이라고 생각하고 자신감을 느끼고 말았다.
마치 눈앞에 있는 정대진처럼.
아무리 무의식중이라 해도 너무나 멍청한 생각이었다.
패배하는 것도 당연하다 싶을 만큼.
“후우우-”
수민은 끈덕진 자책을 털어내려는 듯, 혹은 헛된 자신감마저 뱉어내려는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한참이나 내뱉어진 숨과 함께 텅 비어버린 속.
그 안을 채우는 건 오롯이 성현의 가르침이었다.
“전조를 봐라.”, “육체 능력은 둘째.”, “필요한 건 보는 것뿐.” 같은 기초적인 가르침부터, “한발 앞서서 움직여.”, “본 것을 토대로 예측해라.”, “앞서 보고 흐름을 끊어.” 등의 실전적 가르침까지.
성현은 합숙 훈련부터, 전국 대회 대비 훈련까지 지독할 만큼 수민에게 가르침을 새겨왔다.
토가 나올 정도로 지독한 지옥훈련을 통해서─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합숙 훈련 당시, 수민은 끝나고 구토한 적이 있었다!─.
그 덕에 그걸 떠올려 자신을 채워 넣는 건 수민에게 썩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
수민의 눈동자가 먹구름 낀 하늘처럼 흐려졌다.
이제 거기에 선 건 수민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이 아니다.
그저 성현이 벼려낸 한 자루 검일 뿐.
날카롭고, 매서운─ 명검(名劍).
성현은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이 돌고 돌아, 기어이 한 소년을 검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
겉으로 어떠한 변화가 있던 건 아니지만,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에 정대진이 흠칫했다.
전통의 강호라 불리는 경중고 검도부에서 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선봉을 차지한 정대진이다.
이는 재능과 실력을 그만큼 인정받았다는 뜻이고 그렇기에 수민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뭔가 달라졌다는 건 깨달았지만, 그는 수민이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거기까지일 뿐이거나, 혹은.
‘어쨌든 이겨버리면 돼! 강찬울도 이겼다. 내가 못 이길 이유는 없어!’
자신감이 눈을 가렸기 때문이리라.
“···시작!”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심판이 강한 어조로 구령을 외쳤다.
동시에, 정대진이 기부림을 내지르며 움직였다.
공격에 특화된 상단세에게 섣불리 기회를 내주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한 행동이었다.
실제로 4강에서는 강찬울이 수민을 상대로 이를 시도해서 꽤 많은 이득을 보기도 했다.
“우오오앗-!”
거침없이 훅 치고 들어가는 타돌.
정대진의 덩치가 비교적 큰 만큼 더욱 묵직하게 느껴지는 공격이었다.
기술적 완성도가 뛰어난 건 물론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경중고에서 선봉을 맡을 수 없었을 테니까.
“······.”
수민은 강하게 밀어붙이려 하는 정대진을 새카만 눈으로 응시했다.
위압감 넘치는 타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위기를 느낀 듯한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합이 시작하기 전부터.
─두려움은 무지함에서 오는 법.
─이미 알고 있는 공격은 두렵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합숙 훈련 당시 수민이 가장 먼저 얻은 깨달음이다.
상대가 어떻게 공격할지 ‘눈’으로 간파하고 있는 한, 그를 당황케 하는 건 불가능했다.
스윽-
손목을 노리고 휘둘러지는 죽도를, 가볍게 몸을 트는 것만으로 흘려낸다.
거리를 재는 것부터, 타이밍을 잡는 것, 피할 각을 구성하는 것까지 하나 같이 완벽한 회피!
타돌은 상대가 방어할 경우 여세를 살려 몸 받음으로 이어가는 것으로 공격의 흐름을 쥘 수 있지만, 아예 피해버리면 이야기가 다르다.
기껏 취한 흐름을 내어줄 뿐만 아니라 빈틈까지 드러내게 된다.
그것도 이처럼 완벽한 순간에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게 되면 더더욱.
먼 거리를 단숨에 좁혀 공격하는 것이니만큼,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면 어쩔 수 없었다.
‘젠장!’
“우아아앗-!”
너무나 완벽한 회피에 옆구리를 훤히 내준 상황.
정대진은 당연하게도 수민이 그의 빈틈을 찌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급히 발을 굴러 몸이 앞으로 쏠리는 것을 멈춰 세우면서 팔을 끌어당기듯 휘둘렀다.
딱히 어디를 노린다기보다는, 상대를 견제하여 자세를 추스를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그의 판단은 결코 나쁜 게 아니었다.
실제로 수민이 그의 빈틈을 찌르려 했다면 그가 휘두른 죽도에 의해 방해받았었을 테니까.
······찌르려 했다면, 말이다.
후웅-!
“······.”
호면 앞을 스쳐 지나가는 죽도에도 수민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무덤덤했다.
이 또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대진이 타돌을 시도하는 것부터, 흘려내지고 난 뒤 견제하기 위해 죽도를 휘두르는 것까지.
모조리 그가 그의 ‘눈’으로 본 그대로였으니.
‘전부 보인다.’
시합이 시작되기 전 마음을 고쳐먹었기 때문일까.
수민의 두 눈에는 정말이지 모든 게 보였다.
상대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려 하는지가.
근육의 수축이나 관절의 움직임까지 낱낱이 들여보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 발을 뻗을지, 팔을 휘두를지 정도는 훤히 보였다.
성현이 반백 년을 갈고닦아 오른 신기(神技)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나, 이 또한 남들이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기예였다!
“······!”
시합을 지켜보고 있던 백성호가 미간을 찡그렸다.
정대진의 공격을 피해내는 수민의 모습에서 익숙한 그림자를 본 까닭이다.
앞으로 그가 상대해야 할 괴물의 그림자를.
물론, 어디까지나 그림자는 그림자일 뿐, 성현에 버금간다는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만약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김수민-’
백성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진짜 반격에 나서려 하는 수민을 바라보았다.
성현에게 상단세를 배웠다는 것 외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이였는데─백성호의 기준으로 말이다─, 이제는 아니었다.
명백히 주시해야 할 대상이었다.
언젠가 그의 앞을 가로막을지 모르는.
“으음-”
“저 녀석, 나랑 상대할 때보다-”
“······흠.”
그것을 깨달은 건 비단 백성호만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백지호도, 4강전 이후 결승을 지켜보고 있던 김규호와 강찬울도, 그 외에도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수많은 이들이 알게 되었다.
괴물의 가르침을 받아먹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또 하나의 작은 괴물을.
그렇게 한순간에 많은 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수민이었지만, 그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시합에 임해서 그가 추구하는 건 성현의 말, “네가 이길 거야.”를 실천하는 것뿐이므로.
그걸 보고 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이지, 조금도.
“우오오오─!”
수민은 우렁찬 기부림과 함께 격자를 시도했다.
상대의 타돌을 흘려내고, 인내한 끝에 얻어낸 빈틈을 찢어발기려 한 것이다.
강렬하게 상대를 압도하는 기(氣)와 과함도 모자람도 없이 적절한 검(劍), 발 구름에도 중심을 잃지 않고 바르게 선 체(體)까지 완벽하게 일치한 격자였다.
발을 구르며 다가오는 수민을 보며 정대진은 이를 악물었다.
“···우아아앗!”
이것만 막아내면 된다.
그 뒤, 천천히 흐트러진 자세를 되잡고─
‘아.’
─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수민의 죽도는 그의 눈앞에 도달해 있었다.
공격에 특화되어 있는 상단세.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격자의 강력함은 직접 상대해보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한다.
하물며 성현의 가르침으로 오롯이 자신을 채우고 벼려낸 수민의 검속은 그야말로 벼락과 같으니.
감히 자세가 흐트러진 이가 받아낼 수준이 아니다.
타아악-!
“···백색! 머리!”
““와아아아-!””
심판의 선언과 함께 관객들이 환호했다.
‘불의 자세’라 불리는 상단세가 상대의 빈틈을 베어 가르는 모습은 실로 호쾌했기에.
시합 중에 달라진 수민을 보며 성현의 그림자를 느낀 건 그만한 실력이 있는 이들이었고, 그렇지 않은 일반인 검도 팬들에게는 딱 그 정도로만 보이는 경기였다.
물론, 일반인 검도 팬─어디까지나, 선수가 아니라는 의미에서─들 중에서도 수민의 변화를 눈치챈 이들도 있긴 했다.
“······끝내주는군요.”
“저거, 절대 하위호환 수준이 아니죠?”
“네, 아닙니다. 차라리 버전 2라는 말이 맞겠네요.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서 실력을 쌓으면 이성현처럼 된다는 점에서는요.”
김동안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유망주를 발굴해낸 그의 눈에는 수민이 뿜어내는 빛이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이성현이나 백성호, 김규호처럼 고유의 색으로 빛나는 건 아니지만, 언젠가 그들만큼이나 거대해질 힘을 품은 빛이.
“버전 2···.”
김동안의 대답을 들은 권도연이 짤막한 단어를 읊조리며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두 번째 판을 진행하고 있는 경기장 안.
끔찍하리만치 완벽한 반격으로 첫 번째 판을 따낸 수민이 이번에는 날카로운 공격으로 흐름을 완전히 제 것처럼 쥐고 있었다.
그녀는 홀린 듯 카메라를 들어 올려 그 모습을 찍었다.
매섭게 몰아쳐가는 수민을.
그리하여 결승의 첫 번째 경기.
선봉전에서 승리를 거둔 건 광천고였다.
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