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질긴 인연
본래 광천고 검도부와 경중고 검도부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한쪽은 전국 대회 32강도 못 뚫어내고 빌빌대는 약소부고, 다른 한쪽은 전통의 강호이자 삼 년 넘게 고교 검도계 최강의 자리를 지켜낸 검도부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두 고교 검도부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수준이었으므로, 오히려 무언가 인연이 있는 게 더 이상했으리라.
그랬던 광천고와 경중고가 얽히기 시작한 건 작년 5월 무렵이었다.
백성호가 잠시 빠졌던 경중고에서 적당한 연습 상대를 찾다 광천고까지 이야기가 흘러들어왔고, 어쩌다 보니 첫 대결이 성사된 것이다.
결과는 무승부.
물론 바닥까지 쥐어짜낸 광천고와는 달리 경중고는 상당한 여유를 남겨두었지만, 여하튼 겉으로 드러난 결과는 그랬다.
덧붙여서, 성현의 존재를 경중고가 처음으로 깨달은 것도 그때였다.
성현이 백성호를 대신하여 주장 순서로 나선 백지호를 압살해버리면서 비로소 자신을 외부에도 드러냈었으니까.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인연이 더욱 굳건해진 건 회장기 검도 대회 때였다.
비록 견고해졌다고는 해도, 인연에서 악연으로 변한 것에 가까웠지만, 여하튼 간에.
당시 광천고는 결승에서 만난 경중고를 정면에서 누르고 우승, 몇 년간 경중고가 지켜왔던 패권을 강탈하는 데 성공하고야 말았다.
고교 검도계의 패왕이라 불리던 경중고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기어코 새로운 왕이 된 것이다.
그때가 바로 광천고의 신화가 쓰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경중고라는 과거의 왕을 짓밟고 일어서면서─
이후로도 두 고교는 이래저래 자주 얽혔다.
아무래도 양측 모두 고교 검도계에서 손꼽히는 강자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추계 전국 대회에서도 회장기 검도 대회 때와 마찬가지로 결승전에서 만났고, 고교 검도계의 왕좌를 두고 치열하게 싸웠으니···.
그 결과는 광천고의 우승.
경중고를 물리친 광천고는 왕좌를 거머쥐며 누구도 부정 못 할 명실상부, 자타공인 고교 최강의 자리에 올랐다.
겨우 일 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약소부에서 고교 최강으로 올라섰다는 이야기다.
올해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두 고교 검도부의 인연은 끊어지기는커녕, 더욱 질기고 튼튼해졌다.
올해 초를 휩쓸었던 한일합작 승룡기 검도 대회.
이 대회의 4강에서 그들은 다시금 부딪쳤었다.
이때는 연승전 방식인지라 성현의 하드 캐리를 바탕으로 광천고가 또 승리를 거머쥐었고.
당시 이성현 대 백성호의 경기는 역대급 명경기라는 소리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 모두 탈고교급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시합 수준만 보면 검도 세계선수권 대회 4강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이번 춘계 전국 대회에서 김규호와의 경기 이전에는 성현이 치렀던 경기 중 최고의 경기를 꼽으라면 무조건 그 경기를 꼽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춘계 전국 대회 결승.
광천고 검도부와 경중고 검도부, 두 고교 검도부는 또다시 우승을 놓고 마주했다.
정말이지, 질긴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에도 이길 수 있겠지?’
관객석의 한쪽, 광천고 여자 검도부 부원들과 함께 응원을 온 수연은 경기장을 시선을 향했다.
경기장 안에는 광천고 검도부와 경중고 검도부의 주전들이 경기를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광천고 검도부 주전들을 보며 두 손을 기도하듯 꼭 맞잡았다.
‘이길 수 있을 거야.’
같은 도장을 쓰며 광천고 남자 검도부 주전들이 얼마나 지독한 훈련을 했는지 본 수연이다.
그랬기에 이길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법이기에.
무엇보다도, 저들은 성현에게 배우지 않았던가.
그녀가 직접 배워본바, 성현의 가르침을 반만 소화해내도 강해지는 건 순식간이다.
지독히도 들들 볶였던 저들이라면 충분히 경중고를 이겨낼 수 있으리라.
분명히.
그렇게 한 차례 승리를 기원한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성현에게 닿았다.
수민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성현을 본 그녀의 시선은 그에게 못 박힌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늘, 언제나 그랬듯이.
‘작년 이맘때 쯤에는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는데-’
문득, 작년 4월이 떠오른 수연이 작게 웃었다.
그때 성현은 주전조차 아니었고, 검도 실력도 썩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얘가 나중에 백성호도 이기는 고교 최강이 된대요!”라고 말하면 열에 아홉은 믿지 않았을 만큼.
하지만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이한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성현의 검도 실력은 터무니없는 속도로 늘어났다.
마치 이전에 갖고 있던 실력을 되찾아가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으니.
정말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덧붙여서 변한 건 검도 실력만이 아니었다.
성격도 아주 많이 변했다.
어른스러워졌다고나 할까.
무엇보다 수연이 가장 크게 그 부분을 느낀 건 성현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였다.
전에는 말만 걸어도 투덜대거나 심술궂게 무시했었는데, 바뀐 후로는 무척이나 다정해졌으니,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이리라.
“······.”
수연이 성현의 변화에 대해 뭐라 말하지 않은 간단한 이유였다.
어떻게 변했든 성현은 성현이었으니까.
변화한 성현의 근간에는 분명 그녀가 좋아했던 그 소년이 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게 아니라, 더 성숙해진 성현이 된 것일 뿐이기에, 그녀는 굳이 무어라 말하지 않았던 거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옳았다.
모든 게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갔으니.
앞으로도 더 많은 것들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굳이 예를 하나 들자면, 성현과 그녀의 관계라든가-
‘응원! 응원해야지!’
어쩐지 부끄러워진 수연이 고개를 저어 머리에 가득찬 분홍빛 잡념들을 털어냈다.
결승전을 앞두고 할만한 생각은 아니었기에.
지금은 응원을 해야 할 때였다.
애써 마음을 다스린 그녀는 옆에서 응원하고 있는 부원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광천고 파이팅-! 이성현 힘내라-!”
*
“광천고 파이팅-! 이성현 힘내라-!”
관객들이 내는 시끌시끌한 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성현이 고개를 들었다.
올라간 검도의 인기를 증명하듯 관객들이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목소리의 주인- 수연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많은 관객 사이에서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기에.
무언가 노력을 할 필요도 없었다.
어쩐지 거기에 있을 것 같은 곳을 바라보면, 꼭 그녀는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
파닥파닥 손을 흔드는 수연을 본 성현이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때로 귀여운 걸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곤 하는데, 바로 지금 수연을 바라보는 그가 그랬다.
다만 성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실은, 수연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수연을 바라보는 건 도장의 아이들을 지켜보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마음과 다를 바 없었다.
지켜주고 보듬어줄 어린아이를 보는 눈빛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열여덟이라는 나이에 걸맞게, 또래의 소녀를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이 되어 있었으니까.
노인의 정신이 젊은 육신의 영향을 받아, 점차 그 나이대에 맞는─ 아주 조금 더 성숙할 뿐인 소년이 되어가고 있는 까닭이리라.
“성현아! 꼭 이겨!”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자, 자신에게 한 행동이라는 걸 알았는지, 수연이 방방 뛰었다.
언제나처럼 밝고 활기 찬 모습이었다.
곧 주위에 있던 다른 여자 검도부 부원들에게 붙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것까지는 성현이 어찌해줄 수 없는 문제였으니.
“······.”
여하튼, 응원을 받아 마음이 충만해진 성현의 시선이 닿은 곳은 반대편, 경중고 검도부 주전들이 있는 방향이었다.
각자 의지를 다지고 있는 광천고와는 달리, 경중고의 분위기는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물론 그게 축 늘어져 있다거나, 의욕이 없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폭풍전야에 가까우리라.
폭풍이 몰아치기 전날은 되려 적막한 법.
경중고의 가라앉은 분위기는 이제 곧 시작될 시합에서 뿜어낼 에너지를 안으로 축적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건 시선만 봐도 알 수 있었다.
──.
광천고 쪽을 바라보는 위협적인 시선.
마주치는 것만으로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할 만큼 무게감 있는 눈빛!
작년, 연습 경기를 위해 광천고가 찾아갔을 때 경중고가 보여줬던 그 ‘힘 있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강렬한 눈빛을 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백성호였다.
“호오?”
‘이건 또 제법-’
성현은 통로에서 스쳐 지나갈 때, 백성호의 변화를 어렴풋하게나마 눈치챘었다.
왜냐하면, 눈빛부터가 전과 달랐으니까.
하지만 그 변화가 어떤 것인지까지는 확실히 몰랐는데, 이렇듯 시합을 위해 직접 마주하고 나니 알 수 있었다.
지금의 백성호에게서는 여유가 사라졌다.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반드시 닿을 수 있다─ 그러한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여유가.
‘정신을 바짝 조였군. 아니, 그보다는 기어를 올린 것에 가깝나?’
이전의 백성호는 어디까지나 여유로웠다.
느긋하면서도 차분했다는 뜻이다.
그건 가진 바 재능이 만들어낸 여유였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아무리 강한 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자신이 반드시 넘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여유.
성현을 상대하면서도 백성호에게서 그 여유는 은근하게 남아 있었다.
지금은 아직 질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따라잡을 수 있다는 천재 특유의 사고방식은 백성호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것이다.
십여 년에 걸쳐 형성된 그것을 떨쳐내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지금 백성호의 얼굴에서 특유의 여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딱딱하게 굳어진, 무표정한 얼굴은 언뜻 화가 난 것처럼도 보일 지경이었으니 말 다 했다.
성현을 쏘아보는 눈빛도 그러했고.
늘 옅은 미소를 머금고 다녔던 백성호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모습!
이는 평소의 그를 아는 이들에게 이질감마저 느끼게 만들 정도였고, 한창 백성호를 응원하던 관객들도 그것을 느꼈는지 웅성거리는 중이었다.
‘그래, 그래야지.’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백성호를 보며 성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썩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등 뒤에 칼이 겨눠져 있는데도 여유로운 건 방심이나 마찬가지니.’
김규호라는 칼이 바로 뒤까지 짓쳐든 상황.
그런데도 백성호가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면 오히려 실망스러웠으리라.
만약 그러했다면 성현은 김규호를 상대했을 때 했던 생각─자신의 호적수로 기억되는 게 백성호가 아니라 김규호가 될 것이라는─에 확신을 가졌을지도 몰랐을 만큼.
하나 백성호는 변했다.
몸에 배여 있던 여유를 버리고, 절박하게 더 위를 갈구하며 올라서고자 하는 자세를 갖췄다.
자칫하면 뒤처질 뻔 했는데 아주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이다.
일찍이 천재라 불렸던 유망주답게도.
씨익.
성현은 이를 드러내듯 미소지었다.
김규호에 이어 백성호까지.
이전보다 점점 나아지는 모습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기꺼웠기에.
그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강해져야 했다.
언젠가, 그가 더 높은 경지로 올라설 때 발판이 되어줘야 했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는 가운데.
마침내, 춘계 전국 대회 단체전을 마무리할 결승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승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