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도의 신-139화 (139/150)

139화: 호적수

잠시 시간을 돌려.

주장전이 아직 시작되기 전.

“이번에는 진짜 위험했다~ 하마터면 성현이 차례까지 가지도 못할 뻔했네.”

성현이 경기장에 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대현이 가슴을 쓸어내리곤 말했다.

확실히 그 말대로 용암고와 붙은 4강은 이번 대회에서 광천고가 가장 위험했던 경기였다.

시작과 동시에 3대0, 그야말로 벼랑 끝까지 몰렸었으니···.

광천고 최고 전력인 성현에게 순서가 이어지기도 전에 경기가 끝날 수도 있었다는 뜻!

실제로, 만약 3학년 중 한 명이라도 졌다면 광천고의 신화는 여기서 끝을 맺었으리라.

물론 그렇게 되어도 광천고의 강함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작년부터 올해에 이르기까지, 광천고가 쌓아 올린 결과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신화’에 가깝기에.

하지만, 욕심이란 게 원래 그랬다.

갖고 있다 보면 끝까지 갖고 가고 싶어지는 법.

대현을 비롯한 3학년들은 최소한 자신들의 졸업 전까지는 고교 최강의 타이틀을 유지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상태였다.

“아슬아슬하긴 했지.”

영준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 또한 느끼고 있었던 거다.

지금 광천고는 벼랑 끝까지 몰린 뒤, 겨우 거기를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상황이라는 사실을.

“죄송합니다. 저희 때문에-”

““······.””

수민이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대회 내내 그리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둔 1학년 듀오는 마치 죽을죄를 진 죄인처럼 수민의 뒤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이들에게 핀잔을 준 모양새가 된 대현이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아, 아냐. 너희 탓한 거 아냐. 그렇게 사과할 필요 없어. 질 수도 있는 거지!”

“그래. 중요한 건 이제부터 어떻게 하느냐니까.”

“선배 좋다는 게 뭐겠어. 후배들이 좀 실수해도 때워주는 게 선배가 할 일이지. 다음부터 잘하면 된다. 알았지?”

3학년 트리오의 격려에 무겁게 가라앉았던 수민과 은우, 서준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당황한 듯한 3학년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말이 진심이라는 게 확 느껴졌기 때문이다.

침울하던 표정이 밝아지는 걸 본 대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고, 영준과 윤호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뭐, 그래도 다행인 건 여기까지 오니까 더 불안하지는 않다는 거?”

“그러게. 마음이 놓여.”

“설마 성현이가 지겠어?”

그 말에는 모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3대3, 아직 동점의 상황임에도 이번 4강전에서 탈락할 거라는 생각은 더는 들지 않았다.

출전한 선수가 선수다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같은 학교에서 일 년 넘게 성현을 보아온 만큼, 그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실력을 지녔는지 남들보다 훨씬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긴장을 하려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태 보아온 이성현이라는 괴물은 패배라는 두 글자를 갈가리 찢어버린 존재였으므로.

“···용암고는 어째 내년에도 강할 거 같지?”

“아마도- 아니, 분명히.”

“내년만이겠냐. 저 정도면 몇 년은 더 강호 소리 들을 거 같은데. 저쪽 후보들 표정 봐봐.”

“무시무시하네.”

내년이면 용암고는 현재 주장인 김규호를 비롯한 3학년 주전들이 대거 졸업하게 된다.

실력과 경험이 뛰어난 이들이 많이 사라지는 만큼, 저들은 엄청난 전력 손실을 직면하게 되리라.

그런데도 용암고가 약해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위상을 지킨 명문 강호의 저력이 지독하리만치 느껴지는 모습!

몇 사람의 실력에만 크게 의존하고 있는 광천고와는 결이 다른, ‘검도부’ 자체의 강함에 영준과 대현, 윤호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애들 훈련할 때 더 잘 봐줘야겠는데.”

“···그러게.”

설령 그들이 졸업하더라도 광천고가 쉽사리 무너지는 일은 없으리라.

그때쯤이면 은우와 서준도 제 역할을 할 수준까지 올라왔을 거고, 더해서 성현과 수민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도 그들이 이처럼 다짐하는 건, 광천고가 용암고처럼 진정한 명문 강호의 검도부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까닭이리라.

이렇듯 3학년 트리오가 의지를 다졌을 무렵.

성현은 김규호와 역대급 명경기를 만들어내며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는 광천고가 기어코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을 역전해내어 결승에 진출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수고했다.”

“멋졌어!”

“크- 역시 우리 주장이야. 다 이긴다니까.”

시합을 끝내고 돌아온 성현을 광천고 주전들이 환한 얼굴로 맞이했다.

박수치는 영준, 조용히 미소짓는 윤호, 엄지를 치켜세우는 대현, 반짝이는 눈빛의 수민을 비롯한 1학년 은우와 서준까지.

당당히 승리를 거둔 자신들의 주장에게 그들은 아낌없는 환영으로 보답했다.

“······.”

호면을 벗은 성현이 슬며시 미소지었다.

위기에 몰렸건 어쨌건, 광천고는 끝내 그에게까지 순서를 잇는 것에 성공해냈다.

그것이 그는 썩 만족스러웠다.

김규호와 더불어, 이들은 자신이 들인 노력이 헛된 게 아님을 보여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 이제 다음이 결승전입니다.”

““······.””

“한 번만 더 이기면 우승이에요. 다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죠.”

““네, 주장!””

“오케이!”“가즈아-!”

광천고 주전들의 사기를 끌어올린 성현은 그들과 함께 자리를 정돈하고 퇴장을 준비했다.

이제 곧 이곳에서 다음 4강 경기, 경중고와 장수고의 경기가 시작되므로, 그 전에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 까닭이었다.

‘흠-’

짐을 챙겨 나오는 도중, 성현의 시선이 닿은 곳은 맞은 편에 있는 용암고 주전들이었다.

4강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표정과 행동은 당당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패배 앞에 고개 숙이는 게 아니라, 그래도 우리는 최선을 다했고, 그것이 자랑스럽다는 것이 물씬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승패라는 결과보다는 좋은 경기였다는 과정을 중요시하기에 저럴 수 있으리라.

‘저런 게 진짜 학생검도겠지.’

정말이지, 성현에게는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용암고 주전들을 바라보던 중, 성현은 가장 앞에 서서 걸어가는 김규호와 눈이 마주쳤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품은 김규호의 눈이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다음 무대에서 기다리고 있겠노라고─

“하하.”

명확한 의지를 품고 빛나는 시선에 성현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어쩜 이리도 끝까지 그를 만족케 하는 것인지.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졌다는 백성호조차 이러지는 못했건만.

아주 먼 훗날, 어쩌면 자신의 호적수로 기억되는 건 천재라 칭송받던 백성호가 아니라, 김규호일지도 모른다라고, 저도 모르게 생각한 성현이었다.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채 통로로 향하던 성현의 뒤를 광천고 주전들이 뒤따랐다.

퇴장하던 그들의 앞으로 나타난 건, 이제부터 경기를 치러야 하는 경중고 인원들이었다.

백성호를 필두로 한 주전들!

““······.””

““······.””

두 무리는 별다른 말 없이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다소 냉랭하게까지 느껴지는 모습이었지만, 차후 결승전에서 만날 수도 있는 관계이니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실질적으로 몇 초만에 그들은 서로를 스쳐 지나가, 한쪽은 통로 안쪽으로, 다른 한쪽은 통로의 바깥으로 향했다.

성현이 돌연 멈춰 뒤를 돌아본 건, 경중고 주전들이 완전히 통로를 벗어나고 있을 즈음이었다.

“왜 그래, 성현아?”

“······.”

갑작스레 멈춰선 성현을 보며 수민이 물었지만, 성현은 대답없이 뒷모습만 보이는 경중고 주전들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다른 이들에 가려 겨우 뒤통수만 보이고 있는 백성호를.

‘방금 경기가 백성호에게까지 꽤 큰 영향을 미쳤나 보네.’

스쳐 지나가며 얼핏 보았을 뿐이지만, 성현은 단번에 백성호의 변화를 눈치챘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지독히도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는 분위기를.

평소 백성호는 시합 때가 아니면 어딘가 얼빠지고 나른한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손을 대면 베일 듯 날카로웠다.

아직 시합 전임에도.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 불렸던 백성호가 방금 성현과 김규호의 경기에서 무언가를 느낀 탓이리라.

“재밌겠는데.”

그래서 성현은 더욱 기대가 됐다.

과연 백성호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된다. 긴장할 것도 없어. 경중고답게, 이기고 와라.”

““네! 감독님!””

이중한 감독의 차분한 격려에 경중고 주전들이 소리높여 대답했다.

4강에서 용암고와 혈전을 벌인 광천고와는 달리, 경중고의 상대는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강호에 불과했다.

대진빨이 아니었다면 아마 8강 즈음에서 탈락하였을 정도에 불과한.

그래서일까?

경중고 주전들의 표정은 평온했다.

자신들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들이 질만한 요소는 거의 없었다.

실력부터도 우위에 선 데다가, 여지껏 힘을 아끼면서 이기고 올라온 덕에 체력 상황도 여유로웠으니.

사실 이는 광천고 덕분이었다.

광천고가 끔찍하리만치 어려운 대진을 가져간 덕에─빅4를 전부 만나고, 대회의 다크호스까지 조우했으니─ 경중고는 상대적으로 편하게 여기까지 올라온 거다.

그 덕에 경중고 주전들은 어렵잖게 상대 장수고 주전들을 쓰러뜨리며 이겨나갔다.

“······.”

백성호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니, 지켜보는 척했다.

시합을 눈에 담고 있지만, 정작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건 이곳에서 광천고와 용암고가 벌인 시합이었으니까.

엄밀히 말해서, 광천고와 용암고라기보다는, 이성현과 김규호가 벌였다─ 라고 하는 게 옳겠지만.

두 사람의 시합을 떠올린 백성호의 등골에 짜르르한 전율이 흘렀다.

그게 단순히 관객들이 열광하고, 심판들마저 평정심을 잃었을 정도의 명경기라서가 아니다.

백성호에게는 보인 탓이다.

엄청나게 발전한 김규호와 진심이 된 이성현이.

“······.”

‘김규호.’

백성호도 김규호와는 몇 번이나 붙어본 적이 있었다.

아직 백성호가 고교 최강이고, 한국 최고의 유망주 소리를 들었을 무렵, 그를 막아 세울 단 한 사람이 바로 김규호였으니.

그러나 과연 그때의 김규호가 방금 본 경기의 그가 맞긴 할까?

오늘, 김규호의 실력은 실로 눈이 부셨다.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진 두 사람, 이성현과 백성호에게만 허락된 영역에 발을 들였으니.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백성호가 얼마나 경악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터였다···.

‘그리고, 이성현-’

김규호의 발전이 충격적이었다면, 이성현이 드러낸 본색은 화가 났다.

이번 경기에서 성현은 그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모습을 내보였기 때문이다.

적당히 ‘받아들일 만한 수준’의 실력만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상대를 완벽히 박살 내고자 경기에 임하다니.

그 말인즉, 김규호를 오롯이 ‘적’으로 인정했다는 뜻이 아닌가?

‘내가 아니라, 김규호를.’

이 사실은 백성호의 자존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자신보다 먼저 김규호를 인정하다니.

분하고, 또 분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꽈아악.

주먹을 강하게 움켜쥔 백성호의 눈이 음울한 빛을 품고 빛났다.

지금까지는 그저 성현이 보여준 ‘길’을 따라 달리는 것만으로도 만족했기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적이 되어야 했다.

이성현에게 직접 인정받은 적이.

김규호처럼, 아니, 그를 넘어서, 온전히 백성호로서 이성현의 호적수가 되기 위해···.

질긴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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