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도의 신-138화 (138/150)

138화: 황금기

감탄 어린 한숨을 내뱉은 건 관객석 한쪽에서 경기를 예의 주시하던 곽해수였다.

성현과 김규호의 대결은 문외한이 보더라도 대단했지만, 검도를 보는 눈이 뛰어날수록 더욱 많은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한평생을 검도에 바친 진짜배기 검도인, 곽해수는 알아차린 것이다.

이번 경기가 학생 선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것은 물론이거니와, 시합을 치르는 두 사람 모두 어떤 ‘영역’에 발을 들였음을.

그것은 그로 하여금 경이로움이라는 감정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한국 검도의 미래는 밝구나!”

이성현과 백성호만 해도 한 세대, 아니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들이다.

이 두 사람이 있는데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욕심이 넘친다는 소리를 들어도 전혀 과한 게 아닐 만큼.

하여 곽해수도 두 사람의 존재로 만족했었다.

그저 이들이 한국 검도의 발전과 번영에 이바지하기를 바랐을 뿐이고.

그런데 이번 시합에서 김규호가 자신 또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역량이 있음을 증명해낸 거다.

딱 한 명만 있어도 한국 검도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릴 수 있는 재능이 무려 셋이란 의미!

한국 검도의 초석이 되고자 했던 곽해수에게는 퍽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눈에 기대감이 그렁그렁했던 건 바로 그런 까닭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이게 끝이 아니라는 점.

‘여기에 정철과 백지호, 강찬울, 김수민 같은 이들까지···.’

비록 저 세 명에 비할 수는 없더라도, 그 뒤를 바짝 쫓는 재능의 소유자들도 많았다.

그들이 하나의 팀이 되었을 때 만들어 낼 파괴력은 실로 어마어마하리라.

검도 세계 선수권 대회는 물론이요, 차후 등재가 예정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거는 모습이 눈에 훤했다.

한국 검도의 오랜 숙원이었던 일본 격파!

그조차도 유망주 시절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 그들이라면, 분명히···!

꽈악!

“······!”

곽해수가 끓어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경기장 안에 선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러한 시선을 던지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관객 중 미래에 대한 사유가 가능한 이들은 앞으로 도래할 한국 검도의 황금기를 예견하고 비슷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렇게 많고 많은 이들의 기대와 흥미, 염원 속에서 시작된 두 번째 판.

‘이번 경기가 그나마 제일 제대로 된 시합인건가. 나도 참 우습네.’

심판의 시작 구령을 기다리면서, 차갑게 식은 정신으로 김규호는 생각했다.

‘어쩐지 지금은 알 것 같아. 이성현이 얼마나 괴물인지. 어떤 경지에 올라서 있는지도. 나는 지금보다 몇 계단은 더 나아가야 겨우 발목이나마 붙잡을 수 있겠지···.’

어떤 때보다 명료한 정신으로 그러한 추측을 한 뒤, 김규호가 느낀 감정은 두 가지였다.

─공포와 환희.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감정.

공포가 성현이 자신보다 한 살 어린 나이에 이룩한 경지에 대한 아득한 두려움이었다면, 환희는 우습게도 자신이 전력을 다해 뒤쫓을 만한 이가 생겼음에 느끼는 기쁨이었다.

넘어서야 할 목표가 있을 때 가장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게 바로 김규호라는 소년이었기에.

그것을 깨달은 김규호는 비로소 이러쿵저러쿵 생각하고자 하는 의지를 버렸다.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이성현이라는 괴물에 맞서, 자신을 드러내어 증명한 끝에, 단 한 방이라도 제대로 먹여주는 것.

그 외에는 이 순간 아무런 가치도 없었으니까.

“······시작!”

마침내 심판이 두 번째 판의 시작을 알렸다.

동시에, 김규호가 발가락에 담긴 힘으로 바닥을 쥐어짜듯 박찼고, 주위가 늘어져 보일 정도의 속력으로 성현에게 다가섰다.

제대로 된 경기가 이루어진 건 주도권을 쥔 채 흐름을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란 걸 김규호는 아주 잘 알았다.

그런즉, 멈춰서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괴물을 상대로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의 두 손에 흐름을 꽉 쥐고 있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가 전과 같은 수단을 써오는 걸 성현은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단 한 걸음으로 거리를 좁혀 다가선 김규호의 눈에 들어온 건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그를 찔러오고 있는 죽도였다.

뒤늦게, 성현이 내뱉는 기부림이 귓가를 스친다.

빠드득.

이를 악물고, 온 힘을 다해 그것을 피했다.

김규호도 성현이 똑같은 수에 똑같이 당해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분명히 뭐든 해올 것이다.

그리 생각했기에, 타돌을 시도하는 와중에도 몸을 뒤틀 일말의 여력을 남겨놨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서 끝이 났으리라.

성현이 내지른 죽도가 아슬아슬하게 어깨를 스쳤다.

‘기회!’

“으랴아앗-!”

흐름을 쥐어짜 빠듯하게 죽도를 내지른다.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는 죽도.

벌려 걷기로 옆으로 빠져나갔음을 깨닫는다.

그에 내뱉던 숨을 억지로 끊으며 몸을 돌리자, 죽도가 허리를 스쳐 지나갔다.

속절없이 패배할 뻔했다는 아찔함도 잠시.

다시금 손목의 힘을 살려 격자를 시도한다.

노리는 것은 머리··· 귀신같이 파악하고 흘려내진다.

익숙한 일이다.

재차 기부림을 내뱉으며 손목을 노렸다.

연격이 상상 이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조차 가볍게 흘려내어져 버렸지만.

이후로는 같은 수순의 반복이었다.

두들기고, 흘려지고, 내지르고, 비껴지고, 피하고, 다시, 다시, 그리고 다시─

“······.”

“······.”

“······.”

응원의 목소리가 어느새인가 사그라들었다.

경기장 안에서 전개되는 공방에서 눈을 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숨 쉬는 것조차 잊게 될 만큼 수준 높은 시합.

첫 번째 판 이상으로 압도적인 경기력에 관객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한때 너무나도 당연하게 성현이 이기리라고 생각했던 그들을 압도하는 광경이었다.

김규호는 포기를 모르고 도전한 끝에 기어코 성현과 비슷한 영역에까지 올라섰고, 보란 듯이 역대급 명경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이성현이라는 괴물의 발목을 붙잡고 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에 가슴이 떨린 건 관객들만이 아니었다.

‘주장···.’

강찬울을 비롯한 용암고의 주전들.

그들이 김규호를 바라보는 눈빛은 동경하는 우상을 바라보는 그것이었다.

김규호는 용암고의 도전 정신을 제대로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성현이라는 절망과 대등하게 맞서며 그들의 마음에 강한 의지를 새겨넣었다.

시합 이전에 그가 바랐던 그대로.

남은 경기 시간을 모조리 써버릴 것 같았던 공방은, 이윽고 결말에 다가섰다.

오 분간 이어진 쉴 틈 없는 대결.

첫 번째 판에서부터 두 번째 판까지, 칼 위에서 춤추듯 아찔하게 이어지던 긴장 속에서, 한순간 김규호의 정신이 헝클어졌기 때문이다.

잠시나마 집중력이 끊어졌고, 그로 인해 겨우 부여잡고 있던 주도권을 놓치고 만 거다.

찰나에 드러난 빈틈.

성현의 두 눈이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이제까지 내질렀던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렬한 격자가 허공을 찢었다.

엄밀히 말해서, 김규호가 그것을 막아낸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조금이라도 손이 느렸다면, 죽도가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면 성현의 격자는 여지없이 그의 손목을 두들겼으리라.

그러나, 위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성현이 바싹 다가선 것이다.

평소와는 다른 행동에 김규호가 눈을 부릅떴을 때, 물 흐르듯 이어진 몸 받음이 그를 덮쳤다.

몸속에 울려 퍼지는 강렬한 충격-

예상치 못했던 수단에 김규호가 휘청거리듯 뒤로 물러섰고, 성현은 그런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다시금 거리를 좁혔다.

‘아차-’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구도에, 김규호는 오싹함을 느꼈다.

성현이 죽도를 들어 올리는 모습이 마치 슬로 모션처럼 찬찬히 그의 눈에 들어왔다.

첫 번째 판에 그에게서 점수를 앗아가는 시발점이었던 머리 치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죽도로 막아냈음에도 느껴졌던, 철 덩어리가 내려찍은 것 같은 충격도.

대비해야만 했다!

“으아아앗-!”

비명과 같은 외침을 내지르며 죽도를 끌어당긴다.

몸 받음의 충격이 채 해소되기도 전에 하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뼈가 삐걱거렸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무리한 움직임에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막아내지 않는다면, 희망은 없기에.

덕분에 김규호는 첫 번째 판에 그러했듯이, 성현의 머리 치기를 막기 위해 죽도를 들어 올리는 것에 기어코 성공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오싹함을 느낀 건 호면 너머로 자신을 냉정히 응시하는 성현의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하아아앗-!”

김규호는 깨달았다. 깨닫고 말았다.

같은 구도로 몰아 넣어졌다는 사실에 당황한 것조차 성현의 노림수였다는 사실을.

첫 번째 판에 패배했던 상황을 재현함으로써 머릿속에 그때의 패배를 상기시켰고, 무의식적으로 성현이 똑같이 행동하리라고 생각하게 만든 거다.

참으로 지독한 설계였다···.

‘젠장, 결국 한방을 제대로 못 먹였네.’

최후를 직감한 김규호가 쓴웃음 지었다.

어떻게든 한 방 먹여주고 싶었는데-

타아악-!

머리를 칠 것처럼 들었던 죽도가 훤히 드러난 김규호의 허리를 갈랐다.

환상적인 역허리였다.

신경을 온통 머리로 집중시키고, 실제로 그곳을 칠 것처럼 행동하다가, 막기 위해 팔을 드는 과정에서 무방비해지는 허리를 노리는 페인팅 기술.

상대인 김규호부터, 지켜보던 관객들까지 모조리 속고 말았다.

심판마저 움찔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청색, 허리-! ···시합 끝!”

““와아아아아-!””

짝짝짝짝!

성현의 승리가 심판의 입으로 공언된 직후.

입을 다물고 있던 관객들로부터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환호성이 뿜어져나왔다.

격렬하기 짝이 없는 박수 갈채 또한.

“후우-”

성현은 쏟아지는 환호와 박수 속에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김규호에게 다가섰다.

김규호는 그에게 있어 기분 좋은 예상외였다.

가진바 잠재력만큼은 최고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벌써 이처럼 개화하여 자신에게 다가올 줄은 몰랐었기 때문이다.

그가 수많은 유망주에게 베풀었던 ‘새싹 밟기’의 결실을 얻게 된 기분이라고나 할까.

“좋은 경기였어요.”

“그래. 좋은 경기였다.”

성현이 내민 손을, 김규호가 당당히 맞잡았다.

두 사람이 악수하는 모습을 본 관객들이 재차 커다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것은 좋은 경기를 보여준 그들에 대한 감사 표시였으며, 동시에 검도의 무도 정신을 보여주고 있는 지금 모습에 대한 개가이기도 했다.

환성 속에서 잠시 성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김규호는, 이내 툭 내뱉듯 말했다.

“빨리 졸업하고 와라.”

“노력해보겠습니다.”

성현의 대답에 피식 웃은 김규호가 심판의 구령에 따라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자신을 기다리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용암고의 주전들과 감독, 코치까지도 경기장에서 내려오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뚫어질 듯한 시선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그가 말했다.

“미안하다. 잘 보고 있으라 했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형편없게 져버렸네.”

“아닙니다, 주장! 전혀 형편없지 않았어요!”

“맞아요, 주장! 정말 멋졌어요!”

“주장이니까 이 정도로 맞붙은 거잖아요!”

“이길 수도 있었습니다!”

강찬울을 비롯한 용암고 주전과 후보들이 일제히 말을 쏟아냈다.

정말 멋졌다. 끝내줬다.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년에는 이길지도 모른다 등등.

아무것도 못하고 패배했다는 본인의 생각을 고치겠다는 듯 열성적인 태도였다.

그들의 행동에 김규호가 좀 더 밝아진 미소를 지었다.

“규호야.”

“네, 감독님.”

“···훌륭했다. 너는 용암고 주장으로서 할 일을 다 했어. 가슴을 펴라. 당당하게 서!”

구영철 감독이 김규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따스한 손길에 김규호는 이를 꽉 깨물었고, 이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독님!”

호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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